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

한자명

仲冬八關會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1월 > 의례

집필자 안지원(安智源)

정의

고려시대 수도 개경(開京)에서 중동(仲冬)인 11월 보름에 개최되던 불교의례. 불교의례 중 가장 큰 규모의 국가적 연례 행사였다.

유래

팔관회(八關會)는 본래 인도의 팔계재(八戒齋)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에서 계(戒)는 소극적으로는 잘못을 막고 악을 방지하는 힘을 뜻하며, 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선업을 발생시키는 근본을 뜻한다. 팔계재는 불교계율의 사미십계(沙彌十戒)에서 비롯되었다. 사미십계는 ① 살생하지 말라 ② 도둑질하지 말라 ③ 음란한 일을 하지 말라 ④ 거짓말하지 말라 ⑤ 술을 마시지 말라 ⑥ 몸에 꽃 장식을 하고 향을 바르지 말라 ⑦ 노래하고 춤추는 풍악놀이를 하지 말고 그런 것을 가서 보고 듣지도 말라 ⑧ 높고 넓은 평상에 앉지 말라 ⑨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⑩ 돈과 금은보화를 가지지 말라는 열 가지 조항이다. 이 중 앞의 다섯 조항은 승려와 재가신도(齋家信徒)를 막론하고 종신토록 지켜야 할 기본적인 5계(五戒)로 하고, 여기에 ⑥항과 ⑦항을 합하여 제6계로, ⑧항을 제7계로, ⑨항을 제8계로 하여, 이를 팔계재라 총칭하여 일컬었다.

재가신도들은 평상시에는 팔계(八戒)를 엄수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정한 잿날 하루 동안만이라도 절에 모여 팔계재를 지키는 의식을 행하여, 살아서는 재액을 막아 복업을 이루고 죽어서는 죄업을 소멸시켜 욕계육천(欲界六天)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고자 하였다. 이러한 팔계재의 공덕은 초기 경전인 『중아함경(中阿含經)』 권55 경202 「지재경(持齋經)」에서부터 언급되었으며, 대승불교시대에 접어들자 재가신도들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수행법으로 더욱 중요시되어 『팔관재경(八關齋經)』, 『우바이타사가경(優婆夷墮舍迦經)』, 『불설재경(佛說齋經)』 같은 단독 경전에도 기록이 나타났다.

이러한 인도의 팔계재는 중국으로 전해진 명칭이 팔관재(八關齋)로 바뀌게 되었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팔관(八關)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팔(八)이라는 숫자는 팔방(八方) 곧 천하를 상징하고, 관(關)이라는 글자는 막아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팔관은 외적 및 위험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실제로 방어의 요새지에 팔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팔계재를 포교하기에 산스크리트어의 직역인 팔계라는 말보다는 전통적 액막이 관념인 팔관을 차용하는 것이 친숙하여 더 효과적이었다. 삼간다는 뜻의 계(戒)가 금(禁)과 통하고 금은 관(關)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2월조(二月條)에 의하면 팔관재는 남북조시대 초기부터 이미 불탄일(佛誕日) 행사에서 중요한 불교의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법원주림(法苑珠林)』 권6 「육도편(六道篇)」4 귀신부(鬼神部)11에 의하면 팔관재가 재액을 막는 데 전통적인 도교 주술보다 효험이 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한 공덕으로 팔관재가 강조됨에 따라 팔관재는 명복을 비는 위령제로 빈번히 설행(設行)되기 시작하였다. 『약사경(藥師經)』에서도 역시 팔관재가 강조되었기 때문에 치병의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팔관재가 성행하였다.

당(唐)에 이르면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더 큰 공덕이 된다고 하여 인원 동원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법회의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팔계를 지킨다는 재계(齋戒)로서의 의의는 퇴색하고 향락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으로 변질하였다. 또 명칭도 팔관재에서 팔관회로 변화하였다.

역사

우리나라에서 팔관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고려가 건국된 918년 중동 11월 15일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권1 「세가(世家)」1의 태조(太祖) 원년(元年) 기사(記事)와 권69 「지(志)」23 예(禮)11 기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원년 기사에 의하면 태조는 건국한 해 11월에 중동팔관회를 열어 위봉루(威鳳樓)로 나아가 행사를 구경하였고 이후 해마다 이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의 팔관회는 실제로는 이전부터 있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 태조 왕건(王建)은 태봉(泰封)의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는데 태봉에서는 매년 중동팔관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던 궁예는 고구려의 동맹(東盟)처럼 추수감사제 성격의 계절 축제인 팔관회를 개최하여 지역 내 주민들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열전(列傳)」4 거칠부조(居柒夫條)에 의하면 원래 팔관회는 삼국전쟁 때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도 지속된 위령제 기능을 하던 불교의례였다. 신라의 팔관회는 화랑과 낭도들로 구성된 사선악부(四仙樂部)가 주도하고 용과 봉황, 코끼리와 말 형상으로 꾸민 배 모양의 수레들이 행렬을 벌이던 화려한 행사였으며, 위령제로 그치지 않고 생사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불교의 이상 세계인 용화세계가 신라에 구현될 것을 기원하는 축제였다.

태조는 이러한 기존의 팔관회 성격들을 종합하고 나아가 호족들의 기반이 되고 있는 각 지역의 토착신앙을 중앙 집권 체계로 통합하기 위해 팔관회를 구상하였다. 태조는 지역적 성격을 띠고 그 지방 공동체 의식의 고양에 큰 역할을 하던 지역의 산천신앙들을 고려라는 국가 체계 속에 일원화하기 위해서는 팔관회의 개최가 효과적이라 생각하였다. 팔관회는 불교의례이면서도 액막이의 기능이 중요하였으므로 토착신앙을 신봉하는 고려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절요』권1 「태조 신성대왕」 원년 기사에 팔관회를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칭하였다는 기록이나,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6조에서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 언급한 내용은 팔관회가 토착신앙을 포섭한 불교 행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조가 손수 지은 ‘개태사화엄법회소(開泰寺華嚴法會疏)’를 보면 불교의 신불들과 토속신들은 좁은 의미에서는 구별되어서 병존 관계를 이루나, 일상적으로는 불교 속에 토속신들이 포섭된 형태로 신앙되고 있었다.

태조는 후대 왕들을 위해 유훈(遺訓)으로 남긴 훈요십조 제1조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도록 하고, 제4조에서는 우리의 토착신앙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천명한 후, 제5조에서는 삼한 산천신령들의 음덕으로 왕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이어 제6조에서 팔관회를 매년 반드시 설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후 역대 왕들은 이를 준수하여서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의례 구조 속에 최상위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국가 행사로 자리 잡았고 멸망하기 전 해인 공양왕(恭讓王) 3년(1391) 11월까지 지속되어 고려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내용

팔관회는 가장 중요시되었던 국가의례였던 만큼 충분한 준비기간을 거쳐 엄격한 절차를 통하여 준행되었으며, 고려의 국가의례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관리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습의(習儀)라는 예행연습이 있었다. 팔관회의 의전은 『고려사』 권69 「지」23 예11 가례잡의(嘉禮雜儀) 항목의 중동팔관회의(仲冬八關會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정형화된 절차는 정종(靖宗) 즉위년(1034)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중동팔관회는 11월 14일인 소회일(小會日), 15일인 대회일(大會日) 이틀에 걸쳐 설행되었으며 16일까지가 공식휴일이었다. 행사일 훨씬 전부터 관청의 부서들은 각기 소임들을 맡아 궁성 안팎에서 채비를 시작한다. 첫날 소회일 행사는 난가출궁(鑾駕出宮) 의식과 좌전수하(坐殿受賀) 의식의 2부로 구성된다. 난가출궁은 내전에서 좌전수하 의식이 거행되는 의봉문까지 국왕이 행차하는 의식으로, 마지막에 국왕은 의봉문루에 봉안된 태조의 초상화 앞에 술을 올리고 배례하는 예조진작헌(詣祖眞酌獻)을 행하였다. 의봉문은 구정(毬庭)으로 나가는 궁궐 남문으로 양편에 정문보다 작은 규모의 부속 문이 있는 삼문(三門) 양식이며 누각 형태로 동서 양편에 층계를 이용해 문루로 올라갈 수 있었다. 『고려사』 권72 「지」26 여복(輿服) 의위(儀衛) 항목에 있는 중동팔관회출어간악전위장(仲冬八關會出御看樂殿衛杖)에 따르면 이때 국왕의 수레를 의식용 기물을 손에 들고 정복을 착용한 위풍당당한 3,276명의 의위사(儀衛士)들이 호위하였다고 한다.

좌전수하는 국왕이 의봉문루에서 구정에 도열한 모든 군신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은 후 헌수(獻壽)와 하사(賀詞)를 반복하며 연회를 하는 의식이다. 태자 이하 종신(宗臣)들과 중앙의 문무백관이 위계에 따라 하례를 올린 후에 지방관들이 파견한 관원들이 팔관회를 경축하는 하표를 올리고 조하하였다. 이로써 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질서 체계를 분명히 하고 국왕의 권위를 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공고히 하는 정치적 기능을 하였다.

조하의식 이후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참여한 모든 이들이 술과 음식을 나누며 당대 최고 양부(兩部) 악관들의 음악과 교방(敎坊)의 가무, 백희(百戱)를 감상하고 즐겼다. 이는 신들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는 팔관회 본래의 기능에 충실함과 동시에 참여자들로 하여금 출신지를 초월하여 고려인으로서의 소속감과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하였다.

궁정 행사가 끝나면 국왕은 황궁 동편의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모든 불보살과 토속신에게 분향하고 돌아와 궁궐 마당에서 백신(百神)에게 배례하였다. 이것은 지역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전국 각지의 토착신앙을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구조로 수도 개경에 통합한다는 의식이었다. 지방의 호족 세력이 주재하였던 토착신의 제사들을 국왕이 주재하여 합사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구정이 개방되어 일반 백성들도 궁성 안으로 들어와 화려하게 가설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공연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이처럼 팔관회는 고려 사람들의 문화 축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튿날의 대회일 행사는 전반적으로 소회일과 유사하였지만 외국인들의 조하의식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고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는 의식 절차로 송(宋)의 상인과 여진, 말갈, 탐라(耽羅)의 사절단, 멀리 아라비아 대식국(大食國: 사라센 제국)의 상인들까지도 와서 토산물들을 바치고 조하하였다. 고려 왕실은 답례로 봉물을 회사하고 팔관회의 참여를 허락하여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고려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는 별도로 고려가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일 수 있다는 자주적이고 개방적인 천하관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팔관회를 통해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팔관회는 각국에서 온 무역상들과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활발히 교역을 하는 계기도 되었다.

국가 행사 가운데 가장 중시된 팔관회였던 만큼 소요 경비와 동원 인원은 막대하였다. 따라서 개경과 서경에는 팔관회의 경비 조달과 진행을 총괄하는 팔관보(八關寶)라는 전담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경제적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팔관회에 대한 공출 부담과 비용 전가로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는 사례들이 보인다.

이처럼 건국 직후부터 고려와 함께 한 팔관회는 고려의 상징적 행사였던 만큼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문화 청산의 차원에서 최우선적인 철폐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며 배불(排佛)을 주장하던 사대부들은 팔관회의 혁파를 강력히 상소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원년(1392) 8월 5일조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팔관회와 연등회의 폐지를 주청하였다는 기록 이후 중동팔관회에 대한 기사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중동팔관회는 일찍이 조선 건국 직후부터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 행사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세시풍속이 되었던 팔관회는 다시금 불교의 지계행사(持戒行事)로 회귀하였고, 이제는 사찰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大藏經, 高麗史, 高麗史節要, 大正新脩大藏經, 法苑珠林,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荊楚歲時記, 八關會攷 (安啓賢, 東國史學4, 東國大學校史學會, 1956), 한글대장경 (대한불교조계종 역경위원회편, 동국대학교부설 동국역경원, 1966),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안지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중동팔관회

중동팔관회
한자명

仲冬八關會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1월 > 의례

집필자 안지원(安智源)

정의

고려시대 수도 개경(開京)에서 중동(仲冬)인 11월 보름에 개최되던 불교의례. 불교의례 중 가장 큰 규모의 국가적 연례 행사였다.

유래

팔관회(八關會)는 본래 인도의 팔계재(八戒齋)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에서 계(戒)는 소극적으로는 잘못을 막고 악을 방지하는 힘을 뜻하며, 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선업을 발생시키는 근본을 뜻한다. 팔계재는 불교계율의 사미십계(沙彌十戒)에서 비롯되었다. 사미십계는 ① 살생하지 말라 ② 도둑질하지 말라 ③ 음란한 일을 하지 말라 ④ 거짓말하지 말라 ⑤ 술을 마시지 말라 ⑥ 몸에 꽃 장식을 하고 향을 바르지 말라 ⑦ 노래하고 춤추는 풍악놀이를 하지 말고 그런 것을 가서 보고 듣지도 말라 ⑧ 높고 넓은 평상에 앉지 말라 ⑨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⑩ 돈과 금은보화를 가지지 말라는 열 가지 조항이다. 이 중 앞의 다섯 조항은 승려와 재가신도(齋家信徒)를 막론하고 종신토록 지켜야 할 기본적인 5계(五戒)로 하고, 여기에 ⑥항과 ⑦항을 합하여 제6계로, ⑧항을 제7계로, ⑨항을 제8계로 하여, 이를 팔계재라 총칭하여 일컬었다.

재가신도들은 평상시에는 팔계(八戒)를 엄수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정한 잿날 하루 동안만이라도 절에 모여 팔계재를 지키는 의식을 행하여, 살아서는 재액을 막아 복업을 이루고 죽어서는 죄업을 소멸시켜 욕계육천(欲界六天)에 태어날 수 있는 공덕을 쌓고자 하였다. 이러한 팔계재의 공덕은 초기 경전인 『중아함경(中阿含經)』 권55 경202 「지재경(持齋經)」에서부터 언급되었으며, 대승불교시대에 접어들자 재가신도들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수행법으로 더욱 중요시되어 『팔관재경(八關齋經)』, 『우바이타사가경(優婆夷墮舍迦經)』, 『불설재경(佛說齋經)』 같은 단독 경전에도 기록이 나타났다.

이러한 인도의 팔계재는 중국으로 전해진 명칭이 팔관재(八關齋)로 바뀌게 되었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팔관(八關)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팔(八)이라는 숫자는 팔방(八方) 곧 천하를 상징하고, 관(關)이라는 글자는 막아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팔관은 외적 및 위험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실제로 방어의 요새지에 팔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팔계재를 포교하기에 산스크리트어의 직역인 팔계라는 말보다는 전통적 액막이 관념인 팔관을 차용하는 것이 친숙하여 더 효과적이었다. 삼간다는 뜻의 계(戒)가 금(禁)과 통하고 금은 관(關)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2월조(二月條)에 의하면 팔관재는 남북조시대 초기부터 이미 불탄일(佛誕日) 행사에서 중요한 불교의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법원주림(法苑珠林)』 권6 「육도편(六道篇)」4 귀신부(鬼神部)11에 의하면 팔관재가 재액을 막는 데 전통적인 도교 주술보다 효험이 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한 공덕으로 팔관재가 강조됨에 따라 팔관재는 명복을 비는 위령제로 빈번히 설행(設行)되기 시작하였다. 『약사경(藥師經)』에서도 역시 팔관재가 강조되었기 때문에 치병의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팔관재가 성행하였다.

당(唐)에 이르면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더 큰 공덕이 된다고 하여 인원 동원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법회의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팔계를 지킨다는 재계(齋戒)로서의 의의는 퇴색하고 향락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으로 변질하였다. 또 명칭도 팔관재에서 팔관회로 변화하였다.

역사

우리나라에서 팔관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고려가 건국된 918년 중동 11월 15일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권1 「세가(世家)」1의 태조(太祖) 원년(元年) 기사(記事)와 권69 「지(志)」23 예(禮)11 기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원년 기사에 의하면 태조는 건국한 해 11월에 중동팔관회를 열어 위봉루(威鳳樓)로 나아가 행사를 구경하였고 이후 해마다 이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의 팔관회는 실제로는 이전부터 있던 것을 계승한 것이다. 태조 왕건(王建)은 태봉(泰封)의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는데 태봉에서는 매년 중동팔관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던 궁예는 고구려의 동맹(東盟)처럼 추수감사제 성격의 계절 축제인 팔관회를 개최하여 지역 내 주민들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열전(列傳)」4 거칠부조(居柒夫條)에 의하면 원래 팔관회는 삼국전쟁 때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도 지속된 위령제 기능을 하던 불교의례였다. 신라의 팔관회는 화랑과 낭도들로 구성된 사선악부(四仙樂部)가 주도하고 용과 봉황, 코끼리와 말 형상으로 꾸민 배 모양의 수레들이 행렬을 벌이던 화려한 행사였으며, 위령제로 그치지 않고 생사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불교의 이상 세계인 용화세계가 신라에 구현될 것을 기원하는 축제였다.

태조는 이러한 기존의 팔관회 성격들을 종합하고 나아가 호족들의 기반이 되고 있는 각 지역의 토착신앙을 중앙 집권 체계로 통합하기 위해 팔관회를 구상하였다. 태조는 지역적 성격을 띠고 그 지방 공동체 의식의 고양에 큰 역할을 하던 지역의 산천신앙들을 고려라는 국가 체계 속에 일원화하기 위해서는 팔관회의 개최가 효과적이라 생각하였다. 팔관회는 불교의례이면서도 액막이의 기능이 중요하였으므로 토착신앙을 신봉하는 고려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절요』권1 「태조 신성대왕」 원년 기사에 팔관회를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 칭하였다는 기록이나,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6조에서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 언급한 내용은 팔관회가 토착신앙을 포섭한 불교 행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조가 손수 지은 ‘개태사화엄법회소(開泰寺華嚴法會疏)’를 보면 불교의 신불들과 토속신들은 좁은 의미에서는 구별되어서 병존 관계를 이루나, 일상적으로는 불교 속에 토속신들이 포섭된 형태로 신앙되고 있었다.

태조는 후대 왕들을 위해 유훈(遺訓)으로 남긴 훈요십조 제1조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도록 하고, 제4조에서는 우리의 토착신앙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천명한 후, 제5조에서는 삼한 산천신령들의 음덕으로 왕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이어 제6조에서 팔관회를 매년 반드시 설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후 역대 왕들은 이를 준수하여서 팔관회는 고려의 국가의례 구조 속에 최상위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국가 행사로 자리 잡았고 멸망하기 전 해인 공양왕(恭讓王) 3년(1391) 11월까지 지속되어 고려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내용

팔관회는 가장 중요시되었던 국가의례였던 만큼 충분한 준비기간을 거쳐 엄격한 절차를 통하여 준행되었으며, 고려의 국가의례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관리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습의(習儀)라는 예행연습이 있었다. 팔관회의 의전은 『고려사』 권69 「지」23 예11 가례잡의(嘉禮雜儀) 항목의 중동팔관회의(仲冬八關會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정형화된 절차는 정종(靖宗) 즉위년(1034)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중동팔관회는 11월 14일인 소회일(小會日), 15일인 대회일(大會日) 이틀에 걸쳐 설행되었으며 16일까지가 공식휴일이었다. 행사일 훨씬 전부터 관청의 부서들은 각기 소임들을 맡아 궁성 안팎에서 채비를 시작한다. 첫날 소회일 행사는 난가출궁(鑾駕出宮) 의식과 좌전수하(坐殿受賀) 의식의 2부로 구성된다. 난가출궁은 내전에서 좌전수하 의식이 거행되는 의봉문까지 국왕이 행차하는 의식으로, 마지막에 국왕은 의봉문루에 봉안된 태조의 초상화 앞에 술을 올리고 배례하는 예조진작헌(詣祖眞酌獻)을 행하였다. 의봉문은 구정(毬庭)으로 나가는 궁궐 남문으로 양편에 정문보다 작은 규모의 부속 문이 있는 삼문(三門) 양식이며 누각 형태로 동서 양편에 층계를 이용해 문루로 올라갈 수 있었다. 『고려사』 권72 「지」26 여복(輿服) 의위(儀衛) 항목에 있는 중동팔관회출어간악전위장(仲冬八關會出御看樂殿衛杖)에 따르면 이때 국왕의 수레를 의식용 기물을 손에 들고 정복을 착용한 위풍당당한 3,276명의 의위사(儀衛士)들이 호위하였다고 한다.

좌전수하는 국왕이 의봉문루에서 구정에 도열한 모든 군신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은 후 헌수(獻壽)와 하사(賀詞)를 반복하며 연회를 하는 의식이다. 태자 이하 종신(宗臣)들과 중앙의 문무백관이 위계에 따라 하례를 올린 후에 지방관들이 파견한 관원들이 팔관회를 경축하는 하표를 올리고 조하하였다. 이로써 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질서 체계를 분명히 하고 국왕의 권위를 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공고히 하는 정치적 기능을 하였다.

조하의식 이후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참여한 모든 이들이 술과 음식을 나누며 당대 최고 양부(兩部) 악관들의 음악과 교방(敎坊)의 가무, 백희(百戱)를 감상하고 즐겼다. 이는 신들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는 팔관회 본래의 기능에 충실함과 동시에 참여자들로 하여금 출신지를 초월하여 고려인으로서의 소속감과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하였다.

궁정 행사가 끝나면 국왕은 황궁 동편의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모든 불보살과 토속신에게 분향하고 돌아와 궁궐 마당에서 백신(百神)에게 배례하였다. 이것은 지역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전국 각지의 토착신앙을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구조로 수도 개경에 통합한다는 의식이었다. 지방의 호족 세력이 주재하였던 토착신의 제사들을 국왕이 주재하여 합사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구정이 개방되어 일반 백성들도 궁성 안으로 들어와 화려하게 가설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공연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이처럼 팔관회는 고려 사람들의 문화 축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튿날의 대회일 행사는 전반적으로 소회일과 유사하였지만 외국인들의 조하의식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고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는 의식 절차로 송(宋)의 상인과 여진, 말갈, 탐라(耽羅)의 사절단, 멀리 아라비아 대식국(大食國: 사라센 제국)의 상인들까지도 와서 토산물들을 바치고 조하하였다. 고려 왕실은 답례로 봉물을 회사하고 팔관회의 참여를 허락하여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고려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는 별도로 고려가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일 수 있다는 자주적이고 개방적인 천하관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팔관회를 통해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팔관회는 각국에서 온 무역상들과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활발히 교역을 하는 계기도 되었다.

국가 행사 가운데 가장 중시된 팔관회였던 만큼 소요 경비와 동원 인원은 막대하였다. 따라서 개경과 서경에는 팔관회의 경비 조달과 진행을 총괄하는 팔관보(八關寶)라는 전담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경제적 폐해 또한 적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팔관회에 대한 공출 부담과 비용 전가로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는 사례들이 보인다.

이처럼 건국 직후부터 고려와 함께 한 팔관회는 고려의 상징적 행사였던 만큼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문화 청산의 차원에서 최우선적인 철폐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며 배불(排佛)을 주장하던 사대부들은 팔관회의 혁파를 강력히 상소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원년(1392) 8월 5일조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팔관회와 연등회의 폐지를 주청하였다는 기록 이후 중동팔관회에 대한 기사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중동팔관회는 일찍이 조선 건국 직후부터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 행사에서 시작하여 고려의 세시풍속이 되었던 팔관회는 다시금 불교의 지계행사(持戒行事)로 회귀하였고, 이제는 사찰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大藏經, 高麗史, 高麗史節要, 大正新脩大藏經, 法苑珠林,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荊楚歲時記
八關會攷 (安啓賢, 東國史學4, 東國大學校史學會, 1956)
한글대장경 (대한불교조계종 역경위원회편, 동국대학교부설 동국역경원, 1966)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안지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