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시조제(歷代始祖祭)

한자명

歷代始祖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정의

국가차원에서 역대왕조의 시조에게 드리는 제사의례.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거행하며, 중사(中祀)에 편성되어 있다.

내용

{역대시조제(歷代始祖祭)의 시행목적} 역대왕조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조선왕조가 행하게 되는 이유를 세종대왕실록 연대기에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4 세종 11년 5월 7일 임자조에 세종이 “예조에 전지(傳旨)하여 단군과 기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에게 묘를 세워 치제하는 일을 고제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라.”라고 하였다고 나온다. 이보다 앞서 세종의 연대기는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그 공을 보답한다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삼국의 제도를 증감한 것이고,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하면서 서로 막상막하의 역사를 유지한 것으로, 어느 한 왕조의 시조만을 제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1월 5일 갑오조에서는 “우리 동방은 삼국 시조가 있기 전에는 12한과 9한이 있어서 나라의 경계가 분분했으니,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이를 다소 합하여 놓은 것은 그 공로가 진실로 적지 않으니 마땅히 의사(義祠)를 세워서 그 공을 갚아야 한다.”라는 세종의 의지가 표명되기도 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권1 태종 1년 1월 14일 갑술조에는 이미 태종대에 고려왕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자조선과 동등한 공로가 있음을 인정하여 고려의 시조에 대한 치제는 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곧 “전조(前朝)의 왕(王)씨가 삼한을 통일하고 인덕을 쌓아 5백년을 내려왔으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기자와 왕태조(王太祖)가 모두 동방 백성들에게 공이 있으니, 토전(土田)을 붙여주어 때로 제향을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와 과정을 거치면서 단군조선의 시조신으로부터 기자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시조신이 조선의 사전(祀典)에 기재되어 국가로부터 제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단군으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역사의 전통을 보존하려는 역사인식의 자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밝히는 내용이 되기도 한다. 세종 때 「오례(五禮)」에는 단군과 고려 시조의 제향의(祭享儀)만 있으나, 세종의 연대기에는 단군의 사단(祠壇)을 비롯하여 기자묘가 세워지고, 그 제향을 논의한 기록이 있다. 단군이 조선의 시조임을 확인하고 건묘치사하자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락 시조 수로왕의 능침까지도 주목하는데, 그것은 역사의 정통 인식체계 속에서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전개를 정리하는 것이다.

삼국의 정립이 통일된 국가를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과도적 공적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삼국의 시조를 제향할 수 있다는 세종의 역사인식은 역대 왕조의 시조 제향의 의미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삼국의 역사단계를 인식하고 그들의 역할을 정리하여 그 시조신을 제향하여 그 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하였다. 『세종실록』 권44 세종 11년 5월 7일 임자조에서 보면, 세종은 이와 같은 논리를 얻기 위하여 예조에 고제를 연구토록 하였으며,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세종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에 대하여는 이미 사당을 세웠다고 하였다.

백제 시조의 묘우를 직산현에 세워 노비 2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이는 삼국의 시조제향의를 입묘(立廟)와 함께 사전에 등재하여 치제하도록 한 것이다. 고려 시조묘는 마전현에 세우고 시조배향공신까지도 배려하고 있었다. 『세종실록』 권20 세종 5년 6월 29일 무인조에 따르면, 세종 10년대에 예론(禮論)이 정리되는 상황에서 고려 시조를 사전에 등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묘의 표식을 고쳐 고려 시조 현릉이라 세우고, 아울러 태조의 초상과 태조 이하 8명의 왕의 신주를 제전(祭田), 제기(祭器), 노비(奴婢)를 갖추어 제향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고려왕조를 계승하여 새 왕조의 정통성을 의례를 통하여 인식하려는 세종의 역사의식이자 유학의 논리라고 이해된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平壤府) 내용에 따르면, “기자묘(箕子廟)가 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는데, 정자각(亭子閣), 석인(石人), 석양(石羊)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祠堂)은 성안 의리방(義理坊)에 있다. 봄과 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세종 12년 경술에 유사(有司)에 전지(傳旨)하기를, 예전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太師)를 우리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 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물 예악(文物禮樂)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단군(檀君) 사당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세종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하게 하였다. 봄과 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부(府) 동남쪽[巽方]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모두 화반석(畫班石)으로 광(壙)을 영조(營造)하였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이승휴(李承休)가 동명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雲輧)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玉鞭)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또 인리방(仁理坊)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도 또한 그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역대시조제(歷代始祖祭)의 향사의식} 향사의식의 내용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 향역대시조의(享歷代始祖儀) 항목을 설정하여 시일(時日),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행례(行禮)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준비단계로 5일간의 재계(齋戒)와 2일간의 제수 진설(陳設), 전날의 희생 검사와 향축(香祝) 전달이 있으며, 헌관이 제단에 도착하면 제의가 시행된다. 행례의식은 전폐(奠幣)와 작헌(酌獻), 송신(送神)으로 이루어진다. 전폐는 초헌관이 향을 세 번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절을 하는 과정이다. 작헌에서는 초헌관이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독축하고 절을 하는 초헌례가 시행되고, 이어 아헌례와 종헌례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헌례가 끝나면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하고 제기를 거둔다. 이어 초헌관이 망예(望瘞)를 하고 헌관들이 퇴장함으로써 제의는 끝난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世宗實錄, 太宗實錄

역대시조제

역대시조제
한자명

歷代始祖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2월 > 의례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정의

국가차원에서 역대왕조의 시조에게 드리는 제사의례.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거행하며, 중사(中祀)에 편성되어 있다.

내용

{역대시조제(歷代始祖祭)의 시행목적} 역대왕조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조선왕조가 행하게 되는 이유를 세종대왕실록 연대기에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4 세종 11년 5월 7일 임자조에 세종이 “예조에 전지(傳旨)하여 단군과 기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에게 묘를 세워 치제하는 일을 고제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라.”라고 하였다고 나온다. 이보다 앞서 세종의 연대기는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그 공을 보답한다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삼국의 제도를 증감한 것이고,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하면서 서로 막상막하의 역사를 유지한 것으로, 어느 한 왕조의 시조만을 제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1월 5일 갑오조에서는 “우리 동방은 삼국 시조가 있기 전에는 12한과 9한이 있어서 나라의 경계가 분분했으니,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이를 다소 합하여 놓은 것은 그 공로가 진실로 적지 않으니 마땅히 의사(義祠)를 세워서 그 공을 갚아야 한다.”라는 세종의 의지가 표명되기도 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권1 태종 1년 1월 14일 갑술조에는 이미 태종대에 고려왕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자조선과 동등한 공로가 있음을 인정하여 고려의 시조에 대한 치제는 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곧 “전조(前朝)의 왕(王)씨가 삼한을 통일하고 인덕을 쌓아 5백년을 내려왔으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기자와 왕태조(王太祖)가 모두 동방 백성들에게 공이 있으니, 토전(土田)을 붙여주어 때로 제향을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와 과정을 거치면서 단군조선의 시조신으로부터 기자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시조신이 조선의 사전(祀典)에 기재되어 국가로부터 제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단군으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역사의 전통을 보존하려는 역사인식의 자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밝히는 내용이 되기도 한다. 세종 때 「오례(五禮)」에는 단군과 고려 시조의 제향의(祭享儀)만 있으나, 세종의 연대기에는 단군의 사단(祠壇)을 비롯하여 기자묘가 세워지고, 그 제향을 논의한 기록이 있다. 단군이 조선의 시조임을 확인하고 건묘치사하자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락 시조 수로왕의 능침까지도 주목하는데, 그것은 역사의 정통 인식체계 속에서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전개를 정리하는 것이다.

삼국의 정립이 통일된 국가를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과도적 공적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삼국의 시조를 제향할 수 있다는 세종의 역사인식은 역대 왕조의 시조 제향의 의미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삼국의 역사단계를 인식하고 그들의 역할을 정리하여 그 시조신을 제향하여 그 정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하였다. 『세종실록』 권44 세종 11년 5월 7일 임자조에서 보면, 세종은 이와 같은 논리를 얻기 위하여 예조에 고제를 연구토록 하였으며,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세종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에 대하여는 이미 사당을 세웠다고 하였다.

백제 시조의 묘우를 직산현에 세워 노비 2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이는 삼국의 시조제향의를 입묘(立廟)와 함께 사전에 등재하여 치제하도록 한 것이다. 고려 시조묘는 마전현에 세우고 시조배향공신까지도 배려하고 있었다. 『세종실록』 권20 세종 5년 6월 29일 무인조에 따르면, 세종 10년대에 예론(禮論)이 정리되는 상황에서 고려 시조를 사전에 등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묘의 표식을 고쳐 고려 시조 현릉이라 세우고, 아울러 태조의 초상과 태조 이하 8명의 왕의 신주를 제전(祭田), 제기(祭器), 노비(奴婢)를 갖추어 제향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고려왕조를 계승하여 새 왕조의 정통성을 의례를 통하여 인식하려는 세종의 역사의식이자 유학의 논리라고 이해된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平壤府) 내용에 따르면, “기자묘(箕子廟)가 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는데, 정자각(亭子閣), 석인(石人), 석양(石羊)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祠堂)은 성안 의리방(義理坊)에 있다. 봄과 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세종 12년 경술에 유사(有司)에 전지(傳旨)하기를, 예전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太師)를 우리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 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물 예악(文物禮樂)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단군(檀君) 사당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세종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하게 하였다. 봄과 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부(府) 동남쪽[巽方]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모두 화반석(畫班石)으로 광(壙)을 영조(營造)하였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이승휴(李承休)가 동명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雲輧)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玉鞭)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또 인리방(仁理坊)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도 또한 그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역대시조제(歷代始祖祭)의 향사의식} 향사의식의 내용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 향역대시조의(享歷代始祖儀) 항목을 설정하여 시일(時日),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행례(行禮)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준비단계로 5일간의 재계(齋戒)와 2일간의 제수 진설(陳設), 전날의 희생 검사와 향축(香祝) 전달이 있으며, 헌관이 제단에 도착하면 제의가 시행된다. 행례의식은 전폐(奠幣)와 작헌(酌獻), 송신(送神)으로 이루어진다. 전폐는 초헌관이 향을 세 번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절을 하는 과정이다. 작헌에서는 초헌관이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독축하고 절을 하는 초헌례가 시행되고, 이어 아헌례와 종헌례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헌례가 끝나면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하고 제기를 거둔다. 이어 초헌관이 망예(望瘞)를 하고 헌관들이 퇴장함으로써 제의는 끝난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世宗實錄, 太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