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春节)

한자명

春节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김명자(金明子)

정의

음력 정월 초하룻날.

이칭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원신(元新)·원조(元朝)·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연두(年頭)·연수(年首)·연시(年始)라고도 하는데 이는 대개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일(愼日)·달도(怛忉)라고도 하고, 근대국가에 와서는 신정(新正)으로 일컬어지는 양력설의 상대 개념으로 구정(舊正)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래

설이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중국의 역사서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신라인들이 원일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설 명절이 역법체계에 따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전부터 설이 존재했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가령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제천의례에 대한 기록에서 설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은정월(殷正月), 5월과 10월의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 등과 같은 표현은 당시 역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은정월은 은나라의 역법을 지칭하는데 이는 오늘날로 치면 음력 섣달을 말한다. 이는 복잡한 역법상의 기준 차이일 뿐, 연초라는 관념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역법을 통해 각 달을 가늠했으며 한 해의 시작으로 세수(歲首)인 설이 존재했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의 설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 나타난다. 『수서』와 『구당서』의 신라 관련 기록에는 왕권 국가로서의 설날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즉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고려사(高麗史)』에도 설날[元正]은 상원(上元)·상사(上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중구(重九)·팔관(八關)·동지(冬至)와 함께 9대 속절(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였다. 『수서』와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정초에 패수(浿水)에서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고 소리 지르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편싸움, 특히 석전(石戰)의 원류로 추정될 수 있다.

정월은 삼국 모두 각별한 달로 여겼으며 신라와 가야에서는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신라에서는 정월에 죄수를 사면하기도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사금갑조(射琴匣條)에는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과 십이지일(十二支日)의 금기 유래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박혁거세의 즉위일이 정월 대보름이라고 했고 김알지는 계림 나뭇가지의 황금궤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혁거세는 박씨골매기이고 김알지는 김씨골매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어떻든 이들은 모두 공동체의 시조신이며 창건신, 수호신이다. 오늘날 대보름을 전후하여 많이 지내는 골맥이 동제는 의례이자 세시풍속이기도 한데 그 동제의 원류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고려사』에는 원정을 비롯하여 9대 속절이 소개되어 있지만 그밖에 고려 속요(俗謠) ‘동동(動動)’을 비롯하여 개인 문집에도 세시명절과 풍속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있다.

고려에 들어서도 왕은 정월에 국가 세시의례인 천지신과 조상신 제사를 지냈다. 정월 초하루 원정을 전후하여 관리들에게 7일간의 휴가를 주었고 신하들은 왕에게 신년을 축하하는 예를 올렸으며 왕은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고려사』에는 정월 초하루에 정조 축하의식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문선(東文選)』·『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양촌집(陽村集)』·『가정선생문집(稼亭先生文集)』·『도은선생문집(陶隱先生文集)』 등 문집에 기록된 시(詩)에는 정월 초하루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나누는 새해 인사, 연하장 보내기, 악귀를 쫓기 위해 부적을 문에 붙이기,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등의 세화 보내기 등의 여러 가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설의 세시풍속이 상당히 있었지만 고려에 와서는 더욱 다양해졌으며 이는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실상 오늘날 논의되는 설을 비롯한 각 달의 의 세시풍속은 고려 때 정착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4대 명절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명절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세시명절이 전승되고 세시풍속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세시풍속을 수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비롯하여 조선 전 지역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통해서도 그 다양함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수록된 세시풍속이 모두 당시에 전승된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많은 것이 현대까지 이어졌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추재집(秋齋集)』·『면암집(勉菴集)』·『지봉유설(芝峰類說)』·『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해동죽지(海東竹枝)』 등의 문집에 정월을 비롯한 각 달의 세시풍속이 소개되거나 시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연등회 등 불교 세시풍속이 강세를 이룬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차례를 비롯한 조상제사가 중시되는 등 유교 세시풍속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의례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사실상 거의 의례에 포함되어 전통적인 의미로 말하면 ‘세시의례’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속신도 실상은 의례적인 것이어서 의례와 속신을 구별하는 데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신이나 초월적인 힘을 대상으로 제의를 행하는 것을 의례로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한 것도 있으리라 본다.

세시의례는 농사를 중심축에 놓고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농경의례’라고도 한다. 의례력 속에 포함되는 모든 세시풍속이 풍농의 기원과 예축, 풍흉을 점치는 점세(占歲), 농공 내지는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그만큼 농사가 약화되고 농경을 위한 세시풍속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자의적이든 변화에 따르든 구별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의례로서의 구속력이 보다 강한 것을 농경의례라 한다. 세시의례 가운데서도 공동의례의 경우는 농경의례로서의 기능을 주로 한다.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종손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그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치고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근래에는 설을 전후하여 성묘를 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의정대신들이 임금에게 정조하례를 드렸다. 이는 궁중의례이면서 왕에게 올리는 세배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가정에서는 정초에 안택을 하여 집안의 평안을 빈다. 안택은 무당과 같은 전문적인 단골을 불러 집에서 보통 고사보다는 규모가 큰 굿을 하는 것인데 정초에 행하는 신년제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집에 불러다가 비손 형식의 굿을 한다. 홍수매기는 횡수를 막는 의례로서 가족 가운데 그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각별하게 의례를 행한다. 홍수매기를 지낸 후에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액운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이는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서해안 지역에서는 정초에 무당을 불러 풍어제를 크게 지내기도 한다. 한 해 동안 무사하고 고기잡이가 잘 되기를 기원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 무렵에 동제를 지내기도 한다. 또 대보름날 볏가리를 세웠다가 2월 초하루에 털어낸다. 이는 놀이적인 성격도 있겠으나 애초에는 풍농을 위한 의례였다.

속신

세시풍속에서의 속신은 의례성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의례와 속신의 구별이 모호한 점도 있다.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날은 섣달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 밤과 초하루는 직결되어 있다. 끝과 시작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나면서 동시에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다. 이를 수세(守歲)라 하는데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날에는 세찬의 대표적인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복을 끌어 들인다는 복조리 풍속도 속신으로 볼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에서는 세화(歲畵)라 하여 수성(壽星)·선녀(仙女)·직일신장(直日神將) 등 액을 쫓는 신(도교적인 신)을 그려 임금에게 올렸다. 또한 도끼를 든 장군상을 그려 대궐문 양쪽에 붙였는데 이를 ‘문배(門排)’라 한다. 민간에서는 ‘용(龍)’자와 ‘호(虎)’자를 한지에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이는 모두 궁중의 세화나 문배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서 일정한 방향 없이 돌아다니다가 방향에 관계없이 소리를 들어본다. 이때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마귀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설날 밤에는 야광귀라는 귀신이 하늘에서 내려 와서 신발을 신어 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은 사람은 그해에 재수가 없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에 이런 세시를 행하고 또는 열엿새를 ‘귀신날’이라 하여 이날 밤에 신발을 감추거나 엎어 놓는다. 귀신을 쫓는 방법으로 체나 키를 지붕에 매달아놓거나 혹은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정초에 널을 뛰면 그해에 발에 좀(무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섣달그믐 무렵부터 즐기던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까지 한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厄鳶)’이라 하여 연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써서 멀리 날려 보낸다. 예전에는 대보름 이후에도 연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고리백정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액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입춘날에는 보리뿌리를 캐보고 점을 친다. 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그해 보리 농사가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농점(農占)이다.

정초십이지일유모일(有毛日)과 무모일(無毛日)로 나눈다. 정월 초하루가 유모일, 곧 털 있는 십이지 동물의 날이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무모일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유모일 가운데서도 소·토끼·호랑이날이 그 중 좋다. 이는 주술적인 사고에 따른 것으로 이때의 털을 곡식의 성장에 비유했다.

첫 쥐날인 상자일(上子日)에는 모든 일을 금하는데 일을 하면 쥐가 곡식을 축낸다고 한다. 쥐가 쏠고 갉아먹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질이나 바느질을 삼간다. 마소를 먹이기 위해서 여물을 썰면 쥐가 벼나락, 짚 등을 쏠아버린다고 하며 길쌈을 하거나 옷을 지으면 쥐가 옷감을 쏠아 못쓰게 한다고 금한다. 반면 이날 주머니를 만들어 차면 재수가 있다고 한다.

첫 소날인 상축일(上丑日)에는 소에게 좋지 않다고 하여 도마질을 하지 않는다. 쇠고기를 요리할 때에는 으레 도마질을 해야 하는데 소의 명절인 상축일에는 이와 같은 일을 삼가는 것이다. 쇠붙이 연장도 다루지 않는다. 이날 연장을 다루면 쟁기보습이 부러지고 방아를 찧으면 소가 기침을 한다. 또 이날은 곡식을 밖으로 퍼내지 않는다. 퍼내면 소에게 재앙이 온다는 것이다.

첫 호랑이날인 상인일(上寅日)에는 일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하여 놀았다. 또 짐승에 대하여 나쁜 말도 하지 않으며 외출도 삼간다. 이날 여자들이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대소변을 보면 그 집 가족이 호랑이에게 잡혀간다는 말도 있다.

첫 토끼날인 상묘일(上卯日)에는 여자가 남의 집에 일찍 출입하면 재수가 없다하여 금한다. 그래서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고 불가피할 경우 누구라도 남자가 먼저 출입한다. 이날 여자들은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長壽)한다 하여 베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라가 베를 짜본다.

첫 용날인 상진일(上辰日) 새벽에는 여자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온다. 이날 새벽에 용이 내려와서 알을 쓸어놓고 간다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해 농사가 대풍이 든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이것을 ‘용알뜨기[憦龍卵]’라 하여 대보름 풍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물뜨기’라고도 한다. 또 이날은 긴 물건을 다루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는다. 뱀이 나온다고 하는데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뱀처럼 몸이 길어 같은 동물로 여겨 꺼리는 것이다. 반면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 사람은 이날 머리를 감아 곱고 길게 잘 자랄 것을 축수한다.

첫 뱀날인 상사일(上巳日)에는 머리를 빗거나 이발을 하면 뱀이 나타난다 하여 금한다. 그 밖에 빨래도 삼가고 바느질도 하지 않으며 땔나무를 부엌에 들이지 않는다. 첫 원숭이날인 상신일(上申日)에는 부엌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남자가 여자보다 일찍 일어나서 비를 들고 부엌의 네 귀퉁이를 쓴다. 첫 닭날인 상유일(上酉日)에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된다고 하여 금한다. 첫 개날인 상술일(上戌日)에는 일을 하면 개가 텃밭을 해친다고 금하고 이날 풀을 쑤면 개가 평소에 잘 토한다하여 금한다. 첫 돼지날인 상해일(上亥日)에는 콩가루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희어진다고 한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잘사는 집 부엌의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면 부스럼이 나지 않고 귀밝이술을 마시면 일년 내내 좋은 소식을 듣는다. 또 더위를 팔면 그해 여름에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속신도 있다. 오곡밥은 세 집 이상의 타성받이 집의 밥을 먹어야 그해 운수가 좋다고 한다.

복식 및 절식

설날에 입는 옷을 ‘설빔’이라 한다.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이라 했다. 『열양세시기』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 무색(물색, 색깔이 있는) 옷을 입는데 특히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명절뿐 아니라 돌과 같은 기념일에도 색동저고리를 입는데 돌에 남아들은 남색 띠를 두르고 여아들은 자색 띠를 둘러 구별했다.

설에 먹는 절식으로 우선 꼽히는 것은 설날의 떡국이다. 떡국의 기본 재료는 가래떡이다. 『동국세시기』에는 떡국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자루달린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만든 떡을 흰떡[白餠]이라 한다. 이것을 얄팍하게 돈같이 썰어 장국에다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친 것을 떡국[餠湯]이라 한다. 시장에서는 시절음식으로 이것을 판다.”

요즘처럼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해오던 것과는 달리 직접 집에서 만들었던 때의 기록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그런데 예전에도 떡국을 시장에서 판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를 끈다. 떡국에는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한다.

세찬(歲饌)은 차례상에 오르고 명절식으로 시식하는 음식이다. 가래떡을 썰어 넣고 끓인 떡국은 대표적인 설음식이며 그 외에 시루떡도 있다. 고사를 지낼 때에는 붉은 팥시루떡을 쓰지만 차례를 지낼 때에는 붉은색이 조상을 쫓는다하여 거피를 낸 팥을 사용하여 떡을 찐다. 이 밖에 인절미, 전유어, 빈대떡, 강정류, 식혜, 수정과 등도 세찬으로 장만한다. 세주는 맑은 청주인데 역시 차례상에 오르고 산뜻한 봄을 맞는다는 의미에서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함께 마신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입춘날에 경기도의 산골 지방 육읍(六邑, 경기도 중에 산이 많은 양근·지평·포천·가평·삭녕·연천을 말함.)에서는 총아(葱芽, 움파)·산개(山芥. 멧갓)·승검초[辛甘草]를 올린다고 했다.

놀이

설의 놀이는 이미 섣달그믐 무렵부터 시작된다. 연날리기는 섣달그믐 무렵부터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즐긴다. 보름날의 연은 액연(厄鳶)이라 하여 멀리 날려보낸다. 원래 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그 밖에 설날 무렵 윷놀이·널뛰기·승경도놀이·돈치기 등을 한다. 윷놀이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집 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하는 정초의 가장 보편적인 놀이다. 윷의 종류도 장작윷과 밤윷이 있고 놀이 방법도 다양하다. 윷놀이를 통해 그해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한다. 윷놀이와 윷점에 대해서는 『경도잡지』에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널뛰기는 여자들이 즐기는데 역시 『경도잡지』에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승경도(陞卿圖)는 승정도(陞政圖)·종경도(從卿圖)·종정도(從政圖)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주로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과 여자들이 즐겨 놀던 실내놀이로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기입하고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끗수대로 승진하거나 후퇴하는 방식으로 한다. 돈치기는 정초에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인데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정월이 농한기인데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신성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기간에는 인간의 기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설의 구비전승으로 설날과 대보름의 속담을 찾아볼 수 있다. 설날의 명절음식인 떡국에는 쇠고기나 닭고기를 넣는데 원래는 꿩고기를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꿩고기가 구하기 어려워지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닭고기를 넣게 되었는데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은 이래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금기

예로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날은 특별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여겨졌다. 이것을 통칭해서 후일 만들어진 말이 금기(禁忌)이다. 어떤 날에 특정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재앙을 막고 풍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금기의 공통적인 양상인데 설날에 나타나는 금기도 이와 동일한 모양새를 가진다.

설날에 나타나는 금기의 특징은 여자들에 대한 행동 규제가 가장 큰 특징이다. 여자들이 남의 집에 가지 말아야 하거나 바느질을 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설날에 나타나는 금기는 전국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금기의 내용을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날에 전해지는 금기의 대표적인 것은 여자들의 출입에 대한 금기이다. 여자들의 출입에 대한 금기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통하던 것이었다. 대체로 여자들이 설날 혹은 정초에 바깥출입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집 주인이 싫어하기 때문’, ‘단순히 부정타기 때문’, ‘한 해 동안 재수가 없기 때문’, ‘재수가 없다고 여겨서 세배를 하지 못하기 때문’, ‘그 집 닭(병아리)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 ‘농사가 잘 안되기 때문’ 등 지역별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남자들과 섞여 들어가거나 남자 뒤에 들어가는 것은 좋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결혼할 사람이 남의 집에 왕래하면 남녀 어느 한쪽의 운이 나빠진다고 여긴다(충북 괴산).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금기이다. 한편 남자들에 대한 금기도 있는데 설날에 ‘상가(喪家)에 다녀온 남자’, ‘개고기를 먹은 남자’는 부정이 들기 때문에 남의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이 같은 여성에 대한 출입 제한 때문에 양반가의 여인네들은 설날 남의 집에 인사를 갈 수 없어서 몸종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둘째, 설날에 바느질을 하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이날 바느질을 하면 안 되는 이유로 ‘생인손을 앓기 때문’, ‘손에 가시가 들기 때문(손독으로 덧남)’, ‘곡식 뿌리가 삭기 때문’, ‘손가락을 다치기 때문’, ‘손가락이 아리기 때문’, ‘저승에 가서 홀어머니가 되기 때문’ 등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이날은 옷이 헤어져도 바느질을 하지 않았다(경기 남양주, 경북 구미·칠곡).

셋째, 설날에 문을 바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설날에 문종이를 바르면 안되는 이유로 ‘단순히 재수가 없기 때문’, ‘재수 구멍·여수 구멍(돈 구멍)을 막기 때문’, ‘복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 등의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설날이나 정초에 문을 바르는 것을 피하고 8월 전에 문을 발라야 한다고 믿는다. 만약 이것을 어기고 섣달그믐 전까지도 문을 바르지 못하면 정월 한 달 동안이 몹시 춥다고 한다(전북, 충남 예산·홍성).

넷째, 설날에 재를 치우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대체로 재를 재물(財物)로 여기는 관념의 표현이다. 이날 만약 재를 치우면 ‘집안의 복(재물복)이 나간다.’, ‘곳간에 있는 곡식이 줄어든다.’, ‘곡식이 모이지 않고 집안의 복이 빠져 나간다.’,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를 집 밖으로 절대 가져가지 않으며 설날이 되기 전날인 섣달 그믐날 미리 치우기도 한다(경남).

다섯째, 설날에 곡식을 밖으로 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이날 만약 곡식을 팔거나 남에게 주면, ‘집안의 복이 나가서 재산이 줄어든다.’, ‘그해 수확량이 줄어든다.’, ‘돈을 빌려주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곡식이나 돈을 빌려주려면 섣달 스무날 전에 미리 빌려주기도 한다(부산 기장·경남 밀양).

그 외 설날의 금기 사항으로는 ‘개고기 먹지 않기(경기 이천, 충남 천안)’, ‘늦잠 자지 않기(제주도)’, ‘머리 감지 않기(경기 김포, 의왕)’, ‘물동이 지지 않기(제주도)’, ‘물이나 쓰레기 버리지 않기(경기 이천, 전북 익산)’, ‘물질하지 않기(충남 아산)’, ‘방망이 소리 내지 않기(제주도)’, ‘배에 여자 태우지 않기(경북 울진)’, ‘봉사한테 점치지 않기(제주도)’, ‘비질하지 않기(제주도)’, ‘빨래하지 않기(전남 목포)’, ‘새벽에 물 길어오지 않기(전북 진안)’, ‘성냥 사지 않기(경기 이천)’, ‘손톱 깎지 않기(제주도)’, ‘족제비 보지 않기(제주도)’, ‘풀 쑤지 않기(제주도)’ 등이 있다. 이들 행위를 금하는 세부적인 이유가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한 해의 농사와 개인의 운수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의 설

근대국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음력설[舊正]과 양력설[新正]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날을 의미하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이다. 그러나 전통명절은 역시 설날이다. 구정이나 신정이란 용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요즘 설날은 추석과 함께 3일간 연휴이다. 그래서 이들 명절에는 이른바 민족대이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1896년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에 태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부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다. 일본 명절인 천장절(天長節)·명치절(明治節) 등을 국경일로 정하여 갖가지 행사에 한국인을 참가시켰다. 광복 후 우리 스스로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설에 대해 이중과세라는 낭비성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일반인들은 설날을 명절로 여겼다. 그래서 설날은 급기야 ‘민속의 날’이라는 지극히 어색하고 궁색한 이름이 붙여지고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었다. 이때 언론매체에서는 70~80년 만에 설날을 찾았다며 떠들썩했다.

오늘날 설날 무렵이면 추석과 함께 ‘민족대이동’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 현상도 일고 있지만 아직은 고향을 찾는 인구가 훨씬 많다. 그래서 오늘날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소중하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세시풍속은 퇴색되거나 단절되었다. 그래서 설의 세시풍속은 언론매체에 소개되는 것이 일종의 ‘세시풍속화’했을 정도이다. 근래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유관기관에서는 민속놀이판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찾는 가족들도 날로 늘고 있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아직 떡국을 명절음식으로 하는 세시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떡을 먹지 않아서 밥으로 차례를 지낸다는 가정도 있으나 설날과 떡국이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다른 나라의 설풍습

설이 언제인가는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일상력이 기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1월 1일부터 일상력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음력으로 일컬어지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따라서 설날은 태음태양력에 의한 정월 초하루였다. 이는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나라 역시 오늘날에는 모두 그레고리력인 태양력을 일상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1872년에 태양력을 채용했으며 대만의 경우 손문(孫文)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건립 때인 1912년 태양력이 채택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1년, 동양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양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음력에 의한 설명절은 아직도 중요시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1월 1일부터 5일을 춘절(春節)이라 하여 명절로 보낸다. 설음식으로는 만두를 먹는데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빚어 먹으며 명절을 즐긴다. 또 우리처럼 제사를 지내고 신년인사를 하며 폭죽놀이 등을 즐기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설날과 추석 무렵이면 대대적인 민족대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음력의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사용, 양력 1월 1일은 국민의 축일(祝日)이라는 이름으로 명절화되었다. 1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신사참배를 하는데 이를 초예(初詣, 하츠모데, 정월의 첫 참배라는 뜻)라고 한다. 그리고 정초 약 3일간은 친구, 직장인들 사이에서 신년 인사를 다니기도 한다. 상인들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고 문송(門松, 가도마츠, 새해 문 앞에 세우는 장식 소나무)을 비롯한 각종 신년 장식물이 차려진다. 2일에는 황거일반참하(皇居一般參賀, 고쿄잇파상가)라 해서 궁성이 공개되고 천황이 발코니에 나와서 인사를 받는다. 이 밖에 동양적 색채와 유럽적 색채가 동시에 존재하는 러시아에서는 새해가 되면 ‘윗가(vodka, 보드카)’라는 술을 마시면서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프랑스에서는 지금의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전에는 세수가 4월 1일이었다. 1567년 국왕 샤를르 9세 때 세수를 1월 1일로 옮겨 오늘날에 이르렀다. 설날에는 에트렌느(Etrenne, 길조의 선물)라는 선물을 교환하며 덕담을 나눈다.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요구한다. 덕담은 “좋은 한 해를”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며 친척이나 이웃에게 덕담을 하러 가는 어린 소녀들은 “제가 아무라 작아도 다리 밑으로 지나왔어요. 서리가 내리고 추워도 새해 인사드리러 왔어요. 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서 주세요.”라고 한다. 오랜 농경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지역마다 다양한 설 풍속이 있는데 마자르그에서는 설날 새벽에 날씨가 맑으면 과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알프스 저지대에서는 주부들이 설날 아침 일찍 샘물을 길어온다. 맨 먼저 샘에 도착한 주부는 빵이나 치즈 같은 자기가 맨 먼저 만든 것을 우물가에 갖다 놓는다. 그 다음에 온 여자는 이 헌물을 자기 집으로 가져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것을 갖다 놓는다. 우리나라의 대보름 풍속인 용알뜨기와 매우 유사하다. 시푸르 지역에서는 젊은 부부가 조부모에게 세배를 하러 간다. 리얘스 지역에서는 대소가의 친척들을 나이 순서에 따라 방문하고 서로 껴안고 덕담을 나눈다. 아이들에게는 형편에 따라 1프랑이나 2프랑 또는 5프랑짜리 동전을 세뱃돈으로 준다.

인도에서는 설날에 온 가족이 마당에 모여 냄비에 우유와 쌀을 넣고 죽을 끓인다. 죽을 끓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데, 죽이 잘 끓지 않거나 냄비가 깨지면 불행이 닥친다고 한다. 죽이 잘 끓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데 이 죽을 무화과잎에 싸서 친지들에게 선물한다.

베트남에서는 설날 전에 수박을 준비했다가 설날에 손님들이 모이면 수박의 가운데를 가른다. 가른 수박 가운데 빨갛게 익은 정도를 보고 한 해의 길흉을 점친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였을 때 녹두와 돼지고기를 넣은 찹쌀떡인 ‘바인 쯩’을 바나나잎에 싸두었다가 손님들한테 대접한다.

우리나라에서 음력 설날을 명절로 맞이하듯이 이스라엘은 유대달력에 따라 양력 9월에 설날을 맞는다. ‘로쉬 하사나’로 불리는 설날에 서로 덕담을 하면서 꿀에 담근 사과대추를 먹는다. 헝가리에서는 설날 점심 때 콩을 넣은 음식을 먹으면서 부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멕시코에서는 1월 1일이 되는 시점인 자정에 시계탑 종이 열두 번 울리는 것에 맞추어 포도알 열두 개를 먹으며 새해 12개월 동안의 소원을 빈다.

이란에서는 시르(마늘)·세르케(식초)·십(사과) 등 이란어로 ‘시’로 시작하는 7가지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든다. 이 음식은 풍요와 건강·행복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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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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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한자명

春节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집필자 김명자(金明子)

정의

음력 정월 초하룻날.

이칭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원신(元新)·원조(元朝)·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연두(年頭)·연수(年首)·연시(年始)라고도 하는데 이는 대개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일(愼日)·달도(怛忉)라고도 하고, 근대국가에 와서는 신정(新正)으로 일컬어지는 양력설의 상대 개념으로 구정(舊正)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래

설이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중국의 역사서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신라인들이 원일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설 명절이 역법체계에 따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전부터 설이 존재했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가령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제천의례에 대한 기록에서 설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은정월(殷正月), 5월과 10월의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 등과 같은 표현은 당시 역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은정월은 은나라의 역법을 지칭하는데 이는 오늘날로 치면 음력 섣달을 말한다. 이는 복잡한 역법상의 기준 차이일 뿐, 연초라는 관념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역법을 통해 각 달을 가늠했으며 한 해의 시작으로 세수(歲首)인 설이 존재했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의 설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 나타난다. 『수서』와 『구당서』의 신라 관련 기록에는 왕권 국가로서의 설날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즉 “매년 정월 원단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고려사(高麗史)』에도 설날[元正]은 상원(上元)·상사(上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중구(重九)·팔관(八關)·동지(冬至)와 함께 9대 속절(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였다. 『수서』와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해마다 정초에 패수(浿水)에서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고 소리 지르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편싸움, 특히 석전(石戰)의 원류로 추정될 수 있다.

정월은 삼국 모두 각별한 달로 여겼으며 신라와 가야에서는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신라에서는 정월에 죄수를 사면하기도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사금갑조(射琴匣條)에는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과 십이지일(十二支日)의 금기 유래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박혁거세의 즉위일이 정월 대보름이라고 했고 김알지는 계림 나뭇가지의 황금궤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혁거세는 박씨골매기이고 김알지는 김씨골매기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어떻든 이들은 모두 공동체의 시조신이며 창건신, 수호신이다. 오늘날 대보름을 전후하여 많이 지내는 골맥이 동제는 의례이자 세시풍속이기도 한데 그 동제의 원류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고려사』에는 원정을 비롯하여 9대 속절이 소개되어 있지만 그밖에 고려 속요(俗謠) ‘동동(動動)’을 비롯하여 개인 문집에도 세시명절과 풍속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있다.

고려에 들어서도 왕은 정월에 국가 세시의례인 천지신과 조상신 제사를 지냈다. 정월 초하루 원정을 전후하여 관리들에게 7일간의 휴가를 주었고 신하들은 왕에게 신년을 축하하는 예를 올렸으며 왕은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고려사』에는 정월 초하루에 정조 축하의식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문선(東文選)』·『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양촌집(陽村集)』·『가정선생문집(稼亭先生文集)』·『도은선생문집(陶隱先生文集)』 등 문집에 기록된 시(詩)에는 정월 초하루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나누는 새해 인사, 연하장 보내기, 악귀를 쫓기 위해 부적을 문에 붙이기,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등의 세화 보내기 등의 여러 가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설의 세시풍속이 상당히 있었지만 고려에 와서는 더욱 다양해졌으며 이는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실상 오늘날 논의되는 설을 비롯한 각 달의 의 세시풍속은 고려 때 정착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4대 명절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명절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세시명절이 전승되고 세시풍속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세시풍속을 수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비롯하여 조선 전 지역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통해서도 그 다양함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수록된 세시풍속이 모두 당시에 전승된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많은 것이 현대까지 이어졌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추재집(秋齋集)』·『면암집(勉菴集)』·『지봉유설(芝峰類說)』·『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해동죽지(海東竹枝)』 등의 문집에 정월을 비롯한 각 달의 세시풍속이 소개되거나 시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등 불교 세시풍속이 강세를 이룬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차례를 비롯한 조상제사가 중시되는 등 유교 세시풍속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의례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사실상 거의 의례에 포함되어 전통적인 의미로 말하면 ‘세시의례’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속신도 실상은 의례적인 것이어서 의례와 속신을 구별하는 데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신이나 초월적인 힘을 대상으로 제의를 행하는 것을 의례로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한 것도 있으리라 본다.

세시의례는 농사를 중심축에 놓고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농경의례’라고도 한다. 의례력 속에 포함되는 모든 세시풍속이 풍농의 기원과 예축, 풍흉을 점치는 점세(占歲), 농공 내지는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그만큼 농사가 약화되고 농경을 위한 세시풍속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자의적이든 변화에 따르든 구별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의례로서의 구속력이 보다 강한 것을 농경의례라 한다. 세시의례 가운데서도 공동의례의 경우는 농경의례로서의 기능을 주로 한다.

설날 아침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종손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그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치고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하는데 근래에는 설을 전후하여 성묘를 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의정대신들이 임금에게 정조하례를 드렸다. 이는 궁중의례이면서 왕에게 올리는 세배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가정에서는 정초에 안택을 하여 집안의 평안을 빈다. 안택은 무당과 같은 전문적인 단골을 불러 집에서 보통 고사보다는 규모가 큰 굿을 하는 것인데 정초에 행하는 신년제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홍수매기(횡수막이)라 하여 주부가 단골무당을 찾아가 비손을 하거나 집에 불러다가 비손 형식의 굿을 한다. 홍수매기는 횡수를 막는 의례로서 가족 가운데 그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각별하게 의례를 행한다. 홍수매기를 지낸 후에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뱃속에 액운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 삼거리나 사거리에 버린다. 이는 액운을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서해안 지역에서는 정초에 무당을 불러 풍어제를 크게 지내기도 한다. 한 해 동안 무사하고 고기잡이가 잘 되기를 기원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 무렵에 동제를 지내기도 한다. 또 대보름날 볏가리를 세웠다가 2월 초하루에 털어낸다. 이는 놀이적인 성격도 있겠으나 애초에는 풍농을 위한 의례였다.

속신

세시풍속에서의 속신은 의례성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의례와 속신의 구별이 모호한 점도 있다.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날은 섣달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 밤과 초하루는 직결되어 있다. 끝과 시작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나면서 동시에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다. 이를 수세(守歲)라 하는데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날에는 세찬의 대표적인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복을 끌어 들인다는 복조리 풍속도 속신으로 볼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에서는 세화(歲畵)라 하여 수성(壽星)·선녀(仙女)·직일신장(直日神將) 등 액을 쫓는 신(도교적인 신)을 그려 임금에게 올렸다. 또한 도끼를 든 장군상을 그려 대궐문 양쪽에 붙였는데 이를 ‘문배(門排)’라 한다. 민간에서는 ‘용(龍)’자와 ‘호(虎)’자를 한지에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이는 모두 궁중의 세화나 문배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서 일정한 방향 없이 돌아다니다가 방향에 관계없이 소리를 들어본다. 이때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마귀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설날 밤에는 야광귀라는 귀신이 하늘에서 내려 와서 신발을 신어 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은 사람은 그해에 재수가 없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에 이런 세시를 행하고 또는 열엿새를 ‘귀신날’이라 하여 이날 밤에 신발을 감추거나 엎어 놓는다. 귀신을 쫓는 방법으로 체나 키를 지붕에 매달아놓거나 혹은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정초에 널을 뛰면 그해에 발에 좀(무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섣달그믐 무렵부터 즐기던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까지 한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厄鳶)’이라 하여 연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써서 멀리 날려 보낸다. 예전에는 대보름 이후에도 연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고리백정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액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입춘날에는 보리뿌리를 캐보고 점을 친다. 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그해 보리 농사가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농점(農占)이다.

정초십이지일을 유모일(有毛日)과 무모일(無毛日)로 나눈다. 정월 초하루가 유모일, 곧 털 있는 십이지 동물의 날이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무모일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유모일 가운데서도 소·토끼·호랑이날이 그 중 좋다. 이는 주술적인 사고에 따른 것으로 이때의 털을 곡식의 성장에 비유했다.

첫 쥐날인 상자일(上子日)에는 모든 일을 금하는데 일을 하면 쥐가 곡식을 축낸다고 한다. 쥐가 쏠고 갉아먹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질이나 바느질을 삼간다. 마소를 먹이기 위해서 여물을 썰면 쥐가 벼나락, 짚 등을 쏠아버린다고 하며 길쌈을 하거나 옷을 지으면 쥐가 옷감을 쏠아 못쓰게 한다고 금한다. 반면 이날 주머니를 만들어 차면 재수가 있다고 한다.

첫 소날인 상축일(上丑日)에는 소에게 좋지 않다고 하여 도마질을 하지 않는다. 쇠고기를 요리할 때에는 으레 도마질을 해야 하는데 소의 명절인 상축일에는 이와 같은 일을 삼가는 것이다. 쇠붙이 연장도 다루지 않는다. 이날 연장을 다루면 쟁기의 보습이 부러지고 방아를 찧으면 소가 기침을 한다. 또 이날은 곡식을 밖으로 퍼내지 않는다. 퍼내면 소에게 재앙이 온다는 것이다.

첫 호랑이날인 상인일(上寅日)에는 일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하여 놀았다. 또 짐승에 대하여 나쁜 말도 하지 않으며 외출도 삼간다. 이날 여자들이 외출하여 남의 집에서 대소변을 보면 그 집 가족이 호랑이에게 잡혀간다는 말도 있다.

첫 토끼날인 상묘일(上卯日)에는 여자가 남의 집에 일찍 출입하면 재수가 없다하여 금한다. 그래서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고 불가피할 경우 누구라도 남자가 먼저 출입한다. 이날 여자들은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長壽)한다 하여 베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라가 베를 짜본다.

첫 용날인 상진일(上辰日) 새벽에는 여자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온다. 이날 새벽에 용이 내려와서 알을 쓸어놓고 간다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면 그해 농사가 대풍이 든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이것을 ‘용알뜨기[憦龍卵]’라 하여 대보름 풍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물뜨기’라고도 한다. 또 이날은 긴 물건을 다루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는다. 뱀이 나온다고 하는데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뱀처럼 몸이 길어 같은 동물로 여겨 꺼리는 것이다. 반면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 사람은 이날 머리를 감아 곱고 길게 잘 자랄 것을 축수한다.

첫 뱀날인 상사일(上巳日)에는 머리를 빗거나 이발을 하면 뱀이 나타난다 하여 금한다. 그 밖에 빨래도 삼가고 바느질도 하지 않으며 땔나무를 부엌에 들이지 않는다. 첫 원숭이날인 상신일(上申日)에는 부엌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남자가 여자보다 일찍 일어나서 비를 들고 부엌의 네 귀퉁이를 쓴다. 첫 닭날인 상유일(上酉日)에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된다고 하여 금한다. 첫 개날인 상술일(上戌日)에는 일을 하면 개가 텃밭을 해친다고 금하고 이날 풀을 쑤면 개가 평소에 잘 토한다하여 금한다. 첫 돼지날인 상해일(上亥日)에는 콩가루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희어진다고 한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잘사는 집 부엌의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면 부스럼이 나지 않고 귀밝이술을 마시면 일년 내내 좋은 소식을 듣는다. 또 더위를 팔면 그해 여름에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속신도 있다. 오곡밥은 세 집 이상의 타성받이 집의 밥을 먹어야 그해 운수가 좋다고 한다.

복식 및 절식

설날에 입는 옷을 ‘설빔’이라 한다.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이라 했다. 『열양세시기』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 무색(물색, 색깔이 있는) 옷을 입는데 특히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명절뿐 아니라 돌과 같은 기념일에도 색동저고리를 입는데 돌에 남아들은 남색 띠를 두르고 여아들은 자색 띠를 둘러 구별했다.

설에 먹는 절식으로 우선 꼽히는 것은 설날의 떡국이다. 떡국의 기본 재료는 가래떡이다. 『동국세시기』에는 떡국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자루달린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만든 떡을 흰떡[白餠]이라 한다. 이것을 얄팍하게 돈같이 썰어 장국에다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친 것을 떡국[餠湯]이라 한다. 시장에서는 시절음식으로 이것을 판다.”

요즘처럼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해오던 것과는 달리 직접 집에서 만들었던 때의 기록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그런데 예전에도 떡국을 시장에서 판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를 끈다. 떡국에는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한다.

세찬(歲饌)은 차례상에 오르고 명절식으로 시식하는 음식이다. 가래떡을 썰어 넣고 끓인 떡국은 대표적인 설음식이며 그 외에 시루떡도 있다. 고사를 지낼 때에는 붉은 팥시루떡을 쓰지만 차례를 지낼 때에는 붉은색이 조상을 쫓는다하여 거피를 낸 팥을 사용하여 떡을 찐다. 이 밖에 인절미, 전유어, 빈대떡, 강정류, 식혜, 수정과 등도 세찬으로 장만한다. 세주는 맑은 청주인데 역시 차례상에 오르고 산뜻한 봄을 맞는다는 의미에서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함께 마신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입춘날에 경기도의 산골 지방 육읍(六邑, 경기도 중에 산이 많은 양근·지평·포천·가평·삭녕·연천을 말함.)에서는 총아(葱芽, 움파)·산개(山芥. 멧갓)·승검초[辛甘草]를 올린다고 했다.

놀이

설의 놀이는 이미 섣달그믐 무렵부터 시작된다. 연날리기는 섣달그믐 무렵부터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즐긴다. 보름날의 연은 액연(厄鳶)이라 하여 멀리 날려보낸다. 원래 보름날 이후에는 연을 날리지 않는다. 그 밖에 설날 무렵 윷놀이·널뛰기·승경도놀이·돈치기 등을 한다. 윷놀이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집 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하는 정초의 가장 보편적인 놀이다. 윷의 종류도 장작윷과 밤윷이 있고 놀이 방법도 다양하다. 윷놀이를 통해 그해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한다. 윷놀이와 윷점에 대해서는 『경도잡지』에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널뛰기는 여자들이 즐기는데 역시 『경도잡지』에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승경도(陞卿圖)는 승정도(陞政圖)·종경도(從卿圖)·종정도(從政圖)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주로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과 여자들이 즐겨 놀던 실내놀이로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기입하고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끗수대로 승진하거나 후퇴하는 방식으로 한다. 돈치기는 정초에 청소년들이 동전이나 동전 모양의 쇠붙이를 가지고 노는 놀이인데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정월이 농한기인데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신성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기간에는 인간의 기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설의 구비전승으로 설날과 대보름의 속담을 찾아볼 수 있다. 설날의 명절음식인 떡국에는 쇠고기나 닭고기를 넣는데 원래는 꿩고기를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꿩고기가 구하기 어려워지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닭고기를 넣게 되었는데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은 이래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금기

예로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날은 특별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여겨졌다. 이것을 통칭해서 후일 만들어진 말이 금기(禁忌)이다. 어떤 날에 특정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재앙을 막고 풍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금기의 공통적인 양상인데 설날에 나타나는 금기도 이와 동일한 모양새를 가진다.

설날에 나타나는 금기의 특징은 여자들에 대한 행동 규제가 가장 큰 특징이다. 여자들이 남의 집에 가지 말아야 하거나 바느질을 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설날에 나타나는 금기는 전국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금기의 내용을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날에 전해지는 금기의 대표적인 것은 여자들의 출입에 대한 금기이다. 여자들의 출입에 대한 금기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통하던 것이었다. 대체로 여자들이 설날 혹은 정초에 바깥출입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집 주인이 싫어하기 때문’, ‘단순히 부정타기 때문’, ‘한 해 동안 재수가 없기 때문’, ‘재수가 없다고 여겨서 세배를 하지 못하기 때문’, ‘그 집 닭(병아리)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 ‘농사가 잘 안되기 때문’ 등 지역별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남자들과 섞여 들어가거나 남자 뒤에 들어가는 것은 좋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결혼할 사람이 남의 집에 왕래하면 남녀 어느 한쪽의 운이 나빠진다고 여긴다(충북 괴산).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금기이다. 한편 남자들에 대한 금기도 있는데 설날에 ‘상가(喪家)에 다녀온 남자’, ‘개고기를 먹은 남자’는 부정이 들기 때문에 남의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이 같은 여성에 대한 출입 제한 때문에 양반가의 여인네들은 설날 남의 집에 인사를 갈 수 없어서 몸종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둘째, 설날에 바느질을 하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이날 바느질을 하면 안 되는 이유로 ‘생인손을 앓기 때문’, ‘손에 가시가 들기 때문(손독으로 덧남)’, ‘곡식 뿌리가 삭기 때문’, ‘손가락을 다치기 때문’, ‘손가락이 아리기 때문’, ‘저승에 가서 홀어머니가 되기 때문’ 등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이날은 옷이 헤어져도 바느질을 하지 않았다(경기 남양주, 경북 구미·칠곡).

셋째, 설날에 문을 바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설날에 문종이를 바르면 안되는 이유로 ‘단순히 재수가 없기 때문’, ‘재수 구멍·여수 구멍(돈 구멍)을 막기 때문’, ‘복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 등의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설날이나 정초에 문을 바르는 것을 피하고 8월 전에 문을 발라야 한다고 믿는다. 만약 이것을 어기고 섣달그믐 전까지도 문을 바르지 못하면 정월 한 달 동안이 몹시 춥다고 한다(전북, 충남 예산·홍성).

넷째, 설날에 재를 치우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대체로 재를 재물(財物)로 여기는 관념의 표현이다. 이날 만약 재를 치우면 ‘집안의 복(재물복)이 나간다.’, ‘곳간에 있는 곡식이 줄어든다.’, ‘곡식이 모이지 않고 집안의 복이 빠져 나간다.’,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를 집 밖으로 절대 가져가지 않으며 설날이 되기 전날인 섣달 그믐날 미리 치우기도 한다(경남).

다섯째, 설날에 곡식을 밖으로 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이날 만약 곡식을 팔거나 남에게 주면, ‘집안의 복이 나가서 재산이 줄어든다.’, ‘그해 수확량이 줄어든다.’, ‘돈을 빌려주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곡식이나 돈을 빌려주려면 섣달 스무날 전에 미리 빌려주기도 한다(부산 기장·경남 밀양).

그 외 설날의 금기 사항으로는 ‘개고기 먹지 않기(경기 이천, 충남 천안)’, ‘늦잠 자지 않기(제주도)’, ‘머리 감지 않기(경기 김포, 의왕)’, ‘물동이 지지 않기(제주도)’, ‘물이나 쓰레기 버리지 않기(경기 이천, 전북 익산)’, ‘물질하지 않기(충남 아산)’, ‘방망이 소리 내지 않기(제주도)’, ‘배에 여자 태우지 않기(경북 울진)’, ‘봉사한테 점치지 않기(제주도)’, ‘비질하지 않기(제주도)’, ‘빨래하지 않기(전남 목포)’, ‘새벽에 물 길어오지 않기(전북 진안)’, ‘성냥 사지 않기(경기 이천)’, ‘손톱 깎지 않기(제주도)’, ‘족제비 보지 않기(제주도)’, ‘풀 쑤지 않기(제주도)’ 등이 있다. 이들 행위를 금하는 세부적인 이유가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한 해의 농사와 개인의 운수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의 설

근대국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음력설[舊正]과 양력설[新正]로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날을 의미하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이다. 그러나 전통명절은 역시 설날이다. 구정이나 신정이란 용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요즘 설날은 추석과 함께 3일간 연휴이다. 그래서 이들 명절에는 이른바 민족대이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다. 1896년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에 태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부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다. 일본 명절인 천장절(天長節)·명치절(明治節) 등을 국경일로 정하여 갖가지 행사에 한국인을 참가시켰다. 광복 후 우리 스스로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설에 대해 이중과세라는 낭비성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일반인들은 설날을 명절로 여겼다. 그래서 설날은 급기야 ‘민속의 날’이라는 지극히 어색하고 궁색한 이름이 붙여지고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찾게 되었다. 이때 언론매체에서는 70~80년 만에 설날을 찾았다며 떠들썩했다.

오늘날 설날 무렵이면 추석과 함께 ‘민족대이동’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 현상도 일고 있지만 아직은 고향을 찾는 인구가 훨씬 많다. 그래서 오늘날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소중하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갖가지 세시풍속은 퇴색되거나 단절되었다. 그래서 설의 세시풍속은 언론매체에 소개되는 것이 일종의 ‘세시풍속화’했을 정도이다. 근래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유관기관에서는 민속놀이판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찾는 가족들도 날로 늘고 있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아직 떡국을 명절음식으로 하는 세시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떡을 먹지 않아서 밥으로 차례를 지낸다는 가정도 있으나 설날과 떡국이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다른 나라의 설풍습

설이 언제인가는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일상력이 기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1월 1일부터 일상력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음력으로 일컬어지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따라서 설날은 태음태양력에 의한 정월 초하루였다. 이는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나라 역시 오늘날에는 모두 그레고리력인 태양력을 일상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1872년에 태양력을 채용했으며 대만의 경우 손문(孫文)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건립 때인 1912년 태양력이 채택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1년, 동양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양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음력에 의한 설명절은 아직도 중요시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1월 1일부터 5일을 춘절(春節)이라 하여 명절로 보낸다. 설음식으로는 만두를 먹는데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빚어 먹으며 명절을 즐긴다. 또 우리처럼 제사를 지내고 신년인사를 하며 폭죽놀이 등을 즐기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설날과 추석 무렵이면 대대적인 민족대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음력의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사용, 양력 1월 1일은 국민의 축일(祝日)이라는 이름으로 명절화되었다. 1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신사참배를 하는데 이를 초예(初詣, 하츠모데, 정월의 첫 참배라는 뜻)라고 한다. 그리고 정초 약 3일간은 친구, 직장인들 사이에서 신년 인사를 다니기도 한다. 상인들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고 문송(門松, 가도마츠, 새해 문 앞에 세우는 장식 소나무)을 비롯한 각종 신년 장식물이 차려진다. 2일에는 황거일반참하(皇居一般參賀, 고쿄잇파상가)라 해서 궁성이 공개되고 천황이 발코니에 나와서 인사를 받는다. 이 밖에 동양적 색채와 유럽적 색채가 동시에 존재하는 러시아에서는 새해가 되면 ‘윗가(vodka, 보드카)’라는 술을 마시면서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한다.

프랑스에서는 지금의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전에는 세수가 4월 1일이었다. 1567년 국왕 샤를르 9세 때 세수를 1월 1일로 옮겨 오늘날에 이르렀다. 설날에는 에트렌느(Etrenne, 길조의 선물)라는 선물을 교환하며 덕담을 나눈다.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요구한다. 덕담은 “좋은 한 해를”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며 친척이나 이웃에게 덕담을 하러 가는 어린 소녀들은 “제가 아무라 작아도 다리 밑으로 지나왔어요. 서리가 내리고 추워도 새해 인사드리러 왔어요. 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서 주세요.”라고 한다. 오랜 농경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지역마다 다양한 설 풍속이 있는데 마자르그에서는 설날 새벽에 날씨가 맑으면 과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알프스 저지대에서는 주부들이 설날 아침 일찍 샘물을 길어온다. 맨 먼저 샘에 도착한 주부는 빵이나 치즈 같은 자기가 맨 먼저 만든 것을 우물가에 갖다 놓는다. 그 다음에 온 여자는 이 헌물을 자기 집으로 가져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것을 갖다 놓는다. 우리나라의 대보름 풍속인 용알뜨기와 매우 유사하다. 시푸르 지역에서는 젊은 부부가 조부모에게 세배를 하러 간다. 리얘스 지역에서는 대소가의 친척들을 나이 순서에 따라 방문하고 서로 껴안고 덕담을 나눈다. 아이들에게는 형편에 따라 1프랑이나 2프랑 또는 5프랑짜리 동전을 세뱃돈으로 준다.

인도에서는 설날에 온 가족이 마당에 모여 냄비에 우유와 쌀을 넣고 죽을 끓인다. 죽을 끓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데, 죽이 잘 끓지 않거나 냄비가 깨지면 불행이 닥친다고 한다. 죽이 잘 끓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데 이 죽을 무화과잎에 싸서 친지들에게 선물한다.

베트남에서는 설날 전에 수박을 준비했다가 설날에 손님들이 모이면 수박의 가운데를 가른다. 가른 수박 가운데 빨갛게 익은 정도를 보고 한 해의 길흉을 점친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였을 때 녹두와 돼지고기를 넣은 찹쌀떡인 ‘바인 쯩’을 바나나잎에 싸두었다가 손님들한테 대접한다.

우리나라에서 음력 설날을 명절로 맞이하듯이 이스라엘은 유대달력에 따라 양력 9월에 설날을 맞는다. ‘로쉬 하사나’로 불리는 설날에 서로 덕담을 하면서 꿀에 담근 사과나 대추를 먹는다. 헝가리에서는 설날 점심 때 콩을 넣은 음식을 먹으면서 부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멕시코에서는 1월 1일이 되는 시점인 자정에 시계탑 종이 열두 번 울리는 것에 맞추어 포도알 열두 개를 먹으며 새해 12개월 동안의 소원을 빈다.

이란에서는 시르(마늘)·세르케(식초)·십(사과) 등 이란어로 ‘시’로 시작하는 7가지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든다. 이 음식은 풍요와 건강·행복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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