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제(先蠶祭)

선잠제

한자명

先蠶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정의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던 서릉씨(西陵氏)를 치제(致祭)하고, 제사 후에 왕비가 채상(採桑)의 모범을 보이는 국가의례. 제사의 시기는 계춘(季春: 음력 3월)의 길사(吉巳: 길한 사일)이다. 선잠제는 왕이 선농단에서 제사한 후 적전(籍田)에서 농사지어 제수(祭需)를 마련하면, 왕비가 선잠단(先蠶壇)에서 제사한 후 북교(北郊)에서 누에를 쳐 제복(祭服)을 만든다는 이념 아래 설정되었다.

유래

선잠제와 관련된 채상의 기록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여, 그 기원이 중국의 주대(周代) 이전임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선잠제가 유교적인 국가 제사로 제도화된 것은 한대(漢代)이며, 당대(唐代) 이후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규정되었다.선잠제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대에는 선잠제의 기록이 없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 권62 「예지(禮志)」4 길례중사(吉禮中祀) 선잠조(先蠶條)에 그 제향 절차가 수록되었지만, 연대기 기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위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선잠단의 크기는 사방 2장, 높이 5척이고, 폐백은 흑색(黑色)이며, 희생은 돼지 한 마리이다. 헌관은 정3품인 태상경(太常卿) 이하가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선잠제와 관련된 왕후의 채상과 잠실(蠶室)의 기록이 없어 당시 왕비의 친잠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선잠제의 내용은 조선시대에 더 강화되었다. 태종대 중반까지는 고려의 체제를 바탕으로 했지만, 같은 왕 후반기에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 양유(兩壝)로 제단이 마련되었고, 헌관(獻官)은 정1품관으로, 희생은 양, 돼지 각 한 마리로 바꾸어 제의(祭儀)의 내용을 새롭게 하였다. 이 규정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다.

조선에서는 고려와 달리 채상단(採桑壇)에서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다. 친잠례는 성종 8년(1477) 3월 임오일에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채상단에 나가 행한 것이 최초였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잠의(親蠶儀)가 완성되었고, 후원(後苑)에 사방 3장, 높이 5척 4촌의 채상단과 잠실이 설치되었다. 아울러 선잠단은 북교(北郊)에, 채상단은 후원에 있어 왕비의 친제가 어렵다 하여 제사는 관리가, 왕비는 친잠(親蠶)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이후 이에 근거하여 친잠례가 시행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모두 8차례의 사례가 보인다.

내용

선잠제는 북교의 선잠단에서 정1품의 초헌관이 주관하는 제사와 후원의 채상단에서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의 2단계로 구성되는데, 『국조오례의』에서는 앞엣것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선잠제는 5일간의 재계(齋戒)와 2일간의 제수 진설(陳設), 전날의 희생 검사와 향축(香祝) 전달 같은 준비 단계를 거쳐 제사 당일 헌관이 제단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의식은 전폐(奠幣)와 작헌(酌獻), 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전폐는 서릉씨에게 초헌관이 향을 세 번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절을 하는 과정이다. 작헌에서는 초헌관이 먼저 서릉씨에게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축문을 읽고 절을 하는 초헌례가 진행되고, 이어 아헌례와 종헌례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축문은 읽지 않는다. 헌례가 끝나면 음복(飮福), 수조(受胙)를 하고 제기를 거둔다. 이후 제수를 구덩이에 파묻고 헌관 이하가 퇴장한다.

이렇게 제사가 끝나면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궁을 나와 후원의 채상단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이때 왕비는 채상단에서 뽕잎 5가지를 따고, 이후 내외명부 1품은 7가지, 내외명부 2품과 3품은 9가지를 차례대로 딴다. 채상을 마치면 왕비는 궁으로 돌아가고, 내외명부가 잠실에서 뽕잎을 누에에게 뿌리면 의식이 마무리된다.

의의

고대 이래 의식(衣食)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자 사회 유지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권농상(勸農桑)은 일찍부터 전근대 국가의 농업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의복의 원료이자 화폐로 사용되던 직물의 생산 확대를 통해 재정의 확보와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자 정책적으로 양잠을 권장하였고, 민간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업으로 양잠을 주목했다. 이러한 현실적 농정(農政)과 연결된 선잠제는 고려 때 국가의 사전(祀典)에 등재되었지만, 현재 제사 의식만 기록에 남아 있을 뿐 친잠례의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국왕의 친경(親耕)과 더불어 왕비의 육잠(育蠶)도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관원들이 대행하는 선잠제와는 별도로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가 채상단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국왕 이하 남성들이 주관했지만, 선잠제는 유일하게 여성이 주체가 되었던 의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五禮儀, 朝鮮王朝實錄, 春官通考, 韓國中世禮思想硏究 (李範稷, 一潮閣, 1991), 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 (金海榮,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朝鮮初期 中祀祭禮의 정비와 그 운영 (韓亨周, 震檀學報89, 震檀學會, 2000),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 朝鮮前期 養蠶業硏究 (南美惠,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高麗前期 重農理念과 農耕儀禮 (韓政洙,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선잠제

선잠제
한자명

先蠶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의례

집필자 한형주(韓亨周)

정의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던 서릉씨(西陵氏)를 치제(致祭)하고, 제사 후에 왕비가 채상(採桑)의 모범을 보이는 국가의례. 제사의 시기는 계춘(季春: 음력 3월)의 길사(吉巳: 길한 사일)이다. 선잠제는 왕이 선농단에서 제사한 후 적전(籍田)에서 농사지어 제수(祭需)를 마련하면, 왕비가 선잠단(先蠶壇)에서 제사한 후 북교(北郊)에서 누에를 쳐 제복(祭服)을 만든다는 이념 아래 설정되었다.

유래

선잠제와 관련된 채상의 기록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여, 그 기원이 중국의 주대(周代) 이전임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선잠제가 유교적인 국가 제사로 제도화된 것은 한대(漢代)이며, 당대(唐代) 이후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규정되었다.선잠제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대에는 선잠제의 기록이 없고,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 권62 「예지(禮志)」4 길례중사(吉禮中祀) 선잠조(先蠶條)에 그 제향 절차가 수록되었지만, 연대기 기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위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선잠단의 크기는 사방 2장, 높이 5척이고, 폐백은 흑색(黑色)이며, 희생은 돼지 한 마리이다. 헌관은 정3품인 태상경(太常卿) 이하가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선잠제와 관련된 왕후의 채상과 잠실(蠶室)의 기록이 없어 당시 왕비의 친잠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선잠제의 내용은 조선시대에 더 강화되었다. 태종대 중반까지는 고려의 체제를 바탕으로 했지만, 같은 왕 후반기에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 양유(兩壝)로 제단이 마련되었고, 헌관(獻官)은 정1품관으로, 희생은 양, 돼지 각 한 마리로 바꾸어 제의(祭儀)의 내용을 새롭게 하였다. 이 규정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다.

조선에서는 고려와 달리 채상단(採桑壇)에서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다. 친잠례는 성종 8년(1477) 3월 임오일에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채상단에 나가 행한 것이 최초였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잠의(親蠶儀)가 완성되었고, 후원(後苑)에 사방 3장, 높이 5척 4촌의 채상단과 잠실이 설치되었다. 아울러 선잠단은 북교(北郊)에, 채상단은 후원에 있어 왕비의 친제가 어렵다 하여 제사는 관리가, 왕비는 친잠(親蠶)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이후 이에 근거하여 친잠례가 시행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모두 8차례의 사례가 보인다.

내용

선잠제는 북교의 선잠단에서 정1품의 초헌관이 주관하는 제사와 후원의 채상단에서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의 2단계로 구성되는데, 『국조오례의』에서는 앞엣것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선잠제는 5일간의 재계(齋戒)와 2일간의 제수 진설(陳設), 전날의 희생 검사와 향축(香祝) 전달 같은 준비 단계를 거쳐 제사 당일 헌관이 제단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의식은 전폐(奠幣)와 작헌(酌獻), 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전폐는 서릉씨에게 초헌관이 향을 세 번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절을 하는 과정이다. 작헌에서는 초헌관이 먼저 서릉씨에게 술잔을 올리고 엎드린 후 축문을 읽고 절을 하는 초헌례가 진행되고, 이어 아헌례와 종헌례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축문은 읽지 않는다. 헌례가 끝나면 음복(飮福), 수조(受胙)를 하고 제기를 거둔다. 이후 제수를 구덩이에 파묻고 헌관 이하가 퇴장한다.

이렇게 제사가 끝나면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궁을 나와 후원의 채상단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이때 왕비는 채상단에서 뽕잎 5가지를 따고, 이후 내외명부 1품은 7가지, 내외명부 2품과 3품은 9가지를 차례대로 딴다. 채상을 마치면 왕비는 궁으로 돌아가고, 내외명부가 잠실에서 뽕잎을 누에에게 뿌리면 의식이 마무리된다.

의의

고대 이래 의식(衣食)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자 사회 유지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권농상(勸農桑)은 일찍부터 전근대 국가의 농업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의복의 원료이자 화폐로 사용되던 직물의 생산 확대를 통해 재정의 확보와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자 정책적으로 양잠을 권장하였고, 민간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업으로 양잠을 주목했다. 이러한 현실적 농정(農政)과 연결된 선잠제는 고려 때 국가의 사전(祀典)에 등재되었지만, 현재 제사 의식만 기록에 남아 있을 뿐 친잠례의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국왕의 친경(親耕)과 더불어 왕비의 육잠(育蠶)도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관원들이 대행하는 선잠제와는 별도로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가 채상단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국왕 이하 남성들이 주관했지만, 선잠제는 유일하게 여성이 주체가 되었던 의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五禮儀, 朝鮮王朝實錄, 春官通考
韓國中世禮思想硏究 (李範稷, 一潮閣, 1991)
朝鮮初期 祀典에 관한 硏究 (金海榮,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朝鮮初期 中祀祭禮의 정비와 그 운영 (韓亨周, 震檀學報89, 震檀學會, 2000)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韓亨周, 一潮閣, 2002)
朝鮮前期 養蠶業硏究 (南美惠,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高麗前期 重農理念과 農耕儀禮 (韓政洙,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