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관자례(字冠者禮)

자관자례

한자명

字冠者禮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관례|계례

집필자 박홍갑(朴洪甲)

정의

관례冠禮를 행할 때에 관자冠者의 자字를 지어주던 의식.

역사

성리학 도입과 함께 널리 보급된 관례의 시행 단계에서 행하는 자관자례字冠者禮 역시 조선 중기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부터 관례의 기록은 나타난다. 즉,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예종・의종대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禮書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단발령으로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사라지게 되었고, 다만 여자들의 계례笄禮만 구식 혼례식에 흡수되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시가례재가례再加禮・삼가례三加禮 등 삼가三加를 하나로 합하고, 축사祝辭 또한 한 번으로 그치게 하는 등 간소화를 추구하였지만, 정약용丁若鏞은 고례에 따라 이 셋을 분리하여 예를 행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자관자례는 성인으로서의 혹은 인격체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마지막 단계이기에 생략할 수 없었던 의식이었다.

내용

관례를 행할 때 삼가례와 초醮(술 한 잔을 내리는 의식)를 마친 후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행하는 의식이 자관자례이다. 빈賓은 층계를 내려와 동향(대청 서쪽에 해당함)하고, 주인은 층계를 내려와 서향한다. 관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조금 동쪽으로 가서 남향한다 . 빈이 자字를 지어주는데, “백○○○보伯某父(보父는 보甫이니, 남자의 미칭美稱이다)”라고 한다(둘째면 중仲, 셋째면 숙叔, 막내면 계季). 관자는 대답하기를 “○○○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감히 밤낮으로 공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 관자가 절할 때 빈은 답배하지 않는다. 관자에게 자를 지어주는 축사식祝辭式(축하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빈이 혹 따로 글을 써서 자字를 지어주는 뜻을 일러주는 것도 좋다. 예의禮儀를 갖추어 좋은 달 길한 날에 너의 자字를 밝게 고하노라. 이 자字는 매우 좋아 모사髦士(뛰어난 선비)에게 마땅하고 크게 어울리니 길이 간직하여라.”

계례를 행할 경우에도 자관자례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족두리비녀를 꽂아주고 난 후 이어서 술 한 잔을 내리는 초醮 의식이 끝나면, 바로 자관자례를 진행한다. 빈과 주인이 함께 층계를 내려가는데, 주인은 동쪽으로 빈은 서쪽으로 내려간다. 계자笄者가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조금 동쪽으로 남향해 서면, 빈은 축사祝辭하고 ‘○○’라고 자字를 말하면 계자는 네 번 절하고 빈은 답배하지 않는다. 이때의 축사식은 남자의 자관자례 축사식과 동일하나, 다만 ‘모사髦士(뛰어난 선비)’ 대신에 ‘여사女士’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생략한 경우가 많았다.

특징 및 의의

술로써 예를 행하는 정화의례淨化儀禮가 끝나면 시행하는 것이 자관자례이다. 이 의절은 관례자에게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주어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의례이다. 예로부터 이름은 그 사람에 어울리고, 자字는 그 이름에 어울리기를 바랐다. 성인이 되는 시점에 새로운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기성사회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통합의례가 된다는 점에 자관자례의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四禮便覽, 與猶堂全書, 朱子家禮, 관혼상제(이민수, 을유문화사, 1975), 조선시대 관혼상제-1(문옥표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조선의 관혼상제(사회과학원, 중심, 2002), 한국민속대관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전통사회의 관혼상제(장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자관자례

자관자례
한자명

字冠者禮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관례|계례

집필자 박홍갑(朴洪甲)

정의

관례冠禮를 행할 때에 관자冠者의 자字를 지어주던 의식.

역사

성리학 도입과 함께 널리 보급된 관례의 시행 단계에서 행하는 자관자례字冠者禮 역시 조선 중기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고려시대부터 관례의 기록은 나타난다. 즉,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예종・의종대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禮書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단발령으로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사라지게 되었고, 다만 여자들의 계례笄禮만 구식 혼례식에 흡수되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시가례・재가례再加禮・삼가례三加禮 등 삼가三加를 하나로 합하고, 축사祝辭 또한 한 번으로 그치게 하는 등 간소화를 추구하였지만, 정약용丁若鏞은 고례에 따라 이 셋을 분리하여 예를 행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자관자례는 성인으로서의 혹은 인격체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마지막 단계이기에 생략할 수 없었던 의식이었다.

내용

관례를 행할 때 삼가례와 초醮(술 한 잔을 내리는 의식)를 마친 후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행하는 의식이 자관자례이다. 빈賓은 층계를 내려와 동향(대청 서쪽에 해당함)하고, 주인은 층계를 내려와 서향한다. 관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조금 동쪽으로 가서 남향한다 . 빈이 자字를 지어주는데, “백○○○보伯某父(보父는 보甫이니, 남자의 미칭美稱이다)”라고 한다(둘째면 중仲, 셋째면 숙叔, 막내면 계季). 관자는 대답하기를 “○○○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감히 밤낮으로 공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 관자가 절할 때 빈은 답배하지 않는다. 관자에게 자를 지어주는 축사식祝辭式(축하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빈이 혹 따로 글을 써서 자字를 지어주는 뜻을 일러주는 것도 좋다. 예의禮儀를 갖추어 좋은 달 길한 날에 너의 자字를 밝게 고하노라. 이 자字는 매우 좋아 모사髦士(뛰어난 선비)에게 마땅하고 크게 어울리니 길이 간직하여라.”

계례를 행할 경우에도 자관자례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족두리와 비녀를 꽂아주고 난 후 이어서 술 한 잔을 내리는 초醮 의식이 끝나면, 바로 자관자례를 진행한다. 빈과 주인이 함께 층계를 내려가는데, 주인은 동쪽으로 빈은 서쪽으로 내려간다. 계자笄者가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조금 동쪽으로 남향해 서면, 빈은 축사祝辭하고 ‘○○’라고 자字를 말하면 계자는 네 번 절하고 빈은 답배하지 않는다. 이때의 축사식은 남자의 자관자례 축사식과 동일하나, 다만 ‘모사髦士(뛰어난 선비)’ 대신에 ‘여사女士’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생략한 경우가 많았다.

특징 및 의의

술로써 예를 행하는 정화의례淨化儀禮가 끝나면 시행하는 것이 자관자례이다. 이 의절은 관례자에게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주어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의례이다. 예로부터 이름은 그 사람에 어울리고, 자字는 그 이름에 어울리기를 바랐다. 성인이 되는 시점에 새로운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기성사회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통합의례가 된다는 점에 자관자례의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四禮便覽, 與猶堂全書, 朱子家禮, 관혼상제(이민수, 을유문화사, 1975), 조선시대 관혼상제-1(문옥표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조선의 관혼상제(사회과학원, 중심, 2002), 한국민속대관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전통사회의 관혼상제(장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