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부적(端午符籍)

단오부적

한자명

端午符籍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5월 > 정일

집필자 김종대(金宗大)

정의

단오를 맞아 그해의 액을 쫓기 위해서 쓰는 부적. 단오부(端午符), 천중부적(天中符籍), 치우부적(蚩尤符籍)이라고도 한다.

내용

단오는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이날 부적을 쓰면 잡귀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집안의 재액도 모두 소멸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단오에는 그해 불길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주부가 절에서 부적을 받아와 집안의 방문 위나 부엌 벽에 붙였다. 또한 단오에 내의원에서 제호탕(醍醐湯)과 옥추단(玉樞丹)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나, 창포의 뿌리로 만든 창포비녀도 단오의 양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주술행위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21년 기록을 보면, 태종이 단오부적을 보고 글귀의 내용이 모두 다른 이유를 물었는데, 이때 답변을 한 사람은 경사(經師)로 있는 승려였다. 하지만 이 승려는 자신의 스승이 전수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은 경사를 없애고 서운관(書雲觀)에서 관장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당시 단오부적의 제작을 천문관측 및 역서와 절기를 담당하던 서운관에서 담당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명칭이 바뀌고 단오부적을 담당하는 기구가 된다. 따라서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까지 부적의 제작 배포를 승려가 전담했지만, 점차 승려를 배제하고 관리가 전담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찍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궐 안의 문설주에 붙였다고 한다. 또한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이것을 붙인다는 기록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그 풍속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단오 풍속이 한나라 때 “도인(桃印), 곧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으로 사악한 기운을 멈춘다.”라는 기록과 『포박자(抱朴子)』에 “적령부(赤靈符)를 만든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부터 단오풍속과 부적 붙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처용의 얼굴을 그린 부적이나 비형랑과 관련한 부적이 사용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이와 유사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이것과 함께 또 한 장의 부적을 찍는데, 그 내용이 매우 길다. 내용은 12신을 불러 잡귀를 쫓는 것으로 만일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이들의 양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甲作食凶 胇胃食虎 雄伯食魅 騰簡食不祥 攬諸食咎 伯奇食夢 强梁祖明共食磔死 寄生 委隨食觀 錯斷食巨 窮奇騰根共食蟲 凡使十二神 追惡凶 嚇汝軀 拉汝幹節 解汝肌肉 抽汝肺腸 汝不急去 後者爲糧.” 이것은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에서 나례(儺禮)를 행하여 역질을 쫓아낼 때 사용한 글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東國歲時記, 太宗實錄, 抱朴子, 後漢書, 한국민속대사전 (한국민속사전 편찬위원회, 민족문화사, 1991), 부산지방의 세시풍속 (김승찬, 세종출판사, 1999)

단오부적

단오부적
한자명

端午符籍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夏) > 5월 > 정일

집필자 김종대(金宗大)

정의

단오를 맞아 그해의 액을 쫓기 위해서 쓰는 부적. 단오부(端午符), 천중부적(天中符籍), 치우부적(蚩尤符籍)이라고도 한다.

내용

단오는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이날 부적을 쓰면 잡귀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집안의 재액도 모두 소멸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단오에는 그해 불길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주부가 절에서 부적을 받아와 집안의 방문 위나 부엌 벽에 붙였다. 또한 단오에 내의원에서 제호탕(醍醐湯)과 옥추단(玉樞丹)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나, 창포의 뿌리로 만든 창포비녀도 단오의 양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주술행위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21년 기록을 보면, 태종이 단오부적을 보고 글귀의 내용이 모두 다른 이유를 물었는데, 이때 답변을 한 사람은 경사(經師)로 있는 승려였다. 하지만 이 승려는 자신의 스승이 전수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은 경사를 없애고 서운관(書雲觀)에서 관장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당시 단오부적의 제작을 천문관측 및 역서와 절기를 담당하던 서운관에서 담당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명칭이 바뀌고 단오부적을 담당하는 기구가 된다. 따라서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까지 부적의 제작 배포를 승려가 전담했지만, 점차 승려를 배제하고 관리가 전담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에서 주사(朱砂)로 벽사문을 찍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궐 안의 문설주에 붙였다고 한다. 또한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이것을 붙인다는 기록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그 풍속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단오 풍속이 한나라 때 “도인(桃印), 곧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장으로 사악한 기운을 멈춘다.”라는 기록과 『포박자(抱朴子)』에 “적령부(赤靈符)를 만든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부터 단오풍속과 부적 붙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처용의 얼굴을 그린 부적이나 비형랑과 관련한 부적이 사용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이와 유사한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이것과 함께 또 한 장의 부적을 찍는데, 그 내용이 매우 길다. 내용은 12신을 불러 잡귀를 쫓는 것으로 만일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이들의 양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甲作食凶 胇胃食虎 雄伯食魅 騰簡食不祥 攬諸食咎 伯奇食夢 强梁祖明共食磔死 寄生 委隨食觀 錯斷食巨 窮奇騰根共食蟲 凡使十二神 追惡凶 嚇汝軀 拉汝幹節 解汝肌肉 抽汝肺腸 汝不急去 後者爲糧.” 이것은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에서 나례(儺禮)를 행하여 역질을 쫓아낼 때 사용한 글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東國歲時記, 太宗實錄, 抱朴子, 後漢書
한국민속대사전 (한국민속사전 편찬위원회, 민족문화사, 1991)
부산지방의 세시풍속 (김승찬, 세종출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