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장군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

남이장군사당제

한자명

南怡將軍祠堂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0월 > 의례

집필자 김선풍(金善豊)

정의

조선 초기에 용맹을 떨치다가 반역 혐의로 처형당한 명장 남이장군(南怡將軍)을 기리는 제의. 남이장군신(南怡將軍神)은 중부 지역 무속에서 최영장군(崔瑩將軍),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과 함께 장군신(將軍神)으로 승화되었으며, 남이장군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는 현재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남이장군사당제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에서 음력 4월 1일, 7월 1일, 10월 1일에 걸쳐 연 3회의 제를 올리고 격년으로 4월 1일에 당굿을 행하였다. 원래는 4월 1일에 대제를 올리고 10월 1일에 소제를 올렸으나 1983년부터 복원되어 거행되면서 4월에 하던 당굿을 10월로 옮기는 대신 7월의 당굿은 폐지되었고 3년 마다 하던 당굿을 매년 시행하게 되었다.

남이장군사당제가 거행되는 사당과 제의 진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당 안에 있는 무화(巫畫)에 그려진 무속신은 최영장군신을 비롯하여 제단 상단 좌측 벽에 천신대감상(天神大監像)과 맹인내외상(盲人內外像)이 있으며, 두 점의 확인되지 않은 비슷한 화상(畵像)이 걸려 있다. 전면에는 좌측부터 삼불제석상(三佛帝釋像)과 호구아씨상[胡鬼-像]이 있으며, 서로 비슷한 두 점의 화상이 옆에 있다. 당 전면 중앙에는 남이장군상이 걸려 있으며, 우측에는 부군대감 내외의 화상, 최영장군상, 정추정씨와 그의 부인상이 걸려 있다. 그 우측 벽에는 산신령 내외와 토지관장(土地官長)의 화상이 있으며 그 사이에 각각 유사한 화상이 한 점씩 걸려 있다. 위의 화상 중에서 정추정씨의 상은 정숙정이란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제단의 하단에 있는 각종 화상들은 남이장군의 하졸들이다. 고려시대의 최영장군신이 배열에 끼여 있으나 상징적 존신(尊神)으로서의 위상일 뿐이다. 28점의 무속신은 하늘나라에서 사람들을 지켜 준다는 28수(宿)의 별 곧, 28신을 뜻한다.

제관 선정은 제일 15일 전에 마을의 연로(年老)한 분들이 모여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고 부정(不淨)이 없는 원로 2인을 제관으로 뽑는다. 한 사람은 제주(祭主)이고 한 사람은 집사(執事)이다. 제주는 헌관(獻官)으로 제수를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치제(致祭) 3일 전부터 시작하는데 제주가 당에다 신에게 바치는 제주(祭酒)인 조라를 모신다. 조라는 정결한 백미 서 되 서 홉을 쪄서 누룩을 버무려 담근다. 제물은 백반(白飯), 병(餠), 주(酒), 과(果), 포(脯), 채(菜), 탕(湯)으로 보통 제수와 같다. 준비는 집사가 하며 장에 가서 값을 깎지 않는다. 당굿에는 돼지를 잡아 통째로 바치며 굿상은 따로 마련한다. 당제 15일 전부터 부정한 일을 금기하다가 제를 지내는 당일 도가(都家)에서 제를 준비하여 밤 11시 무렵에 진설(陳設)한다. 진설은 남이장군신상 앞에 홍동백서(紅東白西), 동두서미(東頭西尾)로 하고 자정이 되면 메를 올리고 분향(焚香), 독축(讀祝), 소지(燒紙), 음복(飮福) 순으로 진행한다.

당굿은 제관 외에 화주(化主) 12명이 걸립을 하면서 시작된다. 걸립할 때에는 신당 처마 네 귀퉁이에 등롱(燈籠)을 내걸고 풍물을 울린 다음, 용기(龍旗)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고 선발된 동민들이 걸립에 참여한다. 등롱은 한 변이 25센티미터의 4각이며, 길이 100센티미터 가량의 청사등롱(靑紗燈籠)이다. 용기는 길이 5미터 정도의 죽간(竹竿) 꼭대기에 청룡과 황룡을 그린 기(100센티미터×150센티미터)로서 부군기(府君旗) 또는 부군대, 느림기라고도 한다. 걸립은 3~4일간 계속된다.

용기를 앞세우고 호적, 징, 꽹과리, 장구, 북, 소고로 구성된 걸립꾼들이 민가를 돌면 민가에서는 쌀을 대주의 식기에 담아 그 위에 실 한 타래를 감은 숟가락을 꽂고, 그 밑에 돈을 놓으며 소반 양 옆에 촛불을 켜서 내놓는다. 이때 걸립패상쇠나 중쇠가 그 앞에서 가정의 화목과 운수대통을 축원하고 마당에서는 호적, 징, 북, 장구, 소고를 울리며 용기는 집안까지 넣어 몇 차례 가로 뉘어 쓸어준다. 시장 또는 넓은 길에 들어서면 대잡이는 용기를 가로 뉘어 양 옆으로 휩쓸며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고,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은 걸립꾼의 뒤를 따르며 어깨춤을 추며 아이들도 뒤를 따라가면서 축제 분위기에 들뜬다. 걸립을 도는 범위는 용문시장을 비롯하여 용문동 일대 4백여 호이며, 만약 남이장군과 연고가 있는 주민이 청하면 다른 동이라도 걸립꾼이 간다. 걸립에서 모은 돈은 제수를 장만하는 데 사용된다.

당굿은 무당 6인과 잽이 3인(피리, 젓대, 해금)이 맡아서 한다. 당굿은 무당이 당 앞에서 주당살을 가리고 부정을 친 다음 유가(遊街)하는 순서로 시작된다. 주당살을 가리는 것을 주당가린다고 하는데, 무당이 당 앞에서 혼자 앉아 장구만 울리고 무당 외의 제관을 비롯한 동민들은 모두 당 밖으로 나가 시선이 당 쪽으로 가지 않게 등을 돌린다. 이것은 당 주위에 서려 있던 살기(殺氣)가 장구소리에 쫓겨나갈 때 동민들의 시선과 마주치면 마주친 사람에게 살이 간다고 하여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당이 무악 반주 없이 평상복을 입고 부정거리 무가를 구송한다. 유가는 등롱 2개를 앞세우고 그 뒤에는 장군기(폭 100센티미터, 길이 300센티미터의 남색천에 ‘남이장군사당’이라고 써서 5미터 가량의 죽간에 매단다.)가 서고 무당, 피리잡이, 젓대잡이 그리고 걸립꾼들이 풍물을 치고 따르며 뒤에 제관이 따른다. 유가도 걸립과 같이 하며 용기를 든 대잡이가 좌우로 나뉘어 휩쓸면서 부군놀림을 하며 춤을 춘다. 유가에서 용기의 느림대에 꽂고 간 지화 연꽃을 옆 동네 여신을 모신 부군당에 가서 그곳에 있는 연꽃과 교환해 오는데 이것을 꽃받기라고 한다. 이것은 옆 동네 부군당의 여신을 남이장군이 초청하는 과장이다.

유가를 돌고 당으로 들어오면 다른 무당이 홍철릭을 입고 큰 머리를 얹은 위에 홍갓을 쓰고 대기하다가 마중 나가 용기를 받아 당 앞으로 가면 남이장군신이 내려 한동안 도무(蹈舞)로 춤을 추다가 신탁을 내린다. 이때 무당은 용기의 느름대를 잡고 한 손을 옆구리에 얹어 장군의 위엄을 과시하고 화주들은 손을 비비며 마을이 편안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는 장군신을 맞아 놀리는 부군놀음과장이 된다.

이 과장이 끝나면 용기 느름대에 꽂고 온 연꽃을 남이장군신상 옆에다 세워놓고 굿을 시작한다.

굿의 순서는 가망청배- 부정거리- 호구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제석거리- 군웅거리- 황제풀이- 뒷전으로 이어진다.

굿이 끝나면 일반인이 무복을 입고 무감 곧 신춤을 추며 여흥을 즐긴다. 당굿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사례제(謝禮祭)를 지낸다. 이 제를 사례제청이라고도 한다. 사례제는 당굿을 할 때 신청에 부정한 잡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장군신에게 사과하는 의미라고 한다.

참고문헌

鄕土祝祭調査報告書 (金泰坤 外, 鄕土祝祭協議會), 韓國鄕土祝祭 (韓國鄕土史硏究全國協議會, 1990), 남이장군대제론 (김선풍, 比較民俗學13, 比較民俗學會, 1996)

남이장군사당제

남이장군사당제
한자명

南怡將軍祠堂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0월 > 의례

집필자 김선풍(金善豊)

정의

조선 초기에 용맹을 떨치다가 반역 혐의로 처형당한 명장 남이장군(南怡將軍)을 기리는 제의. 남이장군신(南怡將軍神)은 중부 지역 무속에서 최영장군(崔瑩將軍),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과 함께 장군신(將軍神)으로 승화되었으며, 남이장군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는 현재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남이장군사당제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에서 음력 4월 1일, 7월 1일, 10월 1일에 걸쳐 연 3회의 제를 올리고 격년으로 4월 1일에 당굿을 행하였다. 원래는 4월 1일에 대제를 올리고 10월 1일에 소제를 올렸으나 1983년부터 복원되어 거행되면서 4월에 하던 당굿을 10월로 옮기는 대신 7월의 당굿은 폐지되었고 3년 마다 하던 당굿을 매년 시행하게 되었다.

남이장군사당제가 거행되는 사당과 제의 진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당 안에 있는 무화(巫畫)에 그려진 무속신은 최영장군신을 비롯하여 제단 상단 좌측 벽에 천신대감상(天神大監像)과 맹인내외상(盲人內外像)이 있으며, 두 점의 확인되지 않은 비슷한 화상(畵像)이 걸려 있다. 전면에는 좌측부터 삼불제석상(三佛帝釋像)과 호구아씨상[胡鬼-像]이 있으며, 서로 비슷한 두 점의 화상이 옆에 있다. 당 전면 중앙에는 남이장군상이 걸려 있으며, 우측에는 부군대감 내외의 화상, 최영장군상, 정추정씨와 그의 부인상이 걸려 있다. 그 우측 벽에는 산신령 내외와 토지관장(土地官長)의 화상이 있으며 그 사이에 각각 유사한 화상이 한 점씩 걸려 있다. 위의 화상 중에서 정추정씨의 상은 정숙정이란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제단의 하단에 있는 각종 화상들은 남이장군의 하졸들이다. 고려시대의 최영장군신이 배열에 끼여 있으나 상징적 존신(尊神)으로서의 위상일 뿐이다. 28점의 무속신은 하늘나라에서 사람들을 지켜 준다는 28수(宿)의 별 곧, 28신을 뜻한다.

제관 선정은 제일 15일 전에 마을의 연로(年老)한 분들이 모여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고 부정(不淨)이 없는 원로 2인을 제관으로 뽑는다. 한 사람은 제주(祭主)이고 한 사람은 집사(執事)이다. 제주는 헌관(獻官)으로 제수를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치제(致祭) 3일 전부터 시작하는데 제주가 당에다 신에게 바치는 제주(祭酒)인 조라를 모신다. 조라는 정결한 백미 서 되 서 홉을 쪄서 누룩을 버무려 담근다. 제물은 백반(白飯), 병(餠), 주(酒), 과(果), 포(脯), 채(菜), 탕(湯)으로 보통 제수와 같다. 준비는 집사가 하며 장에 가서 값을 깎지 않는다. 당굿에는 돼지를 잡아 통째로 바치며 굿상은 따로 마련한다. 당제 15일 전부터 부정한 일을 금기하다가 제를 지내는 당일 도가(都家)에서 제를 준비하여 밤 11시 무렵에 진설(陳設)한다. 진설은 남이장군신상 앞에 홍동백서(紅東白西), 동두서미(東頭西尾)로 하고 자정이 되면 메를 올리고 분향(焚香), 독축(讀祝), 소지(燒紙), 음복(飮福) 순으로 진행한다.

당굿은 제관 외에 화주(化主) 12명이 걸립을 하면서 시작된다. 걸립할 때에는 신당 처마 네 귀퉁이에 등롱(燈籠)을 내걸고 풍물을 울린 다음, 용기(龍旗)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고 선발된 동민들이 걸립에 참여한다. 등롱은 한 변이 25센티미터의 4각이며, 길이 100센티미터 가량의 청사등롱(靑紗燈籠)이다. 용기는 길이 5미터 정도의 죽간(竹竿) 꼭대기에 청룡과 황룡을 그린 기(100센티미터×150센티미터)로서 부군기(府君旗) 또는 부군대, 느림기라고도 한다. 걸립은 3~4일간 계속된다.

용기를 앞세우고 호적, 징, 꽹과리, 장구, 북, 소고로 구성된 걸립꾼들이 민가를 돌면 민가에서는 쌀을 대주의 식기에 담아 그 위에 실 한 타래를 감은 숟가락을 꽂고, 그 밑에 돈을 놓으며 소반 양 옆에 촛불을 켜서 내놓는다. 이때 걸립패의 상쇠나 중쇠가 그 앞에서 가정의 화목과 운수대통을 축원하고 마당에서는 호적, 징, 북, 장구, 소고를 울리며 용기는 집안까지 넣어 몇 차례 가로 뉘어 쓸어준다. 시장 또는 넓은 길에 들어서면 대잡이는 용기를 가로 뉘어 양 옆으로 휩쓸며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고,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은 걸립꾼의 뒤를 따르며 어깨춤을 추며 아이들도 뒤를 따라가면서 축제 분위기에 들뜬다. 걸립을 도는 범위는 용문시장을 비롯하여 용문동 일대 4백여 호이며, 만약 남이장군과 연고가 있는 주민이 청하면 다른 동이라도 걸립꾼이 간다. 걸립에서 모은 돈은 제수를 장만하는 데 사용된다.

당굿은 무당 6인과 잽이 3인(피리, 젓대, 해금)이 맡아서 한다. 당굿은 무당이 당 앞에서 주당살을 가리고 부정을 친 다음 유가(遊街)하는 순서로 시작된다. 주당살을 가리는 것을 주당가린다고 하는데, 무당이 당 앞에서 혼자 앉아 장구만 울리고 무당 외의 제관을 비롯한 동민들은 모두 당 밖으로 나가 시선이 당 쪽으로 가지 않게 등을 돌린다. 이것은 당 주위에 서려 있던 살기(殺氣)가 장구소리에 쫓겨나갈 때 동민들의 시선과 마주치면 마주친 사람에게 살이 간다고 하여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당이 무악 반주 없이 평상복을 입고 부정거리 무가를 구송한다. 유가는 등롱 2개를 앞세우고 그 뒤에는 장군기(폭 100센티미터, 길이 300센티미터의 남색천에 ‘남이장군사당’이라고 써서 5미터 가량의 죽간에 매단다.)가 서고 무당, 피리잡이, 젓대잡이 그리고 걸립꾼들이 풍물을 치고 따르며 뒤에 제관이 따른다. 유가도 걸립과 같이 하며 용기를 든 대잡이가 좌우로 나뉘어 휩쓸면서 부군놀림을 하며 춤을 춘다. 유가에서 용기의 느림대에 꽂고 간 지화 연꽃을 옆 동네 여신을 모신 부군당에 가서 그곳에 있는 연꽃과 교환해 오는데 이것을 꽃받기라고 한다. 이것은 옆 동네 부군당의 여신을 남이장군이 초청하는 과장이다.

유가를 돌고 당으로 들어오면 다른 무당이 홍철릭을 입고 큰 머리를 얹은 위에 홍갓을 쓰고 대기하다가 마중 나가 용기를 받아 당 앞으로 가면 남이장군신이 내려 한동안 도무(蹈舞)로 춤을 추다가 신탁을 내린다. 이때 무당은 용기의 느름대를 잡고 한 손을 옆구리에 얹어 장군의 위엄을 과시하고 화주들은 손을 비비며 마을이 편안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는 장군신을 맞아 놀리는 부군놀음과장이 된다.

이 과장이 끝나면 용기 느름대에 꽂고 온 연꽃을 남이장군신상 옆에다 세워놓고 굿을 시작한다.

굿의 순서는 가망청배- 부정거리- 호구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제석거리- 군웅거리- 황제풀이- 뒷전으로 이어진다.

굿이 끝나면 일반인이 무복을 입고 무감 곧 신춤을 추며 여흥을 즐긴다. 당굿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사례제(謝禮祭)를 지낸다. 이 제를 사례제청이라고도 한다. 사례제는 당굿을 할 때 신청에 부정한 잡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장군신에게 사과하는 의미라고 한다.

참고문헌

鄕土祝祭調査報告書 (金泰坤 外, 鄕土祝祭協議會)
韓國鄕土祝祭 (韓國鄕土史硏究全國協議會, 1990)
남이장군대제론 (김선풍, 比較民俗學13, 比較民俗學會,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