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놀이(男寺黨-)

남사당놀이

한자명

男寺黨-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9월 > 놀이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정의

사당패(男寺黨牌)가 주로 봄과 가을에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던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놀음)로 구성된 놀이. 이 중에서 꼭두각시놀음이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에 남사당놀이 전체가 지정되었다.

유래

조선 태종 6년 불교의 사사혁파정책(寺社革罷政策)으로 사원이 혁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전(寺田)이 삭감되었고 승려의 환속이 있었으며, 사사노비(寺社奴婢)가 관아의 노비로 넘어갔고 도첩제(度牒制)가 강화되었다. 그래서 본래 재를 올리는 일과 다비를 치르는 데 뽑혀 다녔고, 범패, 염불, 법고, 바라 같은 가무희에 뛰어난 명수들이었던 재승(才僧)들은 그들끼리 어울려 살게 되었는데, 사설사암은 이런 재승들의 활동 장소였다. 그러다가 같은 소질과 재주를 가지고 그늘에서 사는 신세인 무당, 재인,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조선 전기에 연희 담당층의 하나로 성립되었으니 그것이 사장(社長)이다. 다음 기록들을 통해서 사장으로부터 조선 후기의 유랑 예인 집단인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사장에서 파생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세조실록(世宗實錄)』 14년(1468) 5월 6일조에 승인(僧人)의 사장이 원각사(圓覺寺)의 불유(佛油)를 모연한다고 일컫고 혹은 낙산사(洛山寺)를 짓는 화주승(化主僧)이라고 일컬으며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일정한 절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희를 하고 다닌 것과 일치하고 있다. 『예종실록(睿宗實錄)』 1년(1469) 5월 9일조는 재승 계통 연희자뿐만 아니라 향리, 군인, 공사(公私) 노비들도 사장의 무리에 참여했음을 전해 준다. 원래 조선 초기에 도첩제를 만들어 백성들이 마음대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했으나, 승복을 입고 승려로 가장하여 국역(國役)을 피하는 유민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2년(1471) 6월 8일조 한치형(韓致亨)의 상소문은 사장이 징과 북을 울리고 염불을 일삼고 범패를 하며 기이한 형태와 괴이한 형상으로 춤추고 뛰어노는데, 시중의 아이나 부녀들이 이들의 연희를 쳐다보며 흠모하고 귀로 듣고 익혔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사장패의 연희가 민간에서 매우 인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40년(1607) 5월 4일조는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 이후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이 무리를 이루어 떠돌아다녔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사당이나 거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전해 준다.

사당패의 공연 종목은 사당벅구(법고)춤, 소리판(주로 산타령 등 민요창), 줄타기(재담줄이라 해서 곡예보다는 재담과 노래가 우세하다)의 세 가지였다. 사당패에는 맨 위에 모갑(某甲)이라는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라는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추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모갑이라 불리는 우두머리 남자가 이끄는 조직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에 붙어먹는 기생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사당들의 가무희였는데 사당들은 매음도 했다. 신재효본 ‘박타령’, ‘변강쇠가’나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의하면 사당패는 주로 사당들의 가무희 곧 소리판만 공연하고 다닌 것으로 나타난다.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여장(女裝)한 남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남사당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는 수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 조직을 이루었는데, 암동모는 초입자인 삐리들이 감당했고, 삐리는 연희자인 가열이 되기까지 머리를 땋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여장을 했다.

내용 및 특성

사당놀이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에 의해 전승되며, 남사당패의 연희는 악기 연주인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 요술인 얼른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승되지 않는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풍물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농악인 웃다리 가락을 위주로 연주한다. 진풀이, 열두 발 상모돌리기, 무동 등 다양한 풍물놀이를 펼친다. 버나는 버나잡이(돌리는 사람)가 앵두나무막대기로 대접, 쳇바퀴, 대야 등을 돌리면서 매호씨(버나잡이의 재담 상대역)와 재담과 소리를 주고받는 연희이다. 살판은 땅재주로 살판쇠(땅재주꾼)가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으면서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자반뒤지기, 팔걸음, 외팔걸음, 외팔곤두, 앉은뱅이팔걸음, 쑤세미트리, 앉은뱅이모말되기, 숭어뜀, 살판 같은 기교를 부린다. 어름은 줄타기로서 어름산이(줄꾼)가 앉아서 장구를 쳐주는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으면서 꽹과리, 징, 북, 장구, 날라리의 반주에 맞춰 가새트림(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앞으로 가다가 두 발을 뛰어서 돌아앉기)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예를 행한다. 그리고 중의 모습을 흉내 내다가 신세 한탄을 하며 파계하는 모습을 희화적으로 표현하는 중놀이와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익살스럽게 흉내 내는 왈자놀이를 하면서, ‘중타령’, ‘오봉산 타령’, ‘풍년가’, ‘돈타령’ 등의 노래를 부른다.

가면극인 덧뵈기는 ‘덧(곱)본다’는 뜻으로 가면을 나타낸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우세한 풍자극으로 제1과장 마당씻이, 제2과장 옴탈잡이, 제3과장 샌님잡이, 제4과장 먹중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가면극에 반드시 나오는 벽사적인 의식무는 마당씻이의 고사문(告祀文)인 비나리로 대체되어 있다.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는 각각 양주별산대놀이의 옴중·먹중놀이, 샌님놀이, 노장춤과 같은 내용이다. 등장인물과 내용에서 양주별산대놀이와 유사한 것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서울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생긴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의 대표적인 연희는 꼭두각시놀음인데, 박첨지마당과 평안감사마당으로 나뉜다. 박첨지마당의 ‘박첨지유람거리’에서는 박첨지가 등장해 악사산받이와 대화를 나눈다. 이어서 익살스런 재담을 늘어놓고 ‘유람가(遊覽歌)’를 부른다. ‘피조리거리’에서는 두 명의 피조리 곧 박첨지의 딸과 며느리가 뒷산에 나물을 뜯으러 다니다가 상좌중들과 놀아난다. 이때 홍동지가 벌거벗고 등장해 모두 쫓아버린다. ‘꼭두각시거리’에서는 박첨지와 그의 처인 꼭두각시가 서로 찾아다니다가 만난다. 영감이 첩을 얻었음을 실토하고 꼭두각시에게 돌머리집을 상면시키면, 첩이 머리로 꼭두각시를 마구 들이받는다. 꼭두각시는 중이 되겠다며 금강산으로 떠나간다. ‘이시미거리’에서는 박첨지의 손자, 피조리, 박첨지의 동생, 꼭두각시, 홍백가, 영노, 표생원, 동방삭 같은 등장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산받이에 의해 정체가 확인된 후, 이시미에게 잡혀먹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박첨지도 이시미에게 물리면 홍동지가 나와 박첨지의 경솔함을 꾸짖으며 구출하고 이시미를 때려잡는다.

평안감사마당의 ‘매사냥거리’에서 홍동지는 평안감사의 부임, 평양감사의 매사냥, 평양감사의 장례 장면에서 길을 닦는 인부, 사냥몰이꾼, 상두꾼의 역할을 함으로써, 양반의 횡포에 시달리던 민중의 모습을 대변한다. ‘상여거리’에서는 박첨지가 등장해 평안감사가 매사냥에서 돌아가던 중 산고개에서 낮잠을 자다가 개미에게 불알 땡금줄을 물려 즉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감사의 아들인 상주는 ‘장타령’을 부르기도 하며 경박한 행동을 한다. 상두꾼으로 뽑힌 홍동지는 벌거벗은 채 배(또는 성기)로 상여를 밀고 간다. ‘건사거리(절 짓고 허는 거리)’에서는 상좌중 둘이 나와 절에다 시주하면 자식을 많이 낳고 부귀공명을 누리게 된다고 하면서 법당을 짓는다. 조립식의 법당이 다 완성되면 다시 그것을 헐어낸다.

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혹은 아미타(阿彌陀)를 생각하여 떼어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공연 목적과 일치한다. 그리고 꼭두각시놀이의 각 거리가 독립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맨 마지막 거리에서 절을 지어 그동안 진행되어온 갈등을 극적으로 승화시키며 화해를 이루고, 시주를 해준 관중들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 주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꼭두각시놀이는 몇 개의 과장(거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은 가면극과 마찬가지로 서로 유기적인 연결성이 없는 독립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박첨지가 여러 과장에 걸쳐 계속 등장하며 극의 해설자 역할을 함으로써 각 장면을 연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꼭두각시놀이가 박첨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희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연희자들은 이 연희를 흔히 박첨지놀이라고 부른다. 박첨지와 같은 일정한 주인공이 존재함으로써 극의 통일성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박첨지와 함께 꼭두각시놀이의 극적 진행에 중요한 존재가 산받이다. 산받이는 악사 중 한 명이 맡는데 인형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산받이는 등장인물이면서 관중과 같은 입장에 있기도 하기 때문에 무대와 관중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현재는 3평방미터 공간에 네 기둥을 세우고 관중석을 마주 보며 12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 위에 인형이 나와서 노는 가로 250센티미터, 세로 70센티미터 정도의 무대면만 남겨놓고 사방을 모두 포장으로 둘러친다. 그러나 다락을 만들고 그 위에 무대를 설치하거나 이층식의 무대를 설치하는 식으로 공중 높이 무대를 설치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인형사들은 포장 속에서 의자에 걸터앉아 인형을 손에 쥐고 조종한다.

도시의 장마당이나 농어촌 마을을 활동 무대로 삼고 순회공연을 하던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집결처이며 새로운 공연 종목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지이고, 생활 본거지인 사찰을 본산으로 삼았다. 그러나 18~19세기에 사당패들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본산 사찰뿐만 아니라 그 근처의 일부 마을에도 근거지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사당골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생겨났다. 이 중 널리 알려진 본산과 사당골은 경기도 안성 청룡사와 그 부근의 청룡사당골, 황해도 문화 구월산의 패엽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경상도 하동 쌍계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전라도 강진 정수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사당리), 경남 남해의 화방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을 들 수 있다. 그곳에서는 연희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해서 초입자인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인접국가사례

{동아시아의 전통인형극} 중국, 한국, 일본의 전통 인형극은 무대 구조, 연출 방식, 인형 조종법이 거의 같고, 인형극의 주역들이 모두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희극적인 성격의 인물이라는 공통점과 외양의 유사성이 있으며, 원시종교나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고, 유랑예인집단에 의해 공연된 점 등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

일본 12세기 초 문헌인 『오에노마사후사(大江匡房)』의 ‘괴뢰자기(傀儡子記)’에서 괴뢰자(傀儡子, 쿠구츠시)라는 유랑 예인 집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의 사당패나 남사당패와 매우 흡사하다. 괴뢰자는 수초를 따라 유랑했고, 남자들은 활과 말로 수렵생활을 했으며, 쌍칼을 던졌다가 받기, 일곱 개의 방울 받기, 괴뢰희(인형극), 환술 등의 연희도 행했다. 여자들은 춤과 노래로 공연하고 몸을 팔았다. 이 괴뢰희가 발전하여 근세 닌교조루리(人形淨琉璃)와 오늘날 분라쿠(文樂)와 같은 일본 전통 인형극의 모태가 되었다.

의의

예전에 떠돌이 예인집단에는 사당패를 비롯해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중매구패가 있었다.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한국을 대표하는 유랑 예인 집단이다. 남사당패의 연희 중 꼭두각시놀음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으로서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大江匡房, 宣祖實錄, 成宗實錄, 世宗實錄, 睿宗實錄, 解語花史, 사당패들의 활동정형 (박은용, 고고민속4, 사회과학원출판사), 한국인형극의 유래 (유민영, 藝術論文集14, 藝術院, 1975), 山臺都監劇成立의 諸問題 (崔正如, 韓國學論集1, 啓明大學校 韓國學硏究院, 1980), 男寺黨牌硏究 (沈雨晟, 東文選, 1994),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 (서연호, 연극과 인간, 2001), 한국의 전통연희 (전경욱, 학고재, 2004)

남사당놀이

남사당놀이
한자명

男寺黨-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가을(秋) > 9월 > 놀이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정의

남사당패(男寺黨牌)가 주로 봄과 가을에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던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놀음)로 구성된 놀이. 이 중에서 꼭두각시놀음이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에 남사당놀이 전체가 지정되었다.

유래

조선 태종 6년 불교의 사사혁파정책(寺社革罷政策)으로 사원이 혁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전(寺田)이 삭감되었고 승려의 환속이 있었으며, 사사노비(寺社奴婢)가 관아의 노비로 넘어갔고 도첩제(度牒制)가 강화되었다. 그래서 본래 재를 올리는 일과 다비를 치르는 데 뽑혀 다녔고, 범패, 염불, 법고, 바라 같은 가무희에 뛰어난 명수들이었던 재승(才僧)들은 그들끼리 어울려 살게 되었는데, 사설사암은 이런 재승들의 활동 장소였다. 그러다가 같은 소질과 재주를 가지고 그늘에서 사는 신세인 무당, 재인,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조선 전기에 연희 담당층의 하나로 성립되었으니 그것이 사장(社長)이다. 다음 기록들을 통해서 사장으로부터 조선 후기의 유랑 예인 집단인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사장에서 파생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세조실록(世宗實錄)』 14년(1468) 5월 6일조에 승인(僧人)의 사장이 원각사(圓覺寺)의 불유(佛油)를 모연한다고 일컫고 혹은 낙산사(洛山寺)를 짓는 화주승(化主僧)이라고 일컬으며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일정한 절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희를 하고 다닌 것과 일치하고 있다. 『예종실록(睿宗實錄)』 1년(1469) 5월 9일조는 재승 계통 연희자뿐만 아니라 향리, 군인, 공사(公私) 노비들도 사장의 무리에 참여했음을 전해 준다. 원래 조선 초기에 도첩제를 만들어 백성들이 마음대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했으나, 승복을 입고 승려로 가장하여 국역(國役)을 피하는 유민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2년(1471) 6월 8일조 한치형(韓致亨)의 상소문은 사장이 징과 북을 울리고 염불을 일삼고 범패를 하며 기이한 형태와 괴이한 형상으로 춤추고 뛰어노는데, 시중의 아이나 부녀들이 이들의 연희를 쳐다보며 흠모하고 귀로 듣고 익혔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사장패의 연희가 민간에서 매우 인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40년(1607) 5월 4일조는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 이후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이 무리를 이루어 떠돌아다녔고, 일반 백성 가운데서도 사당이나 거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전해 준다.

사당패의 공연 종목은 사당벅구(법고)춤, 소리판(주로 산타령 등 민요창), 줄타기(재담줄이라 해서 곡예보다는 재담과 노래가 우세하다)의 세 가지였다. 사당패에는 맨 위에 모갑(某甲)이라는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라는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추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모갑이라 불리는 우두머리 남자가 이끄는 조직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에 붙어먹는 기생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사당들의 가무희였는데 사당들은 매음도 했다. 신재효본 ‘박타령’, ‘변강쇠가’나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의하면 사당패는 주로 사당들의 가무희 곧 소리판만 공연하고 다닌 것으로 나타난다.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여장(女裝)한 남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남사당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는 수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 조직을 이루었는데, 암동모는 초입자인 삐리들이 감당했고, 삐리는 연희자인 가열이 되기까지 머리를 땋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여장을 했다.

내용 및 특성

남사당놀이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에 의해 전승되며, 남사당패의 연희는 악기 연주인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 요술인 얼른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승되지 않는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풍물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농악인 웃다리 가락을 위주로 연주한다. 진풀이, 열두 발 상모돌리기, 무동 등 다양한 풍물놀이를 펼친다. 버나는 버나잡이(돌리는 사람)가 앵두나무막대기로 대접, 쳇바퀴, 대야 등을 돌리면서 매호씨(버나잡이의 재담 상대역)와 재담과 소리를 주고받는 연희이다. 살판은 땅재주로 살판쇠(땅재주꾼)가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으면서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자반뒤지기, 팔걸음, 외팔걸음, 외팔곤두, 앉은뱅이팔걸음, 쑤세미트리, 앉은뱅이모말되기, 숭어뜀, 살판 같은 기교를 부린다. 어름은 줄타기로서 어름산이(줄꾼)가 앉아서 장구를 쳐주는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으면서 꽹과리, 징, 북, 장구, 날라리의 반주에 맞춰 가새트림(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앞으로 가다가 두 발을 뛰어서 돌아앉기)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예를 행한다. 그리고 중의 모습을 흉내 내다가 신세 한탄을 하며 파계하는 모습을 희화적으로 표현하는 중놀이와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익살스럽게 흉내 내는 왈자놀이를 하면서, ‘중타령’, ‘오봉산 타령’, ‘풍년가’, ‘돈타령’ 등의 노래를 부른다.

가면극인 덧뵈기는 ‘덧(곱)본다’는 뜻으로 가면을 나타낸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우세한 풍자극으로 제1과장 마당씻이, 제2과장 옴탈잡이, 제3과장 샌님잡이, 제4과장 먹중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가면극에 반드시 나오는 벽사적인 의식무는 마당씻이의 고사문(告祀文)인 비나리로 대체되어 있다.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는 각각 양주별산대놀이의 옴중·먹중놀이, 샌님놀이, 노장춤과 같은 내용이다. 등장인물과 내용에서 양주별산대놀이와 유사한 것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볼 때 서울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생긴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의 대표적인 연희는 꼭두각시놀음인데, 박첨지마당과 평안감사마당으로 나뉜다. 박첨지마당의 ‘박첨지유람거리’에서는 박첨지가 등장해 악사인 산받이와 대화를 나눈다. 이어서 익살스런 재담을 늘어놓고 ‘유람가(遊覽歌)’를 부른다. ‘피조리거리’에서는 두 명의 피조리 곧 박첨지의 딸과 며느리가 뒷산에 나물을 뜯으러 다니다가 상좌중들과 놀아난다. 이때 홍동지가 벌거벗고 등장해 모두 쫓아버린다. ‘꼭두각시거리’에서는 박첨지와 그의 처인 꼭두각시가 서로 찾아다니다가 만난다. 영감이 첩을 얻었음을 실토하고 꼭두각시에게 돌머리집을 상면시키면, 첩이 머리로 꼭두각시를 마구 들이받는다. 꼭두각시는 중이 되겠다며 금강산으로 떠나간다. ‘이시미거리’에서는 박첨지의 손자, 피조리, 박첨지의 동생, 꼭두각시, 홍백가, 영노, 표생원, 동방삭 같은 등장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산받이에 의해 정체가 확인된 후, 이시미에게 잡혀먹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박첨지도 이시미에게 물리면 홍동지가 나와 박첨지의 경솔함을 꾸짖으며 구출하고 이시미를 때려잡는다.

평안감사마당의 ‘매사냥거리’에서 홍동지는 평안감사의 부임, 평양감사의 매사냥, 평양감사의 장례 장면에서 길을 닦는 인부, 사냥몰이꾼, 상두꾼의 역할을 함으로써, 양반의 횡포에 시달리던 민중의 모습을 대변한다. ‘상여거리’에서는 박첨지가 등장해 평안감사가 매사냥에서 돌아가던 중 산고개에서 낮잠을 자다가 개미에게 불알 땡금줄을 물려 즉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감사의 아들인 상주는 ‘장타령’을 부르기도 하며 경박한 행동을 한다. 상두꾼으로 뽑힌 홍동지는 벌거벗은 채 배(또는 성기)로 상여를 밀고 간다. ‘건사거리(절 짓고 허는 거리)’에서는 상좌중 둘이 나와 절에다 시주하면 자식을 많이 낳고 부귀공명을 누리게 된다고 하면서 법당을 짓는다. 조립식의 법당이 다 완성되면 다시 그것을 헐어낸다.

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혹은 아미타(阿彌陀)를 생각하여 떼어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공연 목적과 일치한다. 그리고 꼭두각시놀이의 각 거리가 독립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맨 마지막 거리에서 절을 지어 그동안 진행되어온 갈등을 극적으로 승화시키며 화해를 이루고, 시주를 해준 관중들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 주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꼭두각시놀이는 몇 개의 과장(거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은 가면극과 마찬가지로 서로 유기적인 연결성이 없는 독립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박첨지가 여러 과장에 걸쳐 계속 등장하며 극의 해설자 역할을 함으로써 각 장면을 연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꼭두각시놀이가 박첨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희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연희자들은 이 연희를 흔히 박첨지놀이라고 부른다. 박첨지와 같은 일정한 주인공이 존재함으로써 극의 통일성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박첨지와 함께 꼭두각시놀이의 극적 진행에 중요한 존재가 산받이다. 산받이는 악사 중 한 명이 맡는데 인형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산받이는 등장인물이면서 관중과 같은 입장에 있기도 하기 때문에 무대와 관중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현재는 3평방미터 공간에 네 기둥을 세우고 관중석을 마주 보며 12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 위에 인형이 나와서 노는 가로 250센티미터, 세로 70센티미터 정도의 무대면만 남겨놓고 사방을 모두 포장으로 둘러친다. 그러나 다락을 만들고 그 위에 무대를 설치하거나 이층식의 무대를 설치하는 식으로 공중 높이 무대를 설치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인형사들은 포장 속에서 의자에 걸터앉아 인형을 손에 쥐고 조종한다.

도시의 장마당이나 농어촌 마을을 활동 무대로 삼고 순회공연을 하던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집결처이며 새로운 공연 종목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지이고, 생활 본거지인 사찰을 본산으로 삼았다. 그러나 18~19세기에 사당패들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본산 사찰뿐만 아니라 그 근처의 일부 마을에도 근거지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사당골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생겨났다. 이 중 널리 알려진 본산과 사당골은 경기도 안성 청룡사와 그 부근의 청룡사당골, 황해도 문화 구월산의 패엽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경상도 하동 쌍계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전라도 강진 정수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사당리), 경남 남해의 화방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을 들 수 있다. 그곳에서는 연희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해서 초입자인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인접국가사례

{동아시아의 전통인형극} 중국, 한국, 일본의 전통 인형극은 무대 구조, 연출 방식, 인형 조종법이 거의 같고, 인형극의 주역들이 모두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희극적인 성격의 인물이라는 공통점과 외양의 유사성이 있으며, 원시종교나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고, 유랑예인집단에 의해 공연된 점 등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

일본 12세기 초 문헌인 『오에노마사후사(大江匡房)』의 ‘괴뢰자기(傀儡子記)’에서 괴뢰자(傀儡子, 쿠구츠시)라는 유랑 예인 집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의 사당패나 남사당패와 매우 흡사하다. 괴뢰자는 수초를 따라 유랑했고, 남자들은 활과 말로 수렵생활을 했으며, 쌍칼을 던졌다가 받기, 일곱 개의 방울 받기, 괴뢰희(인형극), 환술 등의 연희도 행했다. 여자들은 춤과 노래로 공연하고 몸을 팔았다. 이 괴뢰희가 발전하여 근세 닌교조루리(人形淨琉璃)와 오늘날 분라쿠(文樂)와 같은 일본 전통 인형극의 모태가 되었다.

의의

예전에 떠돌이 예인집단에는 남사당패를 비롯해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중매구패가 있었다.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한국을 대표하는 유랑 예인 집단이다. 남사당패의 연희 중 꼭두각시놀음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으로서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大江匡房, 宣祖實錄, 成宗實錄, 世宗實錄, 睿宗實錄, 解語花史
사당패들의 활동정형 (박은용, 고고민속4, 사회과학원출판사)
한국인형극의 유래 (유민영, 藝術論文集14, 藝術院, 1975)
山臺都監劇成立의 諸問題 (崔正如, 韓國學論集1, 啓明大學校 韓國學硏究院, 1980)
男寺黨牌硏究 (沈雨晟, 東文選, 1994)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 (서연호, 연극과 인간, 2001)
한국의 전통연희 (전경욱, 학고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