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

가야진용신제

한자명

伽倻津龍神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의례

집필자 김승찬(金承璨)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당곡마을에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가야진(伽倻津)의 용신(龍神)에게 올리는 의례. 1997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가야진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유래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 제사조(祭祀條)에 따르면 가야진용신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가적 제전(祭典)으로 제정한 중사(中祀)이다. 중사는 국가에서 칙사(勅使)를 보내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로, 오악(五岳), 사진(四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으로 구분하였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독의 하나이다. 사독이란 경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큰 강이다. 곧 동쪽은 토지하(吐只河), 남쪽은 황산하(黃山河), 서쪽은 웅천하(熊川河), 북쪽은 한산하(漢山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양산군(梁山郡) 산천조(山川條)에 “가야진은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도 한다. 고을 서쪽 40리이며 황산강 상류에 있다. 우리 세종조 때 황룡이 물 속에 나타났으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같은 책 사묘조(祠廟條)에 “가야진사는 사전(祀典)에 공주, 웅진과 함께 남독으로 삼았다고 중사에 실려 있다. 나라에서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낸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낙동강 중류인 양산시의 황산하 상류에서 중사를 지내던 사당이 가야진사임을 알 수 있다. 가야진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창건된 후로 인조 22년(1644)과 숙종 34년(1708) 그리고 고종 12년(1875)에 각각 중수(重修)하였다. 이후 1935년 하천 정리 때 당곡마을의 산기슭으로 옮겼다가 1966년에 다시 원위치인 용당리 615번지로 옮겼다. 1983년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가야진사의 용신제는 조선조 말기까지는 국가적 제례로 용신에게 뱃길의 안정과 우순풍조를 비는 제례였으나,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사당의 복원과 정비를 한 것을 계기로 가야진용신제의 예능 보유자였던 이장백(1914~1998) 옹이 가야진용신제보존회를 조직하고 용신제의 내용을 고증하고 보완하여 민속놀이인 용신제놀이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가야진용신제는 재래의 용신제와 지방의 기우제와 동민의 풍물놀이를 융합시킨 것이다.

내용

가야진사의 용신제는 부정(不淨)가시기, 칙사영접, 용신제, 용소(龍沼)풀이, 사신(辭神)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정가시기는 제례 사흘 전부터 제관들이 목욕재계하고 제당 안팎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례 당일에는 부정을 가시기 위해 제당 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출입문에는 금줄을 치며 제수를 준비한다. 칙사영접은 칙사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길닦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괭이와 망깨와 비 같은 연장을 가지고 ‘길닦기소리’에 맞추어 길의 흙을 고르고 다지고 비질한다. 길닦기가 끝나고 칙사가 길목에 당도하면 선창자가 길을 밟는 지신풀이를 하면서 영접길에 오르는데, 나머지 일행들은 풍물을 치며 뒤따라간다. 이때 하는 지신밟기소리는 다음과 같다.

어려루 지신아 가야지신을 누리자 하늘생겨 갑자년
땅이생겨 을축년
갑자을축 생긴후에 천지신명이 밝았고 천지신명
밝은후에 이나라가 생겼고
이나라가 생긴후에 황산강이 생겼고 황산강이
생긴후에 용당터가 생겼네
용당터가 생긴후에 가야제당을 세웠고
가야제당 세운후에 삼용신을 모셨네
삼용신을 모신후에 용신제를 지냈네
용신제를 지내려고 칙사님을 모셔오네
삼정승 육판서는 나랏일로 못오시고
이고을 원님께서 칙사명을 받으셨네
가슴에는 바람안고 등뒤에는 바람지고
칙사님이 오시네요 칙사님을 맞이하세
칙사님을 모신후에 용신제를 지내보자
배띄워라 배 띄워라 황산강에 배띄워라
순풍에 돛을달아 용당용김에 당도하여
삼용신을 청한후에 희생을 바쳤더니
영험하신 삼용신이 비를몰고 오는구나
비가온다 비가온다 온누리에 비가온다
풍년일세 풍년일세 금년농사 풍년일세
먹고쓰고 남은식량 술도빚고 도하여
남녀노소 즐겨보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국태민안 비나이다 어려루 지신아
가야지신을 누리자 지신지신 지신아

칙사를 만나 절을 올리고 풍물을 친 후 칙사를 사인교에 태워 제당으로 모셔온다. 칙사가 제당에 당도하면 집례관이 칙사의 입실을 고한 다음 용신제를 행한다. 용신제는 홀기에 따라 진행하는데, 사당 안에서 분향례, 헌작례, 음복례를 하고, 사당 밖에서 망료례(望燎禮)를 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제물은 모두 익히지 않은 것들로 쓰는데, 가야진지신(伽倻津之神)의 위패 앞 첫째 줄에는 왼쪽부터 기장, , 수수, 둘째 줄에는 조기, 육회, 돼지머리, 고기포, 육포, 셋째 줄에는 미나리, 무, 겉밤, 대추를 차리고, 넷째 줄에는 술잔 세 개를 얹어 놓는다. 술잔 세 개를 얹어놓는 것은 세 용신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신제에서 읽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 세차 갑신 삼월 무진삭 초십일에 양산군수 ◦◦◦가야진의 신께 감히 밝게 고합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위해 빌면 만물을 윤택케 하고, 제사를 지내면 우리에게 백복을 주옵니다. 삼가 희생과 폐백과 술과 밥 등 여러 제수를 이에 베풀어 밝게 올리니 흠향하소서(維 歲次甲申三月戊辰朔初十日丁丑 梁山市長◦◦◦敢昭告于 伽倻津之神 伏以 爲國之祝 澤潤萬物 克 禋克祀 錫我百福 謹以 牲幣醴齊 粲盛庶品 式陳明薦 尙 饗).”

용소풀이는 용소침돈례(龍沼沈豚禮)의 과정이다. 용신제를 마치면 칙사를 비롯한 제관이 강변에 지어놓은 송막(松幕: 불집)으로 가는데, 풍물패는 풍물을 치며 따라가서 송막을 한 바퀴 돌면 칙사가 송막에 불을 지른다. 이때 풍물패의 잡색들은 짚신을 벗어 불길에 던지며 용의 승천을 기원한다. 한편 알자(謁者)의 안내로 희생물인 돼지를 배에 싣고 풍물을 치면, 헌관인 칙사는 집례, 대축, 사령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 용소로 향한다. 용소에 당도하면 희생물을 뱃머리에 두고 칙사가 헌작하며 재배한 후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돼지를 강에 던지면서 “침하돈(沈下豚)”이라고 세 번 외친다. 이때 강변의 불타는 송막에 있던 사람들이 “비가 온다. 풍년이 온다.” 외치면서 한바탕 풍물놀이를 벌인다.

용소풀이가 끝나면 제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제당으로 돌아오고, 풍물패는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제당으로 온다. 알자가 제당을 향해 제향이 끝났음을 고한 후 칙사는 관복을 벗고 제관을 비롯한 모든 참례자들이 풍물패와 어울려서 한바탕 난장을 벌이고 의례를 마감한다.

전설

가야진사의 세 용신에 대한 전설은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용당리 일대를 전초기지로 삼았을 때부터 전승되어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양주도독부에 있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중 이곳 주막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곳에 사는 암룡인데, 숫룡인 남편이 첩만 사랑하고 나를 멀리하니 첩을 죽여주면 꼭 은혜를 갚겠다.” 하며 애원하였다. 전령은 여인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이 생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음날 여인이 가리켜주는 대로 숫룡이 첩을 데리고 논다는 용소에 가서 칼을 빼어들고 바위틈에 숨어 기다렸다. 한참 있으니, 갑자기 강물이 끓어오르면서 용 두 마리가 불쑥 솟아오르며 서로 엉켜 놀기 시작하였다. 겁에 질린 전령은 다급한 나머지 앞뒤를 가릴 새도 없이 칼을 번쩍 들어 가르쳐준 첩룡을 내려친다는 게 공교롭게도 칼이 빗나가 숫룡을 쳐죽이고 말았다. 남편의 죽음에 슬피 울던 암룡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고, 당신에게 용궁을 구경시켜 줄까 하니 가겠느냐?”라고 제의하였다. 전령은 용궁에 대한 호기심에 암룡의 제의를 받아들여 입었던 전복과 칼, 투구를 벗어놓고 암룡의 등에 올라타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로부터 암룡과 전령의 자취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이 마을에는 알 수 없는 재앙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므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용이 놀던 용소가 보이는 곳에 사당을 짓고, 세 마리의 용과 전령의 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져 넣으며 제사를 지내니,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의의

가야진용신제는 그 역사가 오래인 만큼 제례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면서 전승된 것이라 하더라도 중사인 사독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용신제이다.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는 수로의 안전과 우순풍조를 용신에게 기원하는 유교식의 제례였으리라 추정되나, 근래에는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보장해 주는 용신에게 올리는 제례에, 기우제의 송막태우기와 침돈(沈豚) 그리고 풍물놀이가 덧붙여져 민속제례화한 용신제로 변모되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國朝五禮儀, 三國史記, 新增東國輿地勝覽, 增補文獻備考, 내고장 傳統 (梁山郡, 1983), 梁山歷史文化觀光選集 (山文化院, 2001), 梁山市誌 (梁山市誌編纂委員會, 2004)

가야진용신제

가야진용신제
한자명

伽倻津龍神祭

사전위치

한국세시풍속사전 > 봄(春) > 3월 > 의례

집필자 김승찬(金承璨)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당곡마을에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가야진(伽倻津)의 용신(龍神)에게 올리는 의례. 1997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가야진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유래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 제사조(祭祀條)에 따르면 가야진용신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가적 제전(祭典)으로 제정한 중사(中祀)이다. 중사는 국가에서 칙사(勅使)를 보내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로, 오악(五岳), 사진(四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으로 구분하였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독의 하나이다. 사독이란 경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큰 강이다. 곧 동쪽은 토지하(吐只河), 남쪽은 황산하(黃山河), 서쪽은 웅천하(熊川河), 북쪽은 한산하(漢山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양산군(梁山郡) 산천조(山川條)에 “가야진은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도 한다. 고을 서쪽 40리이며 황산강 상류에 있다. 우리 세종조 때 황룡이 물 속에 나타났으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같은 책 사묘조(祠廟條)에 “가야진사는 사전(祀典)에 공주, 웅진과 함께 남독으로 삼았다고 중사에 실려 있다. 나라에서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낸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낙동강 중류인 양산시의 황산하 상류에서 중사를 지내던 사당이 가야진사임을 알 수 있다. 가야진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창건된 후로 인조 22년(1644)과 숙종 34년(1708) 그리고 고종 12년(1875)에 각각 중수(重修)하였다. 이후 1935년 하천 정리 때 당곡마을의 산기슭으로 옮겼다가 1966년에 다시 원위치인 용당리 615번지로 옮겼다. 1983년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가야진사의 용신제는 조선조 말기까지는 국가적 제례로 용신에게 뱃길의 안정과 우순풍조를 비는 제례였으나,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사당의 복원과 정비를 한 것을 계기로 가야진용신제의 예능 보유자였던 이장백(1914~1998) 옹이 가야진용신제보존회를 조직하고 용신제의 내용을 고증하고 보완하여 민속놀이인 용신제놀이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가야진용신제는 재래의 용신제와 지방의 기우제와 동민의 풍물놀이를 융합시킨 것이다.

내용

가야진사의 용신제는 부정(不淨)가시기, 칙사영접, 용신제, 용소(龍沼)풀이, 사신(辭神)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정가시기는 제례 사흘 전부터 제관들이 목욕재계하고 제당 안팎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례 당일에는 부정을 가시기 위해 제당 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출입문에는 금줄을 치며 제수를 준비한다. 칙사영접은 칙사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길닦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괭이와 망깨와 비 같은 연장을 가지고 ‘길닦기소리’에 맞추어 길의 흙을 고르고 다지고 비질한다. 길닦기가 끝나고 칙사가 길목에 당도하면 선창자가 길을 밟는 지신풀이를 하면서 영접길에 오르는데, 나머지 일행들은 풍물을 치며 뒤따라간다. 이때 하는 지신밟기소리는 다음과 같다.

어려루 지신아 가야지신을 누리자 하늘생겨 갑자년
땅이생겨 을축년
갑자을축 생긴후에 천지신명이 밝았고 천지신명
밝은후에 이나라가 생겼고
이나라가 생긴후에 황산강이 생겼고 황산강이
생긴후에 용당터가 생겼네
용당터가 생긴후에 가야제당을 세웠고
가야제당 세운후에 삼용신을 모셨네
삼용신을 모신후에 용신제를 지냈네
용신제를 지내려고 칙사님을 모셔오네
삼정승 육판서는 나랏일로 못오시고
이고을 원님께서 칙사명을 받으셨네
가슴에는 바람안고 등뒤에는 바람지고
칙사님이 오시네요 칙사님을 맞이하세
칙사님을 모신후에 용신제를 지내보자
배띄워라 배 띄워라 황산강에 배띄워라
순풍에 돛을달아 용당용김에 당도하여
삼용신을 청한후에 희생을 바쳤더니
영험하신 삼용신이 비를몰고 오는구나
비가온다 비가온다 온누리에 비가온다
풍년일세 풍년일세 금년농사 풍년일세
먹고쓰고 남은식량 술도빚고 떡도하여
남녀노소 즐겨보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국태민안 비나이다 어려루 지신아
가야지신을 누리자 지신지신 지신아

칙사를 만나 절을 올리고 풍물을 친 후 칙사를 사인교에 태워 제당으로 모셔온다. 칙사가 제당에 당도하면 집례관이 칙사의 입실을 고한 다음 용신제를 행한다. 용신제는 홀기에 따라 진행하는데, 사당 안에서 분향례, 헌작례, 음복례를 하고, 사당 밖에서 망료례(望燎禮)를 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제물은 모두 익히지 않은 것들로 쓰는데, 가야진지신(伽倻津之神)의 위패 앞 첫째 줄에는 왼쪽부터 기장, 쌀, 수수, 둘째 줄에는 조기, 육회, 돼지머리, 고기포, 육포, 셋째 줄에는 미나리, 무, 겉밤, 대추를 차리고, 넷째 줄에는 술잔 세 개를 얹어 놓는다. 술잔 세 개를 얹어놓는 것은 세 용신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신제에서 읽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 세차 갑신 삼월 무진삭 초십일에 양산군수 ◦◦◦가야진의 신께 감히 밝게 고합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위해 빌면 만물을 윤택케 하고, 제사를 지내면 우리에게 백복을 주옵니다. 삼가 희생과 폐백과 술과 밥 등 여러 제수를 이에 베풀어 밝게 올리니 흠향하소서(維 歲次甲申三月戊辰朔初十日丁丑 梁山市長◦◦◦敢昭告于 伽倻津之神 伏以 爲國之祝 澤潤萬物 克 禋克祀 錫我百福 謹以 牲幣醴齊 粲盛庶品 式陳明薦 尙 饗).”

용소풀이는 용소침돈례(龍沼沈豚禮)의 과정이다. 용신제를 마치면 칙사를 비롯한 제관이 강변에 지어놓은 송막(松幕: 불집)으로 가는데, 풍물패는 풍물을 치며 따라가서 송막을 한 바퀴 돌면 칙사가 송막에 불을 지른다. 이때 풍물패의 잡색들은 짚신을 벗어 불길에 던지며 용의 승천을 기원한다. 한편 알자(謁者)의 안내로 희생물인 돼지를 배에 싣고 풍물을 치면, 헌관인 칙사는 집례, 대축, 사령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 용소로 향한다. 용소에 당도하면 희생물을 뱃머리에 두고 칙사가 헌작하며 재배한 후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돼지를 강에 던지면서 “침하돈(沈下豚)”이라고 세 번 외친다. 이때 강변의 불타는 송막에 있던 사람들이 “비가 온다. 풍년이 온다.” 외치면서 한바탕 풍물놀이를 벌인다.

용소풀이가 끝나면 제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제당으로 돌아오고, 풍물패는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제당으로 온다. 알자가 제당을 향해 제향이 끝났음을 고한 후 칙사는 관복을 벗고 제관을 비롯한 모든 참례자들이 풍물패와 어울려서 한바탕 난장을 벌이고 의례를 마감한다.

전설

가야진사의 세 용신에 대한 전설은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용당리 일대를 전초기지로 삼았을 때부터 전승되어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양주도독부에 있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중 이곳 주막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곳에 사는 암룡인데, 숫룡인 남편이 첩만 사랑하고 나를 멀리하니 첩을 죽여주면 꼭 은혜를 갚겠다.” 하며 애원하였다. 전령은 여인의 딱한 사정에 동정심이 생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음날 여인이 가리켜주는 대로 숫룡이 첩을 데리고 논다는 용소에 가서 칼을 빼어들고 바위틈에 숨어 기다렸다. 한참 있으니, 갑자기 강물이 끓어오르면서 용 두 마리가 불쑥 솟아오르며 서로 엉켜 놀기 시작하였다. 겁에 질린 전령은 다급한 나머지 앞뒤를 가릴 새도 없이 칼을 번쩍 들어 가르쳐준 첩룡을 내려친다는 게 공교롭게도 칼이 빗나가 숫룡을 쳐죽이고 말았다. 남편의 죽음에 슬피 울던 암룡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고, 당신에게 용궁을 구경시켜 줄까 하니 가겠느냐?”라고 제의하였다. 전령은 용궁에 대한 호기심에 암룡의 제의를 받아들여 입었던 전복과 칼, 투구를 벗어놓고 암룡의 등에 올라타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로부터 암룡과 전령의 자취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이 마을에는 알 수 없는 재앙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므로 주민들이 힘을 모아, 용이 놀던 용소가 보이는 곳에 사당을 짓고, 세 마리의 용과 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져 넣으며 제사를 지내니,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의의

가야진용신제는 그 역사가 오래인 만큼 제례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면서 전승된 것이라 하더라도 중사인 사독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용신제이다.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는 수로의 안전과 우순풍조를 용신에게 기원하는 유교식의 제례였으리라 추정되나, 근래에는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보장해 주는 용신에게 올리는 제례에, 기우제의 송막태우기와 침돈(沈豚) 그리고 풍물놀이가 덧붙여져 민속제례화한 용신제로 변모되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國朝五禮儀, 三國史記, 新增東國輿地勝覽, 增補文獻備考
내고장 傳統 (梁山郡, 1983)
梁山歷史文化觀光選集 (山文化院, 2001)
梁山市誌 (梁山市誌編纂委員會,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