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막(廬幕)

한자명

廬幕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김문택(金文澤)

정의

부모가 사망하면 상주가 무덤이나 궤연几筵을 지키기 위하여 거처하는 집으로 여차廬次, 여소廬所, 여묘廬墓, 의려倚廬, 여廬라고도 함.

역사

고려시대에는 의종 때 손응시孫應時, 명종 때 장광부張光富가 여묘 3년의 효행을 다했다고 전한다. 또한 , 경주의 손시양孫時揚은 부모를 위하여 각각 3년간 여막을 짓고 살아서 국가로부터 정문旌門을 받았다. 그리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의하면 최누백崔累伯은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복수한 다음, 3년 동안 여묘廬墓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후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가 3년간 여막을 짓고 살았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 이념의 도입과 함께 국가에서 삼년상을 장려하면서 여막이 사대부 계층에 일반화되었다.

내용

여막은 사람이 겨우 지낼 수 있는 초막으로 부모의 묘소 옆에다가 조성한다. 그렇지만 장례를 지내기전에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서 집 안에 만든 움막도 여막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도 상을 당하면 궁궐 안에 여차廬次를 짓고 임시 거처로 삼았다.

여막을 집 안에 세울 때는 중문 바깥의 동쪽 담장 아래에 나무를 기대어서 만들었다. 『의례儀禮』에 의하면, “효자는 의려倚廬에 거처하는데 거적 위에서 자고 흙덩어리를 베개로 삼으며 질紩과 대帶를 벗지 않고 지낸다.”라고 하였고, 또 “이미 우제를 지낸 뒤에는 가려진 풀을 깎고 기둥으로 들보를 받치며 자리를 깔고 잔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상주는 볏짚이나 띠로 만든 여막 안에서 짚으로 만든 고석藁席을 깔고 고침藁枕을 베며 엄나무를 섞어 만든 엄신을 신고서 고통스럽게 생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여막이 유행하였지만, 여막의 구조를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에 있는 <의려도倚廬圖>를 참고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의려도>에는 집에 붙어 있는 움막의 모양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데, 외부에는 풀로 엮은 거적을 만들어 덮는다고 했다. 그 밖에, 김용환・김형래는 묘소 옆에 짓는 여막의 구조가 선사시대와 유사한 움집 형태로, 지붕과 벽체는 이엉으로 두른 구조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런데 움집의 형태라고 하더라도 취식과 취침이 가능해야 했으므로, 겨울에는 한기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갖추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안동에 살던 이정회李庭檜(1542~1612)는 모친상 때에 여막에서 생활하면서 취식을 하였고 , 찾아오는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노비들이 수시로 숯과 나무를 마련하여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안동의 김성일金誠一은 시묘살이 기간 중모친의 행장, 묘지문을 작성하였고, 1년이 지난 뒤에는 『상례고증喪禮考證』을 편찬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바로 여막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류성룡柳成龍은 60세에 모친상을 당해, 여막살이를 하며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등을 찬술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 여막은 집안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취식을 하면서 겨울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난방시설을 갖추었고, 때에 따라서는 난로나 간이 온돌시설을 갖췄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내부에는 적어도 손님을 맞이하고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징 및 의의

여막은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시기 위해서 마련한 거주지이다. 상주가 움막 같이 누추한 곳에 거주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하게 지낼 수 없다는 지극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三綱行實圖, 禮 記, 상례와 시묘살이(김문택, 조선시대생활사2, 역사비평사, 2000), 시묘살이 여막의 복원적 고찰(김용환・김형래, 박물관지10, 충청대학교박물관, 2001), 한국의 상례문화(김시덕, 민속원, 2012).

여막

여막
한자명

廬幕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김문택(金文澤)

정의

부모가 사망하면 상주가 무덤이나 궤연几筵을 지키기 위하여 거처하는 집으로 여차廬次, 여소廬所, 여묘廬墓, 의려倚廬, 여廬라고도 함.

역사

고려시대에는 의종 때 손응시孫應時, 명종 때 장광부張光富가 여묘 3년의 효행을 다했다고 전한다. 또한 , 경주의 손시양孫時揚은 부모를 위하여 각각 3년간 여막을 짓고 살아서 국가로부터 정문旌門을 받았다. 그리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의하면 최누백崔累伯은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서 복수한 다음, 3년 동안 여묘廬墓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후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가 3년간 여막을 짓고 살았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 이념의 도입과 함께 국가에서 삼년상을 장려하면서 여막이 사대부 계층에 일반화되었다.

내용

여막은 사람이 겨우 지낼 수 있는 초막으로 부모의 묘소 옆에다가 조성한다. 그렇지만 장례를 지내기전에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서 집 안에 만든 움막도 여막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도 상을 당하면 궁궐 안에 여차廬次를 짓고 임시 거처로 삼았다.

여막을 집 안에 세울 때는 중문 바깥의 동쪽 담장 아래에 나무를 기대어서 만들었다. 『의례儀禮』에 의하면, “효자는 의려倚廬에 거처하는데 거적 위에서 자고 흙덩어리를 베개로 삼으며 질紩과 대帶를 벗지 않고 지낸다.”라고 하였고, 또 “이미 우제를 지낸 뒤에는 가려진 풀을 깎고 기둥으로 들보를 받치며 자리를 깔고 잔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상주는 볏짚이나 띠로 만든 여막 안에서 짚으로 만든 고석藁席을 깔고 고침藁枕을 베며 엄나무를 섞어 만든 엄신을 신고서 고통스럽게 생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여막이 유행하였지만, 여막의 구조를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에 있는 <의려도倚廬圖>를 참고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의려도>에는 집에 붙어 있는 움막의 모양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데, 외부에는 풀로 엮은 거적을 만들어 덮는다고 했다. 그 밖에, 김용환・김형래는 묘소 옆에 짓는 여막의 구조가 선사시대와 유사한 움집 형태로, 지붕과 벽체는 이엉으로 두른 구조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런데 움집의 형태라고 하더라도 취식과 취침이 가능해야 했으므로, 겨울에는 한기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갖추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안동에 살던 이정회李庭檜(1542~1612)는 모친상 때에 여막에서 생활하면서 취식을 하였고 , 찾아오는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노비들이 수시로 숯과 나무를 마련하여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안동의 김성일金誠一은 시묘살이 기간 중모친의 행장, 묘지문을 작성하였고, 1년이 지난 뒤에는 『상례고증喪禮考證』을 편찬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바로 여막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류성룡柳成龍은 60세에 모친상을 당해, 여막살이를 하며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등을 찬술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 여막은 집안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취식을 하면서 겨울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난방시설을 갖추었고, 때에 따라서는 난로나 간이 온돌시설을 갖췄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내부에는 적어도 손님을 맞이하고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징 및 의의

여막은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시기 위해서 마련한 거주지이다. 상주가 움막 같이 누추한 곳에 거주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하게 지낼 수 없다는 지극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三綱行實圖, 禮 記, 상례와 시묘살이(김문택, 조선시대생활사2, 역사비평사, 2000), 시묘살이 여막의 복원적 고찰(김용환・김형래, 박물관지10, 충청대학교박물관, 2001), 한국의 상례문화(김시덕, 민속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