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제단(酺祭坛)

포제단

한자명

酺祭坛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김동섭(金東燮)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내에서 유교식 마을제의가 베풀어지는 제의 장소.

내용

포제단들은 거의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위치는 마을의 입구나 노변 등 일반적인 조건은 없지만 인가(人家)에서 떨어져 개소리나 닭소리 등이 안 들리고, 사람의 왕래가 번잡하지 않은 조용하고 음적(陰的)인 곳이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포제단이 일정한 장소에 위치했다가 ‘4․3사건, 도로 개설, 개발 사업’ 등 이유로 포제단의 위치가 변경되었다고 하는 증언도 여러 마을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향사를 포제단으로 이용하는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을 안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인가와 가깝게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포제단의 형태는 위치와 관련이 깊은 경우가 많은 셈이다. 즉 마을 위치의 지형적 조건에 따라 해변, 천변, 전지, 임야, 구릉 등, 아무곳이나 택함으로써 그곳의 지형적 조건에 따라 포제단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포제단을 형태적 특징으로 나누면 노지형(露地型), 돌담형(石垣型), 당우형(堂宇型)의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ㅇ노지형
노지형은 인가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돌담과 같은 시설물이나 제사(祭舍)와 같은 건물도 없이 23.1㎡~26.4㎡의 노지(露地)에 자연석을 모아 평편하게 제단을 만들고, 작은 판석을 신위의 수만큼 가지런히 설치하여 놓은 제단 형태이다. 반석의 제단이나 165㎡~200㎡의 넓이에 돌담 등 울타리도 두르지 않은 상태의 비탈진 자연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제단에서 제의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관들이 제단 옆에 마련된 임시 천막 거처를 제청으로 삼아 정성을 다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수고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찾을 수 있다. 호근동은 서귀포 시내에서 서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으며 바닷가에서부터 중산간에 이르기까지 넓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농촌마을이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산악을 이용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 때문인지 호근동의 포제단은 각시바위 정상 부근에 마련되어 있다.

호근동에서 포제는 정월 상정일에 치른다. 제관은 제청으로 입재하여 사흘 동안 정성을 들인 뒤 제의봉행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호근동에서는 다른 마을과 달리 입재 사흘 전에 제청으로 입재하여 정성을 들인다. 입재 사흘째 아침이 되면 각시바위에 있는 포제단으로 제청을 옮겨 정성을 들이다가 제의를 지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제의 하루 전날 각시바위 제청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예행연습을 한 뒤 이튿날 자정에 제의를 지내는 점 또한 다른 마을과 차이를 보인다.

노지형 포제단의 경우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임시 거처로 천막을 설치한다. 이때 사람이 대기하는 곳과 제물을 준비하는 곳으로 나누어 설치해야 한다. 호근동의 경우 각시바위 주변 포제단에 오래전부터 천막을 설치하던 곳에 바닥을 평탄하게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나즈막하게나마 돌담을 둘러 다른 지역과 구분 하고 있다.

난방을 위해 임시 거처인 천막 안에는 석유난로를 이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제관들은 천막 밖에 피운 모닥불에 의지해 추위와 졸음을 쫓는 편이었다.

ㅇ돌담형
돌담형은 돌로 담을 둘러쌓고 그 내부에 제단을 설치한 형태이다. 제주도 내 포제단의 일반적인 형태로 가장 많이 있는 편이다. 제단 형태는 비가림이 있는 형태와 비가림이 없는 형태로 구분되기도 한다.

비가림이 없는 형태로는 한림읍 명월리, 해월읍 하가리, 표선면 성읍리 등지의 제단이 있다. 명월리의 경우 1,000㎡ 정도의 포제단을 각석으로 돌담을 둘렀다. 그리고 마을로 연결된 길가에는 출입구(出入口)로 살창의 철문(鐵門)을 설치하였다.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가장 구석진 자리에 제단이 형성되어 있다. 다듬질한 큰 판석(板石)을 제단(祭壇)으로 삼고 그 아래에 받침을 돋우는 형식이다. 제단 앞에는 향로석(香爐石)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제단 주변에 관세위의 위치와 집례, 찬자의 위치도 작은 석재로 표시하고 있다.

하가리의 경우 660㎡ 정도 포제단의 경계를 자연석으로 담을 둘러 다른 지역과 경계를 지었다. 그리고 산업도로로 연결된 길가에는 출입구로 살창의 철문을 설치하였다. 살창을 들어서면 제관들이 입재 정성을 들이는 제청이 마련되어 있다. 그 안쪽의 깊고 높은 쪽에 작은 자연석 판석을 여러 장 모아 넓은 제단을 설치하였다. 그 앞쪽에는 작은 향로석을 놓았다.

성읍리의 경우 1983년 조성한 제청 옆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난 안쪽에 330㎡ 정도 포제단을 자연석으로 담을 둘러 다른 지역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 조금 낮은 곳에 조그마하게 돌담을 둘러 하단을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출입구에 출입문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다. 포제단의 제단은 출입구의 반대편 안쪽에 설치되어 있다. 장방형(長方形)의 넓은 반석(盤石)이 지면에 설치되고, 향로석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형태이다. 이 같은 형태의 포제단은 성산읍 온평리도 같다.

연미마을의 경우 제단 청소를 할 때 제단 전부를 덮을 수 있도록 제단 안에 천막을 설치하여 제의봉행에 임하고 있고, 법환동의 경우 비가림 시설이 없지만 아예 비닐하우스를 전체적으로 설치하여 우천이나 바람 등에 대비하고 있다.

비가림이 있는 형태로는 애월읍 애월리, 아라1동, 2동 등지의 제단이다. 애월리의 경우 각석으로 담을 두르고 그 내부에 제관들이 옮겨다니는 ‘신도’(神道)를 판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 이외 지역은 소나무를 심어 조경 하였다. 그 안쪽에 청기와를 얹은 비가림 시설을 하고 아래에 두꺼운 가공 판석(板石) 두 장을 받침에 고여 놓아 제단을 만들고, 그 앞에 향로석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같이 동일 포제단 내에 신위(神位) 2위를 함께 모시게 되어 토신(土神)과 포신(酺神)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애월리와 같이 2신위(里祀之神과 酺神之位)를 함께 모시는 마을로는 애월읍 유수암리를 들 수 있다.

아라1동의 경우 각석으로 담을 두른 다음 기와를 얹었으며, 담 안쪽은 시멘트 포장으로 단장하였다. 출입구 쪽이 마을을 향해 자리 잡도록 하였으며, 제의봉행 때 이하였으며, 위에 비가림 시설을 하고 기와를 얹었다. 제물을 진설하는 제단 뒤에는 이사(里祀)라고 음각(陰刻)한 신위(神位)를 세웠다.

ㅇ당우형
당우형은 포제를 모시는 제단으로 별도의 공간을 확보하여 치르는 경우를 말한다. 이 같은 경우 제관들의 정성을 위한 금기의 공간이 별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이 포제단 안에서 입재 생활을 하다가 제의봉행을 하는 형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신촌리의 경우 신촌향사를 이용하고 있다. 원래 신촌향사는 향사와 관리사로 갖추어진 건물로, 1975년에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 때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곳이었다. 정확히 언제 건립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중동 길가에 있던 것을 1805년(순조 5)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몇 차례의 보수와 개조로 변형된 것을 옛 모습처럼 보수하여 신촌리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77년에 사무소를 새로 지어 이사한 뒤로 사용치 않고 있다.

제청으로 쓰고 있는 향사 건물은 전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우진각 지붕 중앙의 대청이 넓은 기와 건물이다. 이곳에서 제관들의 사흘에 걸친 입재 정성은 물론 신촌리 포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관리사 건물은 향사 왼쪽에 위치하며, 전면 세 칸 우진각 진 기와지붕 건물이다.

건입동의 경우 포제당을 이용하고 있다. 원래 건입동의 포제단은 금산수원지 상류 부근에 있었다. 지금의 사라봉 중턱의 이 자리에 절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 1991년경 마을 사람들이 제단을 조성하고 위패를 모시는 신주각[삼신위(三神位)로 토신지위(土神之位), 포신지위(酺神之位), 가신지위(街神之位)의 삼신위를 가리킨다]을 설치하면서부터 포제당(酺祭堂)으로 가꾸어지게 된 것이다.

삼양3동인 벌랑마을의 경우 마을회관을 이용하고 있다. 원래 삼양3동의 포제단은 마을 내 깨끗한 곳을 골라 포제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회관이 마련돼 회관 안에 경로당이 개설되고 난방 시설과 취사가 가능한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제청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을회관 2층에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별도의 공간이 있어 그곳에 제단을 설치하고 포제를 봉행하게 되었다. 특히 삼양3동의 경우 바닷가 마을이다 보니 어촌계에서 포제와 용신제가 함께 치러지고 있다. 용신제당이 마을회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어 마을회관이 더욱 유리한 곳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산리의 경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옛 초등학교 옆에 슬래브로 포제단을 만들어 제의봉행에만 활용하고 일체 정성은 마을회관을 이용하고 있다. 슬래브 건물 안에는 판석(板石)으로 만들어 놓은 제단만 있을 뿐 아무런 시설이나 이용물은 없기 때문에 일 년에 한 차례 포제봉행에만 이용하고 있다.

이상 3개 유형으로 나누었으나 노지형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여기서 발전하여 다른 공간과 포제단을 구분하여 경계를 지을 필요가 있을 때 이루어진 것이 돌담형인 것으로 보인다. 당우형은 후대에 오면서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차량 등으로 제청을 방문하는 사람이 늘면서 넓고 편리한 곳을 찾다가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제주도의 포제단은 당초 개소리와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음적인 공간을 찾아 형성하였으나 후대에 오면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면서 깨끗한 곳을 찾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포제단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으로는 돌담형이 기본이지만 차츰 당우형으로 변하고 있고, 노지형은 가끔 있다.

참조

포신 포제

참고문헌

제주 유교식마을제의 전승현장 (김동섭,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본부, 2010)

포제단

포제단
한자명

酺祭坛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김동섭(金東燮)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내에서 유교식 마을제의가 베풀어지는 제의 장소.

내용

포제단들은 거의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위치는 마을의 입구나 노변 등 일반적인 조건은 없지만 인가(人家)에서 떨어져 개소리나 닭소리 등이 안 들리고, 사람의 왕래가 번잡하지 않은 조용하고 음적(陰的)인 곳이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포제단이 일정한 장소에 위치했다가 ‘4․3사건, 도로 개설, 개발 사업’ 등 이유로 포제단의 위치가 변경되었다고 하는 증언도 여러 마을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향사를 포제단으로 이용하는 경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을 안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인가와 가깝게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포제단의 형태는 위치와 관련이 깊은 경우가 많은 셈이다. 즉 마을 위치의 지형적 조건에 따라 해변, 천변, 전지, 임야, 구릉 등, 아무곳이나 택함으로써 그곳의 지형적 조건에 따라 포제단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포제단을 형태적 특징으로 나누면 노지형(露地型), 돌담형(石垣型), 당우형(堂宇型)의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ㅇ노지형
노지형은 인가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돌담과 같은 시설물이나 제사(祭舍)와 같은 건물도 없이 23.1㎡~26.4㎡의 노지(露地)에 자연석을 모아 평편하게 제단을 만들고, 작은 판석을 신위의 수만큼 가지런히 설치하여 놓은 제단 형태이다. 반석의 제단이나 165㎡~200㎡의 넓이에 돌담 등 울타리도 두르지 않은 상태의 비탈진 자연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제단에서 제의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관들이 제단 옆에 마련된 임시 천막 거처를 제청으로 삼아 정성을 다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수고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찾을 수 있다. 호근동은 서귀포 시내에서 서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으며 바닷가에서부터 중산간에 이르기까지 넓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농촌마을이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산악을 이용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 때문인지 호근동의 포제단은 각시바위 정상 부근에 마련되어 있다.

호근동에서 포제는 정월 상정일에 치른다. 제관은 제청으로 입재하여 사흘 동안 정성을 들인 뒤 제의봉행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호근동에서는 다른 마을과 달리 입재 사흘 전에 제청으로 입재하여 정성을 들인다. 입재 사흘째 아침이 되면 각시바위에 있는 포제단으로 제청을 옮겨 정성을 들이다가 제의를 지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제의 하루 전날 각시바위 제청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예행연습을 한 뒤 이튿날 자정에 제의를 지내는 점 또한 다른 마을과 차이를 보인다.

노지형 포제단의 경우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임시 거처로 천막을 설치한다. 이때 사람이 대기하는 곳과 제물을 준비하는 곳으로 나누어 설치해야 한다. 호근동의 경우 각시바위 주변 포제단에 오래전부터 천막을 설치하던 곳에 바닥을 평탄하게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나즈막하게나마 돌담을 둘러 다른 지역과 구분 하고 있다.

난방을 위해 임시 거처인 천막 안에는 석유난로를 이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제관들은 천막 밖에 피운 모닥불에 의지해 추위와 졸음을 쫓는 편이었다.

ㅇ돌담형
돌담형은 돌로 담을 둘러쌓고 그 내부에 제단을 설치한 형태이다. 제주도 내 포제단의 일반적인 형태로 가장 많이 있는 편이다. 제단 형태는 비가림이 있는 형태와 비가림이 없는 형태로 구분되기도 한다.

비가림이 없는 형태로는 한림읍 명월리, 해월읍 하가리, 표선면 성읍리 등지의 제단이 있다. 명월리의 경우 1,000㎡ 정도의 포제단을 각석으로 돌담을 둘렀다. 그리고 마을로 연결된 길가에는 출입구(出入口)로 살창의 철문(鐵門)을 설치하였다.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가장 구석진 자리에 제단이 형성되어 있다. 다듬질한 큰 판석(板石)을 제단(祭壇)으로 삼고 그 아래에 받침을 돋우는 형식이다. 제단 앞에는 향로석(香爐石)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제단 주변에 관세위의 위치와 집례, 찬자의 위치도 작은 석재로 표시하고 있다.

하가리의 경우 660㎡ 정도 포제단의 경계를 자연석으로 담을 둘러 다른 지역과 경계를 지었다. 그리고 산업도로로 연결된 길가에는 출입구로 살창의 철문을 설치하였다. 살창을 들어서면 제관들이 입재 정성을 들이는 제청이 마련되어 있다. 그 안쪽의 깊고 높은 쪽에 작은 자연석 판석을 여러 장 모아 넓은 제단을 설치하였다. 그 앞쪽에는 작은 향로석을 놓았다.

성읍리의 경우 1983년 조성한 제청 옆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난 안쪽에 330㎡ 정도 포제단을 자연석으로 담을 둘러 다른 지역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 조금 낮은 곳에 조그마하게 돌담을 둘러 하단을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출입구에 출입문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다. 포제단의 제단은 출입구의 반대편 안쪽에 설치되어 있다. 장방형(長方形)의 넓은 반석(盤石)이 지면에 설치되고, 향로석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형태이다. 이 같은 형태의 포제단은 성산읍 온평리도 같다.

연미마을의 경우 제단 청소를 할 때 제단 전부를 덮을 수 있도록 제단 안에 천막을 설치하여 제의봉행에 임하고 있고, 법환동의 경우 비가림 시설이 없지만 아예 비닐하우스를 전체적으로 설치하여 우천이나 바람 등에 대비하고 있다.

비가림이 있는 형태로는 애월읍 애월리, 아라1동, 2동 등지의 제단이다. 애월리의 경우 각석으로 담을 두르고 그 내부에 제관들이 옮겨다니는 ‘신도’(神道)를 판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 이외 지역은 소나무를 심어 조경 하였다. 그 안쪽에 청기와를 얹은 비가림 시설을 하고 아래에 두꺼운 가공 판석(板石) 두 장을 받침에 고여 놓아 제단을 만들고, 그 앞에 향로석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같이 동일 포제단 내에 신위(神位) 2위를 함께 모시게 되어 토신(土神)과 포신(酺神)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애월리와 같이 2신위(里祀之神과 酺神之位)를 함께 모시는 마을로는 애월읍 유수암리를 들 수 있다.

아라1동의 경우 각석으로 담을 두른 다음 기와를 얹었으며, 담 안쪽은 시멘트 포장으로 단장하였다. 출입구 쪽이 마을을 향해 자리 잡도록 하였으며, 제의봉행 때 이하였으며, 위에 비가림 시설을 하고 기와를 얹었다. 제물을 진설하는 제단 뒤에는 이사(里祀)라고 음각(陰刻)한 신위(神位)를 세웠다.

ㅇ당우형
당우형은 포제를 모시는 제단으로 별도의 공간을 확보하여 치르는 경우를 말한다. 이 같은 경우 제관들의 정성을 위한 금기의 공간이 별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이 포제단 안에서 입재 생활을 하다가 제의봉행을 하는 형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신촌리의 경우 신촌향사를 이용하고 있다. 원래 신촌향사는 향사와 관리사로 갖추어진 건물로, 1975년에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 때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곳이었다. 정확히 언제 건립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중동 길가에 있던 것을 1805년(순조 5)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몇 차례의 보수와 개조로 변형된 것을 옛 모습처럼 보수하여 신촌리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77년에 사무소를 새로 지어 이사한 뒤로 사용치 않고 있다.

제청으로 쓰고 있는 향사 건물은 전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우진각 지붕 중앙의 대청이 넓은 기와 건물이다. 이곳에서 제관들의 사흘에 걸친 입재 정성은 물론 신촌리 포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관리사 건물은 향사 왼쪽에 위치하며, 전면 세 칸 우진각 진 기와지붕 건물이다.

건입동의 경우 포제당을 이용하고 있다. 원래 건입동의 포제단은 금산수원지 상류 부근에 있었다. 지금의 사라봉 중턱의 이 자리에 절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 1991년경 마을 사람들이 제단을 조성하고 위패를 모시는 신주각[삼신위(三神位)로 토신지위(土神之位), 포신지위(酺神之位), 가신지위(街神之位)의 삼신위를 가리킨다]을 설치하면서부터 포제당(酺祭堂)으로 가꾸어지게 된 것이다.

삼양3동인 벌랑마을의 경우 마을회관을 이용하고 있다. 원래 삼양3동의 포제단은 마을 내 깨끗한 곳을 골라 포제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회관이 마련돼 회관 안에 경로당이 개설되고 난방 시설과 취사가 가능한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제청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을회관 2층에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별도의 공간이 있어 그곳에 제단을 설치하고 포제를 봉행하게 되었다. 특히 삼양3동의 경우 바닷가 마을이다 보니 어촌계에서 포제와 용신제가 함께 치러지고 있다. 용신제당이 마을회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어 마을회관이 더욱 유리한 곳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산리의 경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옛 초등학교 옆에 슬래브로 포제단을 만들어 제의봉행에만 활용하고 일체 정성은 마을회관을 이용하고 있다. 슬래브 건물 안에는 판석(板石)으로 만들어 놓은 제단만 있을 뿐 아무런 시설이나 이용물은 없기 때문에 일 년에 한 차례 포제봉행에만 이용하고 있다.

이상 3개 유형으로 나누었으나 노지형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여기서 발전하여 다른 공간과 포제단을 구분하여 경계를 지을 필요가 있을 때 이루어진 것이 돌담형인 것으로 보인다. 당우형은 후대에 오면서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차량 등으로 제청을 방문하는 사람이 늘면서 넓고 편리한 곳을 찾다가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제주도의 포제단은 당초 개소리와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음적인 공간을 찾아 형성하였으나 후대에 오면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면서 깨끗한 곳을 찾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포제단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으로는 돌담형이 기본이지만 차츰 당우형으로 변하고 있고, 노지형은 가끔 있다.

참조

포신 포제

참고문헌

제주 유교식마을제의 전승현장 (김동섭,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본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