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주고사(宅基神告祀)

터주고사

한자명

宅基神告祀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 김명자(金明子)

정의

집터를 지키는 터주신에게 집안의 평안을 위해 지내는 고사. 터주고사, 터주제, 텃고사라고도 한다. 터주는 집터를 맡고 있는 신으로서 터줏대감, 텃대감, 터전, 터신, 지신, 토주, 기주(基主) 등 다양하게 불린다. 집터를 맡아보고 있으면서 집안의 액운을 거두어 주고 재복을 주는 신이다.

역사

터주고사의 역사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고사는 신을 향해 지내는 것이어서 우선 신의 존재와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터주에 해당되는 지신(地神)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 처용가(處容歌)와 망해사(望海寺) 조(條)에 나타난다.

지신과 산신(山神)은 장차 나라가 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경계하게 하였지만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탐락(耽樂)을 더욱 심하게 한 까닭에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던 것이라 한다.

지신에 대한 이 기록은 가신(家神)과 직접 관련되지 않지만 가신의 근거는 찾아볼 수 있어 터주의 오랜 역사성을 추정할 수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으레 고사와 같은 의례가 행해진다. 이러한 의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나타난다.

1927년에 간행된 『조선무속고』에 이어 1929년에 나온 『조선의 귀신』, 1938년에 간행된 『석전․기우․안택(釋奠․祈雨․安宅)』에는 터주신앙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원류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터주고사는 행해졌으리라는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신과 관련된 의례에 대해서는 이미 고려시대 자료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칠석날 공민왕이 공주와 내정(內庭)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민가에서 칠석날 칠성신에게 비는 것과 관련되는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또 걸교(乞巧)는 민가에서 부녀자들이 칠석날 바느질 솜씨를 빈다거나 아이들의 시험운(試驗運)을 위해 색실을 자녀의 오지랖에 넣어 두는 것과 관련시킬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세시풍속이자 가정신앙의 범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음력 시월 그믐날 마구간에 팥 시루떡을 차려 놓고 신에게 말의 건강을 빌었다는 내용과 시월상달에 무당을 불러다가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더라도 가신에 대한 의례 역시 유교식 제사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정신앙의 의례인 고사는 긴 역사성을 지니는데 따라서 터주고사 역시 긴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용

터주의 자리는 뒤뜰 장독대 옆이다. 신체(神體)는 주로 터줏가리를 만들어 모신다. 터줏가리는 서너 되들이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은 것이다.

터줏단지 안에 넣는 벼는 해마다 햇벼가 날 때마다 갈아 넣는다. 이때 갈아낸 묵은 벼는 남을 주지 않고 밥을 짓거나 떡을 쪄서 가족끼리만 먹는다. 이 곡물은 복이 담긴 신성물로서 남을 주면 복이 나가기 때문에 내보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한다. 햇벼로 갈아 넣을 때에는 간단하게 고사를 지낸다.

터주고사를 지낼 때에는 터줏가리의 짚주저리를 갈고 왼새끼로 허리를 감은 뒤 왼새끼 사이에 한지를 꽂아 신성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옷 갈아입힌다’라고 한다,

충청남도지역에서는 터주를 지신이라고도 한다. 주요 가신으로 여겨 음력 정월 중 길일(吉日)을 잡아 지신제(地神祭)를 지낸다. 지신제라고는 하지만 지신뿐만 아니라 다른 가신에게도 두루 의례를 행하는 것은 다른 지역의 가신제(家神祭)와 마찬가지이다. 가정고사를 지신제라 할 만큼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터주의 신체로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짚가리 형태이다. 짚가리는 농경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편 문헌에는 짚가리뿐만 아니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에서 터주신[土主神]의 신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쌀과 베[麻布]를 볏짚에 넣어 부엌 뒷벽에 놓아둔다. 무릇 가정에서는 비단을 한 필 사와서 그 앞부분(속명 토끗)을 잘라 신을 모신 볏짚에 매달아 두는데, 마치 국수가게의 사지(絲紙) 모양과 같다. 요즈음 풍속에 국수가게에서는 종이를 잘라 걸어 놓는데 이 사지를 초패(招牌)라 한다. 10월에 농사가 끝난 뒤 안택신사(安宅神祀)에서 무녀는 먼저 성주를 모시고, 나중에 토주를 모신다.

이 기록을 보면 터주의 신체는 국수집의 사지(絲紙) 모양을 하고 있다. 요즘도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짚주저리를 씌운 짚가리 형태의 신체가 아니다.

『조선무속고』에 이어 『조선의 귀신』에는 터주를 기주(基主)라고 하면서 신체는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전․기우․안택』에서는 터주 신체를 “작은 항아리 속에 백미 또는 나락․수수 등의 곡물을 넣은 것을 짚가리로 씌운 것으로 뒤뜰 또는 장독대의 구석에 안치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터주 신체가 국수가게의 사지 모양, 단지를 짚가리로 덮은 모양, 돌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것은 단지를 짚가리로 덮은 형태이다. ‘초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장에는 터주 신체를 돌로 모시는 예가 있다. 즉 터주의 신체가 자연석인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의 한 가정에서는 자연석을 터주의 신체로 모신다. 이를 터줏대감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경우 돌을 터주 신체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한다.

경기도 김포시에는 벙거지쾌자를 한지로 싼 것을 터줏대감 또는 터대감이라고 하는 독특한 자료도 있다. 거실 구석 모서리의 왼쪽에 선반을 달아 그 위에 봉안했다. 이 터줏대감은 굿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 무당이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한다. 애초 무당이 굿을 할 때 입던 것인데 이 댁에서 터주를 모시면서 터주의 신체가 되었다. 이 경우 터주의 신체는 무복(巫服)이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의 다른 가정에서도 이와 흡사한 사례가 있다.

경기도 가평군의 한 가정의 터주 신체는 ‘터주막대기’에 주저리를 씌운 형태이다. 그 앞에 제단처럼 넙적한 돌을 놓아두었다. 그 자리는 뒤꼍이다. 봄과 가을에 제의를 지낸다. 봄에는 음력 이월 초하루, 가을에는 추수 후 햇곡식을 찧어 온 뒤에 길일을 잡아 고사를 지낸다. 여주지역에도 이와 흡사한 형태의 터줏가리가 있다. 밤나무를 깎아 만든 ‘말뚝’을 신체로 삼았다. 이를 ‘터주 막대기’라고 한다. 대주가 짚으로 상투를 틀어서 이 막대기 위에 얹어 놓는다. 말뚝을 박아서 그 위에 주저리를 덮어 놓은 형태도 있다. 그러나 고사 방식은 대동소이하다.

터주의 자리는 예외가 있지만 대개 집 뒤꼍 장독대 주변 장독대로, 집 안이다. 집 밖에 터주를 모신 경우도 있다.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의 한 가정에서는 집 밖에 터줏대감을 모시고 있다. 신체는 터줏가리이다. 이 터줏가리는 할머니가 아파서 무당이 치성을 올린 뒤에 봉안한 것이다. 집 주인은 이 터줏대감을 ‘산’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집안고사를 지낼 때 반드시 마을에 대한 고사를 먼저 지낸다. 터줏대감을 산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을고사를 지낸 뒤에 집안고사를 지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터주가 비록 집 밖이라고는 하지만 그 집의 범위 내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지역사례

터주는 집터를 지켜 주고 재복을 주는 지신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는 터주를 대체로 신체 없이 건궁으로 모신다. 그러나 가정에 따라 고방의 쌀독을 터주단지라고 인식하며 위한다. 터주에 대한 의례는 성주와 마찬가지로 일 년에 한번 햅쌀이 나는 음력 10월이다. 이때 수확한 햅쌀로 떡을 만들어 터주고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애기 잘 봐 주면 터줏단지 쌀 퍼서 밥해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터주단지 안에 있는 쌀을 소중히 여겼다.

경기도 여주군의 한 가정에서는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터줏가리가 뒤꼍 장독대에 있다. 신체 역시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짚으로 주저리를 만들고 위에는 모자처럼 씌운 원뿔형이다. 터줏가리의 허리에는 왼새끼를 감아 놓으며, 가리 안에는 옹기로 된 한 말들이의 아담한 터줏단지가 들어 있다. 터주단지 안에는 벼가 가득 담겨 있다. 햇벼가 나면 새 벼로 갈고 터주단지 안에 들어 있던 묵은 벼는 찧어 밥을 지어 먹는다. 고사를 지낼 때에는 시루떡과 청수(淸水)를 올린다. 터주를 비롯한 각 가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면 떡을 조금씩 떼어서 동서남북에다 던진다. 터주에게 시루째 놓아도 빌고 나서는 떡을 떼어 터줏자리에 놓는다. 빌 때에는 집안과 자손이 잘되라는 말을 한다.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가을이면 터주의 짚주저리를 새 것으로 바꾼다. 짚주저리는 남편이 만든다.

여주의 다른 가정에서는 뒤꼍 감나무 옆에 터줏가리가 있다. 이를 ‘토주항아리’라고 한다. 토주항아리를 덮는 짚 주저리는 남편이 만들며, 해마다 가을이면 짚주저리를 갈아 준다.

토주항아리는 한 말들이 옹기항아리이며, 고사를 지낼 때에는 시루떡과 청수를 올린다. 먼저 방에 떡시루를 놓고 빈 다음 마루(성주)에 올리고 다음으로 터주에 올린다. 토주항아리 안에 전에는 벼를 넣었으나 근래는 지전을 넣어 둔다.

마을에서 터주항아리에 돈을 넣는 경우는 흔하다. 이는 곡물이 상하는 까닭도 있지만 벼농사가 줄어들면서 곡물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고사를 지낼 때 콩시루떡은 터주, 팥 시루떡은 성주에게 각각 정화수와 함께 올린다. 터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제보자들은 고사를 지내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다.

예전처럼 정식으로 고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음력 10월이면 터줏가리 안에 들어 있는 벼를 햇벼로 갈고 물[정화수]을 떠 올려 간단하게 예를 갖춘다.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어재리 압수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터주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으로, 집안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간주한다. 사시사철 터를 눌러 줌으로 집터의 기운이 세더라도 잡귀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 일 년에 정월, 유두, 10월에 고사를 지낸다. 쌀을 담은 단지를 놓아두는데 빗물이 들거나 바람을 막기 위해 ‘유두저리’(주저리)를 틀어 씌어 놓고 터줏가리라고 한다.

장광은 터주가 좌정하여 있는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하고 신성한 장소로 여긴다. 장광에 다른 집에서 그릇을 갖다 놓으면 주부가 앓아 눕는 일이 종종 있다. ‘터주가 계신 깨끗한 공간’에 함부로 물건을 가져다 놓아 동티(동토)가 난 것이다. 따라서 남의 집 물건은 절대 가져다 놓지 말아야 한다. 사용하지 않은 그릇이나 깨끗한 그릇은 상관이 없다.

터주단지 안에는 3꼬대기(되) 분량의 쌀을 넣어 둔다. 유두에 터주단지 안의 쌀을 비워 내면 10월까지 빈 항아리 그대로 둔다. 쌀을 비워 낼 때에는 정성을 둘여 하기 때문에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시간에 청수를 올린다. 터주단지 안에 쌀을 열어 보았을 때 바구미가 생겼으면 집안이 좋지 않다고 간주하여 청수를 떠 놓고 “인간이 어리석으므로 좋게 해 주시오.”라고 일용수[비손]한다.

추수 후에 햇곡식으로 단지에 햅쌀을 채워 넣는다. 이때에도 쌀을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청수를 떠 올린다. 터주에 씌운 유두저리는 가을에 깨끗한 날을 잡아 태워 없애고 새것으로 만들어 씌운다.

아들이 큰일을 하러 타지에 나가거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는 터주에게 보살펴 달라고 치성을 드린다. 물 두 되 정도 들어가는 옹기그릇에 물을 떠다 올린다. 간혹 겨울에 터주에게 물을 떠 올리면 청수동이가 깨지기도 한다. 이는 주부의 정성이 부족해서 깨진 것이므로 터주께 사죄하고 새 그릇을 구입해 한다. 이사를 가게 되면 터주도 유두저리까지 씌워서 그대로 가지고 간다. 이 댁에서는 터주를 각별히 섬겨 유월유두날 고사도 터주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북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상이전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터주고사를 터제라고 한다. 그리고 터주를 터전이라 하여 자신의 집터인 마당을 위한다. 터주를 위하면서 집터나 자손들이 모두 잘되기를 기원한다. 과거에는 보살을 데려와 날을 받아 치성을 드렸지만 근래에는 내외가 간소하게 지낸다. 터전을 위할 때는 음력 10월 중에 날을 받아서 일 년에 한 번만 정성을 들인다. 일 년 중에는 날이 하루뿐이므로 잊으면 안 된다.

터주를 위할 때는 맨 먼저 청송장에 나가서 각종 제물을 구입해 온다. 특별히 황토금줄을 치지는 않는다. 터전, 조왕, 골목, 산신을 모두 위한다. 특이한 점은 터주를 위할 때(고사지낼 때) 반드시 조왕에다 숯을 둔다는 것이다. 지금은 부엌아궁이가 없어서 식탁 위에 숯을 둔다. 조왕에게 올리는 제물인 밥, 나물 등을 함께 올린다. 제보자인 며느리는 그 까닭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전에 시어머니가 하던 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제보자가 어린 시절에는 가을이면 날을 받아서 마당에 자리를 깔고 갖가지 제물, 햇곡식으로 쌀 한 말, 물 한 동이를 두고 터주를 위했다고 한다. 그러면 경쟁이가 와서 경을 하고 대주가 절을 한 뒤 소지를 올리면서 집안이 화목하기를 빌었다.

참고문헌

가신신앙의 역사 (김명자, 한국민속사 입문, 지식산업사, 1886), 朝鮮の 神 (村山智順, 조선총독부, 1929), 釋奠․祈雨․安宅 (조선총독부, 국서관행회, 1938), 한국민간신앙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3), 가신신앙의 성격과 여성상 (김명자, 한국여성연구 13, 효성여자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1984), 업신의 성격과 다른 가택신과의 친연성 (김명자, 한국민속학보 7, 한국민속학회, 1996), 경기 민속지 Ⅱ-신앙 (경기도박물관, 1999), 경기지역의 터주신앙 (김명자, 역사민속학 9, 한국역사민속학회, 1999),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한국․고려시대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의 가정신앙-충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한국의 가정신앙-경북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조선무속고 (이능화, 서영대 역주, 창비, 2008), 문헌과 현지조사 자료를 통해 본 칠석세시와 전승 (김명자, 인문과학연구 9, 안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터주고사

터주고사
한자명

宅基神告祀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제의

집필자 김명자(金明子)

정의

집터를 지키는 터주신에게 집안의 평안을 위해 지내는 고사. 터주고사, 터주제, 텃고사라고도 한다. 터주는 집터를 맡고 있는 신으로서 터줏대감, 텃대감, 터전, 터신, 지신, 토주, 기주(基主) 등 다양하게 불린다. 집터를 맡아보고 있으면서 집안의 액운을 거두어 주고 재복을 주는 신이다.

역사

터주고사의 역사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고사는 신을 향해 지내는 것이어서 우선 신의 존재와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터주에 해당되는 지신(地神)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 처용가(處容歌)와 망해사(望海寺) 조(條)에 나타난다.

지신과 산신(山神)은 장차 나라가 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경계하게 하였지만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탐락(耽樂)을 더욱 심하게 한 까닭에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던 것이라 한다.

지신에 대한 이 기록은 가신(家神)과 직접 관련되지 않지만 가신의 근거는 찾아볼 수 있어 터주의 오랜 역사성을 추정할 수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으레 고사와 같은 의례가 행해진다. 이러한 의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나타난다.

1927년에 간행된 『조선무속고』에 이어 1929년에 나온 『조선의 귀신』, 1938년에 간행된 『석전․기우․안택(釋奠․祈雨․安宅)』에는 터주신앙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원류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터주고사는 행해졌으리라는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신과 관련된 의례에 대해서는 이미 고려시대 자료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칠석날 공민왕이 공주와 내정(內庭)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민가에서 칠석날 칠성신에게 비는 것과 관련되는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또 걸교(乞巧)는 민가에서 부녀자들이 칠석날 바느질 솜씨를 빈다거나 아이들의 시험운(試驗運)을 위해 색실을 자녀의 오지랖에 넣어 두는 것과 관련시킬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세시풍속이자 가정신앙의 범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음력 시월 그믐날 마구간에 팥 시루떡을 차려 놓고 신에게 말의 건강을 빌었다는 내용과 시월상달에 무당을 불러다가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더라도 가신에 대한 의례 역시 유교식 제사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정신앙의 의례인 고사는 긴 역사성을 지니는데 따라서 터주고사 역시 긴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용

터주의 자리는 뒤뜰 장독대 옆이다. 신체(神體)는 주로 터줏가리를 만들어 모신다. 터줏가리는 서너 되들이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으로 원추형 모양을 만들어 덮은 것이다.

터줏단지 안에 넣는 벼는 해마다 햇벼가 날 때마다 갈아 넣는다. 이때 갈아낸 묵은 벼는 남을 주지 않고 밥을 짓거나 떡을 쪄서 가족끼리만 먹는다. 이 곡물은 복이 담긴 신성물로서 남을 주면 복이 나가기 때문에 내보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한다. 햇벼로 갈아 넣을 때에는 간단하게 고사를 지낸다.

터주고사를 지낼 때에는 터줏가리의 짚주저리를 갈고 왼새끼로 허리를 감은 뒤 왼새끼 사이에 한지를 꽂아 신성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옷 갈아입힌다’라고 한다,

충청남도지역에서는 터주를 지신이라고도 한다. 주요 가신으로 여겨 음력 정월 중 길일(吉日)을 잡아 지신제(地神祭)를 지낸다. 지신제라고는 하지만 지신뿐만 아니라 다른 가신에게도 두루 의례를 행하는 것은 다른 지역의 가신제(家神祭)와 마찬가지이다. 가정고사를 지신제라 할 만큼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터주의 신체로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짚가리 형태이다. 짚가리는 농경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편 문헌에는 짚가리뿐만 아니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에서 터주신[土主神]의 신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쌀과 베[麻布]를 볏짚에 넣어 부엌 뒷벽에 놓아둔다. 무릇 가정에서는 비단을 한 필 사와서 그 앞부분(속명 토끗)을 잘라 신을 모신 볏짚에 매달아 두는데, 마치 국수가게의 사지(絲紙) 모양과 같다. 요즈음 풍속에 국수가게에서는 종이를 잘라 걸어 놓는데 이 사지를 초패(招牌)라 한다. 10월에 농사가 끝난 뒤 안택신사(安宅神祀)에서 무녀는 먼저 성주를 모시고, 나중에 토주를 모신다.

이 기록을 보면 터주의 신체는 국수집의 사지(絲紙) 모양을 하고 있다. 요즘도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짚주저리를 씌운 짚가리 형태의 신체가 아니다.

『조선무속고』에 이어 『조선의 귀신』에는 터주를 기주(基主)라고 하면서 신체는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전․기우․안택』에서는 터주 신체를 “작은 항아리 속에 백미 또는 나락․수수 등의 곡물을 넣은 것을 짚가리로 씌운 것으로 뒤뜰 또는 장독대의 구석에 안치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터주 신체가 국수가게의 사지 모양, 단지를 짚가리로 덮은 모양, 돌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것은 단지를 짚가리로 덮은 형태이다. ‘초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장에는 터주 신체를 돌로 모시는 예가 있다. 즉 터주의 신체가 자연석인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의 한 가정에서는 자연석을 터주의 신체로 모신다. 이를 터줏대감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경우 돌을 터주 신체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한다.

경기도 김포시에는 벙거지와 쾌자를 한지로 싼 것을 터줏대감 또는 터대감이라고 하는 독특한 자료도 있다. 거실 구석 모서리의 왼쪽에 선반을 달아 그 위에 봉안했다. 이 터줏대감은 굿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 무당이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한다. 애초 무당이 굿을 할 때 입던 것인데 이 댁에서 터주를 모시면서 터주의 신체가 되었다. 이 경우 터주의 신체는 무복(巫服)이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의 다른 가정에서도 이와 흡사한 사례가 있다.

경기도 가평군의 한 가정의 터주 신체는 ‘터주막대기’에 주저리를 씌운 형태이다. 그 앞에 제단처럼 넙적한 돌을 놓아두었다. 그 자리는 뒤꼍이다. 봄과 가을에 제의를 지낸다. 봄에는 음력 이월 초하루, 가을에는 추수 후 햇곡식을 찧어 온 뒤에 길일을 잡아 고사를 지낸다. 여주지역에도 이와 흡사한 형태의 터줏가리가 있다. 밤나무를 깎아 만든 ‘말뚝’을 신체로 삼았다. 이를 ‘터주 막대기’라고 한다. 대주가 짚으로 상투를 틀어서 이 막대기 위에 얹어 놓는다. 말뚝을 박아서 그 위에 주저리를 덮어 놓은 형태도 있다. 그러나 고사 방식은 대동소이하다.

터주의 자리는 예외가 있지만 대개 집 뒤꼍 장독대 주변 장독대로, 집 안이다. 집 밖에 터주를 모신 경우도 있다.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의 한 가정에서는 집 밖에 터줏대감을 모시고 있다. 신체는 터줏가리이다. 이 터줏가리는 할머니가 아파서 무당이 치성을 올린 뒤에 봉안한 것이다. 집 주인은 이 터줏대감을 ‘산’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집안고사를 지낼 때 반드시 마을에 대한 고사를 먼저 지낸다. 터줏대감을 산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을고사를 지낸 뒤에 집안고사를 지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터주가 비록 집 밖이라고는 하지만 그 집의 범위 내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지역사례

터주는 집터를 지켜 주고 재복을 주는 지신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는 터주를 대체로 신체 없이 건궁으로 모신다. 그러나 가정에 따라 고방의 쌀독을 터주단지라고 인식하며 위한다. 터주에 대한 의례는 성주와 마찬가지로 일 년에 한번 햅쌀이 나는 음력 10월이다. 이때 수확한 햅쌀로 떡을 만들어 터주고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애기 잘 봐 주면 터줏단지 쌀 퍼서 밥해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터주단지 안에 있는 쌀을 소중히 여겼다.

경기도 여주군의 한 가정에서는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터줏가리가 뒤꼍 장독대에 있다. 신체 역시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짚으로 주저리를 만들고 위에는 모자처럼 씌운 원뿔형이다. 터줏가리의 허리에는 왼새끼를 감아 놓으며, 가리 안에는 옹기로 된 한 말들이의 아담한 터줏단지가 들어 있다. 터주단지 안에는 벼가 가득 담겨 있다. 햇벼가 나면 새 벼로 갈고 터주단지 안에 들어 있던 묵은 벼는 찧어 밥을 지어 먹는다. 고사를 지낼 때에는 시루떡과 청수(淸水)를 올린다. 터주를 비롯한 각 가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면 떡을 조금씩 떼어서 동서남북에다 던진다. 터주에게 시루째 놓아도 빌고 나서는 떡을 떼어 터줏자리에 놓는다. 빌 때에는 집안과 자손이 잘되라는 말을 한다.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가을이면 터주의 짚주저리를 새 것으로 바꾼다. 짚주저리는 남편이 만든다.

여주의 다른 가정에서는 뒤꼍 감나무 옆에 터줏가리가 있다. 이를 ‘토주항아리’라고 한다. 토주항아리를 덮는 짚 주저리는 남편이 만들며, 해마다 가을이면 짚주저리를 갈아 준다.

토주항아리는 한 말들이 옹기항아리이며, 고사를 지낼 때에는 시루떡과 청수를 올린다. 먼저 방에 떡시루를 놓고 빈 다음 마루(성주)에 올리고 다음으로 터주에 올린다. 토주항아리 안에 전에는 벼를 넣었으나 근래는 지전을 넣어 둔다.

이 마을에서 터주항아리에 돈을 넣는 경우는 흔하다. 이는 곡물이 상하는 까닭도 있지만 벼농사가 줄어들면서 곡물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고사를 지낼 때 콩시루떡은 터주, 팥 시루떡은 성주에게 각각 정화수와 함께 올린다. 터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제보자들은 고사를 지내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다.

예전처럼 정식으로 고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음력 10월이면 터줏가리 안에 들어 있는 벼를 햇벼로 갈고 물[정화수]을 떠 올려 간단하게 예를 갖춘다.

충남 금산군 부리면 어재리 압수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터주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으로, 집안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간주한다. 사시사철 터를 눌러 줌으로 집터의 기운이 세더라도 잡귀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 일 년에 정월, 유두, 10월에 고사를 지낸다. 쌀을 담은 단지를 놓아두는데 빗물이 들거나 바람을 막기 위해 ‘유두저리’(주저리)를 틀어 씌어 놓고 터줏가리라고 한다.

장광은 터주가 좌정하여 있는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하고 신성한 장소로 여긴다. 장광에 다른 집에서 그릇을 갖다 놓으면 주부가 앓아 눕는 일이 종종 있다. ‘터주가 계신 깨끗한 공간’에 함부로 물건을 가져다 놓아 동티(동토)가 난 것이다. 따라서 남의 집 물건은 절대 가져다 놓지 말아야 한다. 사용하지 않은 그릇이나 깨끗한 그릇은 상관이 없다.

터주단지 안에는 3꼬대기(되) 분량의 쌀을 넣어 둔다. 유두에 터주단지 안의 쌀을 비워 내면 10월까지 빈 항아리 그대로 둔다. 쌀을 비워 낼 때에는 정성을 둘여 하기 때문에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시간에 청수를 올린다. 터주단지 안에 쌀을 열어 보았을 때 바구미가 생겼으면 집안이 좋지 않다고 간주하여 청수를 떠 놓고 “인간이 어리석으므로 좋게 해 주시오.”라고 일용수[비손]한다.

추수 후에 햇곡식으로 단지에 햅쌀을 채워 넣는다. 이때에도 쌀을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청수를 떠 올린다. 터주에 씌운 유두저리는 가을에 깨끗한 날을 잡아 태워 없애고 새것으로 만들어 씌운다.

아들이 큰일을 하러 타지에 나가거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는 터주에게 보살펴 달라고 치성을 드린다. 물 두 되 정도 들어가는 옹기그릇에 물을 떠다 올린다. 간혹 겨울에 터주에게 물을 떠 올리면 청수동이가 깨지기도 한다. 이는 주부의 정성이 부족해서 깨진 것이므로 터주께 사죄하고 새 그릇을 구입해 한다. 이사를 가게 되면 터주도 유두저리까지 씌워서 그대로 가지고 간다. 이 댁에서는 터주를 각별히 섬겨 유월유두날 고사도 터주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북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상이전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터주고사를 터제라고 한다. 그리고 터주를 터전이라 하여 자신의 집터인 마당을 위한다. 터주를 위하면서 집터나 자손들이 모두 잘되기를 기원한다. 과거에는 보살을 데려와 날을 받아 치성을 드렸지만 근래에는 내외가 간소하게 지낸다. 터전을 위할 때는 음력 10월 중에 날을 받아서 일 년에 한 번만 정성을 들인다. 일 년 중에는 날이 하루뿐이므로 잊으면 안 된다.

터주를 위할 때는 맨 먼저 청송장에 나가서 각종 제물을 구입해 온다. 특별히 황토나 금줄을 치지는 않는다. 터전, 조왕, 골목, 산신을 모두 위한다. 특이한 점은 터주를 위할 때(고사지낼 때) 반드시 조왕에다 숯을 둔다는 것이다. 지금은 부엌에 아궁이가 없어서 식탁 위에 숯을 둔다. 조왕에게 올리는 제물인 밥, 나물 등을 함께 올린다. 제보자인 며느리는 그 까닭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전에 시어머니가 하던 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제보자가 어린 시절에는 가을이면 날을 받아서 마당에 자리를 깔고 갖가지 제물, 햇곡식으로 쌀 한 말, 물 한 동이를 두고 터주를 위했다고 한다. 그러면 경쟁이가 와서 경을 하고 대주가 절을 한 뒤 소지를 올리면서 집안이 화목하기를 빌었다.

참고문헌

가신신앙의 역사 (김명자, 한국민속사 입문, 지식산업사, 1886)
朝鮮の 神 (村山智順, 조선총독부, 1929)
釋奠․祈雨․安宅 (조선총독부, 국서관행회, 1938)
한국민간신앙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3)
가신신앙의 성격과 여성상 (김명자, 한국여성연구 13, 효성여자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1984)
업신의 성격과 다른 가택신과의 친연성 (김명자, 한국민속학보 7, 한국민속학회, 1996)
경기 민속지 Ⅱ-신앙 (경기도박물관, 1999)
경기지역의 터주신앙 (김명자, 역사민속학 9, 한국역사민속학회, 1999)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한국․고려시대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의 가정신앙-충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한국의 가정신앙-경북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조선무속고 (이능화, 서영대 역주, 창비, 2008)
문헌과 현지조사 자료를 통해 본 칠석세시와 전승 (김명자, 인문과학연구 9, 안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