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왕중발

조왕중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신체

집필자 박대재(朴大在)

정의

부엌을 관장하는 가신인 조왕의 신체로 모시는 작은 물그릇.

내용

조왕의 신체는 전국적으로 ‘건궁’이라 하여 형태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조왕중발을 많이 모신다. 조왕중발은 특히 전라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개 부뚜막 뒤 벽 아래쪽에 흙으로 조그만 단(돈대)을 세우고 거기에 정화수를 담은 중발을 얹어 놓는다. 정화수는 매일 새벽에 갈아 넣기도 하고 삭망에만 갈기도 하며, 정초‧한식‧추석 같은 명절에만 갈아 넣기도 한다. 이는 조왕을 모시는 주부의 정성에 따라 일정치 않다. 밥그릇인 바리(중발) 대신 반찬 그릇인 작은 보시기(조왕보시기)를 사용하기도 하며, 강원도와 서울에서는 작은 항아리에 쌀을 담은 ‘조왕단지’를 신체로 모시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조왕의 신체는 조왕중발인 경우(전라, 충청), 신격 위패인 경우(경남), 솥뚜껑을 엎어 놓고 그 위에 음식을 차리는 경우(경북), 부뚜막 위에 한지와 마른 명태를 걸어 놓거나 조그만 항아리에 쌀을 담아 놓는 경우(강원), 바가지삼베 조각을 넣어 선반에 두거나 벽에 벽지나 헝겊을 붙여 놓는 경우(경기), 항아리에 쌀을 넣는 경우(서울), 특별한 신체 없이 ‘건궁’으로 모시는 경우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조왕중발의 형태가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조왕의 신체로 모시는 물그릇은 크기에 따라 조왕보시기나 조왕단지 또는 조왕그릇(조왕물그릇)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종지, 사발, 바가지, 옹자배기, 대접, 뚝배기 등도 조왕을 모시는 물그릇으로 쓰이기도 한다. 조왕중발에 담긴 물은 가족의 역병과 재액을 막고 씻어내는 정화력을 상징한다. 부엌에서 불을 관장하는 조왕에게 물을 올리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물과 불은 정화라는 공통적인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며, 아울러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불과 물을 함께 모신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역사

조왕의 신체로 바리나 단지를 모신 풍속은 부뚜막 시설이 처음 등장한 기원전 1세기 이후 삼한의 주거 유적으로부터 확인된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KC 38호 주거지의 부뚜막 시설 왼쪽 뒤에서 점토로 만든 작은 단이 확인되었고 그 위에서 목이 짧은 단지 한 점이 출토되었다. 토기 한 점만 따로 단 위에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는 조리용보다 부뚜막신에 대한 제의에 사용된 조왕중발과 같은 성격의 단지로 판단된다. 전남 곡성 오지리 철 10호 주거지 유적에서도 부뚜막 위 뒤쪽에서 너비 12.6㎝, 높이 4.9㎝의 적갈색 완(盌, 주발)형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역시 조왕의 신체로 모셔진 조왕중발의 예로 이해된다. 경남 진주시 평거동 삼국시대 15호 수혈건물지의 부뚜막 시설 오른쪽 벽면에서는 마치 감(龕)과 같이 벽체를 판 좁은 공간이 확인되었다. 그 속에서는 깨어진 발(鉢, 바리)형 토기 한 점이 출토되었다. 보고서에서는 부뚜막과 인접한 벽에 설치된 조리대와 유사한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감의 구조라는 점과 거기서 바리 한 점만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역시 제의적 성격의 조왕중발과 관련된 시설로 보인다.

이와 같이 1990년대 이후 삼한과 삼국시대의 부뚜막 유적에서 조왕중발(단지)로 추정되는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는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의 “조(竈)를 호(戶)의 서쪽에 둔다.”라는 기록과도 연결된다. 이 기록의 ‘조’에 대해서는 그동안 부뚜막 시설로 보는 견해와 부뚜막신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삼한의 주거지에서 부뚜막 시설과 함께 부뚜막신앙의 흔적이 확인됨에 따라 이 기록의 ‘조’는 단순히 부뚜막 시설뿐만 아니라 부뚜막신인 조왕까지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한과 삼국시대의 부뚜막 시설은 5세기 이후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전파됐으며, 이때 조왕중발을 신체로 모시던 풍속도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지바[千葉] 현 시바야마[芝山] 쇼자쿠[壓作] 유적의 58호 수혈건물지에서 8세기 초의 적색 하지키[土師器]가 출토되었으며 토기 바닥 바깥쪽에 ‘조신(竈神)’이라고 먹으로 쓴 글씨[墨書]가 확인되었다. 지바 현 도가네[東金] 구가다이[久我台] 유적의 주거지에서도 토기 벽 바깥쪽에 ‘조(竈)’라고 묵서된 하지키가 출토되었다. 도치기[栃木] 현 가미노카와[上三川] 다코미나미하라[多功南原] 유적과 도야마[富山]시 미즈하시아라마치(水橋荒町) 유적에서도 ‘조신(竈神)’이라고 묵서된 스에키[須惠器]의 저부(底部)와 뚜껑이 출토되었다. 이 묵서토기들의 성격은 조신을 제사할 때 사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부뚜막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파되면서 조왕의 신체로 토기를 모시던 풍속까지 함께 전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특히 지바 현 쇼자쿠 유적에서 출토된 ‘조신(竈神)’명 토기는 너비 12㎝, 높이 4㎝의 규모나 형태에서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유적의 완형 토기와 유사하여 전형적인 조왕중발의 고례(古例)로 주목된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조왕중발의 예는 조왕의 신체로 위패나 부적을 모시는 중국의 예와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례

근대까지 각 지역에 남아 있던 조왕중발의 민속을 살펴보면 전남 여수시 거문도의 민가에서는 부뚜막 위 중앙 정면 벽에 흙으로 조그만 단을 빚어 붙이고 그 위에 조그만 중발을 놓고 있는 사례가 많다. 중발 안에는 물이 들어 있고 뚜껑이 덮여 있기도 했다. ‘조왕물그릇’이라 하여 집안에 탈이 없으라고 모시는 것이었다. 특히 정월대보름, 유두, 백중, 추석, 섣달그믐 등 명절과 부모 제삿날 등에 주로 주부가 밥‧반찬‧술 등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새벽에 우물물을 떠서 갈아 넣되 초상 같은 유고시에는 물을 갈지 않는다고 한다. 여수시 초도에서도 조왕중발을 비슷하게 모신다. 다만 조그만 나무상자를 짜서 그 안에 조왕그릇을 넣고 부뚜막 뒤 벽 중앙에 걸어 놓는다. 전남 해남군 현산면 덕흥리에서는 남편의 밥그릇을 조왕의 신체로 쓰는 경우도 있다. 전북지역에서는 부뚜막 솥 사이에 높이 15㎝의 작은 돈대(평지보다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대)를 흙으로 빚어 만들고 중간 크기의 보시기에 냉수를 떠 놓는다. 충청지역에서도 전라도와 같이 부뚜막 뒤에 조왕중발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집을 떠나 객지에 있는 가족의 안전과 끼니를 위해 주부가 부뚜막 한 곳에 제장을 마련하고 집 떠난 식구의 밥사발에 정화수를 떠 놓는 사례도 확인된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소도마을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의 밥그릇에 매일 아침에 밥 반 공기 정도를 떠 두었다가 이튿날에 새 밥으로 갈아주는 곳도 있다. 전날 조왕에게 올린 밥은 점심 때 가족이 먹는다. 이는 조왕이 군대에 간 아들을 보살펴 줄 것이라고 믿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 옥실4리 대무마을에서는 조왕단지 옆에 찻독그릇(좀도리를 위해 마련한 그릇, 여기서 좀도리란 절미[節米]의 전라도 방언임)을 두었다가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주먹씩을 따로 담아두기도 한다.

조왕의 신체로 모셔지는 조왕중발은 일찍이 기원전 1세기 삼한의 부뚜막 유적에서 확인되는, 유래가 오래된 민속 유물이다. 이를 통해 가정에서 조왕을 모시는 신앙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민속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부엌 (김광언, 대원사, 1997), 墨書土器の硏究 (平川南, 吉川弘文館, 2000), 가신신앙 (장주근, 한국 민속의 세계 9-민간신앙‧기타신앙,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1), 竈神と竈の祭祀 (內田律雄, 季刊 考古學 87-特集: 古代祭祀の世界, 吉川弘文館, 2004), 한국의 가정신앙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2008), 삼한의 ‘납일제사’와 부뚜막신앙 (박대재, 한국사학보 37, 고려사학회, 2009), 조왕의 성격과 전승양상 (최숙경, 지방사와 지방문화 12, 2009), 주거와 조왕신앙 (박대재, 한국역사민속학강의 1, 한국역사민속학회, 민속원, 2010)

조왕중발

조왕중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가정신앙 > 신체

집필자 박대재(朴大在)

정의

부엌을 관장하는 가신인 조왕의 신체로 모시는 작은 물그릇.

내용

조왕의 신체는 전국적으로 ‘건궁’이라 하여 형태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조왕중발을 많이 모신다. 조왕중발은 특히 전라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개 부뚜막 뒤 벽 아래쪽에 흙으로 조그만 단(돈대)을 세우고 거기에 정화수를 담은 중발을 얹어 놓는다. 정화수는 매일 새벽에 갈아 넣기도 하고 삭망에만 갈기도 하며, 정초‧한식‧추석 같은 명절에만 갈아 넣기도 한다. 이는 조왕을 모시는 주부의 정성에 따라 일정치 않다. 밥그릇인 바리(중발) 대신 반찬 그릇인 작은 보시기(조왕보시기)를 사용하기도 하며, 강원도와 서울에서는 작은 항아리에 쌀을 담은 ‘조왕단지’를 신체로 모시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조왕의 신체는 조왕중발인 경우(전라, 충청), 신격 위패인 경우(경남), 솥뚜껑을 엎어 놓고 그 위에 음식을 차리는 경우(경북), 부뚜막 위에 한지와 마른 명태를 걸어 놓거나 조그만 항아리에 쌀을 담아 놓는 경우(강원), 바가지에 삼베 조각을 넣어 선반에 두거나 벽에 벽지나 헝겊을 붙여 놓는 경우(경기), 항아리에 쌀을 넣는 경우(서울), 특별한 신체 없이 ‘건궁’으로 모시는 경우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조왕중발의 형태가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조왕의 신체로 모시는 물그릇은 크기에 따라 조왕보시기나 조왕단지 또는 조왕그릇(조왕물그릇)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종지, 사발, 바가지, 옹자배기, 대접, 뚝배기 등도 조왕을 모시는 물그릇으로 쓰이기도 한다. 조왕중발에 담긴 물은 가족의 역병과 재액을 막고 씻어내는 정화력을 상징한다. 부엌에서 불을 관장하는 조왕에게 물을 올리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물과 불은 정화라는 공통적인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며, 아울러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불과 물을 함께 모신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역사

조왕의 신체로 바리나 단지를 모신 풍속은 부뚜막 시설이 처음 등장한 기원전 1세기 이후 삼한의 주거 유적으로부터 확인된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KC 38호 주거지의 부뚜막 시설 왼쪽 뒤에서 점토로 만든 작은 단이 확인되었고 그 위에서 목이 짧은 단지 한 점이 출토되었다. 토기 한 점만 따로 단 위에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는 조리용보다 부뚜막신에 대한 제의에 사용된 조왕중발과 같은 성격의 단지로 판단된다. 전남 곡성 오지리 철 10호 주거지 유적에서도 부뚜막 위 뒤쪽에서 너비 12.6㎝, 높이 4.9㎝의 적갈색 완(盌, 주발)형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역시 조왕의 신체로 모셔진 조왕중발의 예로 이해된다. 경남 진주시 평거동 삼국시대 15호 수혈건물지의 부뚜막 시설 오른쪽 벽면에서는 마치 감(龕)과 같이 벽체를 판 좁은 공간이 확인되었다. 그 속에서는 깨어진 발(鉢, 바리)형 토기 한 점이 출토되었다. 보고서에서는 부뚜막과 인접한 벽에 설치된 조리대와 유사한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감의 구조라는 점과 거기서 바리 한 점만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역시 제의적 성격의 조왕중발과 관련된 시설로 보인다.

이와 같이 1990년대 이후 삼한과 삼국시대의 부뚜막 유적에서 조왕중발(단지)로 추정되는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는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의 “조(竈)를 호(戶)의 서쪽에 둔다.”라는 기록과도 연결된다. 이 기록의 ‘조’에 대해서는 그동안 부뚜막 시설로 보는 견해와 부뚜막신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삼한의 주거지에서 부뚜막 시설과 함께 부뚜막신앙의 흔적이 확인됨에 따라 이 기록의 ‘조’는 단순히 부뚜막 시설뿐만 아니라 부뚜막신인 조왕까지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한과 삼국시대의 부뚜막 시설은 5세기 이후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전파됐으며, 이때 조왕중발을 신체로 모시던 풍속도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지바[千葉] 현 시바야마[芝山] 쇼자쿠[壓作] 유적의 58호 수혈건물지에서 8세기 초의 적색 하지키[土師器]가 출토되었으며 토기 바닥 바깥쪽에 ‘조신(竈神)’이라고 먹으로 쓴 글씨[墨書]가 확인되었다. 지바 현 도가네[東金] 구가다이[久我台] 유적의 주거지에서도 토기 벽 바깥쪽에 ‘조(竈)’라고 묵서된 하지키가 출토되었다. 도치기[栃木] 현 가미노카와[上三川] 다코미나미하라[多功南原] 유적과 도야마[富山]시 미즈하시아라마치(水橋荒町) 유적에서도 ‘조신(竈神)’이라고 묵서된 스에키[須惠器]의 저부(底部)와 뚜껑이 출토되었다. 이 묵서토기들의 성격은 조신을 제사할 때 사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부뚜막이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파되면서 조왕의 신체로 토기를 모시던 풍속까지 함께 전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특히 지바 현 쇼자쿠 유적에서 출토된 ‘조신(竈神)’명 토기는 너비 12㎝, 높이 4㎝의 규모나 형태에서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유적의 완형 토기와 유사하여 전형적인 조왕중발의 고례(古例)로 주목된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조왕중발의 예는 조왕의 신체로 위패나 부적을 모시는 중국의 예와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례

근대까지 각 지역에 남아 있던 조왕중발의 민속을 살펴보면 전남 여수시 거문도의 민가에서는 부뚜막 위 중앙 정면 벽에 흙으로 조그만 단을 빚어 붙이고 그 위에 조그만 중발을 놓고 있는 사례가 많다. 중발 안에는 물이 들어 있고 뚜껑이 덮여 있기도 했다. ‘조왕물그릇’이라 하여 집안에 탈이 없으라고 모시는 것이었다. 특히 정월대보름, 유두, 백중, 추석, 섣달그믐 등 명절과 부모 제삿날 등에 주로 주부가 밥‧반찬‧술 등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새벽에 우물물을 떠서 갈아 넣되 초상 같은 유고시에는 물을 갈지 않는다고 한다. 여수시 초도에서도 조왕중발을 비슷하게 모신다. 다만 조그만 나무상자를 짜서 그 안에 조왕그릇을 넣고 부뚜막 뒤 벽 중앙에 걸어 놓는다. 전남 해남군 현산면 덕흥리에서는 남편의 밥그릇을 조왕의 신체로 쓰는 경우도 있다. 전북지역에서는 부뚜막 솥 사이에 높이 15㎝의 작은 돈대(평지보다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대)를 흙으로 빚어 만들고 중간 크기의 보시기에 냉수를 떠 놓는다. 충청지역에서도 전라도와 같이 부뚜막 뒤에 조왕중발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집을 떠나 객지에 있는 가족의 안전과 끼니를 위해 주부가 부뚜막 한 곳에 제장을 마련하고 집 떠난 식구의 밥사발에 정화수를 떠 놓는 사례도 확인된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소도마을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의 밥그릇에 매일 아침에 밥 반 공기 정도를 떠 두었다가 이튿날에 새 밥으로 갈아주는 곳도 있다. 전날 조왕에게 올린 밥은 점심 때 가족이 먹는다. 이는 조왕이 군대에 간 아들을 보살펴 줄 것이라고 믿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 옥실4리 대무마을에서는 조왕단지 옆에 찻독그릇(좀도리를 위해 마련한 그릇, 여기서 좀도리란 절미[節米]의 전라도 방언임)을 두었다가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주먹씩을 따로 담아두기도 한다.

조왕의 신체로 모셔지는 조왕중발은 일찍이 기원전 1세기 삼한의 부뚜막 유적에서 확인되는, 유래가 오래된 민속 유물이다. 이를 통해 가정에서 조왕을 모시는 신앙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민속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부엌 (김광언, 대원사, 1997)
墨書土器の硏究 (平川南, 吉川弘文館, 2000)
가신신앙 (장주근, 한국 민속의 세계 9-민간신앙‧기타신앙,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1)
竈神と竈の祭祀 (內田律雄, 季刊 考古學 87-特集: 古代祭祀の世界, 吉川弘文館, 2004)
한국의 가정신앙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2008)
삼한의 ‘납일제사’와 부뚜막신앙 (박대재, 한국사학보 37, 고려사학회, 2009)
조왕의 성격과 전승양상 (최숙경, 지방사와 지방문화 12, 2009)
주거와 조왕신앙 (박대재, 한국역사민속학강의 1, 한국역사민속학회, 민속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