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신사(海神祠)

한자명

海神祠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강정식(姜晶植)

정의

제주도 화북 포구를 통하여 바다를 드나드는 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당.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 1619-2번지에 있으며, 1973년 4월 3일에 ‘제주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해신사의 역사는 비교적 뚜렷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해신사는 1820년(순조 20) 제주목사 한상묵(韓象默)이 처음 세웠다. 1841년(헌종 7)에 방어사 이원조(李源祚)가 한 차례 건물을 보수하였으며, 1849년(헌종 15)에는 방어사 장인식(張寅植)이 돌에 ‘해신지위(海神之位)’라는 글자를 새겨 보존하도록 하였다. 1975년에 사당이 낡고 공간이 좁아 본래 위치에서 서북쪽 해안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형태

해신사는 정면과 측면 모두 단칸으로 이루어진 비각(碑閣) 형태의 건물이다. 각주(各柱)로 장혀와 도리를 받치고 5량조로 결구하여 바로 서까래를 얹고 합각지붕을 덮었다. 하부에만 심벽을 치고, 외부로는 돌담을 둘렀으며 상부에는 살창을 세웠다. 또 모로단청으로 단장하였다. 전면에 판문을 달았으며, 약간의 공간을 남긴 채 장방형의 겹담을 두르고 일각대문을 달았다. 해신사의 안에는 ‘해신지위’라고 새긴 돌 위패가 있는며 옥개석을 갖춘 작은 비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용

해신사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대개 마을 포구에는 해신당에 해당하는 제당을 따로 두게 마련인데 화북 포구에서는 해신사가 이를 겸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북 포구는 제주도와 한반도의 뭍을 드나드는 주요 관문이었다. 목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화북 포구를 이용하여 나들이를 하였다. 여기에 후풍관(候風館)을 따로 두고 기상의 변화에 대처하였다. 화북 포구 일대는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따라 1678년(숙종 4)에는 화북진성을 쌓고 조방장을 두기도 하였다. 항내에서 파선 사고가 잦자 1736년(영조 12)에 김정(金政) 목사가 포구를 정비하였다. 한편 뱃길이 워낙 험하여 자연스레 안전한 여행을 기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1820년(순조 20)에 목사 한상묵이 해신사를 세웠다. 해신사는 보수하고 옮겨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해신사에서는 출항을 앞두고 제사를 지내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정월대보름날에도 제사를 크게 지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제주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제1관문 구실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화북 포구가 그런대로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는 점이다. 오늘날 화북 포구는 더 이상 제주의 관문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어촌의 평범한 포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해신사에서 뭍 나들이를 위한 항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일은 보기 어렵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닷샛날이 되면 정성을 다해 마을의 안녕과 생업의 풍등을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내고 있다. 관이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된 이후 오랫동안 해녀와 어부 중심으로 해신제를 지내오다가 1990년쯤 부터 마을제로 바꾸어 지내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부락과 중서부락에서는 제각기 마을제를 지내 오던 터였다. 이를 모두 그만두고 해신사에서 함께 해신제를 지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셈이다. 제관헌관 세 명과 집례, 대축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다. 제사를 앞두고 사흘 동안 정성을 들인 뒤 초닷샛날 새벽에 제사를 지낸다. 이때 기원하는 내용은 고기잡이배의 안전과 풍어, 마을의 안녕이다.

참고문헌

제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 해설집 (제주시, 1998)

제주해신사

제주해신사
한자명

海神祠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장소

집필자 강정식(姜晶植)

정의

제주도 화북 포구를 통하여 바다를 드나드는 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당.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 1619-2번지에 있으며, 1973년 4월 3일에 ‘제주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해신사의 역사는 비교적 뚜렷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해신사는 1820년(순조 20) 제주목사 한상묵(韓象默)이 처음 세웠다. 1841년(헌종 7)에 방어사 이원조(李源祚)가 한 차례 건물을 보수하였으며, 1849년(헌종 15)에는 방어사 장인식(張寅植)이 돌에 ‘해신지위(海神之位)’라는 글자를 새겨 보존하도록 하였다. 1975년에 사당이 낡고 공간이 좁아 본래 위치에서 서북쪽 해안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형태

해신사는 정면과 측면 모두 단칸으로 이루어진 비각(碑閣) 형태의 건물이다. 각주(各柱)로 장혀와 도리를 받치고 5량조로 결구하여 바로 서까래를 얹고 합각지붕을 덮었다. 하부에만 심벽을 치고, 외부로는 돌담을 둘렀으며 상부에는 살창을 세웠다. 또 모로단청으로 단장하였다. 전면에 판문을 달았으며, 약간의 공간을 남긴 채 장방형의 겹담을 두르고 일각대문을 달았다. 해신사의 안에는 ‘해신지위’라고 새긴 돌 위패가 있는며 옥개석을 갖춘 작은 비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용

해신사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대개 마을 포구에는 해신당에 해당하는 제당을 따로 두게 마련인데 화북 포구에서는 해신사가 이를 겸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북 포구는 제주도와 한반도의 뭍을 드나드는 주요 관문이었다. 목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도 화북 포구를 이용하여 나들이를 하였다. 여기에 후풍관(候風館)을 따로 두고 기상의 변화에 대처하였다. 화북 포구 일대는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따라 1678년(숙종 4)에는 화북진성을 쌓고 조방장을 두기도 하였다. 항내에서 파선 사고가 잦자 1736년(영조 12)에 김정(金政) 목사가 포구를 정비하였다. 한편 뱃길이 워낙 험하여 자연스레 안전한 여행을 기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1820년(순조 20)에 목사 한상묵이 해신사를 세웠다. 해신사는 보수하고 옮겨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해신사에서는 출항을 앞두고 제사를 지내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정월대보름날에도 제사를 크게 지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제주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제1관문 구실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화북 포구가 그런대로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는 점이다. 오늘날 화북 포구는 더 이상 제주의 관문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어촌의 평범한 포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해신사에서 뭍 나들이를 위한 항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일은 보기 어렵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닷샛날이 되면 정성을 다해 마을의 안녕과 생업의 풍등을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내고 있다. 관이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된 이후 오랫동안 해녀와 어부 중심으로 해신제를 지내오다가 1990년쯤 부터 마을제로 바꾸어 지내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부락과 중서부락에서는 제각기 마을제를 지내 오던 터였다. 이를 모두 그만두고 해신사에서 함께 해신제를 지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셈이다. 제관은 헌관 세 명과 집례, 대축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다. 제사를 앞두고 사흘 동안 정성을 들인 뒤 초닷샛날 새벽에 제사를 지낸다. 이때 기원하는 내용은 고기잡이배의 안전과 풍어, 마을의 안녕이다.

참고문헌

제주시문화유적분포지도 해설집 (제주시,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