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례(始加禮)

시가례

한자명

始加禮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관례|계례

집필자 박홍갑(朴洪甲)

정의

관례를 행할 때에 첫 번째 관을 씌우는 예禮.

역사

성리학 도입과 함께 널리 보급된 관례의 시행 단계에서 행하는 시가례始加禮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관례 관련 기록이 이미 등장한다. 즉,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예종・의종대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으로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상투틀기라는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점차 사라졌다. 다만, 여자의 계례筓禮만 구식 혼례식에 흡수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시가례・재가례再加禮・삼가례三加禮 등 삼가三加를 하나로 합하였고, 축사祝辭 또한 한 번으로 그치게 하는 등 간소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고례古禮에 따라 이 셋을 분리하여 예禮를 행하게 하였다. 고례에는 치포관緇布冠(두꺼운 종이로 만든 검은 관)을 씌울 때 현의玄衣(검은 저고리)와 현상玄裳(검은 치마)을, 재가再加에는 피변皮弁을 씌울 때 소의素衣(흰 저고리)와 소상素裳(흰 치마)을, 삼가三加에는 작변爵弁을 씌울 때 순의純衣(색이 순일한 저고리)와 훈상纁裳(붉은 치마)을 입었는데,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초가初加에 심의深衣(선비들이 입는 소매가 넓은 흰 윗옷), 재가再加에 조삼皁衫(검은 색깔의 흑단령黑團領이라 부름), 삼가三加에 복두幞頭(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로, 사모紗帽와 같이 두 단으로 되어 있으며, 뒤쪽의 좌우에 각脚이 달려있다)와 난삼襴衫(녹색 혹은 검은색 예복, 유생・생원・진사 등이 입던 예복)을 입는다 하였다.

이렇듯 관례의 절차나 내용이 일정치 않은 것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속時俗에 따라 관례를 다르게 실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관례」에서 가난한 선비와 경대부 집안에서는 관례의 예법을 다르게 적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던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관례」에 따른시가례의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빈賓이 장관자將冠者에게 읍揖하면, 장관자는 오른쪽 자리(북쪽 끝)를 향하여 선다. 찬자贊者는 빗과 망건을 들어 자리 왼쪽(남쪽끝)에 놓고 일어나 장관자의 왼쪽에 선다. 빈이 읍하면 장관자는 자리에 나가 서향해서 꿇어앉는다. 찬자는 자리에 나아가 같은 방향으로 꿇어앉아 빗질하고 상투를 합한다. 빈이 내려가면 주인도 내려간다. 빈이 손을 씻으면 주인은 읍하고 올라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집사자執事者가 관과 건巾을 놓은 쟁반을 올리면 빈은 층계 한 단을 내려가 관과 비녀를 받아 쥔다(오른손으로 뒤쪽을 잡고 왼손으로 앞쪽을 잡는다). 얼굴을 바로 하고 천천히 장관자 앞에 이르러(찬자는 건을 들고 따른다) 그를 향해 축사祝辭하고, 무릎을 꿇고 이를 씌운다(찬자가 대신해서 비녀를 꽂는다). 찬자가 무릎을 꿇고 건을 올리면, 빈은 이를 받아 씌운다. 찬자는 그 끈을 묶는다. 빈이 일어나 제자리로 가서 읍하면 관자冠者(이제는 관을 썼으므로, 관을 쓴 사람을 지칭함)는 방에 가서 사규삼四揆衫(아이가 입는 옷)을 벗고 심의深衣(선비가 입는소매가 넓은 흰 윗옷)를 입고 대대大帶(남자의 심의나 여자의 원삼활옷에 두르는 넓은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방을 나와 얼굴을 바로 하고 남향하여 한동안 선다. 종자宗子가 스스로 관을 쓸 때 빈은 읍하고 자리에 나가고, 빈이 내려가 손을 씻을 때 주인은 내려가지 않으며, 나머지 예식은 모두 같다. 시가례를 행할 때 축사식祝辭式(축하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좋은 달 좋은 날에 처음으로 원복元服을 씌우니, 너의 어린 마음을 버리고 너의 성숙한 덕을 따라 길하게 오래 살고, 네 큰 복을 더욱 크게 하여라.

계례筓禮에서는 장계자將筓者(비녀를 꽂을 사람)에게 족두리와 비녀를 꽂아주고 배자背子를 입히는 의식을 거행한다. 비녀 꽂을 사람은 방에서 나오고 시자侍子는 자리 왼쪽에 빗을 놓는다. 빈이 손으로 이끌면 비녀 꽂을 사람은 자리에 나가 서쪽을 향해서 꿇어앉는다. 시자도 같은 방향으로 꿇어앉아 머리를 풀어 빗질하고 머리를 합한다(쪽을 만든다). 빈은 층계를 내려가고 주부도 내려간다. 손을 씻으면 주부는 빈에게 먼저 자리로 돌아가기를 청한다. 시자가 족두리와 비녀를 담은 쟁반을 올리면, 빈은 비녀 꽂을 사람 앞에 나아가 축사祝辭하고 무릎을 꿇어 관을 씌우고 비녀를 꽂아 준 다음 일어나 제자리로 간다. 비녀 꽂은 사람은 일어나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시자가 빗을 치운다. 계자筓者는 상의인 배자를 입고 방에서 나온다. 이때의 축사식은 남자의 시가례와 같다.

특징 및 의의

관례의 절차는 준비, 시행, 종결의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시가례는 시행 과정으로서 중요한 절차이다. 『주자가례』를 비롯한 정통적인 예서에서는 시가례・재가례삼가례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성호 이익이 주창한 것처럼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시가례, 즉 초가례初加禮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빈객이 직접 관자의 머리를 풀어 상투를 조이고 망건을 씌워주고, 갓이나 초립을 씌워 준 뒤 도포전복을 입고 빨간 띠를 매게 한 다음 간단한 축사를 하여 끝내는 것으로 진행해 왔다. 이렇듯 관례의 시행 과정은 빈객과 관자, 찬자와 관자의 관계에 따라 진행한다. 또한, 반드시 축사가 매개되어야 한다. 이는 사람의 아들, 사람의 신하, 사람의 형제로서 알맞은 책임을 부여하고, 분수 있고 겸허한 행동과 됨됨이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실제 관행에서는 대폭 간소화하여 진행해 왔는데, 앞에서 언급한 여러 조건보다는 단지 육체적 성장에 따라 성인이 되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가한다. 빈객의 조건과 선택 기준도 마을 안에서 가장 복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던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四禮便覽, 與猶堂全書, 朱子家禮, 관혼상제(이민수, 을유문화사, 1975), 조선시대 관혼상제-1(문옥표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조선의 관혼상제(사회과학원, 중심, 2002), 한국민속대관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전통사회의 관혼상제(장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시가례

시가례
한자명

始加禮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관례|계례

집필자 박홍갑(朴洪甲)

정의

관례를 행할 때에 첫 번째 관을 씌우는 예禮.

역사

성리학 도입과 함께 널리 보급된 관례의 시행 단계에서 행하는 시가례始加禮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관례 관련 기록이 이미 등장한다. 즉,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예종・의종대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하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으로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상투틀기라는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점차 사라졌다. 다만, 여자의 계례筓禮만 구식 혼례식에 흡수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시가례・재가례再加禮・삼가례三加禮 등 삼가三加를 하나로 합하였고, 축사祝辭 또한 한 번으로 그치게 하는 등 간소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고례古禮에 따라 이 셋을 분리하여 예禮를 행하게 하였다. 고례에는 치포관緇布冠(두꺼운 종이로 만든 검은 관)을 씌울 때 현의玄衣(검은 저고리)와 현상玄裳(검은 치마)을, 재가再加에는 피변皮弁을 씌울 때 소의素衣(흰 저고리)와 소상素裳(흰 치마)을, 삼가三加에는 작변爵弁을 씌울 때 순의純衣(색이 순일한 저고리)와 훈상纁裳(붉은 치마)을 입었는데,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초가初加에 심의深衣(선비들이 입는 소매가 넓은 흰 윗옷), 재가再加에 조삼皁衫(검은 색깔의 흑단령黑團領이라 부름), 삼가三加에 복두幞頭(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로, 사모紗帽와 같이 두 단으로 되어 있으며, 뒤쪽의 좌우에 각脚이 달려있다)와 난삼襴衫(녹색 혹은 검은색 예복, 유생・생원・진사 등이 입던 예복)을 입는다 하였다.

이렇듯 관례의 절차나 내용이 일정치 않은 것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속時俗에 따라 관례를 다르게 실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관례」에서 가난한 선비와 경대부 집안에서는 관례의 예법을 다르게 적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던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관례」에 따른시가례의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빈賓이 장관자將冠者에게 읍揖하면, 장관자는 오른쪽 자리(북쪽 끝)를 향하여 선다. 찬자贊者는 빗과 망건을 들어 자리 왼쪽(남쪽끝)에 놓고 일어나 장관자의 왼쪽에 선다. 빈이 읍하면 장관자는 자리에 나가 서향해서 꿇어앉는다. 찬자는 자리에 나아가 같은 방향으로 꿇어앉아 빗질하고 상투를 합한다. 빈이 내려가면 주인도 내려간다. 빈이 손을 씻으면 주인은 읍하고 올라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집사자執事者가 관과 건巾을 놓은 쟁반을 올리면 빈은 층계 한 단을 내려가 관과 비녀를 받아 쥔다(오른손으로 뒤쪽을 잡고 왼손으로 앞쪽을 잡는다). 얼굴을 바로 하고 천천히 장관자 앞에 이르러(찬자는 건을 들고 따른다) 그를 향해 축사祝辭하고, 무릎을 꿇고 이를 씌운다(찬자가 대신해서 비녀를 꽂는다). 찬자가 무릎을 꿇고 건을 올리면, 빈은 이를 받아 씌운다. 찬자는 그 끈을 묶는다. 빈이 일어나 제자리로 가서 읍하면 관자冠者(이제는 관을 썼으므로, 관을 쓴 사람을 지칭함)는 방에 가서 사규삼四揆衫(아이가 입는 옷)을 벗고 심의深衣(선비가 입는소매가 넓은 흰 윗옷)를 입고 대대大帶(남자의 심의나 여자의 원삼・활옷에 두르는 넓은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방을 나와 얼굴을 바로 하고 남향하여 한동안 선다. 종자宗子가 스스로 관을 쓸 때 빈은 읍하고 자리에 나가고, 빈이 내려가 손을 씻을 때 주인은 내려가지 않으며, 나머지 예식은 모두 같다. 시가례를 행할 때 축사식祝辭式(축하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좋은 달 좋은 날에 처음으로 원복元服을 씌우니, 너의 어린 마음을 버리고 너의 성숙한 덕을 따라 길하게 오래 살고, 네 큰 복을 더욱 크게 하여라.

계례筓禮에서는 장계자將筓者(비녀를 꽂을 사람)에게 족두리와 비녀를 꽂아주고 배자背子를 입히는 의식을 거행한다. 비녀 꽂을 사람은 방에서 나오고 시자侍子는 자리 왼쪽에 빗을 놓는다. 빈이 손으로 이끌면 비녀 꽂을 사람은 자리에 나가 서쪽을 향해서 꿇어앉는다. 시자도 같은 방향으로 꿇어앉아 머리를 풀어 빗질하고 머리를 합한다(쪽을 만든다). 빈은 층계를 내려가고 주부도 내려간다. 손을 씻으면 주부는 빈에게 먼저 자리로 돌아가기를 청한다. 시자가 족두리와 비녀를 담은 쟁반을 올리면, 빈은 비녀 꽂을 사람 앞에 나아가 축사祝辭하고 무릎을 꿇어 관을 씌우고 비녀를 꽂아 준 다음 일어나 제자리로 간다. 비녀 꽂은 사람은 일어나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시자가 빗을 치운다. 계자筓者는 상의인 배자를 입고 방에서 나온다. 이때의 축사식은 남자의 시가례와 같다.

특징 및 의의

관례의 절차는 준비, 시행, 종결의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시가례는 시행 과정으로서 중요한 절차이다. 『주자가례』를 비롯한 정통적인 예서에서는 시가례・재가례・삼가례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성호 이익이 주창한 것처럼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시가례, 즉 초가례初加禮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빈객이 직접 관자의 머리를 풀어 상투를 조이고 망건을 씌워주고, 갓이나 초립을 씌워 준 뒤 도포와 전복을 입고 빨간 띠를 매게 한 다음 간단한 축사를 하여 끝내는 것으로 진행해 왔다. 이렇듯 관례의 시행 과정은 빈객과 관자, 찬자와 관자의 관계에 따라 진행한다. 또한, 반드시 축사가 매개되어야 한다. 이는 사람의 아들, 사람의 신하, 사람의 형제로서 알맞은 책임을 부여하고, 분수 있고 겸허한 행동과 됨됨이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실제 관행에서는 대폭 간소화하여 진행해 왔는데, 앞에서 언급한 여러 조건보다는 단지 육체적 성장에 따라 성인이 되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기대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가한다. 빈객의 조건과 선택 기준도 마을 안에서 가장 복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던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四禮便覽, 與猶堂全書, 朱子家禮, 관혼상제(이민수, 을유문화사, 1975), 조선시대 관혼상제-1(문옥표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조선의 관혼상제(사회과학원, 중심, 2002), 한국민속대관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한국전통사회의 관혼상제(장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