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내왓당 무신도(濟州道 川外堂 巫神圖)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한자명

濟州道 川外堂 巫神圖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구

집필자 이수자(李秀子)

정의

제주시 용담동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천 중 특히 삼동물이라 불리는 깊은 웅덩이가 있는 주변 마을에 있던 내왓당[川外堂]이라는 신당(神堂)에서 모시던 신들의 신상(神像)을 그린 그림. 원래는 12폭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남신상 6폭과 여신상 4폭 등 10폭만 남아 있다. 내왓당은 고종 19년(1882)에 헐려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이들 무신도는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1년 6월 4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1월 30일 중요민속자료 제240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한지(韓紙)에 채색(彩色) 안료인 진채(眞彩)를 사용하여 그렸다. 빨강·노랑·초록 등 삼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림에 금박이 입혀져 있다. 10폭 모두 가로·세로 길이가 380×620㎜이다. 제주대학교의 현용준 교수가 1959년 처음 보았을 때는 원래 송판에 붙어 있었으나, 벌레가 많이 먹어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2000년에 다시 배접 하여 현재는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1963년에 이것을 다시 발견했을 때에는 10폭 모두 오른편 상단에 한자(漢字)로 쓴 붉은색의 신명(神名)이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8폭에만 신명이 남아 있다.

내용

내왓당 무신도가 남아 있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82년 내왓당이 훼철되자 이 당의 매인 심방이자 신방청(神房廳)의 도행수(都行首)로 있던 고임생(高壬生)이 삼도동에 있는 자기 집에 가져다 모셨다. 후일 그가 사망하자 부인은 살던 집을 팔고 제주시 산지천(山地川) 가까이에 있는 남수각 근처 굴로 이사를 했는데, 이 때 이들 무신도와 무구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1959년에 현용준 교수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냇가에서 어떤 안노인이 이상한 그림을 가지고 이리저리 짝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확인해 본 결과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1963년 고임생의 부인이 사망하자 현 교수는 그녀가 살던 굴속에서 무신도가 들어있던 궤짝을 꺼내 당시 용담동에 있던 제주대학교 창고로 옮겼다. 1967년 제주대학교 민속박물관 개관 후 1970년에 유물을 전시할 때 이 무신도들이 전시되었다. 1980년 제주대학교가 현 위치인 아라동으로 이전될 때 이 무신도 역시 현재의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존하는 내왓당 무신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2년(1466) 7월 27일조에 있었던 내왓당과 관련된 강우문(姜遇文)과 복승리(卜承利)의 사건을 참조하면, 내왓당에는 적어도 그 이전부터 당신을 그린 화상(畵像)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복승리가 세조의 열렬한 지지자인 사실을 몰랐던 강우문이 복승리를 모해하여 그가 노산군[단종]의 얼굴을 그려서 치제(致祭)를 하였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이것이 모해임을 알고 잘잘못을 가려 강우문을 치죄한 사건이다. 이러한 기록 중에는 ‘천외당(川外堂) 신의 화상(畵像)이 이미 불에 타버렸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내왓당에는 이미 당신도(堂神圖), 혹은 무신도(巫神圖)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내왓당 무신도가 그 때의 그림과 같은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무신도 같은 것은 대체로 모본을 대고 계속 그리는 점을 감안하면 모본이 세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내왓당 무신도는 신상에 나와 있는 신들의 복장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신도 10폭 가운데 남신의 복장에는 목 부분에 리본을 맨 듯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한국복식사를 살펴보면 남성복에 이처럼 리본이 나타나는 예는 거의 없다. 우리 민족은 남녀 모두 신분의 귀천이 없이 포를 많이 입었는데, 귀족층은 소매가 넓은 활수포(闊袖袍), 평민은 주로 소매가 좁은 착수포(窄袖袍)를 착용하였다. 신라 때에는 목에 표(裱)를 둘러 목 뒤에서 어깨에 걸쳐 가슴 앞으로 늘어뜨려 일종의 장식용 도리로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무신도 깃의 리본은 이러한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남신 가운데 감찰위의 사모는 그 모습이 고려 말 이후 조선 중기 즈음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사모는 주로 검은색이어서 흔히 오사모(烏紗帽)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 모양에 있어 시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그런데 감찰위의 사모는 뒤쪽의 뿔이 폭은 좁지만 옆의 길이는 상당히 길어 고려의 것과도 다르고, 조선 후기의 모습과도 전혀 다르다. 또한 4폭의 여신상에 나타나는 저고리 길이는 허리 즈음에 닿아 있는데, 이러한 기장은 주로 조선 중기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신들의 복장을 중시할 때, 이들 무신도는 적어도 1800년보다 앞서는 것이 확실하다.

내왓당 무신도는 원래 12폭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내왓당본풀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풀이에서 “서수문 밧 삼동물 의 좌정신 열두시위전 본초~”라고 하여 이 당에는 12신위가 있다는 사실과 그 근본 내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내왓당 무신도는 10폭만 남아 있다.

10폭의 무신도 중에 6폭은 남신상이고, 4폭은 여신상이다. 남신은 제석위(帝釋位), 원망위(寃望位), 수령위(水靈位), 천자위(天子位), 감찰위(監察位), 상사위(相思位) 등이고, 여신은 본궁위(本宮位), 중전위(中殿位), 상군위(相君位), 홍아위(紅兒位) 등이다. 내왓당본풀이와 연결해 보면, 천자위는 대국천자의 아들로서 불효하여 바다로 내쫓겼다가 용왕의 딸과 결혼하고, 나중에 강남천자국의 변란을 제압한 후 제주시 내왓당에 좌정한 신이다. 상사대왕은 서천서역국에서 들어온 신으로 큰부인은 중전대부인이고 작은부인은 정절상군농이다. 작은부인은 일곱 아기를 임신한 몸으로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돼지털 세 개를 뽑아 청동화로에 태우다가 남편으로부터 부정하다고 내쫓김을 당했다가 나중에 큰부인과 함께 내왓당에 좌정되었다.

무신도의 회화적 특징을 살펴보면 <제석위>는 머리에 송낙을 쓰고, 양손에는 각기 지팡이와 부채를 쥐었는데, 지팡이의 끝에는 새[鳥]가 있다. 가사가 붉은색인 것은 오늘날 육지 의 중이나 대사들이 입는 복장과 일치하는데, 장삼이 노란색인 것은 특이한 사례이다. <원망위>는 망건에 흑립을 썼으며, 손에는 선추가 달린 접선(쥘부채)을 쥐었고, 청철릭으로 볼 수 있는 주름이 있는 옷에 검은 목화를 신었다. <수령위>는 머리에 원유관 혹은 오량관을 쓰고 손에는 선추가 달린 접선을 쥐고 있으며 청록색의 포에 검은색 목화를 신고 있다. 관모 및 쥘부채를 보면 높은 신분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한 듯한데, 허리에 각대가 아니라 끈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복식은 격에 맞다고 할 수 없다. <천자위>는 망건에 흑립을 쓰고 있으며, 홍철릭(융복)을 입었다. 옷에는 반쪽의 국화무늬가 있고 주름이 많았다. 여기에 광다회를 드리우고 검정 목화를 신었다. 얼굴과 목 부위의 뒤쪽 배경에 푸른 점무늬의 뱀 같은 모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감찰위>는 사모를 쓰고 광다회를 드리운 포를 입었다. 포는 소매가 큰 것이 특징이며 목화는 신지 않았다. <상사위>는 유문(有紋)의 홍포에 광다회를 드리우고 검정 목화를 신고 있다. 머리에는 망건 위에 붉고 흰 두 개의 원이 있는 매우 독특한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가 우리나라 전통적인 관모가 아닌 것은 이 신이 서천서역국에서 들어온 외래신이라 이런 모습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여신 중 <본궁위>는 천자위의 부인일 가능성이 있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속바지와 운문이 있는 녹의 및 홍상을 입었으며, 신발을 신었다. 치마에는 말기 및 긴 끈이 있는데, 말기라면 보통 흰색으로 나타나지만 여기에서는 청록색의 말기와 끈인 것이 특색이다. 머리는 자기머리인지, 가체인지 혹은 관을 쓴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우나 뒤에 비녀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자신의 머리를 틀어 올린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녀에 새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중전위>는 상사대왕의 큰부인으로 볼 수 있는데, 속바지와 운문이 있는 홍의를 입었으며, 반쪽의 국화꽃 무늬가 있는 녹색 치마를 입었다. 혜를 신고 있으며, 치마에는 흰 말기와 끈이 보인다. <상군위>는 상사대왕의 작은부인으로 일곱 아기를 출산하는 정절상군농인 듯한데, 손에는 부채를 들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구슬이 장식되어 있다. 녹의 홍상에는 반쪽의 국화 문양이 있다. 저고리와 치마가 이어지는 부분에는 빨간 색의 말기가 있고, 혜를 신고 있다. <홍아위>는 정절상군농의 딸로 여겨진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머리는 내려진 긴 머리에 비녀를 꽂았다. 운문의 홍상을 입었고, 흰 말기에 녹색 끈을 드리웠으며 혜를 신었다. 본풀이 내용과 연결지어보면 이 신은 아직 미혼이기에 이처럼 머리를 길게 내려 그린 듯하다.

내왓당 무신도 중에서 남신의 복식을 살펴보면 머리에 통이 넓은 흑갓, 뒤쪽의 뿔이 긴 사모, 대가 낮은 원유관(혹은 오량관), 송낙, 모자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난다. 깃 부분과 수구(袖口)는 대체로 여러 색이 나타나는데, 옷의 깃 부분은 대개 리본을 맨 듯한 독특한 모양이며 광다회를 드리우고 있다. <제석위>는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인데, 이 신을 제외한 남신들의 복식은 대체로 그 복식이 신분이 높은 관복형이라 할 수 있다. 내왓당 본풀이에서 신들의 위상에 대해 대체로 “대왕” 운운하고 있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제석위를 제외한 모든 신들이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특징을 보이는데, 양손 중 부채를 든 손을 제외한 나머지 손들은 모두 용이나 새와 같은 동물의 발톱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인간과 신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고자 하여 신들의 손을 새나 용의 발톱처럼 그린 것이 아닌가 하며, 또한 양쪽 손목에는 거의 누런색의 팔찌를 끼고 있는데, 이러한 금팔찌 역시 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이들 무신도들은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손 모양이라든지 얼굴 모양, 그리고 옷에 나타나는 반쪽의 국화꽃 무늬 같은 것으로 볼 때, 동일 시대에 동일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고 볼 수 있어 한 속(屬)으로 묶을 수 있다.

내왓당 무신도는 회화적으로 볼 때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신상의 얼굴 표정이 너무 획일적이고 일률적이어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지의 수많은 무신도와는 얼굴 모양이나 색채, 감각이 매우 달라서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무신도의 저고리, 치마, 사모관대 등을 보면 이들은 분명히 우리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제주문화 속에서 배태되고 잉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왓당 무신도에 나타나는 색채와 기교의 독특함은 내왓당의 무신도가 지니는 특이성이자 독자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제주도의 신앙 형태와 회화사를 연구할 때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무신도는 제주도의 4대 국당(國堂)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내왓당의 무신도라는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耽羅誌 (담수계, 1953), 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김봉옥, 제주문화방송, 1986), 중요민속자료 지정조사보고서-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이수자, 문화재청, 2001), 내왓당 무신도 (제주대학교 박물관, 2002), 제주도 신화의 수수께끼 (현용준, 집문당, 2005)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한자명

濟州道 川外堂 巫神圖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구

집필자 이수자(李秀子)

정의

제주시 용담동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천 중 특히 삼동물이라 불리는 깊은 웅덩이가 있는 주변 마을에 있던 내왓당[川外堂]이라는 신당(神堂)에서 모시던 신들의 신상(神像)을 그린 그림. 원래는 12폭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남신상 6폭과 여신상 4폭 등 10폭만 남아 있다. 내왓당은 고종 19년(1882)에 헐려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이들 무신도는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1년 6월 4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1월 30일 중요민속자료 제240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한지(韓紙)에 채색(彩色) 안료인 진채(眞彩)를 사용하여 그렸다. 빨강·노랑·초록 등 삼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림에 금박이 입혀져 있다. 10폭 모두 가로·세로 길이가 380×620㎜이다. 제주대학교의 현용준 교수가 1959년 처음 보았을 때는 원래 송판에 붙어 있었으나, 벌레가 많이 먹어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2000년에 다시 배접 하여 현재는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1963년에 이것을 다시 발견했을 때에는 10폭 모두 오른편 상단에 한자(漢字)로 쓴 붉은색의 신명(神名)이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8폭에만 신명이 남아 있다.

내용

내왓당 무신도가 남아 있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82년 내왓당이 훼철되자 이 당의 매인 심방이자 신방청(神房廳)의 도행수(都行首)로 있던 고임생(高壬生)이 삼도동에 있는 자기 집에 가져다 모셨다. 후일 그가 사망하자 부인은 살던 집을 팔고 제주시 산지천(山地川) 가까이에 있는 남수각 근처 굴로 이사를 했는데, 이 때 이들 무신도와 무구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1959년에 현용준 교수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냇가에서 어떤 안노인이 이상한 그림을 가지고 이리저리 짝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확인해 본 결과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1963년 고임생의 부인이 사망하자 현 교수는 그녀가 살던 굴속에서 무신도가 들어있던 궤짝을 꺼내 당시 용담동에 있던 제주대학교 창고로 옮겼다. 1967년 제주대학교 민속박물관 개관 후 1970년에 유물을 전시할 때 이 무신도들이 전시되었다. 1980년 제주대학교가 현 위치인 아라동으로 이전될 때 이 무신도 역시 현재의 제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존하는 내왓당 무신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2년(1466) 7월 27일조에 있었던 내왓당과 관련된 강우문(姜遇文)과 복승리(卜承利)의 사건을 참조하면, 내왓당에는 적어도 그 이전부터 당신을 그린 화상(畵像)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복승리가 세조의 열렬한 지지자인 사실을 몰랐던 강우문이 복승리를 모해하여 그가 노산군[단종]의 얼굴을 그려서 치제(致祭)를 하였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이것이 모해임을 알고 잘잘못을 가려 강우문을 치죄한 사건이다. 이러한 기록 중에는 ‘천외당(川外堂) 신의 화상(畵像)이 이미 불에 타버렸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내왓당에는 이미 당신도(堂神圖), 혹은 무신도(巫神圖)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내왓당 무신도가 그 때의 그림과 같은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무신도 같은 것은 대체로 모본을 대고 계속 그리는 점을 감안하면 모본이 세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내왓당 무신도는 신상에 나와 있는 신들의 복장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시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신도 10폭 가운데 남신의 복장에는 목 부분에 리본을 맨 듯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한국복식사를 살펴보면 남성복에 이처럼 리본이 나타나는 예는 거의 없다. 우리 민족은 남녀 모두 신분의 귀천이 없이 포를 많이 입었는데, 귀족층은 소매가 넓은 활수포(闊袖袍), 평민은 주로 소매가 좁은 착수포(窄袖袍)를 착용하였다. 신라 때에는 목에 표(裱)를 둘러 목 뒤에서 어깨에 걸쳐 가슴 앞으로 늘어뜨려 일종의 장식용 목도리로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무신도 깃의 리본은 이러한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남신 가운데 감찰위의 사모는 그 모습이 고려 말 이후 조선 중기 즈음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사모는 주로 검은색이어서 흔히 오사모(烏紗帽)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 모양에 있어 시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그런데 감찰위의 사모는 뒤쪽의 뿔이 폭은 좁지만 옆의 길이는 상당히 길어 고려의 것과도 다르고, 조선 후기의 모습과도 전혀 다르다. 또한 4폭의 여신상에 나타나는 저고리 길이는 허리 즈음에 닿아 있는데, 이러한 기장은 주로 조선 중기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신들의 복장을 중시할 때, 이들 무신도는 적어도 1800년보다 앞서는 것이 확실하다.

내왓당 무신도는 원래 12폭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내왓당본풀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풀이에서 “서수문 밧 삼동물 의 좌정신 열두시위전 본초~”라고 하여 이 당에는 12신위가 있다는 사실과 그 근본 내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내왓당 무신도는 10폭만 남아 있다.

10폭의 무신도 중에 6폭은 남신상이고, 4폭은 여신상이다. 남신은 제석위(帝釋位), 원망위(寃望位), 수령위(水靈位), 천자위(天子位), 감찰위(監察位), 상사위(相思位) 등이고, 여신은 본궁위(本宮位), 중전위(中殿位), 상군위(相君位), 홍아위(紅兒位) 등이다. 내왓당본풀이와 연결해 보면, 천자위는 대국천자의 아들로서 불효하여 바다로 내쫓겼다가 용왕의 딸과 결혼하고, 나중에 강남천자국의 변란을 제압한 후 제주시 내왓당에 좌정한 신이다. 상사대왕은 서천서역국에서 들어온 신으로 큰부인은 중전대부인이고 작은부인은 정절상군농이다. 작은부인은 일곱 아기를 임신한 몸으로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돼지털 세 개를 뽑아 청동화로에 태우다가 남편으로부터 부정하다고 내쫓김을 당했다가 나중에 큰부인과 함께 내왓당에 좌정되었다.

무신도의 회화적 특징을 살펴보면 <제석위>는 머리에 송낙을 쓰고, 양손에는 각기 지팡이와 부채를 쥐었는데, 지팡이의 끝에는 새[鳥]가 있다. 가사가 붉은색인 것은 오늘날 육지 의 중이나 대사들이 입는 복장과 일치하는데, 장삼이 노란색인 것은 특이한 사례이다. <원망위>는 망건에 흑립을 썼으며, 손에는 선추가 달린 접선(쥘부채)을 쥐었고, 청철릭으로 볼 수 있는 주름이 있는 옷에 검은 목화를 신었다. <수령위>는 머리에 원유관 혹은 오량관을 쓰고 손에는 선추가 달린 접선을 쥐고 있으며 청록색의 포에 검은색 목화를 신고 있다. 관모 및 쥘부채를 보면 높은 신분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한 듯한데, 허리에 각대가 아니라 끈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복식은 격에 맞다고 할 수 없다. <천자위>는 망건에 흑립을 쓰고 있으며, 홍철릭(융복)을 입었다. 옷에는 반쪽의 국화무늬가 있고 주름이 많았다. 여기에 광다회를 드리우고 검정 목화를 신었다. 얼굴과 목 부위의 뒤쪽 배경에 푸른 점무늬의 뱀 같은 모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감찰위>는 사모를 쓰고 광다회를 드리운 포를 입었다. 포는 소매가 큰 것이 특징이며 목화는 신지 않았다. <상사위>는 유문(有紋)의 홍포에 광다회를 드리우고 검정 목화를 신고 있다. 머리에는 망건 위에 붉고 흰 두 개의 원이 있는 매우 독특한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가 우리나라 전통적인 관모가 아닌 것은 이 신이 서천서역국에서 들어온 외래신이라 이런 모습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여신 중 <본궁위>는 천자위의 부인일 가능성이 있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속바지와 운문이 있는 녹의 및 홍상을 입었으며, 신발을 신었다. 치마에는 말기 및 긴 끈이 있는데, 말기라면 보통 흰색으로 나타나지만 여기에서는 청록색의 말기와 끈인 것이 특색이다. 머리는 자기머리인지, 가체인지 혹은 관을 쓴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우나 뒤에 비녀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자신의 머리를 틀어 올린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녀에 새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중전위>는 상사대왕의 큰부인으로 볼 수 있는데, 속바지와 운문이 있는 홍의를 입었으며, 반쪽의 국화꽃 무늬가 있는 녹색 치마를 입었다. 혜를 신고 있으며, 치마에는 흰 말기와 끈이 보인다. <상군위>는 상사대왕의 작은부인으로 일곱 아기를 출산하는 정절상군농인 듯한데, 손에는 부채를 들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구슬이 장식되어 있다. 녹의 홍상에는 반쪽의 국화 문양이 있다. 저고리와 치마가 이어지는 부분에는 빨간 색의 말기가 있고, 혜를 신고 있다. <홍아위>는 정절상군농의 딸로 여겨진다.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머리는 내려진 긴 머리에 비녀를 꽂았다. 운문의 홍상을 입었고, 흰 말기에 녹색 끈을 드리웠으며 혜를 신었다. 본풀이 내용과 연결지어보면 이 신은 아직 미혼이기에 이처럼 머리를 길게 내려 그린 듯하다.

내왓당 무신도 중에서 남신의 복식을 살펴보면 머리에 통이 넓은 흑갓, 뒤쪽의 뿔이 긴 사모, 대가 낮은 원유관(혹은 오량관), 송낙, 모자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난다. 깃 부분과 수구(袖口)는 대체로 여러 색이 나타나는데, 옷의 깃 부분은 대개 리본을 맨 듯한 독특한 모양이며 광다회를 드리우고 있다. <제석위>는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인데, 이 신을 제외한 남신들의 복식은 대체로 그 복식이 신분이 높은 관복형이라 할 수 있다. 내왓당 본풀이에서 신들의 위상에 대해 대체로 “대왕” 운운하고 있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제석위를 제외한 모든 신들이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특징을 보이는데, 양손 중 부채를 든 손을 제외한 나머지 손들은 모두 용이나 새와 같은 동물의 발톱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인간과 신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고자 하여 신들의 손을 새나 용의 발톱처럼 그린 것이 아닌가 하며, 또한 양쪽 손목에는 거의 누런색의 팔찌를 끼고 있는데, 이러한 금팔찌 역시 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이들 무신도들은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손 모양이라든지 얼굴 모양, 그리고 옷에 나타나는 반쪽의 국화꽃 무늬 같은 것으로 볼 때, 동일 시대에 동일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고 볼 수 있어 한 속(屬)으로 묶을 수 있다.

내왓당 무신도는 회화적으로 볼 때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신상의 얼굴 표정이 너무 획일적이고 일률적이어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지의 수많은 무신도와는 얼굴 모양이나 색채, 감각이 매우 달라서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무신도의 저고리, 치마, 사모관대 등을 보면 이들은 분명히 우리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제주문화 속에서 배태되고 잉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왓당 무신도에 나타나는 색채와 기교의 독특함은 내왓당의 무신도가 지니는 특이성이자 독자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제주도의 신앙 형태와 회화사를 연구할 때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무신도는 제주도의 4대 국당(國堂)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내왓당의 무신도라는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耽羅誌 (담수계, 1953)
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김봉옥, 제주문화방송, 1986)
중요민속자료 지정조사보고서-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이수자, 문화재청, 2001)
내왓당 무신도 (제주대학교 박물관, 2002)
제주도 신화의 수수께끼 (현용준, 집문당,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