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喪轝)

상여

한자명

喪轝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박종민(朴鍾珉)

정의

장례의 발인 절차에 따라 상여꾼들이 망자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구하는 도구.

역사

고대국가에서 상여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관의 사용과 “북을 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죽은 자를 보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장례에서 상여가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사가私家에서 장례용 운구 용구로 건거巾車・상거喪車・유거柳車・영거靈車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는 국장용으로 유거・대여大輿・견여肩輿・외재궁여外梓宮輿를 제작해서 대행왕大行王의 옥체를, 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용으로 윤거輪車・지거紙車・상거・대여・소여小輿・상여를 사용해서 망자의 시신을 운구하였다. 일부 실학자들은 장례에 윤거와 지거・상거를 사용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여러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대여의 일부 구조를 축소한 소여가 상여로 자리 잡았다. 상여는 어깨에 메고서 망자를 운구하는 상구도 포함한다.

내용

상여의 구체적인 모습은, 주희朱熹(1130~1200)의 『가례家禮』 「상여지도喪轝之圖」에 실린 대여와 유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상여는 목조로 짜 맞춘 구조물에 직물로 두르고 장식물을 배치한, 망자를 위한 작은 공간으로, 망자의 집이라는 의미도 있다. 운구 용구는 바퀴를 달아서 이끄는 방식[車]과 어깨에 메는 방식[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의 방식으로는 유거・재곽거載槨車・윤거・지거・상거를, ‘여’의 방식으로는 대여・소여・방산方山 등을 들 수 있다.

‘거’의 방식으로는 유거가 가장 대표적이다. 유거는 바퀴가 달린 수레 형태로, 앞에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끌고 나아가는 상구이다. 유거는 하체와 본체로 크게 나뉜다. 하체는 유거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물로, 윤輪(바퀴)・곡轂(속바퀴)・축軸(가로대)・원轅(차대)・형衡・횡목橫木으로 구성된다. 본체는 거상車箱이라 하여 재궁梓宮을 싣는 부분으로, 횡목과 귀기歸機・단주短柱・소주小柱・정판精板・입주立柱・별갑鱉甲으로 구성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대부・사・서인용 운구 상구로 바퀴 달린 대여를 제시하였다. 왕실의 영향인지, 몇몇 실학자들은 지거와 윤거, 상거를 운구용 상구로 사용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반계수록磻溪隧錄』,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대군과 사대부는 말이 끄는 윤거輪車, 소가 끄는 상거喪車를 사용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장지가 멀어 상여꾼을 구할 수 없었던 상가에서 소가 운구용 상구를 끈 사례도 있었다. 또한, 사람이 메고 가기에 먼 거리에 장지가있거나 수레가 다니기에 유리하면, 바퀴 달린 운구 용구를 편리하게 사용하였다.

‘여’의 방식은 대여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소여와 방산 등의 용구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대여는 어깨에 메고서 망자의 시신을 운구하는 상구이다. ‘여’는 기본적으로 장강長杠과 횡강橫杠을 얽거나 짠 위에 본체로 난간과 지대목, 입주, 사주 등을 연결하고, 그 위에 상장을 배치하였다. 상가는 점차 운구 상구로 ‘거’ 형태에서 ‘여’ 형태의 상여를 널리 사용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상여 장식물이 달랐지만, 조선시대는 국장용과 대부・사・서인용의 구분만 있었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대행왕의 옥체를 운구할 견여, 대여 또는 유거, 외재궁여를 제작하였다. 국장 과정에서 대여와 유거는 궁궐 외문에서 영악전靈幄殿 입구까지, 견여는 빈전에서 궁궐 외문까지 및 영악전 입구에서 현궁까지 재궁을 운구하였다. 외재궁外梓宮은 하현궁下玄宮 시에 대행왕 옥체를 안치한 재궁을 담은 국장용 상구이다. 유거와 대여는 재궁을, 외재궁여는 외재궁을 운구한 상구였다. 외재궁여는 대여와 별도로 발인 이전에 외재궁을 싣고 능소陵所까지 운구하였으며, 구조적인 변화를 겪었다. 조선 초기에서 선조宣祖의 국장 때까지는 재곽거載槨車를 수레 형태로 제작해서 외재궁을 능소까지 운구하였다. 선조의 국장에서는 외재궁재거를 제작해서 선조의 외재궁을 운구하였다.

도로가 좋지 않았으므로, 유거로 대행왕의 재궁을 운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였다. 평지에서 운구하는 편이 담배군擔陪軍들의 힘이 덜 들 뿐만 아니라 위험도 적었다. 언덕을 오르거나 고개에서 내려올 때 한쪽으로 쏠리기라도 하면 운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거가 엎어지지 않도록 전인군과 후인군의 줄을 당겨서 균형을 맞추어 가며 장지까지 운구하였다. 운구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국장도감은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의 국휼國恤부터 유거를 폐지하고 어깨에 메는 대여를 사용하였다.

길이 넓은가 좁은가, 또는 오르막인가 내리막인가에 따라, 국장에서는 유거와 견여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재궁을 운구하였다. 바퀴 달린 유거와 어깨에 메는 대여는 운구 방식이 달라서, 본체를 지지하는 하체의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유거의 하체는 바퀴 및 바퀴와 관련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면, 대여의 하체는 장강과 횡강이 기본적인 틀을 구성하였다. 하체는 대행왕의 재궁을 안치하는 소방상小方床을 포함한 본체를 배치하도록 견고하게 짜 만들었다.

상여에는 소방상이라는 별도의 구조물을 제작해서 재궁과 구柩를 안치하였다. 소방상은 대행왕 옥체를 안치한 재궁 또는 망자의 시신을 안치한 구를 배치하는 공간으로, 상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공간이다. 소방상은 운구하는 동안 망자의 시신이 항상 수평을 유지하도록 제작하였다. 그래서 소방상은 시신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앞뒤로 흔들린다. 평지에서는 소방상이 장강, 상여 본체와 평형을 유지하지만,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서는 수평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므로 소방상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방상의 흔들림으로 상여꾼들에게 자칫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여를 운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인군과 후인군을 두어 미리 안정성을 확보한 다음 상여를 운구했다.

상가에서는 문제점을 보완하여 소방상을 없앤 소여小轝를 점차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민간의 상례・장례에서는 상여로 소여만을 사용하였다. 지금도 소여가 상여로 사용되며, 보통 소여를 상여라고 부르고있다. 소여 각각의 하체는 동일한 형태인 반면, 상장上裝 부분은 별갑, 와가, 반원통 모양 등으로 처리하여 상이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구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양은 조선시대 국장에서 사용한 대여와 견여의 상장 부분에서 취했던 형식이 민간의 상여 제작에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여의 구조와 장식물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변하기 시작하였다. 상여의 구조는 다층화하고 건축물처럼 변해 갔다. 또한, 상여는 민화같은 그림과 각종 장식물로,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상여는 예서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구조와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조선시대 전통 상여의 맥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계층을 달리해서 기존의 상여와 ‘조선화’된 상여가 함께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 산업화와 공업화로 상가는 점차 기존형식과 다른 상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농촌 지역의 청년층이 교육과 취업 같은 여러 이유로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자, 농촌에는 상여를 메고 운구할 사람이 없어졌다. 상여를 메고 운구할 인력이 부족해지자, 주민들은 이 문제를 지상여(일명 꽃상여)의 사용으로 직접 해결했다. 이외에도 몇몇 상여제작업자가 철과 합성수지로 상여를 제작해서 마을에 판매하였지만, 이들 상여는 크게 유통되지 않았다. 상주와 마을 주민들은 지상여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상주는 지상여가 남이 사용하지 않아 깨끗해서 좋고, 어른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해서 마음이 뿌듯하다고 생각한다. 상여꾼들은 지상여가 가벼워서 운구하기 편하고, 게다가 일회성이어서 운구 후 봉분하는 동안 불태워버리므로, 마을로 돌아올 때 육체적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상여는 망자 또는 상주의 종교와 사회적 위신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식은 십자가와 성경 글귀를 넣고, 불교식은 만卍자를 넣어서 외부인이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종교적인 색채를 표현하였다. 사회 저명인사의 상여는 고향의 기존 상여에 국화를 장식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상여를 개별적으로 구입해서 운구하는 것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계를 조직해서 가가호호 돈을 갹출하여 상여 구입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주로 마을의 목수를 중심으로 상여를 자체 제작하거나 기성품을 구입하였다. 이후 상여는 손상과 보수를 반복하면서 계속 사용되었다. 남은 들상여는 1956년에 수리비 등 제반 비용 111,490원을 들여서 보수되었다. 상가는 상여를 사용한 대가로 일정액의 사용료를 지불하였다. 상여를 관리하는 마을의 조직은 사용료를 모아두었다가 상여 수리와 부속품 구입, 상엿집 수리와 도색 등에 비용을 지출하였다.

마을에서는 산 아래 같은 외딴곳에 상엿집을 지어서 상여를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보관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곳집, 행상집 등으로 불렀다. 상엿집에는 상여뿐 아니라 산역도구와 햇빛을 가리는 천막도 보관하였다. 이전에는 목재와 흙을 사용해서 와가형 또는 초막형 상엿집을 지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시멘트 블록 등으로 상엿집을 짓고 있다. 또한, 마을마다 상여계 또는 마을 총회에서 상여관리인을 선정해서 상엿집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1990년대에 상여 사용이 점차 줄어들자, 주민들이 결의해서 자체적으로 상여를 태우고 상엿집을 허물기도 하였다. 한편, 도시 미관을 위해서 상엿집을 일제 정비하고자 비용을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특징 및 의의

상여는 단순히 시신 운구의 기능만 하지 않고, 상주의 경제력과 사회적 위신, 유교적 효와 자신의 바람 등을 반영하였다. 일부 부유한 상가는 상례・장례를 호화롭게 치르면서 상여를 복층 또는 중층으로 제작하고 각종 장식물로 꾸며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각종장식물은 망자와 상주 자신의 현실적인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상여는 ‘효孝’라는 유교적 가치관과 가례의 실천도구로서 기능하였다.

참고문헌

家禮, 國朝五禮儀, 磻溪隧錄, 四禮便覽, 星湖僿說, 한국상여의 변용과정 연구(박종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상여

상여
한자명

喪轝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박종민(朴鍾珉)

정의

장례의 발인 절차에 따라 상여꾼들이 망자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구하는 도구.

역사

고대국가에서 상여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관의 사용과 “북을 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죽은 자를 보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장례에서 상여가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사가私家에서 장례용 운구 용구로 건거巾車・상거喪車・유거柳車・영거靈車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는 국장용으로 유거・대여大輿・견여肩輿・외재궁여外梓宮輿를 제작해서 대행왕大行王의 옥체를, 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용으로 윤거輪車・지거紙車・상거・대여・소여小輿・상여를 사용해서 망자의 시신을 운구하였다. 일부 실학자들은 장례에 윤거와 지거・상거를 사용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여러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대여의 일부 구조를 축소한 소여가 상여로 자리 잡았다. 상여는 어깨에 메고서 망자를 운구하는 상구도 포함한다.

내용

상여의 구체적인 모습은, 주희朱熹(1130~1200)의 『가례家禮』 「상여지도喪轝之圖」에 실린 대여와 유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상여는 목조로 짜 맞춘 구조물에 직물로 두르고 장식물을 배치한, 망자를 위한 작은 공간으로, 망자의 집이라는 의미도 있다. 운구 용구는 바퀴를 달아서 이끄는 방식[車]과 어깨에 메는 방식[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의 방식으로는 유거・재곽거載槨車・윤거・지거・상거를, ‘여’의 방식으로는 대여・소여・방산方山 등을 들 수 있다.

‘거’의 방식으로는 유거가 가장 대표적이다. 유거는 바퀴가 달린 수레 형태로, 앞에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끌고 나아가는 상구이다. 유거는 하체와 본체로 크게 나뉜다. 하체는 유거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물로, 윤輪(바퀴)・곡轂(속바퀴)・축軸(가로대)・원轅(차대)・형衡・횡목橫木으로 구성된다. 본체는 거상車箱이라 하여 재궁梓宮을 싣는 부분으로, 횡목과 귀기歸機・단주短柱・소주小柱・정판精板・입주立柱・별갑鱉甲으로 구성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대부・사・서인용 운구 상구로 바퀴 달린 대여를 제시하였다. 왕실의 영향인지, 몇몇 실학자들은 지거와 윤거, 상거를 운구용 상구로 사용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은 『반계수록磻溪隧錄』,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대군과 사대부는 말이 끄는 윤거輪車, 소가 끄는 상거喪車를 사용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장지가 멀어 상여꾼을 구할 수 없었던 상가에서 소가 운구용 상구를 끈 사례도 있었다. 또한, 사람이 메고 가기에 먼 거리에 장지가있거나 수레가 다니기에 유리하면, 바퀴 달린 운구 용구를 편리하게 사용하였다.

‘여’의 방식은 대여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소여와 방산 등의 용구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대여는 어깨에 메고서 망자의 시신을 운구하는 상구이다. ‘여’는 기본적으로 장강長杠과 횡강橫杠을 얽거나 짠 위에 본체로 난간과 지대목, 입주, 사주 등을 연결하고, 그 위에 상장을 배치하였다. 상가는 점차 운구 상구로 ‘거’ 형태에서 ‘여’ 형태의 상여를 널리 사용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상여 장식물이 달랐지만, 조선시대는 국장용과 대부・사・서인용의 구분만 있었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대행왕의 옥체를 운구할 견여, 대여 또는 유거, 외재궁여를 제작하였다. 국장 과정에서 대여와 유거는 궁궐 외문에서 영악전靈幄殿 입구까지, 견여는 빈전에서 궁궐 외문까지 및 영악전 입구에서 현궁까지 재궁을 운구하였다. 외재궁外梓宮은 하현궁下玄宮 시에 대행왕 옥체를 안치한 재궁을 담은 국장용 상구이다. 유거와 대여는 재궁을, 외재궁여는 외재궁을 운구한 상구였다. 외재궁여는 대여와 별도로 발인 이전에 외재궁을 싣고 능소陵所까지 운구하였으며, 구조적인 변화를 겪었다. 조선 초기에서 선조宣祖의 국장 때까지는 재곽거載槨車를 수레 형태로 제작해서 외재궁을 능소까지 운구하였다. 선조의 국장에서는 외재궁재거를 제작해서 선조의 외재궁을 운구하였다.

도로가 좋지 않았으므로, 유거로 대행왕의 재궁을 운구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였다. 평지에서 운구하는 편이 담배군擔陪軍들의 힘이 덜 들 뿐만 아니라 위험도 적었다. 언덕을 오르거나 고개에서 내려올 때 한쪽으로 쏠리기라도 하면 운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거가 엎어지지 않도록 전인군과 후인군의 줄을 당겨서 균형을 맞추어 가며 장지까지 운구하였다. 운구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국장도감은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의 국휼國恤부터 유거를 폐지하고 어깨에 메는 대여를 사용하였다.

길이 넓은가 좁은가, 또는 오르막인가 내리막인가에 따라, 국장에서는 유거와 견여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재궁을 운구하였다. 바퀴 달린 유거와 어깨에 메는 대여는 운구 방식이 달라서, 본체를 지지하는 하체의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유거의 하체는 바퀴 및 바퀴와 관련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면, 대여의 하체는 장강과 횡강이 기본적인 틀을 구성하였다. 하체는 대행왕의 재궁을 안치하는 소방상小方床을 포함한 본체를 배치하도록 견고하게 짜 만들었다.

상여에는 소방상이라는 별도의 구조물을 제작해서 재궁과 구柩를 안치하였다. 소방상은 대행왕 옥체를 안치한 재궁 또는 망자의 시신을 안치한 구를 배치하는 공간으로, 상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공간이다. 소방상은 운구하는 동안 망자의 시신이 항상 수평을 유지하도록 제작하였다. 그래서 소방상은 시신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앞뒤로 흔들린다. 평지에서는 소방상이 장강, 상여 본체와 평형을 유지하지만,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서는 수평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므로 소방상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방상의 흔들림으로 상여꾼들에게 자칫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여를 운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인군과 후인군을 두어 미리 안정성을 확보한 다음 상여를 운구했다.

상가에서는 문제점을 보완하여 소방상을 없앤 소여小轝를 점차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민간의 상례・장례에서는 상여로 소여만을 사용하였다. 지금도 소여가 상여로 사용되며, 보통 소여를 상여라고 부르고있다. 소여 각각의 하체는 동일한 형태인 반면, 상장上裝 부분은 별갑, 와가, 반원통 모양 등으로 처리하여 상이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구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양은 조선시대 국장에서 사용한 대여와 견여의 상장 부분에서 취했던 형식이 민간의 상여 제작에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여의 구조와 장식물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변하기 시작하였다. 상여의 구조는 다층화하고 건축물처럼 변해 갔다. 또한, 상여는 민화같은 그림과 각종 장식물로,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상여는 예서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구조와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조선시대 전통 상여의 맥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계층을 달리해서 기존의 상여와 ‘조선화’된 상여가 함께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 산업화와 공업화로 상가는 점차 기존형식과 다른 상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농촌 지역의 청년층이 교육과 취업 같은 여러 이유로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자, 농촌에는 상여를 메고 운구할 사람이 없어졌다. 상여를 메고 운구할 인력이 부족해지자, 주민들은 이 문제를 지상여(일명 꽃상여)의 사용으로 직접 해결했다. 이외에도 몇몇 상여제작업자가 철과 합성수지로 상여를 제작해서 마을에 판매하였지만, 이들 상여는 크게 유통되지 않았다. 상주와 마을 주민들은 지상여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상주는 지상여가 남이 사용하지 않아 깨끗해서 좋고, 어른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해서 마음이 뿌듯하다고 생각한다. 상여꾼들은 지상여가 가벼워서 운구하기 편하고, 게다가 일회성이어서 운구 후 봉분하는 동안 불태워버리므로, 마을로 돌아올 때 육체적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상여는 망자 또는 상주의 종교와 사회적 위신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식은 십자가와 성경 글귀를 넣고, 불교식은 만卍자를 넣어서 외부인이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종교적인 색채를 표현하였다. 사회 저명인사의 상여는 고향의 기존 상여에 국화를 장식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상여를 개별적으로 구입해서 운구하는 것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계를 조직해서 가가호호 돈을 갹출하여 상여 구입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주로 마을의 목수를 중심으로 상여를 자체 제작하거나 기성품을 구입하였다. 이후 상여는 손상과 보수를 반복하면서 계속 사용되었다. 남은 들상여는 1956년에 수리비 등 제반 비용 111,490원을 들여서 보수되었다. 상가는 상여를 사용한 대가로 일정액의 사용료를 지불하였다. 상여를 관리하는 마을의 조직은 사용료를 모아두었다가 상여 수리와 부속품 구입, 상엿집 수리와 도색 등에 비용을 지출하였다.

마을에서는 산 아래 같은 외딴곳에 상엿집을 지어서 상여를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보관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곳집, 행상집 등으로 불렀다. 상엿집에는 상여뿐 아니라 산역도구와 햇빛을 가리는 천막도 보관하였다. 이전에는 목재와 흙을 사용해서 와가형 또는 초막형 상엿집을 지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시멘트 블록 등으로 상엿집을 짓고 있다. 또한, 마을마다 상여계 또는 마을 총회에서 상여관리인을 선정해서 상엿집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1990년대에 상여 사용이 점차 줄어들자, 주민들이 결의해서 자체적으로 상여를 태우고 상엿집을 허물기도 하였다. 한편, 도시 미관을 위해서 상엿집을 일제 정비하고자 비용을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특징 및 의의

상여는 단순히 시신 운구의 기능만 하지 않고, 상주의 경제력과 사회적 위신, 유교적 효와 자신의 바람 등을 반영하였다. 일부 부유한 상가는 상례・장례를 호화롭게 치르면서 상여를 복층 또는 중층으로 제작하고 각종 장식물로 꾸며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각종장식물은 망자와 상주 자신의 현실적인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상여는 ‘효孝’라는 유교적 가치관과 가례의 실천도구로서 기능하였다.

참고문헌

家禮, 國朝五禮儀, 磻溪隧錄, 四禮便覽, 星湖僿說, 한국상여의 변용과정 연구(박종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