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巫堂)

무당

한자명

巫堂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용어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정의

무속의 사제자로, 길흉화복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의 총칭.

내용

지역이나 성별에 따라 호칭에 차이가 있는데 지역적으로, 충청도에서는 법사, 전라도에서는 단골, 제주도에서는 심방이라고도 한다. 성별에 따라, 여자 무당을 만신이라고 하며, 남자 무당은 박수ㆍ화랭이ㆍ낭중ㆍ양중이라고 한다. 최근 무당이란 말에는 천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여 무속인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무당이란 지역과 성별을 초월한 명칭이라 할 수 있는데, 전통시대의 문헌에는 사제자로서의 무당이란 표현이 없어, 언제부터 사용된 호칭인지는 알 수 없다.이들은 선령이나 악령을 불문하고 교통하여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고, 이러한 능력을 토대로 인간과 신령의 세계를 매개함으로써 인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무당의 시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지리산의 성모천왕(聖母天王)과 법우화상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성모전설ㆍ중국 황제의 딸이나 왕녀였다는 왕녀전설ㆍ귀족 여성이라는 귀녀설ㆍ왕명을 받들어 무사(巫事)를 시작했다는 왕무전설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무조전설의 원형인지 알 수 없지만, 무당이 원래 고귀한 신분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무당은 신령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계자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입무(入巫) 과정의 차이에 따라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뉜다. 강신무란 자의가 아니라 신령의 선택에 의해 무격이 된 사람들이다. 신령의 소명은 보통 병리현상으로 나타나며, 이것을 신병(神病)이라 한다. 신령의 부름이 확인되면 신령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절차인 ‘내림굿’을 한다. 이때 받은 신을 ‘몸주’라 하며, 내림굿을 해준 무격을 ‘신어머니’나 ‘신아버지’라고 한다. 내림굿을 했다고 완전한 무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당 기간 신어머니나 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의례의 절차나 방법 등을 학습한다. 영적 능력은 신령으로부터 받지만 재주와 기술은 선배로부터 배운다. 강신체험을 통해 입문한 무격들은 의례 과정에서도 신령과 직접 접촉한다. 신령에 빙의되고 신령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빙의 상태의 무격은 인간이 아니라 신령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무격의 말은 신령의 말씀으로 신의 약속이고 예언이 된다. 한편 세습무란 무격이 되는 특정 가계에서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무격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춤과 노래 등 필요한 재주들을 익혀 무업(巫業)에 종사한다. 그러나 강신무와는 달리 입무 과정에서 강신체험은 없으며, 의례 과정에서도 신령과 일체화되는 일은 없다. 그 대신 가무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신령을 즐겁게 함으로써 의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강신무가 신령의 입장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면, 세습무는 인간의 소망을 신령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강신무와 세습무는 분포도 다르다. 한강을 경계로, 그 이북에는 강신무가, 이남에는 세습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습무가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 무격을 천시하는 사회적 풍조 때문에 자손들이 무업을 계승해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한강이남 지역에서는 강신무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강신무와 세습무의 분포권이 다르다는 것은 점차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듯 강신무와 세습무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양자는 기원부터가 다르며, 별개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양자의 신 관념이나 의례 절차, 그리고 무구(巫具) 등에는 공통점이 많다. 따라서 강신무와 세습무는 같은 계통이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할 때 강신무와 세습무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은 있지만, 강신무 선행설이 우세하다. 직업의 세습이란 후대에 와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있지만, 강신무가 북아시아의 샤먼과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이 유력한 근거다. 강신무와 샤먼은 다 같이 신병체험을 통해 입무하며, 의례의 과정에서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크다. 그런데 북아시아 지역이 샤머니즘의 원향(原鄕)이며 샤머니즘의 고형(古形)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북아시아의 샤먼과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은 강신무가 세습무에 선행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강신무나 세습무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 무당도 있다. 제주도의 심방은 혈통에 의해 사제권이 세습되며, 강신체험이 없고 무점구(巫占具)를 통해 신의 뜻을 탐지한다는 점에서는 세습무와 유사 하나, 영력을 중시하고 신 인식이 확고하다는 점에서는 세습무와 차이를 보인다. 호남을 비롯한 남부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명두는 어린 아이의 사령(死靈)을 불러 점을 친다는 점에서는 강신무와 유사하나, 가무에 의한 굿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 충청도의 법사는 앉아서 북과 징을 두드리며 무경(巫經)을 구송하여 악귀를 몰아내는 일을 하는데, 입무과정에서 강신체험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모두가 있다. 따라서 무당의 강신무와 세습무로 유형화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한국무속의 역사는 그 기능을 기준으로 했을 때,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로, 무속이 국가와 사회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고대국가의 지배자들이 무속의 권위를 빌어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자 했으며, 스스로 무당처럼 사제자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고대국가의 왕호(王號)인 단군이나 차차웅(次次雄)이 무당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이기에 무격들은 국가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국왕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가 수용되면서 무속의 지위는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불교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신라의 반도통일을 전후하여 지배적 종교 자리를 넘겨주게 되고 기층사회로 침전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는 7세기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중기인 16세기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무속이 국가나 전체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적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국왕에게서는 사제자적 성격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무격들이 국가조직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에서도 배제된다. 그렇지만 무당들은 지역사회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지역사회에는 지역 나름의 독특한 신앙이 있었고, 이러한 신앙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내부의 통합과 결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주의 두두리(豆豆里) 신앙•영해(寧海)의 팔령신(八鈴神) 신앙•울산의 계변신(戒邊神) 신앙•삼척의 오금잠(烏金簪) 신앙이 그 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에 기초한 의례들을 지역 세력의 후원 하에 무당들이 주관함으로써 무당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는 무속에 대한 배척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배척은 고려 말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 계층의 집권,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교국가 조선왕조의 건국으로 강도를 더해 간다. 그것은 무당들을 처벌하거나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 등 무당들에게 직접 제재를 가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는가 하면, 무격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제한한 것은 아니지만, 무당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줌으로써 무속 배척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예컨대 국립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무녀들을 배속시켜 환자를 돌보게 한다든가(굿을 통한 치료가 아니라 간호를 하도록 함), 무격들로부터 각종 무세(巫稅)를 징수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당들은 점차 천시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속 자체가 사회적 기능마저 상실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16세기 사림파의 집권 이후로, 무당들이 지역사회 차원에서의 기능마저 상실하고 주로 개인의 길흉화복 문제에만 관련하는 시기이다. 사림파란 16세기에 조선왕조의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부상한 세력들인데, 이들은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무속을 배척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그들은 무속의 존립 근거를 없애는 일환으로 귀신을 연구하여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나아가 귀신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무속 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들이 무세(巫稅) 폐지를 주장한 것도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다. 즉 무격들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무격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므로, 무격을 불법화하기 위해서는 무세 징수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관리로 부임하면 관권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무속을 탄압하였다. 중앙관서의 관리로 부임해서는 소속 관청의 신당들을 없앴으며, 지방관으로 나가는 지방의 무속적 전통을 근절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사림파의 집권을 계기로 무속은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는데, 촌락의 동제가 무격이 배제된 유교식 동제로 변모하는 것도 그 결과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당은 개인의 길흉화복 영역에서는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의 한계 때문이다.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고도의 철학이지만, 인간으로서 최대 관심사인 길흉화복이나 사후세계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러한 성리학의 한계는 무속이 존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또 조선왕조 정책의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왕조는 토착종교 금압의 일환으로 무격들의 도성 내 거주를 제한하고 도성 밖으로 축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도성 밖에서의 무업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중앙관청과 지방관청 재정의 상당 부분을 무세로 충당한 점도 문제였다. 무세를 징수하지 않을 경우 이들 관청의 운영이 어려워지게 된다. 나아가 무세에 대해 지방관의 재량이 상당히 주어진 점도 문제다. 지방관들은 무세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래서 무격 탄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무속은 현세를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현세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현세 긍정의 종교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보다 실존적 가치를 중시하는 생존의 종교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무속은 기복적이며 저차원의 종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내세의 구원이나 고매한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현세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의 해결이다. 이 때문에 무속은 생존의 종교로서 지금까지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무속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1),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 (유동식,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한국 무속의 강신무와 세습무 유형구분의 문제 (한국무속학회, 민속원, 2006), 조선무속고-역사로 본 한국 무속 (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 창비, 2008)

무당

무당
한자명

巫堂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용어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정의

무속의 사제자로, 길흉화복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의 총칭.

내용

지역이나 성별에 따라 호칭에 차이가 있는데 지역적으로, 충청도에서는 법사, 전라도에서는 단골, 제주도에서는 심방이라고도 한다. 성별에 따라, 여자 무당을 만신이라고 하며, 남자 무당은 박수ㆍ화랭이ㆍ낭중ㆍ양중이라고 한다. 최근 무당이란 말에는 천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여 무속인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무당이란 지역과 성별을 초월한 명칭이라 할 수 있는데, 전통시대의 문헌에는 사제자로서의 무당이란 표현이 없어, 언제부터 사용된 호칭인지는 알 수 없다.이들은 선령이나 악령을 불문하고 교통하여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고, 이러한 능력을 토대로 인간과 신령의 세계를 매개함으로써 인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무당의 시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지리산의 성모천왕(聖母天王)과 법우화상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성모전설ㆍ중국 황제의 딸이나 왕녀였다는 왕녀전설ㆍ귀족 여성이라는 귀녀설ㆍ왕명을 받들어 무사(巫事)를 시작했다는 왕무전설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무조전설의 원형인지 알 수 없지만, 무당이 원래 고귀한 신분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무당은 신령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계자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입무(入巫) 과정의 차이에 따라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뉜다. 강신무란 자의가 아니라 신령의 선택에 의해 무격이 된 사람들이다. 신령의 소명은 보통 병리현상으로 나타나며, 이것을 신병(神病)이라 한다. 신령의 부름이 확인되면 신령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절차인 ‘내림굿’을 한다. 이때 받은 신을 ‘몸주’라 하며, 내림굿을 해준 무격을 ‘신어머니’나 ‘신아버지’라고 한다. 내림굿을 했다고 완전한 무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당 기간 신어머니나 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의례의 절차나 방법 등을 학습한다. 영적 능력은 신령으로부터 받지만 재주와 기술은 선배로부터 배운다. 강신체험을 통해 입문한 무격들은 의례 과정에서도 신령과 직접 접촉한다. 신령에 빙의되고 신령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빙의 상태의 무격은 인간이 아니라 신령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무격의 말은 신령의 말씀으로 신의 약속이고 예언이 된다. 한편 세습무란 무격이 되는 특정 가계에서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무격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춤과 노래 등 필요한 재주들을 익혀 무업(巫業)에 종사한다. 그러나 강신무와는 달리 입무 과정에서 강신체험은 없으며, 의례 과정에서도 신령과 일체화되는 일은 없다. 그 대신 가무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신령을 즐겁게 함으로써 의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강신무가 신령의 입장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면, 세습무는 인간의 소망을 신령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강신무와 세습무는 분포도 다르다. 한강을 경계로, 그 이북에는 강신무가, 이남에는 세습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습무가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 무격을 천시하는 사회적 풍조 때문에 자손들이 무업을 계승해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한강이남 지역에서는 강신무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강신무와 세습무의 분포권이 다르다는 것은 점차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듯 강신무와 세습무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양자는 기원부터가 다르며, 별개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양자의 신 관념이나 의례 절차, 그리고 무구(巫具) 등에는 공통점이 많다. 따라서 강신무와 세습무는 같은 계통이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할 때 강신무와 세습무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은 있지만, 강신무 선행설이 우세하다. 직업의 세습이란 후대에 와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있지만, 강신무가 북아시아의 샤먼과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이 유력한 근거다. 강신무와 샤먼은 다 같이 신병체험을 통해 입무하며, 의례의 과정에서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크다. 그런데 북아시아 지역이 샤머니즘의 원향(原鄕)이며 샤머니즘의 고형(古形)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북아시아의 샤먼과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은 강신무가 세습무에 선행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강신무나 세습무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 무당도 있다. 제주도의 심방은 혈통에 의해 사제권이 세습되며, 강신체험이 없고 무점구(巫占具)를 통해 신의 뜻을 탐지한다는 점에서는 세습무와 유사 하나, 영력을 중시하고 신 인식이 확고하다는 점에서는 세습무와 차이를 보인다. 호남을 비롯한 남부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명두는 어린 아이의 사령(死靈)을 불러 점을 친다는 점에서는 강신무와 유사하나, 가무에 의한 굿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 충청도의 법사는 앉아서 북과 징을 두드리며 무경(巫經)을 구송하여 악귀를 몰아내는 일을 하는데, 입무과정에서 강신체험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모두가 있다. 따라서 무당의 강신무와 세습무로 유형화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한국무속의 역사는 그 기능을 기준으로 했을 때,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로, 무속이 국가와 사회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고대국가의 지배자들이 무속의 권위를 빌어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자 했으며, 스스로 무당처럼 사제자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고대국가의 왕호(王號)인 단군이나 차차웅(次次雄)이 무당을 뜻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이기에 무격들은 국가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국왕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가 수용되면서 무속의 지위는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불교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신라의 반도통일을 전후하여 지배적 종교 자리를 넘겨주게 되고 기층사회로 침전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는 7세기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중기인 16세기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무속이 국가나 전체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적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국왕에게서는 사제자적 성격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무격들이 국가조직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에서도 배제된다. 그렇지만 무당들은 지역사회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지역사회에는 지역 나름의 독특한 신앙이 있었고, 이러한 신앙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내부의 통합과 결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주의 두두리(豆豆里) 신앙•영해(寧海)의 팔령신(八鈴神) 신앙•울산의 계변신(戒邊神) 신앙•삼척의 오금잠(烏金簪) 신앙이 그 예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에 기초한 의례들을 지역 세력의 후원 하에 무당들이 주관함으로써 무당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는 무속에 대한 배척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배척은 고려 말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 계층의 집권,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교국가 조선왕조의 건국으로 강도를 더해 간다. 그것은 무당들을 처벌하거나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 등 무당들에게 직접 제재를 가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는가 하면, 무격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제한한 것은 아니지만, 무당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줌으로써 무속 배척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예컨대 국립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무녀들을 배속시켜 환자를 돌보게 한다든가(굿을 통한 치료가 아니라 간호를 하도록 함), 무격들로부터 각종 무세(巫稅)를 징수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당들은 점차 천시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속 자체가 사회적 기능마저 상실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16세기 사림파의 집권 이후로, 무당들이 지역사회 차원에서의 기능마저 상실하고 주로 개인의 길흉화복 문제에만 관련하는 시기이다. 사림파란 16세기에 조선왕조의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부상한 세력들인데, 이들은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무속을 배척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그들은 무속의 존립 근거를 없애는 일환으로 귀신을 연구하여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나아가 귀신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무속 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들이 무세(巫稅) 폐지를 주장한 것도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다. 즉 무격들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무격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므로, 무격을 불법화하기 위해서는 무세 징수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관리로 부임하면 관권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무속을 탄압하였다. 중앙관서의 관리로 부임해서는 소속 관청의 신당들을 없앴으며, 지방관으로 나가는 지방의 무속적 전통을 근절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사림파의 집권을 계기로 무속은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는데, 촌락의 동제가 무격이 배제된 유교식 동제로 변모하는 것도 그 결과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당은 개인의 길흉화복 영역에서는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의 한계 때문이다.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고도의 철학이지만, 인간으로서 최대 관심사인 길흉화복이나 사후세계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러한 성리학의 한계는 무속이 존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또 조선왕조 정책의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왕조는 토착종교 금압의 일환으로 무격들의 도성 내 거주를 제한하고 도성 밖으로 축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도성 밖에서의 무업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특히 중앙관청과 지방관청 재정의 상당 부분을 무세로 충당한 점도 문제였다. 무세를 징수하지 않을 경우 이들 관청의 운영이 어려워지게 된다. 나아가 무세에 대해 지방관의 재량이 상당히 주어진 점도 문제다. 지방관들은 무세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래서 무격 탄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무속은 현세를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현세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현세 긍정의 종교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보다 실존적 가치를 중시하는 생존의 종교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무속은 기복적이며 저차원의 종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내세의 구원이나 고매한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현세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의 해결이다. 이 때문에 무속은 생존의 종교로서 지금까지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무속연구 (김태곤, 집문당, 1981)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 (유동식,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한국 무속의 강신무와 세습무 유형구분의 문제 (한국무속학회, 민속원, 2006)
조선무속고-역사로 본 한국 무속 (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 창비,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