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散骨)

산골

한자명

散骨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구미래(具美來)

정의

화장한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지정된 장소나 산・강・바다 등에 뿌리는 것.

역사

화장의 흔적이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산골 또한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골에 대한 기록은 불교사상과 함께 화장이 본격적으로 정착되던 7세기에 등장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681)은 죽어서 동해룡東海龍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유지를 남김에 따라 문무왕의 유골은 화장 후 동해 대왕암에 뿌려졌다. 이후 8명의 신라왕이 화장되었고, 그 가운데 효성왕・선덕왕・진성여왕・경명왕은 산골을 행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당시는 화장을 하면 유골을 용기에 담아 매장하는 화장묘火葬墓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와 함께 산골 또한 성행했던 것이다. 왕실뿐 아니라 8세기 전반에는 관리였던 김지성金志誠이 부모의 유해를 동해에 산골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왕실과 지배층은 바다 등에 유골을 뿌림으로써 보다 나은 내세를 기대하는 관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9세기에는 선불교禪佛敎가 일어나 각 선문禪門의 고승이 입적하면 사리나 유골을 승탑僧塔에 봉안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를 중시한 고려시대에는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는 이중장二重葬이 만연하여 산골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이후 화장을 배척한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화장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는데, 유골을 봉안하는 시설이 없던때라 화장을 하는 이들 대부분은 산골을 하였다. 1970년대 전후로 현대식 봉안시설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까지는 화장률이 높지 않았고 봉안시설에 대한 관심도 없어 화장은 대개 산골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화장이 급속하게 증가하여 고인의 유해를 모실 추모공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봉안당奉安堂이 활성화되었다. 2000년대에는 대형 석물로 조형된 봉안시설이 환경훼손과 허례허식의 문제를 불러일으켜, 친환경적 대안으로 산골을 비롯한 자연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내용

산골은 골분骨粉을 그대로 뿌리는 방법과 환丸을 만들어 뿌리는 방법이 있다. 환은 반죽한 곡식가루를 골분과 섞어 작은 콩처럼 만든다. 연못이나 강의 물고기, 산속의 새나 들짐승에게 먹이로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생전에 뭇 생명을 섭취하며 삶을 유지했던 고인의 몸을 자연의 생명에게 보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산골을 할 때 자연의 근원으로 돌려보낸다는 뜻에서 염불기도를 하며 골분을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로 뿌리기도 한다. 현재 관련 법규상으로 봉안당이나 승화원에 화장한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시설을 두도록 하였을 뿐, 지정된 장소에서만 뿌려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 산골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산골은 고인의 유해를 모시지 않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불교에서 행하는 화장의 원형적 모습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통해 인간의 몸을 본래의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이상적 죽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장례문화가 묘지에서 화장으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면, 근래에는 봉안당에서 산골・자연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불교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모습과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장례문화의 변화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참고문헌

茶毘文, 三國史記, 三國遺事, 석문의범(안진호, 만상회, 1935), 장례의 역사(박태호, 서해문집, 2006), 한국불교의 일생의례(구미래, 민족사, 2012).

산골

산골
한자명

散骨

사전위치

한국일생의례사전 > 일생의례 > 상장례

집필자 구미래(具美來)

정의

화장한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지정된 장소나 산・강・바다 등에 뿌리는 것.

역사

화장의 흔적이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산골 또한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골에 대한 기록은 불교사상과 함께 화장이 본격적으로 정착되던 7세기에 등장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681)은 죽어서 동해룡東海龍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유지를 남김에 따라 문무왕의 유골은 화장 후 동해 대왕암에 뿌려졌다. 이후 8명의 신라왕이 화장되었고, 그 가운데 효성왕・선덕왕・진성여왕・경명왕은 산골을 행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당시는 화장을 하면 유골을 용기에 담아 매장하는 화장묘火葬墓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와 함께 산골 또한 성행했던 것이다. 왕실뿐 아니라 8세기 전반에는 관리였던 김지성金志誠이 부모의 유해를 동해에 산골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왕실과 지배층은 바다 등에 유골을 뿌림으로써 보다 나은 내세를 기대하는 관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9세기에는 선불교禪佛敎가 일어나 각 선문禪門의 고승이 입적하면 사리나 유골을 승탑僧塔에 봉안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를 중시한 고려시대에는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는 이중장二重葬이 만연하여 산골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이후 화장을 배척한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화장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는데, 유골을 봉안하는 시설이 없던때라 화장을 하는 이들 대부분은 산골을 하였다. 1970년대 전후로 현대식 봉안시설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까지는 화장률이 높지 않았고 봉안시설에 대한 관심도 없어 화장은 대개 산골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화장이 급속하게 증가하여 고인의 유해를 모실 추모공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봉안당奉安堂이 활성화되었다. 2000년대에는 대형 석물로 조형된 봉안시설이 환경훼손과 허례허식의 문제를 불러일으켜, 친환경적 대안으로 산골을 비롯한 자연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내용

산골은 골분骨粉을 그대로 뿌리는 방법과 환丸을 만들어 뿌리는 방법이 있다. 환은 반죽한 곡식가루를 골분과 섞어 작은 콩처럼 만든다. 연못이나 강의 물고기, 산속의 새나 들짐승에게 먹이로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생전에 뭇 생명을 섭취하며 삶을 유지했던 고인의 몸을 자연의 생명에게 보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산골을 할 때 자연의 근원으로 돌려보낸다는 뜻에서 염불기도를 하며 골분을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로 뿌리기도 한다. 현재 관련 법규상으로 봉안당이나 승화원에 화장한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시설을 두도록 하였을 뿐, 지정된 장소에서만 뿌려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 산골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산골은 고인의 유해를 모시지 않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불교에서 행하는 화장의 원형적 모습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통해 인간의 몸을 본래의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이상적 죽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장례문화가 묘지에서 화장으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면, 근래에는 봉안당에서 산골・자연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불교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모습과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장례문화의 변화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참고문헌

茶毘文, 三國史記, 三國遺事, 석문의범(안진호, 만상회, 1935), 장례의 역사(박태호, 서해문집, 2006), 한국불교의 일생의례(구미래, 민족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