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가천암수바위

남해가천암수바위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정상박(鄭尙圤)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에 있는 성숭배 신앙의 대상인 한 쌍의 암수바위. 1990년 1월 16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숫돌은 높이 450㎝, 둘레 250㎝ 크기로 발기한 남성 성기 형상으로 서 있고, 암돌은 높이 390㎝, 둘레 250㎝ 크기의 암돌은 가운데가 불룩하여 아이를 잉태한 모습이라고 하며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화강암으로 자연석이지만 숫돌은 인공을 가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귀두와 힘줄이 사실적이다. 가천마을의 가장 아래 해안에서 100m 거리의 330㎡가량의 밭 가장자리에 5m 간격으로 암수바위가 있다.

내용

돌들을 ‘미륵’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1751년(영조 27)에 땅속에 있던 것을 파내어 숭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성신앙의 대상물로 숭배되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마을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하여 견디기 어려우니 파내어 세워 주면 필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현령이 가천마을에 가 보니 꿈에 본 지세와 같았다. 일꾼을 시켜 땅을 파게 하여 보니 암수바위가 나왔다. 이들 바위를 일으켜 세워 미륵불봉안하여 논 다섯 마지기를 헌납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 돌을 파서 발견한 날이 음력 10월 23일이어서 이날을 기하여 지금까지 제의를 지내고 있다. 제의는 이 마을 사람들만 아니라 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는 남해, 사천, 통영 등지의 사람들이 모여 미륵계(彌勒契)를 결성하여 지내 왔다. 근년에는 마을 사람들이 10월 보름날에 동제를 지내고 별도로 10월 23일 조금날에 이 미륵제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생기복덕이 좋고 깨끗한 사람을 제주와 집사로 선정한다. 제주 부부와 집사는 깊은 산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조용한 자정에 암수 미륵 앞에 깐 자리 위에 밥,나물, 과일 등을 큰 그릇에 푸짐하게 담아 차려서 제를 지낸다. 불교신인 미륵불을 위한 제의여서 육류, 생선, 술을 쓰지 않는 대신 제물을 푸짐하게 차려서 마을의 태평무사와 풍농을 빌고 절한다. 미륵계를 결성하여 제의를 행할 때 계원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들의 댁내무사와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제를 마치면 제물을 조금 사방에 흩뜨리고 땅에 파묻은 뒤 나머지는 가지고 와서 다음날 동민들과 음복을 한다.

암수바위를 손가락질하거나 욕심을 내어 이 바위 가까이에 작물을 심으면 화를 입고, 상여도 반드시 아래로 지나가지 않으면 변고가 생긴다고 한다. 심지어 새가 암수바위에 앉으면 죽을 정도로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고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처음 잡은 고기를 이 바위에 걸어 둔다. 이 바위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자 타지 사람들도 찾아와 촛불을 밝히고 기자(祈子), 치병, 소원성취 등을 기원한다.

의의

이 암수바위는 옛날에는 풍요, 다산을 기원하던 성숭배의 대상물이었다. 종교적 기능이 바다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확대되고 불교의 미륵불로 격상되면서 시대가 변하여도 신성성을 유지하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존속되어 왔다. 남해 현령이 땅에서 파내어 미륵불로 봉안하였다는 전설을 통하여 관의 권위를 빌려 미륵불로서 품위를 부여하면서 성기 형상석이지만 계속 숭배되어 온 것이다. 이 바위 한 쌍의 신격이 성기숭배 대상물에서 미륵불로 변하였지만 불교신으로서의 변모가 아니라 본래 지닌 풍요 다산의 기능을 유지하면서마을 수호, 기복, 치병, 소원성취, 태평무사 등으로 기능이 확대되어 왔다. 이 암수바위는 민간신앙과 불교의 습합 양상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남해의 얼 (남해군, 1983), 성기암설화의 변이전승 고찰 (정상박, 석당논총 17,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91), 전설의 사회사 (정상박, 민속원, 2000)

남해가천암수바위

남해가천암수바위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정상박(鄭尙圤)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에 있는 성숭배 신앙의 대상인 한 쌍의 암수바위. 1990년 1월 16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숫돌은 높이 450㎝, 둘레 250㎝ 크기로 발기한 남성 성기 형상으로 서 있고, 암돌은 높이 390㎝, 둘레 250㎝ 크기의 암돌은 가운데가 불룩하여 아이를 잉태한 모습이라고 하며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화강암으로 자연석이지만 숫돌은 인공을 가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귀두와 힘줄이 사실적이다. 가천마을의 가장 아래 해안에서 100m 거리의 330㎡가량의 밭 가장자리에 5m 간격으로 암수바위가 있다.

내용

돌들을 ‘미륵’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1751년(영조 27)에 땅속에 있던 것을 파내어 숭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성신앙의 대상물로 숭배되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마을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하여 견디기 어려우니 파내어 세워 주면 필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현령이 가천마을에 가 보니 꿈에 본 지세와 같았다. 일꾼을 시켜 땅을 파게 하여 보니 암수바위가 나왔다. 이들 바위를 일으켜 세워 미륵불로 봉안하여 논 다섯 마지기를 헌납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 돌을 파서 발견한 날이 음력 10월 23일이어서 이날을 기하여 지금까지 제의를 지내고 있다. 제의는 이 마을 사람들만 아니라 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는 남해, 사천, 통영 등지의 사람들이 모여 미륵계(彌勒契)를 결성하여 지내 왔다. 근년에는 마을 사람들이 10월 보름날에 동제를 지내고 별도로 10월 23일 조금날에 이 미륵제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생기복덕이 좋고 깨끗한 사람을 제주와 집사로 선정한다. 제주 부부와 집사는 깊은 산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조용한 자정에 암수 미륵 앞에 깐 자리 위에 밥,나물, 과일 등을 큰 그릇에 푸짐하게 담아 차려서 제를 지낸다. 불교신인 미륵불을 위한 제의여서 육류, 생선, 술을 쓰지 않는 대신 제물을 푸짐하게 차려서 마을의 태평무사와 풍농을 빌고 절한다. 미륵계를 결성하여 제의를 행할 때 계원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들의 댁내무사와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제를 마치면 제물을 조금 사방에 흩뜨리고 땅에 파묻은 뒤 나머지는 가지고 와서 다음날 동민들과 음복을 한다.

암수바위를 손가락질하거나 욕심을 내어 이 바위 가까이에 작물을 심으면 화를 입고, 상여도 반드시 아래로 지나가지 않으면 변고가 생긴다고 한다. 심지어 새가 암수바위에 앉으면 죽을 정도로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고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처음 잡은 고기를 이 바위에 걸어 둔다. 이 바위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자 타지 사람들도 찾아와 촛불을 밝히고 기자(祈子), 치병, 소원성취 등을 기원한다.

의의

이 암수바위는 옛날에는 풍요, 다산을 기원하던 성숭배의 대상물이었다. 종교적 기능이 바다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확대되고 불교의 미륵불로 격상되면서 시대가 변하여도 신성성을 유지하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존속되어 왔다. 남해 현령이 땅에서 파내어 미륵불로 봉안하였다는 전설을 통하여 관의 권위를 빌려 미륵불로서 품위를 부여하면서 성기 형상석이지만 계속 숭배되어 온 것이다. 이 바위 한 쌍의 신격이 성기숭배 대상물에서 미륵불로 변하였지만 불교신으로서의 변모가 아니라 본래 지닌 풍요 다산의 기능을 유지하면서마을 수호, 기복, 치병, 소원성취, 태평무사 등으로 기능이 확대되어 왔다. 이 암수바위는 민간신앙과 불교의 습합 양상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남해의 얼 (남해군, 1983)
성기암설화의 변이전승 고찰 (정상박, 석당논총 17,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91)
전설의 사회사 (정상박, 민속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