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속인명

집필자 윤동환(尹東煥)

분야

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별신굿 보유자(악사)이자 명예보유자.

내용

김성수의 둘째 아들인 김석출(金石出, 남)은 일명 김경남(金京南)으로 1922년에 경북 영일군 흥해읍(현재 포항시 북구) 환호동에서 태어났고 2005년에 사망했다. 김석출의 본적은 조부의 출생지를 이어받아 경북 영일군 흥해면 옥성동 26번지로 되어 있다.

김석출은 5살 때 모친인 이선옥이 사망하고 나서 형인 김호출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김석출은 7살 때부터 굿판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다니다가 8살부터 징채를 잡고 본격적으로 약바라지를 하였다. 김석출은 굿판에 참여하면서 원화선(엄화선), 김성수, 이충운(이치운), 박춘실 등의 가락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이 무렵에 유랑예인단체 일원으로 온 화중선의 단가판소리를 접하기도 했다.

김석출은 무악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서 12살 때부터는 굿판의 어른들이 3원 받을 때 1원 50전, 즉 반 섬을 받았다. 2년 후에는 어른들과 동일하게 온 섬 3원을 받았다. 동해안에서는 이 시기에도 굿 사이에 놀음굿이 있었다. 김석출은 굿 사이사이에 어른들이 못하는 단가나 판소리 한 대목을 하여 온 섬 3원 외에 잔배미로 1원 50전~2원을 더 받았다. 동해안의 굿판에서는 나이나 항렬보다 무업 능력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김석출은 어린 시절에 부산에서 활동했다. 15살에서 18살 무렵에 굿을 하러 가면 인물이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동해안의 화랭이는 광인굿에서 작두를 탔기 때문에 김석축도 작두를 탔다. 김석출이 처음으로 작두에 오른 것은 16살 때이다. 김석출은 16~17살 무렵에 강원도 삼척의 작은아버지인 김영수가 맡은 굿에 불려가기도 했다.

김석출은 17살 때 경북 영덕 출신의 김옥순과 혼인하였다. 결혼식은 삼척 근덕에 있는 변성해의 앞집에서 하게 되었다. 처인 김옥순은 굿 학습을 중단하여 무업을 하지 않고 김석출의 할머니인 이옥분을 병수발하며 집안일을 도왔다. 김석출과 김옥순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병으로 죽고 나서 이혼하게 되었다.

이후 김석출은 19살 때 변성해의 딸 변난호(본명 명자)와 결혼하였다. 혼인 후 장인 변성해의 집에 잠시 거주하였다. 그러나 처가에서 계속 생활하는 것이 싫어 친형이 있는 포항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포항으로 와서는 구룡포 대보(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보면)로 분가하였다. 김석출은 변난호 사이에서 1941년 6월 맏딸인 영희(英希, 개명하기 전 이름 福順), 1951년 둘째 딸 동연(東衍, 개명하기 전 이름 보길), 1955년 9월 28일 셋째 딸 동언(東彦, 개명하기 전 이름 愛心), 넷째 딸 동율(東律)을 낳았다. 김석출은 변난호와 자식들을 낳고 살면서도 한동안 처가집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김석출은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본격적으로 민속예인들과 대면할 기회가 많았다. 포항에서 형제들과 함께 집집마다 걸립을 하다가 이생강의 부친과 만나게 되고, 이생강과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또 스무 살 때는 박동진을 만나 판소리를 배웠다.

김석출의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김석출이 스물네 살 때 부산극장에서 유랑예인단체에 속해 있는 태평소의 명인 방태진을 만난다. 민속음악에 관심이 있던 김석출은 국악단체가 부산•포항 등지로 온다고 방이 붙으면 굿을 해서 번 돈을 싸들고 만나러 갔다. 김석출이 처음 방태진과 만났을 당시 그는 햇님달님 단체에서 무대(의상)감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1950년에서 1955년 무렵에는 유랑예인단체에 참여하여 따라다니기도 했다.

김석출 34살 때 강릉 주문진에 별신굿을 하러 갔다가 주문진 째보영감(백창옥) 집과 사돈관계에 있는 현재의 부인 김유선을 만났다. 김유선은 그 당시 굿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소리는 곧잘 했다. 이 시기에 김석출은 변난호와 부산 자갈치에 살고 있었다. 김유선은 김석출 부부의 권유로 김석출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다. 김유선은 무업 기능을 쉽게 습득하여 굿을 배운 지 넉 달 만에 굿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 김석출과 김유선은 변난호를 피해 포항 청하에 사는 형 김호출의 집에 갔다가 다시 영덕 강구, 강릉 안인과 주문진 등지로 주거지를 이동하였다. 결국 김석출과 김유선 사이에 동완을 낳고 변난호와는 이혼을 하였다. 그 후 1964년에 주문진에서 다시 부산 해운대로 이사한 김석출은 50년 가까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동해안굿을 도맡았다.

김석출은 동해안굿뿐 아니라 전통연희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호적으로 산조를 분 정통 명인이기도 하다. 1982년 일본 도쿄국립극장 초청공연을 비롯하여 1994년 교토•오사카 공연, 1995년과 1996년에 요코하마 페스티벌 참가, 1996년 유라시안 에코스 호암아트홀 공연, 1997년 영국 런던 로열홀 공연을 통해 동해안 무속음악과 김석출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굿음악 음반을 통해 대중과 접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그가 참여한 음반으로는 〈높새바람〉(삼성나이세스, 1993), 〈동해안 별신굿〉(서울음반, 1993), 〈동해무속사물〉(삼성뮤직, 1994), 〈동해오구굿〉(삼성뮤직, 1995), 〈94일요명인명창전 동해 무속음악〉(서울음반, 1996), 〈김석출결정판〉(삼성뮤직, 1997), 〈동해안 별신굿과 오귀굿〉(국립국악원, 1999) 등이 있다.

김석출의 자녀는 모두 1남 9녀이다. 그 가운데 변난호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영희•김동연•김동언만이 동해안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무업을 이어오고 있다.

참고문헌

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 (윤동환,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동해안 무집단의 당주권 확보과정과 적응전략 (윤동환, 한국무속학 16, 한국무속학회, 2008)

김석출

김석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무속신앙 > 무속인명

집필자 윤동환(尹東煥)

분야

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별신굿 보유자(악사)이자 명예보유자.

내용

김성수의 둘째 아들인 김석출(金石出, 남)은 일명 김경남(金京南)으로 1922년에 경북 영일군 흥해읍(현재 포항시 북구) 환호동에서 태어났고 2005년에 사망했다. 김석출의 본적은 조부의 출생지를 이어받아 경북 영일군 흥해면 옥성동 26번지로 되어 있다.

김석출은 5살 때 모친인 이선옥이 사망하고 나서 형인 김호출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김석출은 7살 때부터 굿판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다니다가 8살부터 징채를 잡고 본격적으로 약바라지를 하였다. 김석출은 굿판에 참여하면서 원화선(엄화선), 김성수, 이충운(이치운), 박춘실 등의 가락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이 무렵에 유랑예인단체 일원으로 온 화중선의 단가와 판소리를 접하기도 했다.

김석출은 무악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서 12살 때부터는 굿판의 어른들이 3원 받을 때 1원 50전, 즉 반 섬을 받았다. 2년 후에는 어른들과 동일하게 온 섬 3원을 받았다. 동해안에서는 이 시기에도 굿 사이에 놀음굿이 있었다. 김석출은 굿 사이사이에 어른들이 못하는 단가나 판소리 한 대목을 하여 온 섬 3원 외에 잔배미로 1원 50전~2원을 더 받았다. 동해안의 굿판에서는 나이나 항렬보다 무업 능력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김석출은 어린 시절에 부산에서 활동했다. 15살에서 18살 무렵에 굿을 하러 가면 인물이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동해안의 화랭이는 광인굿에서 작두를 탔기 때문에 김석축도 작두를 탔다. 김석출이 처음으로 작두에 오른 것은 16살 때이다. 김석출은 16~17살 무렵에 강원도 삼척의 작은아버지인 김영수가 맡은 굿에 불려가기도 했다.

김석출은 17살 때 경북 영덕 출신의 김옥순과 혼인하였다. 결혼식은 삼척 근덕에 있는 변성해의 앞집에서 하게 되었다. 처인 김옥순은 굿 학습을 중단하여 무업을 하지 않고 김석출의 할머니인 이옥분을 병수발하며 집안일을 도왔다. 김석출과 김옥순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병으로 죽고 나서 이혼하게 되었다.

이후 김석출은 19살 때 변성해의 딸 변난호(본명 명자)와 결혼하였다. 혼인 후 장인 변성해의 집에 잠시 거주하였다. 그러나 처가에서 계속 생활하는 것이 싫어 친형이 있는 포항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포항으로 와서는 구룡포 대보(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보면)로 분가하였다. 김석출은 변난호 사이에서 1941년 6월 맏딸인 영희(英希, 개명하기 전 이름 福順), 1951년 둘째 딸 동연(東衍, 개명하기 전 이름 보길), 1955년 9월 28일 셋째 딸 동언(東彦, 개명하기 전 이름 愛心), 넷째 딸 동율(東律)을 낳았다. 김석출은 변난호와 자식들을 낳고 살면서도 한동안 처가집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김석출은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본격적으로 민속예인들과 대면할 기회가 많았다. 포항에서 형제들과 함께 집집마다 걸립을 하다가 이생강의 부친과 만나게 되고, 이생강과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또 스무 살 때는 박동진을 만나 판소리를 배웠다.

김석출의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김석출이 스물네 살 때 부산극장에서 유랑예인단체에 속해 있는 태평소의 명인 방태진을 만난다. 민속음악에 관심이 있던 김석출은 국악단체가 부산•포항 등지로 온다고 방이 붙으면 굿을 해서 번 돈을 싸들고 만나러 갔다. 김석출이 처음 방태진과 만났을 당시 그는 햇님달님 단체에서 무대(의상)감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1950년에서 1955년 무렵에는 유랑예인단체에 참여하여 따라다니기도 했다.

김석출 34살 때 강릉 주문진에 별신굿을 하러 갔다가 주문진 째보영감(백창옥) 집과 사돈관계에 있는 현재의 부인 김유선을 만났다. 김유선은 그 당시 굿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소리는 곧잘 했다. 이 시기에 김석출은 변난호와 부산 자갈치에 살고 있었다. 김유선은 김석출 부부의 권유로 김석출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다. 김유선은 무업 기능을 쉽게 습득하여 굿을 배운 지 넉 달 만에 굿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후 김석출과 김유선은 변난호를 피해 포항 청하에 사는 형 김호출의 집에 갔다가 다시 영덕 강구, 강릉 안인과 주문진 등지로 주거지를 이동하였다. 결국 김석출과 김유선 사이에 동완을 낳고 변난호와는 이혼을 하였다. 그 후 1964년에 주문진에서 다시 부산 해운대로 이사한 김석출은 50년 가까이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동해안굿을 도맡았다.

김석출은 동해안굿뿐 아니라 전통연희나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호적으로 산조를 분 정통 명인이기도 하다. 1982년 일본 도쿄국립극장 초청공연을 비롯하여 1994년 교토•오사카 공연, 1995년과 1996년에 요코하마 페스티벌 참가, 1996년 유라시안 에코스 호암아트홀 공연, 1997년 영국 런던 로열홀 공연을 통해 동해안 무속음악과 김석출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굿음악 음반을 통해 대중과 접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그가 참여한 음반으로는 〈높새바람〉(삼성나이세스, 1993), 〈동해안 별신굿〉(서울음반, 1993), 〈동해무속사물〉(삼성뮤직, 1994), 〈동해오구굿〉(삼성뮤직, 1995), 〈94일요명인명창전 동해 무속음악〉(서울음반, 1996), 〈김석출결정판〉(삼성뮤직, 1997), 〈동해안 별신굿과 오귀굿〉(국립국악원, 1999) 등이 있다.

김석출의 자녀는 모두 1남 9녀이다. 그 가운데 변난호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영희•김동연•김동언만이 동해안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무업을 이어오고 있다.

참고문헌

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 (윤동환,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동해안 무집단의 당주권 확보과정과 적응전략 (윤동환, 한국무속학 16, 한국무속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