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교동도부군당제

강화교동도부군당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정연학(鄭然鶴)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읍내리에서 음력 정초에 길일(吉日)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

역사

부군당제는 조선시대 각 관아(官衙)에서 신당(神堂)을 두고 아전(衙前)과 서리(胥吏) 등 하급 관리들이 지낸 제사이다. 부군당제는 현재 한강변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조선 후기 한강의 수운을 이용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인구가 급증한 한강변에 이를 관리하는 여러 관청 및 기관이 집중되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부군당제의 목적이 해당 관서에서 맡은 업무와 관원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부군당제가 주재 집단의 변화에 의해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바뀌거나 무당 개인의 신당으로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교동도의 부군당은 인천 도서지역 가운데 유일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현재 전승되고 있다.

부군당이 위치한 교동도 읍내리 교동읍성(둘레 약 430m, 높이 약 6m)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곳곳에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위쪽에는 읍성의 돌담이 남아 있고, 읍성 남문인 홍예(虹霓)는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홍예 한쪽에는 ‘남문(南門)’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것으로,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었다. 동문의 누는 통삼루(統三樓), 남문의 누는 유량루(庾亮樓), 북문의 누는 공북루(拱北樓)라고 하였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 있다. 1890년(고종 27)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는 것을 통해 그 이후에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예는 화강암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두 홍예 골격 사이는 트여 있어 하늘이 보인다. 홍예 한쪽 벽면에는 민가 한 채가 놓여 있다.

교동읍성의 교동부(喬桐府)는 1629년(인조 7)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후 교동현이 교동도호부로 승격하면서 도호부가 세워졌다. 도호부 터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계단이 남아 있어 3도(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장하던 규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읍성 남문의 누각 기둥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2기가 남아 있다. 한편 연산군이 죽기 전에 머물렀다고 여기는 터를 가리키는 비문이 있으며, 그 터 아래에는 정자형 우물이 현재 남아 있다. 이 우물 안에는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연산군의 격거지(擊居址)는 봉황산 자락, 화개산 북쪽 자락 등 여러곳이 있다. 이 가운데 고읍이 있던 화개산 북쪽 지역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읍내리가 도호부가 되기 전에 교동현이 있던 곳이다.

내용

  1. 부군당 명칭 : 부군은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부군마지로 불리는 신이다. 부군이라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도당보다는 범위가 큰 마을의 수호신이다. 서울 지역 무당들은 부군이 도당보다 상위 신격의 성격을 띠면서, 좀 더 넓은 지역을 관장하는 신격이라고 믿고 있다. 부군당의 한자어 명칭은 ‘府君堂’으로 표기한다.

    한편 교동도 읍지의 경우 부군당을 ‘부근당(付芹堂)’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둘 사이에 한자 표기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록에 보면 ‘付根堂’이라는 표기가 보이며, 이규보(李奎報)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각사(各司)에 신사가 있는데 부근당(付根堂)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府君堂)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규보의 의견에 따르면 부군당(府君堂)의 본래 명칭은 부근당(付根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군의 명칭은 위에서 언급한 한자 이외에도 부근(府根), 부근(附根), 부군(府群), 부강(富降), 부군(符君) 등 다양한 한자로 쓰이고 있다.

    付根, 府根, 附根이라는 명칭은 부군당에 남근목(男根木)을 바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동도부군당 내부에도 남근목이 걸려 있다. 여기서 당집에 남근목을 바치는 이유는 송씨 처녀를 위함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경우와 부군당의 신격이 여성이라고 밝힌 경우가 있다. 송씨 처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흔히 원한을 품고 죽은 여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군당의 송씨 부인은 당의 주신(主神)이 아니고 남성신을 보필하는 존재로 보인다. 한편 송씨 부인의 경우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화주당(化主堂) 전설에서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해 억울하게 죽은 홍대감의 부인, 중구 방산동 성제묘(聖帝廟)에서는 팽씨로 구전되는 관우의 부인으로 성씨를 달리해 등장하는 등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나 광범위하게 모셔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남근목을 바치는 행위는 강원도 해신당이나 일본의 마을 신당에도 보이며, 네팔에서는 정초 행사에 수많은 남근목을 집에 걸어 놓고 풍요를 기원하기도 한다. 이능화는 신당에 봉안된 남근목은 부군당에 모셔진 손각씨(孫閣氏)를 위한 일종의 제물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 한강변 부군당 가운데 남근목을 봉안하고 있는 곳은 영등포구 신길3동 방앗고지 부군당이다. 민간신앙에서 남근목을 봉안하는 것은 생식숭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 위치 : 부군당은 교동읍성 북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교동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읍내리 앞바다는 중국 어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고, 한강에서 출발한 어선들이 중국으로 향할 때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연산군이 폐위를 당하고 교동도에 올 때도 이곳 항로를 이용하였다. 현재 교동도의 포구는 남산포, 동진포, 월선포, 호두포 등이 있다.

    부군당은 본래 옆자리에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허물어지자 지금의 자리에 초가에다 기와를 올려 새로 단장하였다. 부군당 옆에는 큰 오동나무가 있으며, 신목인 셈이다. 본래 부군당은 고읍에 있었으나 교동읍의 중심이 읍내리로 바뀌면서 부군당도 함께 모셔왔다고 한다. 부군당은 본래 관아에서 마을을 지켜 주는 인물을 모신 곳이기에 관아가 읍내리로 이전하면서 부군당도 함께 옮긴 것이다. 부군당을 한자로 ‘府君堂’이라고 표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교동도의 부군당을 한자로 ‘부근당(扶芹堂)’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芹’은 ‘根’의 잘못 표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부군당에 ‘미나리 근(芹)’을 쓰는 사례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부군당 내부 구조 : 부군당에는 사모와 홍포를 입은 남자와 용잠을 하고 파랑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부인 신상(神像)이 그려져 있다. 또한 남자는 홀기를 들고 있으며, 부인 그림 밑에는 대신할머니가 붓을 들고 있다. 부군당에 제사를 잘 올리면 자손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여긴다. 신상 뒤쪽에는 모란이 그려진 병풍 그림과 산봉우리 등이 그려져 있다.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신상이 왕 또는 고관임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부군당이 연산군의 한을 풀기 위해 지어졌다고 여기고, 남자 신상을 연산군, 여인을 연산군의 부인 신씨로 일컫고 있다. 연산군이 홀기를 들고 있는 것은 고관의 신분임을 나타낸 것이다. 교동도에는 연산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으며, 그가 머물렀다고 여겨지는 고적지도 세 곳이나 있다. 한편 현존하는 그림은 15년 전에 기존의 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그림은 서울의 화공이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림 뒤에는 가계매매, 소원성취, 영업대박, 결혼 등 개인의 소망을 담은 5개 문구가 적혀 있다. 이는 굿을 하면서 무당들이 붙여 놓은 것이다.

    부군당에는 이들 신상 이외에도 노랑저고리에 붉은 치마, 여러 한지가 걸려 있으며 세 개의 남근목이 있다. 노랑저고리와 붉은 치마는 여신에게 바치는 옷이며, 한지는 신에게 굿을 할 때 올리는 폐백이고, 남근목은 기자와 풍어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다. 남근목은 조업 중에 죽은 선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걸거나 마을의 서낭이 여서낭인 경우에 건다고 한다. 이들 남근목은 민간이 아니라 무속인들이 건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 남근목에 기도를 하면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강원도 강릉, 삼척에서처럼 남근목을 바치는 전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군당의 규모에 대해 조선시대 박지원(朴趾源)은 사옥(祠屋)이 겨우 두 칸 뿐이며 묘당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조정의 명을 받아 고을의 성황당(城隍堂)을 새로 신축할 때 남은 재목을 가지고 사옥을 보수하고, 옛 규모보다 조금 넓혀서 단청을 덧칠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부군당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사옥이 아니며, 고을의 성황당보다 규모가 작았음을 알 수 있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라는 인물이 그린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 실린 그림을 통해 부군당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부군당은 주건물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규모가 한 칸 정도이다. 실제로 교동도부군당의 경우도 두세 사람이 들어가면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좁다. 또한 부군당의 지붕도 기와에서 초가로 바꾸었다는 현지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다른 유교적 전각보다 중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 부군당 신격 : 교동도부군당에서 모시는 신은 연산군과 그의 부인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말한다. 이는 교동도에 연산군이 유배되고 죽임을 당한 곳이기 때문에 그를 신격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부군당에서 모신 주신은 단군·왕건·공민왕·이성계·세조 등 임금과 최영·남이·김유신·임경업 등 장군, 어효첨(魚孝瞻) 등 문신은 물론 중국의 관우·제갈공명 등도 보인다. 이처럼 해당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의 주인공이 부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교동도부군당에서 연산군을 주신으로 모신 배경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부군신은 해당 인물이 그 마을과 관련이 있음을 애써 내세운다. 몇 편의 전설이 전승될 정도로 해당 인물에 대한 남다름을 과시한다. ‘부군’이라는 구체성이 약한 신격보다는 특정한 인물을 내세우는 과정 속에서 특정 인물이, 전설을 덧입고 해당지역에 수용된 것이다.

    이능화에 따르면 부군당은 모시는 신이 각각 달랐다. 형조(刑曹)의 부군은 송씨 부인, 전옥(典獄)의 부군은 동명왕(東明王)이다. 기타 제갈무후(諸葛武候)나 문천상(文天祥) 등을 섬기는 곳도 있었다. 고려 공민왕을 부군신으로 신봉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이는 고려 유민들이 각사의 이원(吏員)이 되어 항상 구국(舊國)의 왕을 기려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능화는 부군(夫君)이란 지명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각 군에 있는 부군당신은 대개 수령으로서 임소(任所)에서 죽은 이가 많으며, 이때 수령을 ‘부군’이라 불렀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부군은 한나라 태수(太守)를 칭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조흥윤과 유승훈은 부군이 중국 한대 태수의 칭호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마을신이 되었다며 ‘중국 유래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양종승은 ‘부군’이 빛을 뜻하는 ‘붉다’에서 왔으며, ‘붉음’은 곧 ‘밝음’으로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군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신앙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군당에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을 ‘화주’라고 부르는 것도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무속을 연구한 일본인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와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부군에 대해 이것이 조상과 망부(亡夫)의 경칭(敬稱)이기도 하지만 관아의 신사(神祠)인 부군당의 주신이며, 그 부인은 여부군(女府君)과 함께 모셔 재복(財福)을 불러들이는 신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군은 부군당의 주신을 설명하는 것이고, 교동도처럼 처음에는 한 사람의 신을 받들었다가 무당들이 제(祭)를 주재하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많은 무속신을 부군당에 함께 모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사례는 서울의 부군당에서 보이며, 이 때문에 부군당의 기능이 도당굿 등 다른 신앙물들의 기능 사이에서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5. 부군당 모시기 : 부군당에서는 굿을 통해 신을 모신다. 굿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마을의 형편에 따라 2년 또는 3년에 한 번 지낸다. 최근의 굿은 2007년에 행해졌다. 굿을 주관하는 무당은 교동 본도의 무당 세 명이 하였으나 봉선리 큰무당이 죽고 무당들이 노령화되면서 부군당에서의 굿도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 “굿은 여자가 담당한다”라는 할아버지들의 말처럼 부군당에서의 굿은 할머니들이 주관하며, 유교적인 제의 행위는 볼 수 없다. 굿에 드는 경비는 집집마다 성의껏 낸 돈으로 치른다. 일반적으로는 3만~5만 원을 내고, 선주(船主)의 경우 10만 원 정도를 낸다. 읍내리에는 8명의 선주가 있으며, 이들은 주로 새우를 잡는다. 포구 쪽에는 잡은 새우를 보관하는 움집도 있다.

    굿은 섣달그믐에 날짜를 잡아 정월에 지낸다. 굿에 들어가는 비용은 주민들이 부담하고, 제물 장만은 무당들이 한다. 제의를 정월에 하는 것은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이라는 상징적 의미 외에도 관청의 한 해 업무가 시작되는 첫날로서 음력 정월 초하루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

우리나라의 부군당제는 용산구 자치구 내 10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용산구청에서 일정한 경비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아전(衙前)과 서리(胥吏) 등 관리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굿 중심의 제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동도부군당의 경우도 무당들이 제의 주체자로서 행하고 있다. 남자 주민들은 부군당제를 “여자들이 행하는 것”, “무당이 하는 것”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부군당제가 유교적 의례 행위와 다름을 말하고 있으며, 부군당제가 주재 집단의 변화에 의해 마을공동체 신앙 또는 무당 중심의 개인 신당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부군당제가 하급 관리들과 마을 주민, 무당의 세 계층이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이 비록 관아의 부속건물 내에 위치하지만 관아의 안녕과 마을의 평안을 위해 모셔진 주민들의 당(堂)인 셈이다. 부군당은 조선시대에 흥행하다가 1519년(중종 14)에 억압을 받기 시작하여 헌부에 의해 부군당 내부의 지전(紙錢)을 태우고 신을 받드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부군당제는 현재까지 존속하였다.

교동도부군당은 조선 중기 부군당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군당이 읍성 안에 위치하며, 해당되는 신상을 벽에 붙이고 정기적으로 날을 잡아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에 남근목을 바치는 행위나 지전을 거는 행위 등은 오늘날까지 전승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부군당제는 초기에는 유교적 절차에 의해 제를 지냈으나 나중에는 무당들이 제의의 주체가 되어 무속적 제의로 변하였다. 조선시대 부군당 관련 기록에서 남근목을 봉안하거나 지전을 태우고 춤을 추었다는 단편적인 내용들을 통해 무속적 의례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제의에 참석하는 대상도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교동도부군당제를 준비하는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자인 것도 그러하다.

부군당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관청의 하급관리이지만 이에 들어가는 비용은 마을 주민들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 주도보다 민관이 공동으로 지낸 제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군당이 점차 사라지면서 서울 지역에서 부군당제는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용산과 마포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교동도에서는 민간신앙으로 계속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부군당의 신격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그 지역과 관련된 인물이 주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교동도의 경우도 읍성의 관리가 아닌 연산군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밖에 연산군을 신으로 모신 지역은 발견할 수 없다.

참고문헌

경강변 부군당의 성격과 역사적 전개 양상 (유승훈, 서울학연구 20, 서울시립대학교부설 서울학연구소, 2003), 한강변 마을제사의 절차와 내용 (홍태한, 서울 생활문화 자료조사 한강변의 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2006), 한강변 마을제사의 종류와 유래 (오문선, 서울 생활문화 자료조사 한강변의 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2006),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양종승, 민속원, 2007)

강화교동도부군당제

강화교동도부군당제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정연학(鄭然鶴)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읍내리에서 음력 정초에 길일(吉日)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

역사

부군당제는 조선시대 각 관아(官衙)에서 신당(神堂)을 두고 아전(衙前)과 서리(胥吏) 등 하급 관리들이 지낸 제사이다. 부군당제는 현재 한강변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조선 후기 한강의 수운을 이용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인구가 급증한 한강변에 이를 관리하는 여러 관청 및 기관이 집중되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부군당제의 목적이 해당 관서에서 맡은 업무와 관원들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부군당제가 주재 집단의 변화에 의해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바뀌거나 무당 개인의 신당으로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교동도의 부군당은 인천 도서지역 가운데 유일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현재 전승되고 있다.

부군당이 위치한 교동도 읍내리 교동읍성(둘레 약 430m, 높이 약 6m)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곳곳에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위쪽에는 읍성의 돌담이 남아 있고, 읍성 남문인 홍예(虹霓)는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홍예 한쪽에는 ‘남문(南門)’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것으로,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었다. 동문의 누는 통삼루(統三樓), 남문의 누는 유량루(庾亮樓), 북문의 누는 공북루(拱北樓)라고 하였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 있다. 1890년(고종 27)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는 것을 통해 그 이후에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예는 화강암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두 홍예 골격 사이는 트여 있어 하늘이 보인다. 홍예 한쪽 벽면에는 민가 한 채가 놓여 있다.

교동읍성의 교동부(喬桐府)는 1629년(인조 7)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후 교동현이 교동도호부로 승격하면서 도호부가 세워졌다. 도호부 터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계단이 남아 있어 3도(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장하던 규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읍성 남문의 누각 기둥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2기가 남아 있다. 한편 연산군이 죽기 전에 머물렀다고 여기는 터를 가리키는 비문이 있으며, 그 터 아래에는 정자형 우물이 현재 남아 있다. 이 우물 안에는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연산군의 격거지(擊居址)는 봉황산 자락, 화개산 북쪽 자락 등 여러곳이 있다. 이 가운데 고읍이 있던 화개산 북쪽 지역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읍내리가 도호부가 되기 전에 교동현이 있던 곳이다.

내용

부군당 명칭 : 부군은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부군마지로 불리는 신이다. 부군이라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도당보다는 범위가 큰 마을의 수호신이다. 서울 지역 무당들은 부군이 도당보다 상위 신격의 성격을 띠면서, 좀 더 넓은 지역을 관장하는 신격이라고 믿고 있다. 부군당의 한자어 명칭은 ‘府君堂’으로 표기한다.

한편 교동도 읍지의 경우 부군당을 ‘부근당(付芹堂)’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둘 사이에 한자 표기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록에 보면 ‘付根堂’이라는 표기가 보이며, 이규보(李奎報)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각사(各司)에 신사가 있는데 부근당(付根堂)이라고 하였고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府君堂)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규보의 의견에 따르면 부군당(府君堂)의 본래 명칭은 부근당(付根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군의 명칭은 위에서 언급한 한자 이외에도 부근(府根), 부근(附根), 부군(府群), 부강(富降), 부군(符君) 등 다양한 한자로 쓰이고 있다.

付根, 府根, 附根이라는 명칭은 부군당에 남근목(男根木)을 바치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동도부군당 내부에도 남근목이 걸려 있다. 여기서 당집에 남근목을 바치는 이유는 송씨 처녀를 위함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경우와 부군당의 신격이 여성이라고 밝힌 경우가 있다. 송씨 처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흔히 원한을 품고 죽은 여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군당의 송씨 부인은 당의 주신(主神)이 아니고 남성신을 보필하는 존재로 보인다. 한편 송씨 부인의 경우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화주당(化主堂) 전설에서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해 억울하게 죽은 홍대감의 부인, 중구 방산동 성제묘(聖帝廟)에서는 팽씨로 구전되는 관우의 부인으로 성씨를 달리해 등장하는 등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나 광범위하게 모셔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남근목을 바치는 행위는 강원도 해신당이나 일본의 마을 신당에도 보이며, 네팔에서는 정초 행사에 수많은 남근목을 집에 걸어 놓고 풍요를 기원하기도 한다. 이능화는 신당에 봉안된 남근목은 부군당에 모셔진 손각씨(孫閣氏)를 위한 일종의 제물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 한강변 부군당 가운데 남근목을 봉안하고 있는 곳은 영등포구 신길3동 방앗고지 부군당이다. 민간신앙에서 남근목을 봉안하는 것은 생식숭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 부군당은 교동읍성 북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교동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읍내리 앞바다는 중국 어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고, 한강에서 출발한 어선들이 중국으로 향할 때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연산군이 폐위를 당하고 교동도에 올 때도 이곳 항로를 이용하였다. 현재 교동도의 포구는 남산포, 동진포, 월선포, 호두포 등이 있다.

부군당은 본래 옆자리에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허물어지자 지금의 자리에 초가에다 기와를 올려 새로 단장하였다. 부군당 옆에는 큰 오동나무가 있으며, 신목인 셈이다. 본래 부군당은 고읍에 있었으나 교동읍의 중심이 읍내리로 바뀌면서 부군당도 함께 모셔왔다고 한다. 부군당은 본래 관아에서 마을을 지켜 주는 인물을 모신 곳이기에 관아가 읍내리로 이전하면서 부군당도 함께 옮긴 것이다. 부군당을 한자로 ‘府君堂’이라고 표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교동도의 부군당을 한자로 ‘부근당(扶芹堂)’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芹’은 ‘根’의 잘못 표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부군당에 ‘미나리 근(芹)’을 쓰는 사례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군당 내부 구조 : 부군당에는 사모와 홍포를 입은 남자와 용잠을 하고 파랑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부인 신상(神像)이 그려져 있다. 또한 남자는 홀기를 들고 있으며, 부인 그림 밑에는 대신할머니가 붓을 들고 있다. 부군당에 제사를 잘 올리면 자손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여긴다. 신상 뒤쪽에는 모란이 그려진 병풍 그림과 산봉우리 등이 그려져 있다.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신상이 왕 또는 고관임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는 부군당이 연산군의 한을 풀기 위해 지어졌다고 여기고, 남자 신상을 연산군, 여인을 연산군의 부인 신씨로 일컫고 있다. 연산군이 홀기를 들고 있는 것은 고관의 신분임을 나타낸 것이다. 교동도에는 연산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으며, 그가 머물렀다고 여겨지는 고적지도 세 곳이나 있다. 한편 현존하는 그림은 15년 전에 기존의 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그림은 서울의 화공이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림 뒤에는 가계매매, 소원성취, 영업대박, 결혼 등 개인의 소망을 담은 5개 문구가 적혀 있다. 이는 굿을 하면서 무당들이 붙여 놓은 것이다.

부군당에는 이들 신상 이외에도 노랑저고리에 붉은 치마, 여러 한지가 걸려 있으며 세 개의 남근목이 있다. 노랑저고리와 붉은 치마는 여신에게 바치는 옷이며, 한지는 신에게 굿을 할 때 올리는 폐백이고, 남근목은 기자와 풍어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다. 남근목은 조업 중에 죽은 선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걸거나 마을의 서낭이 여서낭인 경우에 건다고 한다. 이들 남근목은 민간이 아니라 무속인들이 건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 남근목에 기도를 하면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강원도 강릉, 삼척에서처럼 남근목을 바치는 전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군당의 규모에 대해 조선시대 박지원(朴趾源)은 사옥(祠屋)이 겨우 두 칸 뿐이며 묘당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조정의 명을 받아 고을의 성황당(城隍堂)을 새로 신축할 때 남은 재목을 가지고 사옥을 보수하고, 옛 규모보다 조금 넓혀서 단청을 덧칠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부군당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사옥이 아니며, 고을의 성황당보다 규모가 작았음을 알 수 있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라는 인물이 그린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 실린 그림을 통해 부군당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부군당은 주건물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규모가 한 칸 정도이다. 실제로 교동도부군당의 경우도 두세 사람이 들어가면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좁다. 또한 부군당의 지붕도 기와에서 초가로 바꾸었다는 현지 주민들의 고증을 통해 다른 유교적 전각보다 중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 신격 : 교동도부군당에서 모시는 신은 연산군과 그의 부인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말한다. 이는 교동도에 연산군이 유배되고 죽임을 당한 곳이기 때문에 그를 신격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부군당에서 모신 주신은 단군·왕건·공민왕·이성계·세조 등 임금과 최영·남이·김유신·임경업 등 장군, 어효첨(魚孝瞻) 등 문신은 물론 중국의 관우·제갈공명 등도 보인다. 이처럼 해당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의 주인공이 부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교동도부군당에서 연산군을 주신으로 모신 배경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부군신은 해당 인물이 그 마을과 관련이 있음을 애써 내세운다. 몇 편의 전설이 전승될 정도로 해당 인물에 대한 남다름을 과시한다. ‘부군’이라는 구체성이 약한 신격보다는 특정한 인물을 내세우는 과정 속에서 특정 인물이, 전설을 덧입고 해당지역에 수용된 것이다.

이능화에 따르면 부군당은 모시는 신이 각각 달랐다. 형조(刑曹)의 부군은 송씨 부인, 전옥(典獄)의 부군은 동명왕(東明王)이다. 기타 제갈무후(諸葛武候)나 문천상(文天祥) 등을 섬기는 곳도 있었다. 고려 공민왕을 부군신으로 신봉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이는 고려 유민들이 각사의 이원(吏員)이 되어 항상 구국(舊國)의 왕을 기려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능화는 부군(夫君)이란 지명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각 군에 있는 부군당신은 대개 수령으로서 임소(任所)에서 죽은 이가 많으며, 이때 수령을 ‘부군’이라 불렀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부군은 한나라 태수(太守)를 칭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조흥윤과 유승훈은 부군이 중국 한대 태수의 칭호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마을신이 되었다며 ‘중국 유래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양종승은 ‘부군’이 빛을 뜻하는 ‘붉다’에서 왔으며, ‘붉음’은 곧 ‘밝음’으로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군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신앙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군당에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을 ‘화주’라고 부르는 것도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무속을 연구한 일본인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와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부군에 대해 이것이 조상과 망부(亡夫)의 경칭(敬稱)이기도 하지만 관아의 신사(神祠)인 부군당의 주신이며, 그 부인은 여부군(女府君)과 함께 모셔 재복(財福)을 불러들이는 신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군은 부군당의 주신을 설명하는 것이고, 교동도처럼 처음에는 한 사람의 신을 받들었다가 무당들이 제(祭)를 주재하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많은 무속신을 부군당에 함께 모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사례는 서울의 부군당에서 보이며, 이 때문에 부군당의 기능이 도당굿 등 다른 신앙물들의 기능 사이에서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부군당 모시기 : 부군당에서는 굿을 통해 신을 모신다. 굿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마을의 형편에 따라 2년 또는 3년에 한 번 지낸다. 최근의 굿은 2007년에 행해졌다. 굿을 주관하는 무당은 교동 본도의 무당 세 명이 하였으나 봉선리 큰무당이 죽고 무당들이 노령화되면서 부군당에서의 굿도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 “굿은 여자가 담당한다”라는 할아버지들의 말처럼 부군당에서의 굿은 할머니들이 주관하며, 유교적인 제의 행위는 볼 수 없다. 굿에 드는 경비는 집집마다 성의껏 낸 돈으로 치른다. 일반적으로는 3만~5만 원을 내고, 선주(船主)의 경우 10만 원 정도를 낸다. 읍내리에는 8명의 선주가 있으며, 이들은 주로 새우를 잡는다. 포구 쪽에는 잡은 새우를 보관하는 움집도 있다.

굿은 섣달그믐에 날짜를 잡아 정월에 지낸다. 굿에 들어가는 비용은 주민들이 부담하고, 제물 장만은 무당들이 한다. 제의를 정월에 하는 것은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이라는 상징적 의미 외에도 관청의 한 해 업무가 시작되는 첫날로서 음력 정월 초하루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

우리나라의 부군당제는 용산구 자치구 내 10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용산구청에서 일정한 경비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아전(衙前)과 서리(胥吏) 등 관리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굿 중심의 제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동도부군당의 경우도 무당들이 제의 주체자로서 행하고 있다. 남자 주민들은 부군당제를 “여자들이 행하는 것”, “무당이 하는 것”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부군당제가 유교적 의례 행위와 다름을 말하고 있으며, 부군당제가 주재 집단의 변화에 의해 마을공동체 신앙 또는 무당 중심의 개인 신당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부군당제가 하급 관리들과 마을 주민, 무당의 세 계층이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이 비록 관아의 부속건물 내에 위치하지만 관아의 안녕과 마을의 평안을 위해 모셔진 주민들의 당(堂)인 셈이다. 부군당은 조선시대에 흥행하다가 1519년(중종 14)에 억압을 받기 시작하여 헌부에 의해 부군당 내부의 지전(紙錢)을 태우고 신을 받드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부군당제는 현재까지 존속하였다.

교동도부군당은 조선 중기 부군당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군당이 읍성 안에 위치하며, 해당되는 신상을 벽에 붙이고 정기적으로 날을 잡아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부군당에 남근목을 바치는 행위나 지전을 거는 행위 등은 오늘날까지 전승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부군당제는 초기에는 유교적 절차에 의해 제를 지냈으나 나중에는 무당들이 제의의 주체가 되어 무속적 제의로 변하였다. 조선시대 부군당 관련 기록에서 남근목을 봉안하거나 지전을 태우고 춤을 추었다는 단편적인 내용들을 통해 무속적 의례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제의에 참석하는 대상도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교동도부군당제를 준비하는 주체가 남자가 아닌 여자인 것도 그러하다.

부군당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관청의 하급관리이지만 이에 들어가는 비용은 마을 주민들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 주도보다 민관이 공동으로 지낸 제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군당이 점차 사라지면서 서울 지역에서 부군당제는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용산과 마포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교동도에서는 민간신앙으로 계속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부군당의 신격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그 지역과 관련된 인물이 주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교동도의 경우도 읍성의 관리가 아닌 연산군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밖에 연산군을 신으로 모신 지역은 발견할 수 없다.

참고문헌

경강변 부군당의 성격과 역사적 전개 양상 (유승훈, 서울학연구 20, 서울시립대학교부설 서울학연구소, 2003)
한강변 마을제사의 절차와 내용 (홍태한, 서울 생활문화 자료조사 한강변의 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2006)
한강변 마을제사의 종류와 유래 (오문선, 서울 생활문화 자료조사 한강변의 마을신앙, 서울역사박물관, 2006)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양종승, 민속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