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사문안석조상

강진사문안석조상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표인주(表仁柱)

정의

강진사문안석조상(토동입석상)은 사찰의 경계표시 또는 수호신적 역할을 하는 석상이지만 마을신앙의 신체(神體)는 물론 도깨비신앙의 신체로 정착된 석상. 1992년 3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토동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4㎞ 지점의 언덕바지에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양산 김씨(梁山 金氏)가 처음 입주하여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앞삼봉의 중간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작은 봉우리를 옥토끼가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형국이다. 앞삼봉의 양쪽 봉우리가 토끼의 귀, 고랑에 있는 마을 앞의 논은 토끼의 입에 해당하는 이 같은 형국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사람들은 토동마을을 ‘사문(寺門)안골’이라고 부르기도한다. 마을 앞의 계곡이 월남사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곧바로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토동입석상이라고도 하는 강진사문안석조상은 당산나무 바로 밑에 있다. 이 입석상은 광복되기 2~3년 전 현재 월남사지가 위치하는 월남리의 주민들이 옮겨갔다가 토동마을 주민들이 광복되기 바로 전에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월남사지와 토동마을의 지형적 관계를 고려하면 토동마을에 있는 입석상은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처럼 월남사의 수호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입석상을 ‘도깨비바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형태

입석상은 하단이 좁고 상단이 넓은 모습으로 높이 122㎝, 폭 55㎝, 두께 28㎝의 자연석 입석이다. 전면과 좌우면이 약간 다듬어졌을 뿐 후면은 요철이 심한 자연석 그대로이다. 또 입석의 기단부 역할을 하고 있는 대좌(臺座)는 직경 155㎝ 의 원형판석이다. 윗면에는 형식화된 연화문이 음각되었으며, 현재는 몇 조각으로 깨져 있다.

입석상은 전면과 좌우 3면에 모두 13개의 인물상이 음각되어 있다.

전면의 나상(裸像) : 전면의 입상(立像)으로 상체가 나상이다. 두상은 확실치 않으나 눈 언저리와 코, 입 등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올려 앞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어색하게 내려 허리에 대고 있다. 하체는 스커트 형태의 바지를 걸쳤다. 허리에 바지 끈이 보이며, 다리에는 내의 같은 옷 주름이 사선을 그리며 좌우가 대칭되게 나타난다. 발목에는 대님으로 묶은 띠가 보이며, 장화 같은 버선형의 신을 신고 있다.(총고68㎝, 두고 15㎝, 안폭 8.5㎝, 견폭 15㎝)

전면의 도깨비상 : 머리 위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얼굴을 자세히 보면 도깨비상이다. 앞이마와 양쪽 볼이 툭 튀어나오고, 눈은 사나우면서도 희화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이빨은 좌우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부각되었다. 상의는 입은 것 같지 않고, 앞가슴 뼈가 U 자형으로 불거져 나왔다. 오른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고, 왼손은 길게 내려 손바닥을 벌린 채 손가락이 4개인 점이 특이하다. 하체는 역시 바지를 걸친 모습이며, 발목에 대님이 보이지 않고 버선형의 신발이 연결된다. 이 상은 왼쪽다리를 구부리고 있으며 몸의 중심을 오른쪽 다리에 두고 있다.(총고 64㎝, 두고 14㎝, 안폭 10㎝, 견폭 13㎝)

전면의 상하 3구상 : 나상과 도깨비상의 왼쪽으로 상체만 보인 입상이 상하로 3구가 음각되었다. 2상은 상층, 1상은 좀 움푹 파인 안쪽에 각각 새겨져 있다. 상층상은 보면 얼굴 형태(두고 7㎝, 안폭 5㎝)만 보인다. 그 밑은 얼굴과 가슴 부분만 보이며, 앞가슴에서 옷 주름이 밀착되어 있다(총고17㎝, 두고 6.5㎝, 안폭6㎝, 견폭 7㎝). 움푹 파인 안쪽에 새긴 상은 좌상(坐像)이다. 머리 형태만 갖추고 목이 없이 그냥 어깨로 연결된 상체가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 무릎은 가부좌를 틀었으며, 어깨에서 내려온 팔과 손은 옷주름 속에 가려진 듯,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엔 불상 같기도 하다.(총고 14㎝, 두고 4㎝, 안폭 3.5㎝, 견폭 6.5㎝, 무릎폭 11.5㎝, 무릎고 4.5㎝)

왼쪽의 면상(面像) : 왼쪽의 면상은 입상 1구뿐이다. 머리 위로 더 연결된 부분이 있는 듯 깨져 있다. 이 왼쪽으로 또 하나의 입상이 있었는지 긴 다리만 보인 부분이 밑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후면은 상당 부분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머리 부분이 깨져 뿔의 여부를 알 수 없고, 양쪽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탈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어깨로 내려오면 오른팔은 수직되게 반듯이 내려 뻗고 있으며, 왼팔은 머리 위로 올린 것 같으나 깨져 있어 확실치 않다. 하체는 허리에 띠를 두르고, 짧은 반바지를 입었으나 앞부분만 가리고 있다. 다리는 오른쪽은 반듯하게 뻗었고, 왼쪽은 다리를 구부려 오른다리에 붙였다.(총고 70㎝, 두고 13㎝, 안폭11㎝, 어깨폭 18㎝)

오른쪽의 면상 : 오른쪽에 있는 것은 모두 5상이며, 1구만 입상이고 나머지는 얼굴만 나타나고 있다. 입상은 얼굴 뒤로 관을 쓴 것 같으나 분명치 않고, 얼굴은 눈과 양볼이 유난히 튀어 나왔으며, 양팔은 앞가슴에 댄것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 확연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체로 내려온 다리는 오른발이 빈약하고 왼발이 튼튼하게 조각되었으며 발목 부분은 비정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상은 전신에 옷을 걸친 상태로 V 자형의 모습이 보이며, 발에까지 옷 주름이 밀집되게 음각 되었다(입상고 74㎝, 두고 12㎝, 안폭 9㎝, 어깨폭 19㎝). 나머지 4상은 모두 얼굴만 보이고 있다. 4상 가운데 얼굴 형태가 가장 뚜렷한 상은 입상 왼쪽에 있다. 목 부분 밑으로 한 줄의 의문이 돌아가고 얼굴엔 눈과 코가 분명하다.

이상에서 13상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이들 상 외에도 전면 상단에 새의 모습이 보이며, 그 오른쪽으로는 방형의 돌기된 띠가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음각이 보이기도 한다. 이 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면상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으며 다리의 모습이 정상인과는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한다면 이들은 도깨비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깨비들의 신통력은 방망이로 대표되고 있으며, 허리 윗부분은 안 보이고 아랫부분만 보인다는 전래의 관념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 더욱이 이들 상 가운데 왼쪽 다리가 약하게 표현되고 이를 구부려 오른쪽 다리에 붙인 것은 도깨비가 왼쪽 다리가 약하다는 통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용

입석상 옆에 있는 당산나무에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면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지낼 때 “나무신이여 마을을 굽어살피어 주민이 평안하고 시절이 좋게 해 주십시오”라고 빈다. 제물을 준비할 사람과 제사를 지낼 제관은 매년 동계(洞契)일인 음력 동짓날 스무닷샛날에 선정되며, 이들은 소변을 보면 손발을 씻어야 하고 대변을 보면 반드시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물론 제관들은 선정되는 날부터 제사를 지낼 때까지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을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깨끗한 몸으로 당산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함이다.

제사의 비용은 마을의 동계 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지난해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밟이를 하여 모아 둔 것을 보태기도 한다. 제사의 음식은 술, 대추, 밤, 곶감, 생선, 말린 고기 등이다.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음복이라 하여 그 음식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이 당산제가 1950년에 중단되었다가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발생하자 다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예전에는 도깨비상이라 하여 입석상 앞에 촛불을 밝혀 놓고 술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아랫샘과 윗샘에서 풍물을 치면서 제사를 마무리하였다.

정월대보름날에는 입석상과 당산나무 곁에서 남녀가 편을 나누어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대보름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짚단을 들고 나와 당산나무 주변에 모여 줄을 만든다. 마을 사람들이 줄을 만들 때 풍물을 그 곁에서 흥겹게 친다. 줄이 완성되면 줄다리기를 한다. 이때 줄은 용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자팀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당산나무에 매어 부녀자들이 그네를 뛰기도 하였다.

의의

입석상이 놓인 과거의 위치와 석상의 형상을 볼 때 이 석상의 기능을 몇 가지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사문안(토동마을)’ 구역의 경계표시 기능을 추론할 수 있다. 둘째 석상에 형상들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경계표시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석상의 수많은 귀면은 액을 막아 주고 벽사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의 상들을 볼 때 귀면들이 지배적이다.

석상의 대좌에 8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석상은 도깨비에 대한 민간신앙과 불교적 요소가 복합된 유형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입석상은 단순히 거석문화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도깨비신앙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나아가 장승과 연계하여 한국의 석인상 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유형문화적 가치도 크다. 입석상의 앞면과 좌우면에 새겨져 있는 형상들은 민속신앙과 불교신앙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비교문화론적 의미도 크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1989), 강진군마을사 - 작천면 (강진군, 1993)

강진사문안석조상

강진사문안석조상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신체

집필자 표인주(表仁柱)

정의

강진사문안석조상(토동입석상)은 사찰의 경계표시 또는 수호신적 역할을 하는 석상이지만 마을신앙의 신체(神體)는 물론 도깨비신앙의 신체로 정착된 석상. 1992년 3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토동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4㎞ 지점의 언덕바지에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양산 김씨(梁山 金氏)가 처음 입주하여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앞삼봉의 중간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작은 봉우리를 옥토끼가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형국이다. 앞삼봉의 양쪽 봉우리가 토끼의 귀, 고랑에 있는 마을 앞의 논은 토끼의 입에 해당하는 이 같은 형국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사람들은 토동마을을 ‘사문(寺門)안골’이라고 부르기도한다. 마을 앞의 계곡이 월남사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곧바로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토동입석상이라고도 하는 강진사문안석조상은 당산나무 바로 밑에 있다. 이 입석상은 광복되기 2~3년 전 현재 월남사지가 위치하는 월남리의 주민들이 옮겨갔다가 토동마을 주민들이 광복되기 바로 전에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월남사지와 토동마을의 지형적 관계를 고려하면 토동마을에 있는 입석상은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처럼 월남사의 수호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입석상을 ‘도깨비바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형태

입석상은 하단이 좁고 상단이 넓은 모습으로 높이 122㎝, 폭 55㎝, 두께 28㎝의 자연석 입석이다. 전면과 좌우면이 약간 다듬어졌을 뿐 후면은 요철이 심한 자연석 그대로이다. 또 입석의 기단부 역할을 하고 있는 대좌(臺座)는 직경 155㎝ 의 원형판석이다. 윗면에는 형식화된 연화문이 음각되었으며, 현재는 몇 조각으로 깨져 있다.

입석상은 전면과 좌우 3면에 모두 13개의 인물상이 음각되어 있다.

전면의 나상(裸像) : 전면의 입상(立像)으로 상체가 나상이다. 두상은 확실치 않으나 눈 언저리와 코, 입 등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올려 앞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어색하게 내려 허리에 대고 있다. 하체는 스커트 형태의 바지를 걸쳤다. 허리에 바지 끈이 보이며, 다리에는 내의 같은 옷 주름이 사선을 그리며 좌우가 대칭되게 나타난다. 발목에는 대님으로 묶은 띠가 보이며, 장화 같은 버선형의 신을 신고 있다.(총고68㎝, 두고 15㎝, 안폭 8.5㎝, 견폭 15㎝)

전면의 도깨비상 : 머리 위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얼굴을 자세히 보면 도깨비상이다. 앞이마와 양쪽 볼이 툭 튀어나오고, 눈은 사나우면서도 희화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이빨은 좌우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부각되었다. 상의는 입은 것 같지 않고, 앞가슴 뼈가 U 자형으로 불거져 나왔다. 오른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고, 왼손은 길게 내려 손바닥을 벌린 채 손가락이 4개인 점이 특이하다. 하체는 역시 바지를 걸친 모습이며, 발목에 대님이 보이지 않고 버선형의 신발이 연결된다. 이 상은 왼쪽다리를 구부리고 있으며 몸의 중심을 오른쪽 다리에 두고 있다.(총고 64㎝, 두고 14㎝, 안폭 10㎝, 견폭 13㎝)

전면의 상하 3구상 : 나상과 도깨비상의 왼쪽으로 상체만 보인 입상이 상하로 3구가 음각되었다. 2상은 상층, 1상은 좀 움푹 파인 안쪽에 각각 새겨져 있다. 상층상은 보면 얼굴 형태(두고 7㎝, 안폭 5㎝)만 보인다. 그 밑은 얼굴과 가슴 부분만 보이며, 앞가슴에서 옷 주름이 밀착되어 있다(총고17㎝, 두고 6.5㎝, 안폭6㎝, 견폭 7㎝). 움푹 파인 안쪽에 새긴 상은 좌상(坐像)이다. 머리 형태만 갖추고 목이 없이 그냥 어깨로 연결된 상체가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 무릎은 가부좌를 틀었으며, 어깨에서 내려온 팔과 손은 옷주름 속에 가려진 듯,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엔 불상 같기도 하다.(총고 14㎝, 두고 4㎝, 안폭 3.5㎝, 견폭 6.5㎝, 무릎폭 11.5㎝, 무릎고 4.5㎝)

왼쪽의 면상(面像) : 왼쪽의 면상은 입상 1구뿐이다. 머리 위로 더 연결된 부분이 있는 듯 깨져 있다. 이 왼쪽으로 또 하나의 입상이 있었는지 긴 다리만 보인 부분이 밑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후면은 상당 부분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머리 부분이 깨져 뿔의 여부를 알 수 없고, 양쪽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탈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어깨로 내려오면 오른팔은 수직되게 반듯이 내려 뻗고 있으며, 왼팔은 머리 위로 올린 것 같으나 깨져 있어 확실치 않다. 하체는 허리에 띠를 두르고, 짧은 반바지를 입었으나 앞부분만 가리고 있다. 다리는 오른쪽은 반듯하게 뻗었고, 왼쪽은 다리를 구부려 오른다리에 붙였다.(총고 70㎝, 두고 13㎝, 안폭11㎝, 어깨폭 18㎝)

오른쪽의 면상 : 오른쪽에 있는 것은 모두 5상이며, 1구만 입상이고 나머지는 얼굴만 나타나고 있다. 입상은 얼굴 뒤로 관을 쓴 것 같으나 분명치 않고, 얼굴은 눈과 양볼이 유난히 튀어 나왔으며, 양팔은 앞가슴에 댄것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 확연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체로 내려온 다리는 오른발이 빈약하고 왼발이 튼튼하게 조각되었으며 발목 부분은 비정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상은 전신에 옷을 걸친 상태로 V 자형의 모습이 보이며, 발에까지 옷 주름이 밀집되게 음각 되었다(입상고 74㎝, 두고 12㎝, 안폭 9㎝, 어깨폭 19㎝). 나머지 4상은 모두 얼굴만 보이고 있다. 4상 가운데 얼굴 형태가 가장 뚜렷한 상은 입상 왼쪽에 있다. 목 부분 밑으로 한 줄의 의문이 돌아가고 얼굴엔 눈과 코가 분명하다.

이상에서 13상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이들 상 외에도 전면 상단에 새의 모습이 보이며, 그 오른쪽으로는 방형의 돌기된 띠가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음각이 보이기도 한다. 이 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면상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으며 다리의 모습이 정상인과는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한다면 이들은 도깨비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깨비들의 신통력은 방망이로 대표되고 있으며, 허리 윗부분은 안 보이고 아랫부분만 보인다는 전래의 관념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 더욱이 이들 상 가운데 왼쪽 다리가 약하게 표현되고 이를 구부려 오른쪽 다리에 붙인 것은 도깨비가 왼쪽 다리가 약하다는 통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용

입석상 옆에 있는 당산나무에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면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지낼 때 “나무신이여 마을을 굽어살피어 주민이 평안하고 시절이 좋게 해 주십시오”라고 빈다. 제물을 준비할 사람과 제사를 지낼 제관은 매년 동계(洞契)일인 음력 동짓날 스무닷샛날에 선정되며, 이들은 소변을 보면 손발을 씻어야 하고 대변을 보면 반드시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물론 제관들은 선정되는 날부터 제사를 지낼 때까지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을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깨끗한 몸으로 당산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함이다.

제사의 비용은 마을의 동계 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지난해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밟이를 하여 모아 둔 것을 보태기도 한다. 제사의 음식은 술, 대추, 밤, 곶감, 생선, 말린 고기 등이다.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음복이라 하여 그 음식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이 당산제가 1950년에 중단되었다가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발생하자 다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예전에는 도깨비상이라 하여 입석상 앞에 촛불을 밝혀 놓고 술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아랫샘과 윗샘에서 풍물을 치면서 제사를 마무리하였다.

정월대보름날에는 입석상과 당산나무 곁에서 남녀가 편을 나누어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대보름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짚단을 들고 나와 당산나무 주변에 모여 줄을 만든다. 마을 사람들이 줄을 만들 때 풍물을 그 곁에서 흥겹게 친다. 줄이 완성되면 줄다리기를 한다. 이때 줄은 용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자팀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당산나무에 매어 부녀자들이 그네를 뛰기도 하였다.

의의

입석상이 놓인 과거의 위치와 석상의 형상을 볼 때 이 석상의 기능을 몇 가지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사문안(토동마을)’ 구역의 경계표시 기능을 추론할 수 있다. 둘째 석상에 형상들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경계표시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석상의 수많은 귀면은 액을 막아 주고 벽사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의 상들을 볼 때 귀면들이 지배적이다.

석상의 대좌에 8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석상은 도깨비에 대한 민간신앙과 불교적 요소가 복합된 유형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입석상은 단순히 거석문화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도깨비신앙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나아가 장승과 연계하여 한국의 석인상 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유형문화적 가치도 크다. 입석상의 앞면과 좌우면에 새겨져 있는 형상들은 민속신앙과 불교신앙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비교문화론적 의미도 크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1989)
강진군마을사 - 작천면 (강진군,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