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

가야진용신제

한자명

伽倻津龍神祭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이건욱(李健昱)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당곡마을에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가야진(伽倻津)의 용신(龍神)에게 올리는 의례. 1997년 1월 30일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는 신라시대 초기부터 전해 오는 국가적 제사의식의 하나라고 한다. 신라의 종묘는 제2대남해왕이 설립한 3월 봄에 시조대왕 혁거세의 묘당을 세워 친누이로 하여금 치제(致祭)케 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는 대사•중사•소사로 나뉘었으며, 가야진용신제는 중사이다.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로, 오악(산신)•사해(해신)•사진(지신)•사독(천신)으로 구분된다. 여기서가야진용신제는 사독에 해당된다. ‘사독’은 서라벌을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토지하(흥해)•웅천하(공주)•황산하(양산)•한산하(서울)를 일컫는것으로, 천신제와 풍년기원제를 담당하였으나 지금은유일하게 가야진사만 남아 있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가야진용신제는 일제강점기 때 큰 홍수로 인해 사당이 헐리고 일제에 의해 용신제를 금지당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하지만 이장백(1914~1998)을 위시한 용당리 당곡마을 주민들은 마을 인근 천태산 비석골에 사당을 모시고, 밤중에 지게를 지고 제수를 운반하여 제사를 모시며 명맥을 이었다.

광복 이후 현 위치로 다시 옮겨와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1990년대 초에 대대적으로 복원정비 공사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당 내부를 보면 북쪽을 향해제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앞에 세 마리의 용 그림이있다. 삼룡신을 모신다고 하여 세 마리의 용 그림이 있는 것이다. 용 그림의 역사에 대해서는 미처 조사를 하지 못했다. 제단 위에는 신위가 있고, 신위에는 ‘가야진지신위(伽倻津之神位)’라고 금색으로 쓰여 있다.

원래 사당이 있는 터는 옛날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대고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일명 ‘옥지주(玉池洲)’라고도 불렸다. 복원 전의 사당은 1406년(태종 6)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야진용신제’는 1995년 제27회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예능보유자이던 이장백이 1998년 작고하는 바람에 이후 후보자 한 명과 조교 세 명이 중심이 되어 매년 음력 삼월 초정일에 제를 올리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1999년 예능보유자 인정심사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지역 주민들의 발의로 이것을 양산문화원 주관으로 전환하고 보존회의 명칭도 무형과 유형을 포괄하여 ‘가야진 보존회’라 개칭하였다. 2004년 4월 28일 제8회 가야진용신제 심사 결과 보유자 한명, 후보자 두 명, 조교 한 명이 각각 승격 인정되었다.

내용

가야진용신제의 제례 구성은 크게 5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순서를 보면 부정가시기-칙사영접-용신제-용소풀이-사신으로 행해진다.
부정가시기는 용신제가 있기 사흘 전부터 제관들이 목욕재계하고 제당 주변을 청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제사 당일 오전에 풍물패가 사당 안에 들어가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자, 여러분, 오늘 가야진용신제를 지내려고 하니
먼저 도란개를 치고 부정을 가시도록 합시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일세동방 결도량 이세남방 득청량
삼세서방 구정토 사세북방 영안감
삼보천룡 강차지 아금지송 묘진언
원사자비 밀가호 아석소조 제악업
가유무시 참진치 종신구의 지소생
일체아금 개참회 등동산하야 마은혜하고
유일영호대 삼도구즉이면 조색세끼 모색팔백으로
유유미육하야 당하자는 사하고 사하자는 피하나니라
여기여기야 속히 친리하고
원거만리하야 오흠급겁 여율영사하바

밖으로 나와서는 또 한 번 노래를 한다. 이때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신이시여 강림하소서
천상옥경 천조신양
천옥경 태월신양
임오명당 호초신양
오방신양님께서 강림하지
그저 따라들고 묻어든 잡귀잡신
썩 물러 주옵소서 허세~ 허세~
영험하신 용신님께서는 잡귀잡신을
다 물리고 정성을 다하였으니
제당에 들어 자가자중 하옵소서

부정가시기가 끝나면 칙사를 영접한다. 풍물패는 칙사를 영접하기 위해 길을 닦는 시늉을 한다. 이때도 노래를 하는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용당마을 장정들아 가야진사 역사 가세
길을 닦자 길을 닦자 가야진사 길을 닦자
괭이로 땅을 파고 나무가래 땅 고르고
망깨로서 다져보세 천년만년 다하도록
배는 고파 등에 붙고 목이 말라 내 죽겠네
잠시 목 좀 축이고 하세
자 잠시 쉬고 목을 축였으니 길닦기 마무리하도록 하세
금년같이 가뭄날에 칙사님을 모셔다가
용신제를 지내보세 영험하신 용왕님이
비를 내려 주실지는 어렵고도 힘들어도
칙사님이 오실 길을 정성 다해 길을 닦자
자 여러분 길닦기가 마무리되었으니
돌아가 칙사님을 모시러 가세

길닦기가 끝나면 칙사를 영접한다. 칙사는 양산시장으로 미리 사당 동쪽 50m 떨어진 곳에 설치한 텐트안에 앉아 있다. 제사의 집례관 등과 풍물패가 가마에 태워 사당으로 모시고 온다.

사당 입구에서 가마에 내린 후 칙사는 동문을 통과하여 사당으로 들어온다. 칙사가 사당으로 들어가자 집례관이 칙사의 입실을 고한다. 이때 그동안 울리던 풍물 음악은 멈추고 스피커를 통해 유교식 음악이 나오기 시작한다. 칙사가 가야진사 내부로 들어가 예를 표하고 곧바로 용신제가 시작된다. 사당 안에서 분향례•헌작례•음복례를 하고, 사당 밖에서 망료례(望燎禮)를 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제물은 모두 익히지 않은 것으로 쓰는데, 가야진지신의 위패 앞 첫째 줄에는 왼쪽부터 기장•수수, 둘째 줄에는 조기•육회•돼지머리•고기포•육포, 셋째 줄에는 미나리•무•겉밤•대추를 각각 차린다. 넷째 줄에는 술잔 세 개를 얹어 놓는다. 술잔 세 개를 얹어 놓는 것은 세 용신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신제가 끝나면 제관들은 삶은 돼지를 들것에 싣고 낙동강으로 간다. 강변에 도착하면 미리 만들어 놓은 ‘송막(불집)’ 앞에 모인다. 높이가 3m 정도인 이것은 소나무가지 등을 겹겹이 쌓아 만든다. 여기에 풍물패가 신고 온 짚신 등을 모아 불을 지른다. 이때 칙사와 대축, 집례, 사령과 함께 돼지를 배에 싣고선 강으로 나간다. 행사 진행자는 이것을 보고 “비 온다!” 하고 소리를 지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한다.

강 건너 바위섬에 거의 다다르면 칙사는 강물에 헌작하고 두 번 절을 한 다음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하며 “침하돈, 침하돈, 침하돈”하고 외치고 나서 돼지를 강물에 던진다. 돼지가 잘 가라앉으라고 돼지에 벽돌을 줄로 매달아서 던진다. 강둑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이 순간 크게 풍물을 울리며 “비 온다”라고 소리친다.

돼지를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다시 사당으로 춤을 추면서 돌아온다. 사당 주변에서 상을 깔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바탕 가무를 즐기면 제사가 끝난다.

참고문헌

한국세시풍속사전-봄 (국립민속박물관, 2005),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가야진용신제

가야진용신제
한자명

伽倻津龍神祭

사전위치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 제의

집필자 이건욱(李健昱)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당곡마을에서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가야진(伽倻津)의 용신(龍神)에게 올리는 의례. 1997년 1월 30일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는 신라시대 초기부터 전해 오는 국가적 제사의식의 하나라고 한다. 신라의 종묘는 제2대남해왕이 설립한 3월 봄에 시조대왕 혁거세의 묘당을 세워 친누이로 하여금 치제(致祭)케 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는 대사•중사•소사로 나뉘었으며, 가야진용신제는 중사이다.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로, 오악(산신)•사해(해신)•사진(지신)•사독(천신)으로 구분된다. 여기서가야진용신제는 사독에 해당된다. ‘사독’은 서라벌을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토지하(흥해)•웅천하(공주)•황산하(양산)•한산하(서울)를 일컫는것으로, 천신제와 풍년기원제를 담당하였으나 지금은유일하게 가야진사만 남아 있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가야진용신제는 일제강점기 때 큰 홍수로 인해 사당이 헐리고 일제에 의해 용신제를 금지당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하지만 이장백(1914~1998)을 위시한 용당리 당곡마을 주민들은 마을 인근 천태산 비석골에 사당을 모시고, 밤중에 지게를 지고 제수를 운반하여 제사를 모시며 명맥을 이었다.

광복 이후 현 위치로 다시 옮겨와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1990년대 초에 대대적으로 복원정비 공사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당 내부를 보면 북쪽을 향해제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앞에 세 마리의 용 그림이있다. 삼룡신을 모신다고 하여 세 마리의 용 그림이 있는 것이다. 용 그림의 역사에 대해서는 미처 조사를 하지 못했다. 제단 위에는 신위가 있고, 신위에는 ‘가야진지신위(伽倻津之神位)’라고 금색으로 쓰여 있다.

원래 사당이 있는 터는 옛날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대고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일명 ‘옥지주(玉池洲)’라고도 불렸다. 복원 전의 사당은 1406년(태종 6)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야진용신제’는 1995년 제27회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예능보유자이던 이장백이 1998년 작고하는 바람에 이후 후보자 한 명과 조교 세 명이 중심이 되어 매년 음력 삼월 초정일에 제를 올리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1999년 예능보유자 인정심사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지역 주민들의 발의로 이것을 양산문화원 주관으로 전환하고 보존회의 명칭도 무형과 유형을 포괄하여 ‘가야진 보존회’라 개칭하였다. 2004년 4월 28일 제8회 가야진용신제 심사 결과 보유자 한명, 후보자 두 명, 조교 한 명이 각각 승격 인정되었다.

내용

가야진용신제의 제례 구성은 크게 5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순서를 보면 부정가시기-칙사영접-용신제-용소풀이-사신으로 행해진다.
부정가시기는 용신제가 있기 사흘 전부터 제관들이 목욕재계하고 제당 주변을 청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제사 당일 오전에 풍물패가 사당 안에 들어가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자, 여러분, 오늘 가야진용신제를 지내려고 하니
먼저 도란개를 치고 부정을 가시도록 합시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일세동방 결도량 이세남방 득청량
삼세서방 구정토 사세북방 영안감
삼보천룡 강차지 아금지송 묘진언
원사자비 밀가호 아석소조 제악업
가유무시 참진치 종신구의 지소생
일체아금 개참회 등동산하야 마은혜하고
유일영호대 삼도구즉이면 조색세끼 모색팔백으로
유유미육하야 당하자는 사하고 사하자는 피하나니라
여기여기야 속히 친리하고
원거만리하야 오흠급겁 여율영사하바

밖으로 나와서는 또 한 번 노래를 한다. 이때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신이시여 강림하소서
천상옥경 천조신양
천옥경 태월신양
임오명당 호초신양
오방신양님께서 강림하지
그저 따라들고 묻어든 잡귀잡신을
썩 물러 주옵소서 허세~ 허세~
영험하신 용신님께서는 잡귀잡신을
다 물리고 정성을 다하였으니
제당에 들어 자가자중 하옵소서

부정가시기가 끝나면 칙사를 영접한다. 풍물패는 칙사를 영접하기 위해 길을 닦는 시늉을 한다. 이때도 노래를 하는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용당마을 장정들아 가야진사 역사 가세
길을 닦자 길을 닦자 가야진사 길을 닦자
목괭이로 땅을 파고 나무가래 땅 고르고
망깨로서 다져보세 천년만년 다하도록
배는 고파 등에 붙고 목이 말라 내 죽겠네
잠시 목 좀 축이고 하세
자 잠시 쉬고 목을 축였으니 길닦기 마무리하도록 하세
금년같이 가뭄날에 칙사님을 모셔다가
용신제를 지내보세 영험하신 용왕님이
비를 내려 주실지는 어렵고도 힘들어도
칙사님이 오실 길을 정성 다해 길을 닦자
자 여러분 길닦기가 마무리되었으니
돌아가 칙사님을 모시러 가세

길닦기가 끝나면 칙사를 영접한다. 칙사는 양산시장으로 미리 사당 동쪽 50m 떨어진 곳에 설치한 텐트안에 앉아 있다. 제사의 집례관 등과 풍물패가 가마에 태워 사당으로 모시고 온다.

사당 입구에서 가마에 내린 후 칙사는 동문을 통과하여 사당으로 들어온다. 칙사가 사당으로 들어가자 집례관이 칙사의 입실을 고한다. 이때 그동안 울리던 풍물 음악은 멈추고 스피커를 통해 유교식 음악이 나오기 시작한다. 칙사가 가야진사 내부로 들어가 예를 표하고 곧바로 용신제가 시작된다. 사당 안에서 분향례•헌작례•음복례를 하고, 사당 밖에서 망료례(望燎禮)를 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제물은 모두 익히지 않은 것으로 쓰는데, 가야진지신의 위패 앞 첫째 줄에는 왼쪽부터 기장•쌀•수수, 둘째 줄에는 조기•육회•돼지머리•고기포•육포, 셋째 줄에는 미나리•무•겉밤•대추를 각각 차린다. 넷째 줄에는 술잔 세 개를 얹어 놓는다. 술잔 세 개를 얹어 놓는 것은 세 용신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신제가 끝나면 제관들은 삶은 돼지를 들것에 싣고 낙동강으로 간다. 강변에 도착하면 미리 만들어 놓은 ‘송막(불집)’ 앞에 모인다. 높이가 3m 정도인 이것은 소나무가지 등을 겹겹이 쌓아 만든다. 여기에 풍물패가 신고 온 짚신 등을 모아 불을 지른다. 이때 칙사와 대축, 집례, 사령과 함께 돼지를 배에 싣고선 강으로 나간다. 행사 진행자는 이것을 보고 “비 온다!” 하고 소리를 지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한다.

강 건너 바위섬에 거의 다다르면 칙사는 강물에 헌작하고 두 번 절을 한 다음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하며 “침하돈, 침하돈, 침하돈”하고 외치고 나서 돼지를 강물에 던진다. 돼지가 잘 가라앉으라고 돼지에 벽돌을 줄로 매달아서 던진다. 강둑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이 순간 크게 풍물을 울리며 “비 온다”라고 소리친다.

돼지를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다시 사당으로 춤을 추면서 돌아온다. 사당 주변에서 상을 깔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바탕 가무를 즐기면 제사가 끝난다.

참고문헌

한국세시풍속사전-봄 (국립민속박물관, 2005)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