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씨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김효경(金孝慶)

정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예技藝의 하나로 단오, 추석, 백중 등의 명절놀이로 전승되기도 하고, 군인들의 체력 단련의 한 종목이기도 한 놀이.

내용

씨름은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룬다는 ‘씨룬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각저角觝·백희百戲·각기角技라는 명칭으로 보아 역시 ‘맞닥뜨려 다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옛 중국 문헌에서는 우리의 씨름을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撩跤’로 불렀다. 이는 우리의 씨름이 중국의 것과 다른 특징이 있음을 시사한다. ‘요’는 ‘붙든다.’라는 뜻이고, ‘교’는 ‘종아리 교’자로 요교는 ‘종아리(다리)를 붙들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놀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씨름에 관한 첫 기록은 고구려의 씨름무덤과 장천 1호분의 벽화 중 씨름 모습이다. 씨름무덤의 씨름 그림은 무덤 주인의 널방 동쪽 벽에 그려져 있는데 두 사람의 씨름꾼과 한 사람의 구경꾼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씨름이 두 사람이 즐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심판이 주재하는 공식적인 경기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7세기에 만들어진 일본 도토리현鳥取縣 노구치野口 1호분에서 출토된 토기에 장식된 토우와 동일한 구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씨름무덤의 그림에 그려진 모습은 당시 씨름의 실제 모습임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장천 1호분의 씨름은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어우러져 백희라 불렸는데, 이는 씨름이 고구려인이 놀던 주요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두 벽화 모두 씨름꾼의 한 명은 서역인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4∼5세기의 고구려가 서역과 교역을 하던 실제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서역인의 외형을 강하게 인식하여 귀신을 쫓는 처용이나 무덤 앞의 수묘인으로 묘사한 것과 연관해 본다면, 씨름을 통해 무덤 주인을 수호하고자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전투의 중요성이 벽화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상무 정신의 함양을 위해 놀이와 더불어 기초 체력을 함양할 수 있는 씨름을 중요하게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시대에도 지속된다. 씨름은 원나라 간섭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며, 왕과 내시는 나른해진 심기를 달래기 위해 씨름을 했다. 이것을 각저희角觝戲라 불렀다. 각저희는 씨름 대회 형식의 공연이나 행사로 볼 수 있다. 이는 기술의 발달을 포함하는 관람용 경기로, 씨름의 저변 확대를 추론케 한다. 주로 2·3·5·11월 등의 농한기에 놀았으나 민속놀이로 정착된 모습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씨름은 용사勇士라는 특별한 무사적 기량을 갖춘 집단이 행하기도 했고, 민간의 시가에서도 베풀어졌다. 공민왕 때에는 씨름을 잘하면 관직을 얻기도 했는데, 이는 씨름이 주요한 병술兵術로 인정되었음을 반증한다. 씨름을 잘하는 사람은 대각大角에 편성되어 맞서서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특별한 전술이 없던 시기에 군인이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기예 중 하나가 씨름으로서 중시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씨름은 유희 종목이기도 하고, 왕의 놀이이기도 하며, 사신 대접을 위해 놀기이도 하고, 민간놀이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씨름꾼은 이전 시기의 용사라는 표현과 달리 그저 역사力士라 불렸다. 역사는 병사가 아니라 국가의 일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중 힘을 쓰는 역할을 맡은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전술의 변화 속에서 씨름이 효용성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씨름의 특징 중 하나는 승려들이 절에서 씨름을 즐겼다는 점이다. 당시 승려는 수시로 무병화되므로, 무예 연마의 차원에서 씨름을 놀았던 것이다. 사찰 씨름은 단오에 베풀어졌으며, 직지사直指寺의 사례를 보면 수백, 수천 명이 즐겼다. 또한 씨름은 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놀던 놀이로 다변화되어 나타난다. 나이에 따라 어린이들의 시합인 ‘아기씨름’부터 차차 나이를 높여 젊은이의 ‘중씨름’, 어른들이 노는 ‘상씨름’으로 논다. 이러한 모습은 1936년 일제가 전국에서 행해진 향토오락을 조사한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 소개된 씨름 기록과 유사하다.

씨름은 양반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루 즐기던 놀이로, 씨름의 저변 확산을 유추할 수 있다. 저변 확산으로 변화·발전되는 것과 동시에 씨름이 일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씨름은 단오, 백중, 추석 등에 행하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또한 씨름을 놀던 공간을 각저장으로 표현할 만큼 놀이 장소 역시 최적화되었다. 당시 씨름 방법은 내구內句·외구外句·윤기輪起 등이 있었는데, 이를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 하여 ‘고려기高麗伎’라 불렀다. 이는 한반도 씨름이 고유한 형태로 유지·발전되었음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는 1560년과 1771년에 인심과 오륜강상이 무너진다고 하여 씨름을 금지하고자 했는데, 실제 씨름이나 치고 때리는 일로 인해 살인이 일어나므로 풍속이 각박해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름은 단오, 백중, 추석의 민속놀이로 여전히 전승되었다. 가장 빈번하게는 단오에는 98회를 놀았고, 추석에는 83회를 놀았으며, 백중에는 55회를 놀았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 등의 한강 이북 지역에서는 단오가 월등히 우세하고, 중부 지역인 충청도에서는 백중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며, 추석도 비교적 강하게 나타난다. 전라도는 추석이 강하며, 백중도 드물게 나타난다. 경상도는 추석과 단오가 강하다. 이러한 지역 차는 지역별 생업 조건과 연관이 깊다. 이렇듯 씨름은 3월, 4월, 5월, 7월, 8월, 12월 등에 놀았는데, 이는 농한기와 농번기와 무관한 시기들로, 농민들이 무시로 놀던 놀이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제 침략 이전인 1899년 4월 30일에 한성 내의 관·사립학교 대운동회에서 학생들의 경기종목으로 씨름을 하였다. 국민이 본격적으로 씨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12년 10월 유각권구락부가 주관하여 단성사에서 열렸던 씨름 대회로, 이는 씨름 대회의 효시로 간주된다. 1927년 이후 근대화된 체육교육을 받은 강낙원 등이 중심이 되어 씨름의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을 놀았는데, 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경상도에서는 왼씨름을, 전라도·경상도에서는 오른씨름을 주로 했다. 이 외에도 당시 씨름 방법은 띠싸름, 바씨름, 선씨름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 중 선씨름은 서서 하는 씨름이며, 띠씨름은 허리에 두른 띠를 두 손으로 잡고 하는 씨름이며, 바씨름은 오른팔과 다리에 샅바를 감고 겨루는 씨름이며, 왼씨름은 샅바를 오른쪽 넓적다리에 매고 상대방이 이를 왼손으로 잡고 겨루는 씨름이고, 오른씨름은 왼다리에 맨 샅바를 상대가 오른손으로 잡고 겨루는 씨름이다. 이후 근대화 작업을 거쳐 현재는 왼손으로 상대방의 다리샅바를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샅바를 잡는 왼씨름이 주로 행해지고 있다.

민속 씨름 경기는 보통 사흘 동안 진행되며, 운영 방식은 지워내기 방식으로 승자를 냈다. 이긴 자에게는 부상副賞으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다. 황소는 농본국가에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고 격려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981년 11월 30일 프로 씨름 개최를 위해 한국민속씨름협회가 창설되었고, 1983년 4월 14일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 개최되어 씨름은 우리나라 제2호 프로스포츠로 출범하였다. 한국씨름연맹은 ‘천하장사씨름대회’, ‘설날장사씨름대회’, ‘추석장사씨름대회’, ‘지역 장사씨름대회’ 등을 개최하여 ‘천하장사’, ‘백두장사’, ‘한라장사’, ‘금강장사’, ‘태백장사’ 등을 선발한다.

특징 및 의의

씨름은 가장 오래된 민속놀이의 하나로, 사람과 사람이 맨손으로 직접 부딪치며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놀이 도구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맨손 놀이인 씨름은 가장 용이한 놀이로, 대동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아이로부터 젊은이, 어른까지 하나가 되어 놀던 대표적인 놀이이다. 휴한기에 틈이 나면 힘을 겨룸으로써 승부를 만끽하고, 자연스레 체력을 기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씨름의 사회사(김효경, 한국민속학37, 한국민속학회 2003), 전통 씨름의 대동놀이적 성격에 관한 연구(한양명, 비교민속학8, 비교민속학회, 2000).

씨름

씨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김효경(金孝慶)

정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예技藝의 하나로 단오, 추석, 백중 등의 명절놀이로 전승되기도 하고, 군인들의 체력 단련의 한 종목이기도 한 놀이.

내용

씨름은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룬다는 ‘씨룬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각저角觝·백희百戲·각기角技라는 명칭으로 보아 역시 ‘맞닥뜨려 다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옛 중국 문헌에서는 우리의 씨름을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撩跤’로 불렀다. 이는 우리의 씨름이 중국의 것과 다른 특징이 있음을 시사한다. ‘요’는 ‘붙든다.’라는 뜻이고, ‘교’는 ‘종아리 교’자로 요교는 ‘종아리(다리)를 붙들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놀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씨름에 관한 첫 기록은 고구려의 씨름무덤과 장천 1호분의 벽화 중 씨름 모습이다. 씨름무덤의 씨름 그림은 무덤 주인의 널방 동쪽 벽에 그려져 있는데 두 사람의 씨름꾼과 한 사람의 구경꾼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씨름이 두 사람이 즐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심판이 주재하는 공식적인 경기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7세기에 만들어진 일본 도토리현鳥取縣 노구치野口 1호분에서 출토된 토기에 장식된 토우와 동일한 구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씨름무덤의 그림에 그려진 모습은 당시 씨름의 실제 모습임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장천 1호분의 씨름은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어우러져 백희라 불렸는데, 이는 씨름이 고구려인이 놀던 주요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두 벽화 모두 씨름꾼의 한 명은 서역인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4∼5세기의 고구려가 서역과 교역을 하던 실제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서역인의 외형을 강하게 인식하여 귀신을 쫓는 처용이나 무덤 앞의 수묘인으로 묘사한 것과 연관해 본다면, 씨름을 통해 무덤 주인을 수호하고자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전투의 중요성이 벽화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상무 정신의 함양을 위해 놀이와 더불어 기초 체력을 함양할 수 있는 씨름을 중요하게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시대에도 지속된다. 씨름은 원나라 간섭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며, 왕과 내시는 나른해진 심기를 달래기 위해 씨름을 했다. 이것을 각저희角觝戲라 불렀다. 각저희는 씨름 대회 형식의 공연이나 행사로 볼 수 있다. 이는 기술의 발달을 포함하는 관람용 경기로, 씨름의 저변 확대를 추론케 한다. 주로 2·3·5·11월 등의 농한기에 놀았으나 민속놀이로 정착된 모습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씨름은 용사勇士라는 특별한 무사적 기량을 갖춘 집단이 행하기도 했고, 민간의 시가에서도 베풀어졌다. 공민왕 때에는 씨름을 잘하면 관직을 얻기도 했는데, 이는 씨름이 주요한 병술兵術로 인정되었음을 반증한다. 씨름을 잘하는 사람은 대각大角에 편성되어 맞서서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특별한 전술이 없던 시기에 군인이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기예 중 하나가 씨름으로서 중시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씨름은 유희 종목이기도 하고, 왕의 놀이이기도 하며, 사신 대접을 위해 놀기이도 하고, 민간놀이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씨름꾼은 이전 시기의 용사라는 표현과 달리 그저 역사力士라 불렸다. 역사는 병사가 아니라 국가의 일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중 힘을 쓰는 역할을 맡은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전술의 변화 속에서 씨름이 효용성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씨름의 특징 중 하나는 승려들이 절에서 씨름을 즐겼다는 점이다. 당시 승려는 수시로 무병화되므로, 무예 연마의 차원에서 씨름을 놀았던 것이다. 사찰 씨름은 단오에 베풀어졌으며, 직지사直指寺의 사례를 보면 수백, 수천 명이 즐겼다. 또한 씨름은 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놀던 놀이로 다변화되어 나타난다. 나이에 따라 어린이들의 시합인 ‘아기씨름’부터 차차 나이를 높여 젊은이의 ‘중씨름’, 어른들이 노는 ‘상씨름’으로 논다. 이러한 모습은 1936년 일제가 전국에서 행해진 향토오락을 조사한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 소개된 씨름 기록과 유사하다.

씨름은 양반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루 즐기던 놀이로, 씨름의 저변 확산을 유추할 수 있다. 저변 확산으로 변화·발전되는 것과 동시에 씨름이 일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씨름은 단오, 백중, 추석 등에 행하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또한 씨름을 놀던 공간을 각저장으로 표현할 만큼 놀이 장소 역시 최적화되었다. 당시 씨름 방법은 내구內句·외구外句·윤기輪起 등이 있었는데, 이를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 하여 ‘고려기高麗伎’라 불렀다. 이는 한반도 씨름이 고유한 형태로 유지·발전되었음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는 1560년과 1771년에 인심과 오륜강상이 무너진다고 하여 씨름을 금지하고자 했는데, 실제 씨름이나 치고 때리는 일로 인해 살인이 일어나므로 풍속이 각박해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름은 단오, 백중, 추석의 민속놀이로 여전히 전승되었다. 가장 빈번하게는 단오에는 98회를 놀았고, 추석에는 83회를 놀았으며, 백중에는 55회를 놀았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 등의 한강 이북 지역에서는 단오가 월등히 우세하고, 중부 지역인 충청도에서는 백중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며, 추석도 비교적 강하게 나타난다. 전라도는 추석이 강하며, 백중도 드물게 나타난다. 경상도는 추석과 단오가 강하다. 이러한 지역 차는 지역별 생업 조건과 연관이 깊다. 이렇듯 씨름은 3월, 4월, 5월, 7월, 8월, 12월 등에 놀았는데, 이는 농한기와 농번기와 무관한 시기들로, 농민들이 무시로 놀던 놀이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제 침략 이전인 1899년 4월 30일에 한성 내의 관·사립학교 대운동회에서 학생들의 경기종목으로 씨름을 하였다. 국민이 본격적으로 씨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12년 10월 유각권구락부가 주관하여 단성사에서 열렸던 씨름 대회로, 이는 씨름 대회의 효시로 간주된다. 1927년 이후 근대화된 체육교육을 받은 강낙원 등이 중심이 되어 씨름의 근대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을 놀았는데, 함경도·평안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경상도에서는 왼씨름을, 전라도·경상도에서는 오른씨름을 주로 했다. 이 외에도 당시 씨름 방법은 띠싸름, 바씨름, 선씨름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 중 선씨름은 서서 하는 씨름이며, 띠씨름은 허리에 두른 띠를 두 손으로 잡고 하는 씨름이며, 바씨름은 오른팔과 다리에 샅바를 감고 겨루는 씨름이며, 왼씨름은 샅바를 오른쪽 넓적다리에 매고 상대방이 이를 왼손으로 잡고 겨루는 씨름이고, 오른씨름은 왼다리에 맨 샅바를 상대가 오른손으로 잡고 겨루는 씨름이다. 이후 근대화 작업을 거쳐 현재는 왼손으로 상대방의 다리샅바를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샅바를 잡는 왼씨름이 주로 행해지고 있다.

민속 씨름 경기는 보통 사흘 동안 진행되며, 운영 방식은 지워내기 방식으로 승자를 냈다. 이긴 자에게는 부상副賞으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다. 황소는 농본국가에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고 격려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981년 11월 30일 프로 씨름 개최를 위해 한국민속씨름협회가 창설되었고, 1983년 4월 14일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 개최되어 씨름은 우리나라 제2호 프로스포츠로 출범하였다. 한국씨름연맹은 ‘천하장사씨름대회’, ‘설날장사씨름대회’, ‘추석장사씨름대회’, ‘지역 장사씨름대회’ 등을 개최하여 ‘천하장사’, ‘백두장사’, ‘한라장사’, ‘금강장사’, ‘태백장사’ 등을 선발한다.

특징 및 의의

씨름은 가장 오래된 민속놀이의 하나로, 사람과 사람이 맨손으로 직접 부딪치며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놀이 도구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맨손 놀이인 씨름은 가장 용이한 놀이로, 대동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아이로부터 젊은이, 어른까지 하나가 되어 놀던 대표적인 놀이이다. 휴한기에 틈이 나면 힘을 겨룸으로써 승부를 만끽하고, 자연스레 체력을 기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씨름의 사회사(김효경, 한국민속학37, 한국민속학회 2003), 전통 씨름의 대동놀이적 성격에 관한 연구(한양명, 비교민속학8, 비교민속학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