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 쌍룡놀이

벽골제 쌍룡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박진태(朴鎭泰)

정의

벽골제碧骨堤의 축조와 관련된 단야전설을 토대로 한 용마놀이.

역사

벽골제 쌍룡놀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가운데 하나인 벽골제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유일하게 지평선이 있는 김만(김제·만경)평야(징게맹경외야밋들)의 벼농사 및 용신앙과 관련이 있고,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에 속하는 단야전설을 토대로 극화되었다. 토목노동요인 말박기 노래가 삽입되어 있으면서 입석 줄다리기와 함께 지평선축제의 핵심적인 공연 예술이다.

벽골제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쌍룡놀이가 형성되고 전승되었는데, 벽골제는 김제 지방의 벼농사 문화의 상징이면서 마한에서 백제를 거쳐 신라로 바뀐 기회와 수탈의 역사를 증언한다. 김제 지방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벼농사를 한 성읍 국가가 발달하였는데, 마한 시대에는 벽비리국辟卑離國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가 마한 병합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김제는 백제의 판도 안으로 편입되어 백제 남진南進 경략經略의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30년(비류왕 27)에 벽골제가 축조되어 황등제黃登堤, 고부눌제高阜訥堤와 함께 벼농사를 위한 인공 관개 시설의 황금 벨트를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 병합 이후 이 지역은 완산주가 되고, 군사 행정의 중심지가 고부에서 전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벽골제의 지명도 김제金堤로 바뀌고, 전주 관하의 김제군이 되었다. 그리고 790년(신라 원성왕 6)과 1143년(고려 인종 21), 1415년(조선 태종 15)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벽골제의 구조는 도랑이 다섯 개였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여거水餘渠─장생거長生渠─중심거中心渠─경장거經藏渠─유통거流通渠의 순서였고,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석주만 남아 있다. 입석줄다리기와 같은 민간 신앙이나 서동설화를 비롯한 용 설화들은 모두 김제 지방에서 벼농사와 관련해서 저수지의 제방을 축조하고, 물의 정령인 용신을 숭배한 사실을 알려준다. 단야전설은 원성왕 때의 보수 공사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단야전설을 토대로 성립된 쌍룡놀이의 역사적·민속적 연원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놀이의 역사가 깊다.

내용

단야전설에는 김제 지역의 민속과 역사가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때의 일이다. 벽골제를 쌓은 지가 오래되어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어 김제를 비롯한 주변 일곱 개 주 백성들의 생사가 걸렸다는 지방 관리들의 진정에 따라 나라에서는 예작부禮作部에 있는 국내 으뜸가는 기술자인 원덕랑元德郞을 현지에 급파하여 보수 공사를 하게 하였다. 원덕랑은 왕명을 받고 머나먼 김제 땅에 도착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당시 김제 태수 유품由品에게는 단야丹若라는 아름다운 외동딸이 있었다. 원덕랑은 태수와 둑 쌓는 일을 밤낮없이 같이 하다 태수의 딸인 단야 낭자하고도 점차 친숙하게 되었다. 단야 또한 원덕랑을 알게 되면서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원덕랑은 뚝 쌓는 일 외에는 한눈팔지 않았다. 특히 고향에 월내月乃라는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더욱 단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무렵 주민들의 원망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이러한 큰 공사는 반드시 용추龍湫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 용의 노여움을 달래야 공사가 순조로운데, 원덕랑이 미신이라 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고 공사를 했기 때문에 완공에 가까운 둑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한편 이때 서라벌에서 월내 낭자가 남장을 하고 김제까지 약혼자 원덕랑을 찾아왔다. 이 사실을 안 단야의 아버지 태수는 월내낭자를 밤중에 보쌈하여 용에게 제물로 바치는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면 딸의 소원도 풀어주고, 백성들의 원성도 진정시키고, 둑도 성공적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음모를 알게 된 단야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월내 낭자를 죽인다고 해서 원덕랑의 결심이 돌아설 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원덕랑을 잊고 다른 곳으로 결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단야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만이 백성의 생명줄인 제방을 완공하고, 원덕랑과 월내 낭자의 결혼을 돕고, 아버지의 잘못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단야는 월내 낭자 대신 자기를 희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보수 공사는 완전하게 준공을 보게 되었고, 원덕랑도 월내 낭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단야전설은 790년(신라 원성왕 6)에 벽골제의 보수 공사를 하며 단야를 희생으로 바쳤다는 인신공희화로, 용과 지역민 사이의 갈등은 자연의 파괴력에 맞서는 인간의 생존 노력을 보여준다. 백성들과 원덕랑 사이의 갈등은 관습적으로 제의적 해결 방식을 채택해온 용신 신앙 집단과 합리적인 사고로 과학적 해결 방식을 관철시키려는 토목 기술자의 대립을 의미하며, 태수와 원덕랑 사이의 갈등은 민심에 영합하는 지방 관리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려는 중앙 파견 세력의 충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야의 희생은 제방의 축조 공사에서 인신공희가 시행되었을 개연성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요컨대 단야전설은 서라벌에서 벽골제의 보수 공사를 위하여 파견한 원덕랑을 태수의 딸 단야가 사모한 까닭에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신라 세력과 백제 세력, 중앙 귀족과 지방 귀족의 갈등도 해소시키고 사회적 대화합을 이룩한 단야의 지고한 사랑과 거룩한 희생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제방의 축조 때 희생 제의를 행하였음은 중국과 일본의 여러 문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벽골제 쌍룡놀이는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12월에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연행은 축제築堤 공사의 현장, 쌍룡놀이, 단야의 희생, 단야의 소원무所願舞의 순서로 진행된다. 놀이의 내용을 개관하면, ‘축제 공사의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원덕랑의 지휘 아래 말박기 노래를 부르며 말뚝을 박는다. 이때 아낙네들이 물동이로 물을 이어 나르고, 태수가 원덕랑으로부터 작업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쌍룡놀이’에서는 청룡이 나타나 횡포를 부리면 인부들이 원덕랑을 원망한다. 백룡이 나타나 청룡과 싸우지만 패퇴당하고, 청룡은 제방을 무너뜨린다. ‘단야의 희생’에서는 월내 대신 보쌈을 당한 단야가 고을 백성을 구하고 원덕랑의 둑 쌓기를 돕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불효를 저지른 것이라고 부모의 용서를 빌고, 청룡에게는 애향심을 가지고 벽골제를 파괴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단야의 소원무’에서는 청룡이 단야의 효심과 의로움에 감화되어 해치지 않고, 태수와 원덕랑, 인부들과 아낙네들이 단야의 행실을 칭송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이러한 벽골제 쌍룡놀이는 첫째 마당에서는 풍농(관개 수로)과 안전(홍수 예방)을 담보하는 제방 쌓기를 재현하고, 말박기 노래와 같은 토목노동요를 수용하였다. 둘째 마당에서는 백룡(서쪽)과 청룡(동쪽)의 싸움 놀이를 연행한다. 셋째 마당에서는 용신과의 화해를 추구하며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희생제의 내지 신성 결혼 의례의 극화이고, 넷째 마당은 굿이나 놀이의 뒤풀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벽골제 쌍룡놀이는 ‘발단─갈등─위기─반전과 대단원’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마당놀이이다.

특징 및 의의

청룡과 백룡이 싸우는 벽골제 쌍룡놀이는 용신이 악룡과 선룡으로 분화된 것을 의미한다. 김제 지방에서 쌍룡놀이가 전승된 사실은 고증되지 않았지만, 조연벽전설에 변산의 청룡과 벽골제의 백룡이 싸우는 화소가 들어 있고, 남원 지방에서 섣달그믐이나 정월 대보름에 남북으로 편을 갈라 오색으로 채색한 용마를 외바퀴 수레에 싣고서 길거리로 나와 온갖 놀음으로 대진對陣하여 승부를 겨루어 풍흉을 점치는 용마희龍馬戲가 연행되었다. 이로 보아 쌍룡놀이가 전북 지역민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편 벽골제 쌍룡놀이에서 단야의 희생이 아니라 행복한 결말로 끝맺음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해진 전설에서는 단야가 희생으로 바쳐지게 되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운 결말이기에 향토 예술인들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서 바꾸었다.”라는 해명이 있다. 이는 김제 지방 향토 예술인들의 순박한 심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재생 모티프에 의해서 행복한 결말로 종결짓는 한국 문학 특유의 반전 현상과도 관련시킬 수도 있다. 벽골제 쌍룡놀이의 극화 과정에서도 비극적인 결말을 기피하는 한국인의 심성이 작용하였으며,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화해와 통합을 지향하는 축제와 놀이의 본질이 구현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북도의 민속예술(전라북도, 1997), 전통공연문화의 이해(박진태, 태학사, 2012).

벽골제 쌍룡놀이

벽골제 쌍룡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박진태(朴鎭泰)

정의

벽골제碧骨堤의 축조와 관련된 단야전설을 토대로 한 용마놀이.

역사

벽골제 쌍룡놀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가운데 하나인 벽골제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유일하게 지평선이 있는 김만(김제·만경)평야(징게맹경외야밋들)의 벼농사 및 용신앙과 관련이 있고,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에 속하는 단야전설을 토대로 극화되었다. 토목노동요인 말박기 노래가 삽입되어 있으면서 입석 줄다리기와 함께 지평선축제의 핵심적인 공연 예술이다.

벽골제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쌍룡놀이가 형성되고 전승되었는데, 벽골제는 김제 지방의 벼농사 문화의 상징이면서 마한에서 백제를 거쳐 신라로 바뀐 기회와 수탈의 역사를 증언한다. 김제 지방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벼농사를 한 성읍 국가가 발달하였는데, 마한 시대에는 벽비리국辟卑離國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가 마한 병합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김제는 백제의 판도 안으로 편입되어 백제 남진南進 경략經略의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30년(비류왕 27)에 벽골제가 축조되어 황등제黃登堤, 고부눌제高阜訥堤와 함께 벼농사를 위한 인공 관개 시설의 황금 벨트를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 병합 이후 이 지역은 완산주가 되고, 군사 행정의 중심지가 고부에서 전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벽골제의 지명도 김제金堤로 바뀌고, 전주 관하의 김제군이 되었다. 그리고 790년(신라 원성왕 6)과 1143년(고려 인종 21), 1415년(조선 태종 15)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벽골제의 구조는 도랑이 다섯 개였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여거水餘渠─장생거長生渠─중심거中心渠─경장거經藏渠─유통거流通渠의 순서였고,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석주만 남아 있다. 입석줄다리기와 같은 민간 신앙이나 서동설화를 비롯한 용 설화들은 모두 김제 지방에서 벼농사와 관련해서 저수지의 제방을 축조하고, 물의 정령인 용신을 숭배한 사실을 알려준다. 단야전설은 원성왕 때의 보수 공사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단야전설을 토대로 성립된 쌍룡놀이의 역사적·민속적 연원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놀이의 역사가 깊다.

내용

단야전설에는 김제 지역의 민속과 역사가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때의 일이다. 벽골제를 쌓은 지가 오래되어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어 김제를 비롯한 주변 일곱 개 주 백성들의 생사가 걸렸다는 지방 관리들의 진정에 따라 나라에서는 예작부禮作部에 있는 국내 으뜸가는 기술자인 원덕랑元德郞을 현지에 급파하여 보수 공사를 하게 하였다. 원덕랑은 왕명을 받고 머나먼 김제 땅에 도착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당시 김제 태수 유품由品에게는 단야丹若라는 아름다운 외동딸이 있었다. 원덕랑은 태수와 둑 쌓는 일을 밤낮없이 같이 하다 태수의 딸인 단야 낭자하고도 점차 친숙하게 되었다. 단야 또한 원덕랑을 알게 되면서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원덕랑은 뚝 쌓는 일 외에는 한눈팔지 않았다. 특히 고향에 월내月乃라는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더욱 단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무렵 주민들의 원망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이러한 큰 공사는 반드시 용추龍湫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 용의 노여움을 달래야 공사가 순조로운데, 원덕랑이 미신이라 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고 공사를 했기 때문에 완공에 가까운 둑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한편 이때 서라벌에서 월내 낭자가 남장을 하고 김제까지 약혼자 원덕랑을 찾아왔다. 이 사실을 안 단야의 아버지 태수는 월내낭자를 밤중에 보쌈하여 용에게 제물로 바치는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면 딸의 소원도 풀어주고, 백성들의 원성도 진정시키고, 둑도 성공적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음모를 알게 된 단야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월내 낭자를 죽인다고 해서 원덕랑의 결심이 돌아설 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원덕랑을 잊고 다른 곳으로 결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단야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만이 백성의 생명줄인 제방을 완공하고, 원덕랑과 월내 낭자의 결혼을 돕고, 아버지의 잘못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단야는 월내 낭자 대신 자기를 희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보수 공사는 완전하게 준공을 보게 되었고, 원덕랑도 월내 낭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단야전설은 790년(신라 원성왕 6)에 벽골제의 보수 공사를 하며 단야를 희생으로 바쳤다는 인신공희 설화로, 용과 지역민 사이의 갈등은 자연의 파괴력에 맞서는 인간의 생존 노력을 보여준다. 백성들과 원덕랑 사이의 갈등은 관습적으로 제의적 해결 방식을 채택해온 용신 신앙 집단과 합리적인 사고로 과학적 해결 방식을 관철시키려는 토목 기술자의 대립을 의미하며, 태수와 원덕랑 사이의 갈등은 민심에 영합하는 지방 관리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려는 중앙 파견 세력의 충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야의 희생은 제방의 축조 공사에서 인신공희가 시행되었을 개연성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요컨대 단야전설은 서라벌에서 벽골제의 보수 공사를 위하여 파견한 원덕랑을 태수의 딸 단야가 사모한 까닭에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신라 세력과 백제 세력, 중앙 귀족과 지방 귀족의 갈등도 해소시키고 사회적 대화합을 이룩한 단야의 지고한 사랑과 거룩한 희생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제방의 축조 때 희생 제의를 행하였음은 중국과 일본의 여러 문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벽골제 쌍룡놀이는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12월에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연행은 축제築堤 공사의 현장, 쌍룡놀이, 단야의 희생, 단야의 소원무所願舞의 순서로 진행된다. 놀이의 내용을 개관하면, ‘축제 공사의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원덕랑의 지휘 아래 말박기 노래를 부르며 말뚝을 박는다. 이때 아낙네들이 물동이로 물을 이어 나르고, 태수가 원덕랑으로부터 작업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쌍룡놀이’에서는 청룡이 나타나 횡포를 부리면 인부들이 원덕랑을 원망한다. 백룡이 나타나 청룡과 싸우지만 패퇴당하고, 청룡은 제방을 무너뜨린다. ‘단야의 희생’에서는 월내 대신 보쌈을 당한 단야가 고을 백성을 구하고 원덕랑의 둑 쌓기를 돕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불효를 저지른 것이라고 부모의 용서를 빌고, 청룡에게는 애향심을 가지고 벽골제를 파괴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단야의 소원무’에서는 청룡이 단야의 효심과 의로움에 감화되어 해치지 않고, 태수와 원덕랑, 인부들과 아낙네들이 단야의 행실을 칭송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이러한 벽골제 쌍룡놀이는 첫째 마당에서는 풍농(관개 수로)과 안전(홍수 예방)을 담보하는 제방 쌓기를 재현하고, 말박기 노래와 같은 토목노동요를 수용하였다. 둘째 마당에서는 백룡(서쪽)과 청룡(동쪽)의 싸움 놀이를 연행한다. 셋째 마당에서는 용신과의 화해를 추구하며 처녀를 제물로 바치던 희생제의 내지 신성 결혼 의례의 극화이고, 넷째 마당은 굿이나 놀이의 뒤풀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벽골제 쌍룡놀이는 ‘발단─갈등─위기─반전과 대단원’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마당놀이이다.

특징 및 의의

청룡과 백룡이 싸우는 벽골제 쌍룡놀이는 용신이 악룡과 선룡으로 분화된 것을 의미한다. 김제 지방에서 쌍룡놀이가 전승된 사실은 고증되지 않았지만, 조연벽전설에 변산의 청룡과 벽골제의 백룡이 싸우는 화소가 들어 있고, 남원 지방에서 섣달그믐이나 정월 대보름에 남북으로 편을 갈라 오색으로 채색한 용마를 외바퀴 수레에 싣고서 길거리로 나와 온갖 놀음으로 대진對陣하여 승부를 겨루어 풍흉을 점치는 용마희龍馬戲가 연행되었다. 이로 보아 쌍룡놀이가 전북 지역민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편 벽골제 쌍룡놀이에서 단야의 희생이 아니라 행복한 결말로 끝맺음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해진 전설에서는 단야가 희생으로 바쳐지게 되는데, 너무나도 안타까운 결말이기에 향토 예술인들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서 바꾸었다.”라는 해명이 있다. 이는 김제 지방 향토 예술인들의 순박한 심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재생 모티프에 의해서 행복한 결말로 종결짓는 한국 문학 특유의 반전 현상과도 관련시킬 수도 있다. 벽골제 쌍룡놀이의 극화 과정에서도 비극적인 결말을 기피하는 한국인의 심성이 작용하였으며,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화해와 통합을 지향하는 축제와 놀이의 본질이 구현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북도의 민속예술(전라북도, 1997), 전통공연문화의 이해(박진태, 태학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