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놀이

뱃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못이나 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기는 놀이.

내용

뱃놀이는 다양한 계층에서 향유할 수 있지만, 주된 연행 집단은 양반들이었다. 양반들이 즐긴 뱃놀이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정 지역에 배를 띄어 놓고 즐기는 ‘체류형’뱃놀이와 비교적 장시간에 걸쳐 이동하면서 즐기는 ‘유람형’ 뱃놀이이다. ‘체류형’은 일반적으로 놀이자가 자신의 삶터 근처에 배를 띄워 놓고 즐기는 놀이였다. 이에 비해 ‘유람형’은 물길을 따라 이동하며 벌인 뱃놀이로서, 길게는 여러 날이 걸릴 정도로 유장하게 전개되는 것이었다. 뱃놀이에는 음주飮酒와 시작詩作, 시창詩唱 등이 따랐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생과 악공 등이 배에 함께 올라서 춤과 노래, 반주 음악을 제공하였다.

양반 뱃놀이의 경과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지역으로 경상북도 안동을 꼽을 수 있다. 안동은 양반 문화가 융성했던 데다,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뱃놀이를 하기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안동 양반들은 활발한 뱃놀이를 펼쳤는데,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체류형 뱃놀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와 퇴계退溪 이황李愰(1501∼1570)이 주도한 16세기 중반의 뱃놀이가 대표적이다. 이현보의 뱃놀이는 『농암집聾巖集』에 담긴 시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뱃놀이는 중종 7년(1512년)에 지은 분강分江[汾川] 위의 애일당愛日堂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이현보는 홀로 배에 올라 유유자적하면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지인들과 함께 즐기기도 했는데, 여럿이 함께 하면 대단히 호방한 뱃놀이가 벌어졌다. 뱃놀이의 전말을 소상히 담은 시인 <취시가 서시좌상제공醉時歌 書示座上諸公>을 보면, 뱃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애일당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가무가 뒤따르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그러다 취흥이 오르면 뱃놀이를 시작했다. 놀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일행이 배를 타고 강 가운데 있는 대자리돌[簟石]까지 이동하면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했다. 다음으로 점석에 올라 흐드러진 놀이판을 벌였다. 이 놀이판의 술자리는 앞서 애일당에서 벌어졌던 것에 비해 한층 즐거운 것이었다. 놀이에 참여한 이는 이현보를 비롯해서 임내신任鼐臣(1512∼1588), 황준량黃俊良(1517∼1563), 가비歌婢와 가동歌童, 음식을 장만하는 주노廚奴 등이었다. 놀이의 과정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아 선배와 후배, 주인과 종이 서로 술잔을 나누었으며 가무를 함께했다. 이후 점석에서 내려와서 다시 배에 올라 귀로의 뱃놀이를 즐겼다. 이때 일행은 노래를 불렀는데 특히 시창을 하는 가동이 따로 있어서 흥취를 더했다.

    한편 이황의 뱃놀이는 『퇴계집退溪集』에 실린 시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황의 뱃놀이는 이현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삶터 인근의 강에서 벌어졌고, 놀이에 이용한 배도 늘 마음만 먹으면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의 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대선배인 이현보가 살아 있을 때 이황은 가끔씩 이현보가 주도하는 뱃놀이에 참여해서 가무악이 함께하는 동적인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지만, 이현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홀로 또는 지인들과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 뱃놀이는 대개 달 밝은 밤에 벌어졌으며, 음주와 시작·시창 등을 병행하면서 달과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는 정적인 것이었다.

  2. 유람형 뱃놀이: 안동부사安東府使 김륵金玏(1540∼1616)과 권기權紀(1546∼1624) 등이 참여한 17세기 초반의 뱃놀이와 처사處士 이종악李宗岳(1726∼1773)이 주도한 18세기 중엽의 뱃놀이를 예로 들 수 있다.

    먼저 김륵 등의 경우이다. 김륵은 1604년(선조 37)에 안동부사로 부임해 1607년까지 4년 동안 안동 고을을 다스렸다. 그는 1606년 오월 보름 무렵에 안동의 사족인 권기權紀 일행과 함께 이틀에 걸쳐 뱃놀이를 벌였는데, 그 전말을 권기가 적어 『영가지永嘉誌』에 남겨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놀이에는 김륵과 권기뿐만 아니라 안동의 사족 몇몇이 참여했고, 권기의 제안에 따라 악공[伶人] 1∼2인이 함께 했다. 놀이에 필요한 배는 사족들이 장만했는데, 돛대를 달아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작은 배였다.

    놀이를 시작한 첫날 안동 읍치에서 출발해 공민왕의 친필이 걸려 있는 영호루와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정자인 석문정사, 이 지역 출신으로 고려의 명신인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자취가 서린 상락대를 탐방하고 김방경의 사우祠宇를 찾아 예를 갖춘 뒤에 밤이 깊어지자 인근의 농가에서 유숙하였다. 뱃놀이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이날의 일정은 배를 타고 추탄의 원사를 지나 단구의 고봉을 거쳐 목적지인 마라의 절벽에 이르는 것이었다. 일행은 마라의 상류에서 내려 도보로 마라의 절벽 근처까지 이동하면서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고, 마침내 절벽 앞에 이르러 웅장하면서도 기기묘묘한 절벽을 음미한 뒤에 다시 뱃놀이를 시작했다. 일행은 유유히 떠도는 배 위에서 서로 술잔을 권하고 이황의 <도산12곡>과 소동파의 <적벽부>를 노래했다. 이때 악공들은 퉁소거문고를 연주하고 북을 쳤으며, 일행은 상하노소의 경계 없이 그 흥취에 젖어들었다. 흥취가 한풀 꺾이자 배를 관어암에 대고 놀이를 마무리하였다.

    다음에 소개할 뱃놀이는 이종악이 주도한 것이다. 본관이 고성固城인 그는 낙동강 가에 자리한 임청각에 거주하면서 평생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강호자연을 벗하면서 학문을 쌓고 예술을 즐긴 사람이었다. 산수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라서 명산대천을 유람하길 즐겼으며 시詩·서書·화畵·금琴이 생활의 일부일 정도로 예술 친화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산수와 더불어 유유자적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작은 배를 마련하여 시종 한두 사람과 함께 낙동강을 주유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했는데, 배의 규모는 세 길 남짓한 것이었다. 그가 빈 배[虛舟]로 호를 삼은 것도 이와 같은 그의 뱃놀이 애호를 반영한 것으로서 배에는 항상 거문고와 책, 다기茶器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뱃놀이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이종악은 1763년 4월 4일부터 8일까지 닷새 동안 배를 타고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을 유람한 내용을 화첩(『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으로 남겼다.

    이 화첩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벌어진 뱃놀이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4일, 읍치 동쪽에 자리한 이종악의 거처인 임청각 부근에서 닻줄을 풀고 뱃놀이를 시작했다. 안동부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위치한 선어연과 양정을 차례대로 지난 뒤에, 안동 읍치에서 임하 쪽으로 올라가다 내앞마을[川前]에 조금 미치지 못한 지점에 있는 이호의 강변에 배를 세우고 휴식하였다. 이곳에서 일행은 마중 나온 선비들과 함께 조촐한 시회를 열었다. 이어서 의성김씨의 정자인 백운정과 칠탄, 망천을 지나 4월 6일에는 사수에 이르러서 뱃놀이를 즐겼다. 사수는 임하의 사의리 앞으로 흐르는 강으로서 읍치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사수를 떠난 일행은 선창 부근에 배를 정박시키고 함께 인근의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거문고 연주를 즐겼다. 그런 다음에 낙연에서 폭포를 구경하고 선사에서 휴식을 취한 뒤, 4월 8일 날이 어두워질 때쯤 반구정에 도착, 강 건너의 민가에 매달린 등불을 구경하며 뱃놀이를 마무리했다.

특징 및 의의

대개 정적靜的인 성향이 강한 양반의 놀이 활동 가운데 뱃놀이는 일상적 삶의 터전인 집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벌이는 것으로서 다른 놀이 활동에 비해 역동적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해도 음주와 가무악, 시작과 시창 등의 다양한 놀이요소가 포함된다는 점에서 산놀이[遊山]와 함께 양반 풍류의 정수를 보여준다.

참고문헌

聾巖集, 永嘉誌, 退溪集, 안동 선비 이종악의 산수화첩에 대한 검토(김학수, 장서각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안동지역 양반 뱃놀이의 사례와 그 성격(한양명, 실천민속학연구12, 실천민속학회, 2008).

뱃놀이

뱃놀이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못이나 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기는 놀이.

내용

뱃놀이는 다양한 계층에서 향유할 수 있지만, 주된 연행 집단은 양반들이었다. 양반들이 즐긴 뱃놀이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정 지역에 배를 띄어 놓고 즐기는 ‘체류형’뱃놀이와 비교적 장시간에 걸쳐 이동하면서 즐기는 ‘유람형’ 뱃놀이이다. ‘체류형’은 일반적으로 놀이자가 자신의 삶터 근처에 배를 띄워 놓고 즐기는 놀이였다. 이에 비해 ‘유람형’은 물길을 따라 이동하며 벌인 뱃놀이로서, 길게는 여러 날이 걸릴 정도로 유장하게 전개되는 것이었다. 뱃놀이에는 음주飮酒와 시작詩作, 시창詩唱 등이 따랐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생과 악공 등이 배에 함께 올라서 춤과 노래, 반주 음악을 제공하였다.

양반 뱃놀이의 경과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들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지역으로 경상북도 안동을 꼽을 수 있다. 안동은 양반 문화가 융성했던 데다,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뱃놀이를 하기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안동 양반들은 활발한 뱃놀이를 펼쳤는데,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체류형 뱃놀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와 퇴계退溪 이황李愰(1501∼1570)이 주도한 16세기 중반의 뱃놀이가 대표적이다. 이현보의 뱃놀이는 『농암집聾巖集』에 담긴 시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뱃놀이는 중종 7년(1512년)에 지은 분강分江[汾川] 위의 애일당愛日堂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이현보는 홀로 배에 올라 유유자적하면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지인들과 함께 즐기기도 했는데, 여럿이 함께 하면 대단히 호방한 뱃놀이가 벌어졌다. 뱃놀이의 전말을 소상히 담은 시인 <취시가 서시좌상제공醉時歌 書示座上諸公>을 보면, 뱃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애일당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가무가 뒤따르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그러다 취흥이 오르면 뱃놀이를 시작했다. 놀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일행이 배를 타고 강 가운데 있는 대자리돌[簟石]까지 이동하면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했다. 다음으로 점석에 올라 흐드러진 놀이판을 벌였다. 이 놀이판의 술자리는 앞서 애일당에서 벌어졌던 것에 비해 한층 즐거운 것이었다. 놀이에 참여한 이는 이현보를 비롯해서 임내신任鼐臣(1512∼1588), 황준량黃俊良(1517∼1563), 가비歌婢와 가동歌童, 음식을 장만하는 주노廚奴 등이었다. 놀이의 과정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아 선배와 후배, 주인과 종이 서로 술잔을 나누었으며 가무를 함께했다. 이후 점석에서 내려와서 다시 배에 올라 귀로의 뱃놀이를 즐겼다. 이때 일행은 노래를 불렀는데 특히 시창을 하는 가동이 따로 있어서 흥취를 더했다.

한편 이황의 뱃놀이는 『퇴계집退溪集』에 실린 시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황의 뱃놀이는 이현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삶터 인근의 강에서 벌어졌고, 놀이에 이용한 배도 늘 마음만 먹으면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의 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대선배인 이현보가 살아 있을 때 이황은 가끔씩 이현보가 주도하는 뱃놀이에 참여해서 가무악이 함께하는 동적인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지만, 이현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홀로 또는 지인들과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 뱃놀이는 대개 달 밝은 밤에 벌어졌으며, 음주와 시작·시창 등을 병행하면서 달과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는 정적인 것이었다.

유람형 뱃놀이: 안동부사安東府使 김륵金玏(1540∼1616)과 권기權紀(1546∼1624) 등이 참여한 17세기 초반의 뱃놀이와 처사處士 이종악李宗岳(1726∼1773)이 주도한 18세기 중엽의 뱃놀이를 예로 들 수 있다.

먼저 김륵 등의 경우이다. 김륵은 1604년(선조 37)에 안동부사로 부임해 1607년까지 4년 동안 안동 고을을 다스렸다. 그는 1606년 오월 보름 무렵에 안동의 사족인 권기權紀 일행과 함께 이틀에 걸쳐 뱃놀이를 벌였는데, 그 전말을 권기가 적어 『영가지永嘉誌』에 남겨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놀이에는 김륵과 권기뿐만 아니라 안동의 사족 몇몇이 참여했고, 권기의 제안에 따라 악공[伶人] 1∼2인이 함께 했다. 놀이에 필요한 배는 사족들이 장만했는데, 돛대를 달아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작은 배였다.

놀이를 시작한 첫날 안동 읍치에서 출발해 공민왕의 친필이 걸려 있는 영호루와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정자인 석문정사, 이 지역 출신으로 고려의 명신인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자취가 서린 상락대를 탐방하고 김방경의 사우祠宇를 찾아 예를 갖춘 뒤에 밤이 깊어지자 인근의 농가에서 유숙하였다. 뱃놀이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이날의 일정은 배를 타고 추탄의 원사를 지나 단구의 고봉을 거쳐 목적지인 마라의 절벽에 이르는 것이었다. 일행은 마라의 상류에서 내려 도보로 마라의 절벽 근처까지 이동하면서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고, 마침내 절벽 앞에 이르러 웅장하면서도 기기묘묘한 절벽을 음미한 뒤에 다시 뱃놀이를 시작했다. 일행은 유유히 떠도는 배 위에서 서로 술잔을 권하고 이황의 <도산12곡>과 소동파의 <적벽부>를 노래했다. 이때 악공들은 퉁소와 거문고를 연주하고 북을 쳤으며, 일행은 상하노소의 경계 없이 그 흥취에 젖어들었다. 흥취가 한풀 꺾이자 배를 관어암에 대고 놀이를 마무리하였다.

다음에 소개할 뱃놀이는 이종악이 주도한 것이다. 본관이 고성固城인 그는 낙동강 가에 자리한 임청각에 거주하면서 평생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강호자연을 벗하면서 학문을 쌓고 예술을 즐긴 사람이었다. 산수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라서 명산대천을 유람하길 즐겼으며 시詩·서書·화畵·금琴이 생활의 일부일 정도로 예술 친화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산수와 더불어 유유자적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작은 배를 마련하여 시종 한두 사람과 함께 낙동강을 주유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했는데, 배의 규모는 세 길 남짓한 것이었다. 그가 빈 배[虛舟]로 호를 삼은 것도 이와 같은 그의 뱃놀이 애호를 반영한 것으로서 배에는 항상 거문고와 책, 다기茶器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뱃놀이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이종악은 1763년 4월 4일부터 8일까지 닷새 동안 배를 타고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을 유람한 내용을 화첩(『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으로 남겼다.

이 화첩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벌어진 뱃놀이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4일, 읍치 동쪽에 자리한 이종악의 거처인 임청각 부근에서 닻줄을 풀고 뱃놀이를 시작했다. 안동부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위치한 선어연과 양정을 차례대로 지난 뒤에, 안동 읍치에서 임하 쪽으로 올라가다 내앞마을[川前]에 조금 미치지 못한 지점에 있는 이호의 강변에 배를 세우고 휴식하였다. 이곳에서 일행은 마중 나온 선비들과 함께 조촐한 시회를 열었다. 이어서 의성김씨의 정자인 백운정과 칠탄, 망천을 지나 4월 6일에는 사수에 이르러서 뱃놀이를 즐겼다. 사수는 임하의 사의리 앞으로 흐르는 강으로서 읍치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사수를 떠난 일행은 선창 부근에 배를 정박시키고 함께 인근의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거문고 연주를 즐겼다. 그런 다음에 낙연에서 폭포를 구경하고 선사에서 휴식을 취한 뒤, 4월 8일 날이 어두워질 때쯤 반구정에 도착, 강 건너의 민가에 매달린 등불을 구경하며 뱃놀이를 마무리했다.

특징 및 의의

대개 정적靜的인 성향이 강한 양반의 놀이 활동 가운데 뱃놀이는 일상적 삶의 터전인 집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벌이는 것으로서 다른 놀이 활동에 비해 역동적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해도 음주와 가무악, 시작과 시창 등의 다양한 놀이요소가 포함된다는 점에서 산놀이[遊山]와 함께 양반 풍류의 정수를 보여준다.

참고문헌

聾巖集, 永嘉誌, 退溪集, 안동 선비 이종악의 산수화첩에 대한 검토(김학수, 장서각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안동지역 양반 뱃놀이의 사례와 그 성격(한양명, 실천민속학연구12, 실천민속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