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잡지

경도잡지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나경수(羅景洙)

정의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조선시대 서울 지역의 민속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

내용

유득공이 저술한 『경도잡지京都雜志』는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819)』,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와 더불어서 조선 후기에 나온 우리나라 3대 세시풍속기 중의 하나이다.

『경도잡지』는 서울 지역에 대한 풍속을 기술한 필사본으로서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풍속편으로서 건복巾服, 주식酒食, 다연茶烟, 과과果瓜, 제택第宅, 마려馬驢, 기집器什, 문방文房, 화훼花卉, 발합鵓鴿, 유상遊賞, 성기聲妓, 도희賭戲, 시포市鋪, 시문詩文, 서화書畫, 혼의婚議, 유가遊街, 가도呵導 등 19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제2권은 세시편으로서 원일元日, 해일亥日, 자일子日, 사일巳日, 인일人日, 입춘立春, 상원上元, 2월 초일일, 한식寒食, 중삼重三, 4월 초파일, 단오端午, 6월 15일, 복伏, 중원中元, 중추中秋, 중구重九, 10월 오일午日, 동지冬至, 납평臘平, 제석除夕 등 당시 서울의 세시별 풍속에 대해 역시 19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제1권에 들고 있는 ‘풍속’은 특정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시적인 것임에 반해서, 제2편에서 들고 있는 ‘세시’는 말 그대로 연중의 특정 일자를 편목으로 나누어 그날 행해지는 풍속이다. 또한 ‘세시’편이 월차별로 정리된 것에 반해서, ‘풍속’편의 19개 항목들은 어떤 특별한 기준에 의해 선정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자신에게 익숙한 상류층의 풍속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화초나 차 등에 대해서는 일본이나 중국 등이 언급되고 있어서 상류층의 문화가 국제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경도잡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서적은 우리나라의 서적은 5종에 그친데 반해서 중국의 서적은 24종에 이른다. 대개 실학사상가들은 백과전서파라 할 수 있다. 또한 청대의 고증학을 들여와 학문적 방법론으로 구축한 예가 많다. 유득공 역시 서울의 풍속과 세시를 설명하기 위해 해박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또한 고증학적 입장에서 우리 풍속의 기원을 다양한 중국의 서적을 인용하여 밝히려고 한 노력이 치열해 보인다.

유득공은 서울에서 태어나 외직과 국내외 주유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본인의 생활 근거지인 서울의 풍속과 세시에 대해 밝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2편 세시는 총 19종의 명절을 열거하고, 각 명절에 행해지는 여러 가지 풍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현재는 단절된 세시풍속도 있지만, 전승되고 있는 것도 있다. 또 당시까지 전승되고 있던 세시풍속으로 노는 여러 가지 세시놀이를 소개하는 한편 고증이 가능한 경우 그 기원을 밝히면서 상세한 기술을 하고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 대보름의 다리밟기: 달이 뜨고 장안 사람들은 모두 종가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져 여러 다리를 밟고 다닌다. 그러면 다리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소 광통교 및 수표교 인기가 제일 좋다. 이날 저녁은 야금을 푸는 관례가 있다. 그래서 인산인해를 이루어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노느라 떠들썩하다. 내 생각에는 육계굉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에 “정월 보름날 부녀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다리로 달려간다.”라고 했다. 또 명나라 사람 우혁정이 쓴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서로 이끌고 나와 돌아다니면서 질병을 없앤다고 하는데 이것을 백병쫓기라고 한다.”라고 했다. 심방의 『완서잡기宛署雜記』에는 “정월 16일 밤에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놀았으며, 대개 다리가 있는 곳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를 건너갔는데, 이것을 ‘액을 건넜다.’라고 한다.”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다리밟기 풍속의 유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정월 보름날 밤 다리밟기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인데 매우 성행하여 남녀들이 길거리를 메워 밤새도록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법관이 이를 금지하고 체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는 다리밟기하는 일이 없어졌다.

• 설날의 널뛰기놀이: 여항의 부녀자들은 맨 널빤지를 짚단 위에 가로로 놓고 양쪽 끝에 마주보고 서서 구르며 높이 뛰는데, 차고 있는 패물이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면 이를 보며 재미있다고 한다. 이를 초판희超板戲, 즉 널뛰기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주황이 쓴 『유구국기략琉球國記略』에 “그곳 부녀들은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서 우리나라 널뛰기와 같은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유구국에서 입조할 때 혹 누군가가 우리 것을 보고 좋아서 따라한 것은 아닐까 싶다.

• 단오의 씨름놀이: 장안의 소년들은 남산 기슭에 모여 어울려 씨름을 하는데, 그 방식은 두 사람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마주 본 다음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쪽 정강이를 잡은 다음 동시에 일어나며 상대를 들어 메어친다. 그 기술로는 안다리걸기, 밧다리걸기, 배지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인들이 이를 따라 하므로 씨름을 고려기高麗技라고도 하고, 요교撩跤라고도 한다.

위에서 대보름의 다리밟기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민속놀이로 보았지만, 설날 널뛰기는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로 전파된 것으로 정리하고, 단오의 씨름놀이 역시 우리의 전통 놀이를 중국인들이 따라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중심의 민속놀이를 소개하면서도 국제적인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도 함께 가졌다.

특징 및 의의

유득공은 조선 후기를 살면서 실학사상에 전념했던 사람이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과 더불어 북학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북학파는 모화사상에 뿌리를 둔 관념론적 성리학에서 일탈하여 당시의 선진국이던 청나라를 배울 것을 강조했으며, 국부 창출을 위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실용적인 산업의 활성화를 주창했다.

유득공은 특히 북학파에 속하면서도 산업에 대한 이해보다는 역사에 대한 연구를 깊이 했던 사람이다. 그의 저서인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및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은 그의 역사관이 빚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발해고』에서 그가 사용한 남북국이라는 말은 그의 역사관과 민족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단군조선보다는 기자조선을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러한 조선조의 전반적인 의식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단군조선에서부터 도읍지로 했던 21개의 수도에 대한 회고의 탄식을 시로서 읊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득공을 포함하여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일었던 자주론적 사관 또는 주체론적 사관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문제이다. 김만중은 집현전의 학자들이 읊은 한시를 앵무새의 노래에 비정한 바 있다. 물긷는 아낙, 나무하러 가는 초동들의 노랫가락이 바로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가장 우리스런 진실한 시라 했다. 이러한 자주론은 성호 이익의 ‘자고론自做論’, 다산 정약용의 ‘조선시론朝鮮詩論’, 연암 박지원의 ‘조선지풍론朝鮮之風論’, 초정 박제가의 ‘자가어론自家語論’과 연결된다.

『경도잡지』에는 저작 동기나 목적을 읽을 수 있는 저자의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따라서 작품 자체에서 그것을 읽어 내거나 그의 사상과 이력, 또는 당시의 사회사상사적 지향 등과 관련지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민속학적 관점에서 유득공을 다시 보아야 할 까닭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 유행을 하고, 사설시조가 열창되고, 통속 소설이 번성하기도 했다. 또한 판소리탈춤, 그리고 농악도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 특히 민속에 대한 관심이 한껏 증폭되던 시기였다. 유득공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는 야코프(Jacob Grimm, 1785~1863)과 빌헬름(Wilhelm Grimm, 1786~1859) 등 그림형제가 독일의 설화를 적극적으로 수집, 출판했다. 우리의 실학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자주론을 바탕에 깔고 이룩한 작업이었다. 근대를 특징짓는 여러 징후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민족주의의 남상이었다. 민족을 의미하는 영어 ‘ethnic’이라는 말이 본래 이교도를 뜻하던 것이었으나, 근대에 들면서 민족을 뜻하는 말로 전이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서구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우리의 실학가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득공을 비롯한 실학적 지향은 서구의 근대 의식과 역사적 시기와 사상적 지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유득공의 『경도잡지』는 그 자체로 머물지만은 않았다. 유사한 저술이 나오는데 영향을 미쳤다.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가 나오도록 하는 단초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민속사적 관점 또는 민속놀이적 측면에서 대단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영재 유득공 경도잡지의 민속문화론적 가치(나경수, 대동한문학27, 대동한문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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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집필자 나경수(羅景洙)

정의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조선시대 서울 지역의 민속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

내용

유득공이 저술한 『경도잡지京都雜志』는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819)』,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와 더불어서 조선 후기에 나온 우리나라 3대 세시풍속기 중의 하나이다.

『경도잡지』는 서울 지역에 대한 풍속을 기술한 필사본으로서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풍속편으로서 건복巾服, 주식酒食, 다연茶烟, 과과果瓜, 제택第宅, 마려馬驢, 기집器什, 문방文房, 화훼花卉, 발합鵓鴿, 유상遊賞, 성기聲妓, 도희賭戲, 시포市鋪, 시문詩文, 서화書畫, 혼의婚議, 유가遊街, 가도呵導 등 19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제2권은 세시편으로서 원일元日, 해일亥日, 자일子日, 사일巳日, 인일人日, 입춘立春, 상원上元, 2월 초일일, 한식寒食, 중삼重三, 4월 초파일, 단오端午, 6월 15일, 복伏, 중원中元, 중추中秋, 중구重九, 10월 오일午日, 동지冬至, 납평臘平, 제석除夕 등 당시 서울의 세시별 풍속에 대해 역시 19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제1권에 들고 있는 ‘풍속’은 특정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시적인 것임에 반해서, 제2편에서 들고 있는 ‘세시’는 말 그대로 연중의 특정 일자를 편목으로 나누어 그날 행해지는 풍속이다. 또한 ‘세시’편이 월차별로 정리된 것에 반해서, ‘풍속’편의 19개 항목들은 어떤 특별한 기준에 의해 선정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자신에게 익숙한 상류층의 풍속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화초나 차 등에 대해서는 일본이나 중국 등이 언급되고 있어서 상류층의 문화가 국제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경도잡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서적은 우리나라의 서적은 5종에 그친데 반해서 중국의 서적은 24종에 이른다. 대개 실학사상가들은 백과전서파라 할 수 있다. 또한 청대의 고증학을 들여와 학문적 방법론으로 구축한 예가 많다. 유득공 역시 서울의 풍속과 세시를 설명하기 위해 해박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또한 고증학적 입장에서 우리 풍속의 기원을 다양한 중국의 서적을 인용하여 밝히려고 한 노력이 치열해 보인다.

유득공은 서울에서 태어나 외직과 국내외 주유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본인의 생활 근거지인 서울의 풍속과 세시에 대해 밝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2편 세시는 총 19종의 명절을 열거하고, 각 명절에 행해지는 여러 가지 풍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현재는 단절된 세시풍속도 있지만, 전승되고 있는 것도 있다. 또 당시까지 전승되고 있던 세시풍속으로 노는 여러 가지 세시놀이를 소개하는 한편 고증이 가능한 경우 그 기원을 밝히면서 상세한 기술을 하고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 대보름의 다리밟기: 달이 뜨고 장안 사람들은 모두 종가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져 여러 다리를 밟고 다닌다. 그러면 다리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소 광통교 및 수표교 인기가 제일 좋다. 이날 저녁은 야금을 푸는 관례가 있다. 그래서 인산인해를 이루어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노느라 떠들썩하다. 내 생각에는 육계굉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에 “정월 보름날 부녀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다리로 달려간다.”라고 했다. 또 명나라 사람 우혁정이 쓴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서로 이끌고 나와 돌아다니면서 질병을 없앤다고 하는데 이것을 백병쫓기라고 한다.”라고 했다. 심방의 『완서잡기宛署雜記』에는 “정월 16일 밤에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놀았으며, 대개 다리가 있는 곳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를 건너갔는데, 이것을 ‘액을 건넜다.’라고 한다.”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다리밟기 풍속의 유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정월 보름날 밤 다리밟기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인데 매우 성행하여 남녀들이 길거리를 메워 밤새도록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법관이 이를 금지하고 체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는 다리밟기하는 일이 없어졌다.

• 설날의 널뛰기놀이: 여항의 부녀자들은 맨 널빤지를 짚단 위에 가로로 놓고 양쪽 끝에 마주보고 서서 구르며 높이 뛰는데, 차고 있는 패물이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면 이를 보며 재미있다고 한다. 이를 초판희超板戲, 즉 널뛰기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주황이 쓴 『유구국기략琉球國記略』에 “그곳 부녀들은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서 우리나라 널뛰기와 같은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유구국에서 입조할 때 혹 누군가가 우리 것을 보고 좋아서 따라한 것은 아닐까 싶다.

• 단오의 씨름놀이: 장안의 소년들은 남산 기슭에 모여 어울려 씨름을 하는데, 그 방식은 두 사람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마주 본 다음 각자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쪽 정강이를 잡은 다음 동시에 일어나며 상대를 들어 메어친다. 그 기술로는 안다리걸기, 밧다리걸기, 배지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인들이 이를 따라 하므로 씨름을 고려기高麗技라고도 하고, 요교撩跤라고도 한다.

위에서 대보름의 다리밟기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민속놀이로 보았지만, 설날 널뛰기는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로 전파된 것으로 정리하고, 단오의 씨름놀이 역시 우리의 전통 놀이를 중국인들이 따라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중심의 민속놀이를 소개하면서도 국제적인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도 함께 가졌다.

특징 및 의의

유득공은 조선 후기를 살면서 실학사상에 전념했던 사람이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과 더불어 북학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북학파는 모화사상에 뿌리를 둔 관념론적 성리학에서 일탈하여 당시의 선진국이던 청나라를 배울 것을 강조했으며, 국부 창출을 위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실용적인 산업의 활성화를 주창했다.

유득공은 특히 북학파에 속하면서도 산업에 대한 이해보다는 역사에 대한 연구를 깊이 했던 사람이다. 그의 저서인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및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은 그의 역사관이 빚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발해고』에서 그가 사용한 남북국이라는 말은 그의 역사관과 민족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말일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단군조선보다는 기자조선을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이러한 조선조의 전반적인 의식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단군조선에서부터 도읍지로 했던 21개의 수도에 대한 회고의 탄식을 시로서 읊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득공을 포함하여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일었던 자주론적 사관 또는 주체론적 사관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문제이다. 김만중은 집현전의 학자들이 읊은 한시를 앵무새의 노래에 비정한 바 있다. 물긷는 아낙, 나무하러 가는 초동들의 노랫가락이 바로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가장 우리스런 진실한 시라 했다. 이러한 자주론은 성호 이익의 ‘자고론自做論’, 다산 정약용의 ‘조선시론朝鮮詩論’, 연암 박지원의 ‘조선지풍론朝鮮之風論’, 초정 박제가의 ‘자가어론自家語論’과 연결된다.

『경도잡지』에는 저작 동기나 목적을 읽을 수 있는 저자의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따라서 작품 자체에서 그것을 읽어 내거나 그의 사상과 이력, 또는 당시의 사회사상사적 지향 등과 관련지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민속학적 관점에서 유득공을 다시 보아야 할 까닭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 유행을 하고, 사설시조가 열창되고, 통속 소설이 번성하기도 했다. 또한 판소리와 탈춤, 그리고 농악도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 특히 민속에 대한 관심이 한껏 증폭되던 시기였다. 유득공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는 야코프(Jacob Grimm, 1785~1863)과 빌헬름(Wilhelm Grimm, 1786~1859) 등 그림형제가 독일의 설화를 적극적으로 수집, 출판했다. 우리의 실학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자주론을 바탕에 깔고 이룩한 작업이었다. 근대를 특징짓는 여러 징후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민족주의의 남상이었다. 민족을 의미하는 영어 ‘ethnic’이라는 말이 본래 이교도를 뜻하던 것이었으나, 근대에 들면서 민족을 뜻하는 말로 전이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서구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우리의 실학가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득공을 비롯한 실학적 지향은 서구의 근대 의식과 역사적 시기와 사상적 지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유득공의 『경도잡지』는 그 자체로 머물지만은 않았다. 유사한 저술이 나오는데 영향을 미쳤다.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가 나오도록 하는 단초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민속사적 관점 또는 민속놀이적 측면에서 대단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영재 유득공 경도잡지의 민속문화론적 가치(나경수, 대동한문학27, 대동한문학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