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이호승(李鎬丞)

정의

산의 형태를 띤 산천초목과 기암괴석을 형상화해서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산 위에 고사를 형상화한 잡상들을 설치하여 잡상雜像놀이를 펼치는 무대 구조물.

역사

문헌에 기록된 산대山臺 관련 기사는 신라 진흥왕 대에 나타난다. 신라의 중동팔관회 때 궁궐 뜰에 윤등과 향등을 장식하고 채붕을 양쪽에 설치해서 가무백희를 연행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7 「악고樂考」 18 산악散樂). 여기서 채붕은 산대를 의미한다. 산대는 시대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조선시대에 산대라고 부르던 것이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채붕으로 불렸다. 신라 경덕왕 대에 만불산萬佛山이라는 산대를 조설했는데, 신라의 만불산은 고려시대 수미산須彌山과 관련이 있다. 수미산은 문수회文殊會 시에 세워진 산대이다(『고려사高麗史』 권132, 「열전列傳」 45, 신돈辛旽). 수미산은 연복사 불전에 세워졌고 비단 꽃과 봉황 등의 잡상들로 장식되었다. 신라 팔관회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의 팔관회에는 금오산金鰲山이 조설되었고 김낙, 신숭겸 등의 인형이 설치됐다. 연등회에 축조된 화산火山은 다양한 등불로 장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산대大山臺, 화산대火山臺, 다정산대茶亭山臺, 예산대 같은 여러 유형의 산대가 조설되어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만세산萬歲山, 영충산迎忠山, 진사산鎭邪山, 침향산沈香山 등은 산대가 개별적인 명칭으로 불린 것이다.

내용

고려 말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서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山臺結綴似蓬萊”라는 표현은 산대의 모양이 산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1488년(성종 19) 3월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광화문 밖에 설치한 두 개의 산대에 대해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를 싸고”라고 서술되어 있고, 그 주석에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성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鰲戴山 擁蓬瀛海日-光化門外東西 列鰲山二座 高如門等 極其工巧.”라고 했다. ‘자라가 산을 이고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설치된 산대의 모양을 추측할 수 있다. 1725년 완성된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에는 산천초목과 기암괴석 형태의 소형 산대 앞에서 줄타기, 접시 돌리기, 땅재주, 탈춤을 연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산과 산대가 자주 혼용되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34년 4월 2일조에 따르면, 중국 사신이 평양에서 산대희를 구경할 때 산대에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부터 10일까지 그 사건에 관한 관리의 서상書狀, 임금의 전교傳敎, 중국 사신의 답사答辭 등의 기록을 보면 오산과 산대라는 명칭이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봉사도』에 등장하는 산대는 예산대로서, 다른 장소에서 제작됐거나 보관하고 있다가 행사 장소로 끌고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광해군 이후에는 예산대만 사용되었는데, 이는 산대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목과 제작 인력을 조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창덕궁의 돈화문 밖 지형이 좁아 산대를 세울 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헌가산대는 예산대와 같은 것이다. 원래 헌가軒架는 제향에 쓰이는 악기 편성을 가리키는데, “헌가를 내고 들일 때 처마서까래를 뜯어내고 담장을 허물어야” 하며 “헌가산 위의 인물”인 잡상이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 기존의 악대가 아니라 커다란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헌가산대 또는 헌가산은 수레 위에 산대를 만들어 연희에 사용한 무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또,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에 헌가와 윤거가 혼용되어 쓰이고,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권95 5장에 부묘 후 환궁 행사 때 “산거와 화대가 매우 사치했다.”라는 기록을 통해 산대가 윤거 혹은 산거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대와 오산은 같은 구조물을 지칭하며, 이것의 약식 구조물인 산거, 윤거, 예산대, 헌가산대, 오붕, 화산대 또한 동일한 것이다.

산대는 산의 형태를 갖추고 다양한 상황을 재연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산의 신성한 의미가 약화되었지만, 잡상놀이를 통해 고사의 재연이 주로 이루어졌다. 산대 위에서 행해진 잡상놀이는 전형적인 상황이나 사람들이 익히 아는 이야기가 공연됐을 것이다. 침향산 또한 산의 형태를 갖춘 구조물로, 그 안에는 산대와 마찬가지로 각종 잡상이 진열된다. 침향산은 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산사나 동물 등으로 꾸미고, 이를 밀고 당길 수 있게 제작했다.

예산붕의 잡상놀이는 단순한 진열이 아니라 고사의 재현으로, 대개 산대잡상의 경우 강태공이나 공자, 빈풍칠월豳風七月 등을 형상화했다. 이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당시 유행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기완별록奇玩別錄』에 서술된 산대는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곳슬 바라보니 금강이 온다  허황 말이로다 이 어이 움이랴
틀 우 가 며 군인들이 메여 오 가에 곡곡쥬란 가온 쳡쳡쳥
암셕도 의연고 송쥭도 로와라 속에 졀이 잇고 동구 밧게 홍문이라
셩이라  즁은 가복 합장고 팔션녀 바라보고 셕인갓치 셧 거동
우읍다 져 화상이 혼칠 일허다
봉마다 셧는 선녀 화안셩모 랑 낭에 가화 곳고 화관에 금봉며
쌍환녹운 두 귀 밋 귀에골이 흔들니 능나의상 고 금슈원 화려다
깁붓와 가지로 반만 면 락말낙 션년히 고은  구룸으로 나려온 듯
셩진의 놉품 도 속졀이 젼혀 업 윤회에 괴로옴을 한번 면키 얼여웨라
이  일홈 금강이 번연히 의제로세 셩진과 팔션녀가 형에셔 만나쓰니
남악에 금강이 잇쓸 리가 만무다 도 의연고 제도가 방다

이 산대의 이름은 ‘금강산’인데, 『구운몽』의 성진과 팔선녀의 상봉 대목을 보여주고 있다. 산대의 외양은 네 면에 난간을 설치하고 그 위에 첩첩이 산이 들어서 있으며, 기암괴석과 송죽 사이로 절과 홍문이 있다. 성진은 가사를 입고 팔선녀를 바라보고 있고, 팔선녀는 각 봉우리 위에 있는데 가화를 꽂고 화관에 금봉채를 하고 능라의상•금수원삼을 입었다. “한곳을 바라보니 금강산이 온다 하니/ 허황한 말이로다 산이 어이 움직이랴”라는 구절을 통해 이것이 산의 형태를 갖추고 움직일 수 있는 예산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인같이 섰는 거동”과 “산봉마다 섰는 선녀”라는 구절에서 여기에 묘사된 연희가 잡상놀이임이 드러난다.

특징 및 의의

산대를 무대에서 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고,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산대를 무대로서 활용한 경우이고, 둘째는 산대를 무대 배경을 위한 구조물로서 이용한 경우이다. 전자는 산대 위에 잡상을 설치하고 연행하는 잡상놀이이고, 후자는 산대 앞에서 가면극줄타기•땅재주 등의 잡희가 연행된 것이다. 한국 전통연희에서 주요 무대 구조물이자 무대였던 산대는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무대 공간으로서 신성한 산을 설행하는 전통은 동북아시아에서 삼신산三神山(봉래산蓬萊山)과 곤륜산崑崙山 등 중국 고대 신화에 기반을 둔 것으로 동질적이다. 고대의 제왕들은 불로장생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신성한 산을 조성하여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했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환상이 점차 약화되면서 산대의 설행은 왕조의 영속성을 주지시키는 이념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공연문화의 전통(사진실, 태학사, 2002), 산대와 채붕(김은영, 생활문물연구10, 국립민속박물관, 2003),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박정혜, 일지사, 2000),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최윤영, 태학사, 2011), 中國雜技史(傅起鳳•傅騰龍, 上海人民出版社, 1989).

산대

산대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이호승(李鎬丞)

정의

산의 형태를 띤 산천초목과 기암괴석을 형상화해서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산 위에 고사를 형상화한 잡상들을 설치하여 잡상雜像놀이를 펼치는 무대 구조물.

역사

문헌에 기록된 산대山臺 관련 기사는 신라 진흥왕 대에 나타난다. 신라의 중동팔관회 때 궁궐 뜰에 윤등과 향등을 장식하고 채붕을 양쪽에 설치해서 가무백희를 연행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7 「악고樂考」 18 산악散樂). 여기서 채붕은 산대를 의미한다. 산대는 시대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조선시대에 산대라고 부르던 것이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채붕으로 불렸다. 신라 경덕왕 대에 만불산萬佛山이라는 산대를 조설했는데, 신라의 만불산은 고려시대 수미산須彌山과 관련이 있다. 수미산은 문수회文殊會 시에 세워진 산대이다(『고려사高麗史』 권132, 「열전列傳」 45, 신돈辛旽). 수미산은 연복사 불전에 세워졌고 비단 꽃과 봉황 등의 잡상들로 장식되었다. 신라 팔관회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의 팔관회에는 금오산金鰲山이 조설되었고 김낙, 신숭겸 등의 인형이 설치됐다. 연등회에 축조된 화산火山은 다양한 등불로 장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산대大山臺, 화산대火山臺, 다정산대茶亭山臺, 예산대 같은 여러 유형의 산대가 조설되어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만세산萬歲山, 영충산迎忠山, 진사산鎭邪山, 침향산沈香山 등은 산대가 개별적인 명칭으로 불린 것이다.

내용

고려 말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서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山臺結綴似蓬萊”라는 표현은 산대의 모양이 산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1488년(성종 19) 3월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광화문 밖에 설치한 두 개의 산대에 대해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를 싸고”라고 서술되어 있고, 그 주석에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성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鰲戴山 擁蓬瀛海日-光化門外東西 列鰲山二座 高如門等 極其工巧.”라고 했다. ‘자라가 산을 이고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설치된 산대의 모양을 추측할 수 있다. 1725년 완성된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에는 산천초목과 기암괴석 형태의 소형 산대 앞에서 줄타기, 접시 돌리기, 땅재주, 탈춤을 연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산과 산대가 자주 혼용되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34년 4월 2일조에 따르면, 중국 사신이 평양에서 산대희를 구경할 때 산대에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부터 10일까지 그 사건에 관한 관리의 서상書狀, 임금의 전교傳敎, 중국 사신의 답사答辭 등의 기록을 보면 오산과 산대라는 명칭이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봉사도』에 등장하는 산대는 예산대로서, 다른 장소에서 제작됐거나 보관하고 있다가 행사 장소로 끌고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광해군 이후에는 예산대만 사용되었는데, 이는 산대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목과 제작 인력을 조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창덕궁의 돈화문 밖 지형이 좁아 산대를 세울 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헌가산대는 예산대와 같은 것이다. 원래 헌가軒架는 제향에 쓰이는 악기 편성을 가리키는데, “헌가를 내고 들일 때 처마와 서까래를 뜯어내고 담장을 허물어야” 하며 “헌가산 위의 인물”인 잡상이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 기존의 악대가 아니라 커다란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헌가산대 또는 헌가산은 수레 위에 산대를 만들어 연희에 사용한 무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또,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에 헌가와 윤거가 혼용되어 쓰이고,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권95 5장에 부묘 후 환궁 행사 때 “산거와 화대가 매우 사치했다.”라는 기록을 통해 산대가 윤거 혹은 산거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대와 오산은 같은 구조물을 지칭하며, 이것의 약식 구조물인 산거, 윤거, 예산대, 헌가산대, 오붕, 화산대 또한 동일한 것이다.

산대는 산의 형태를 갖추고 다양한 상황을 재연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산의 신성한 의미가 약화되었지만, 잡상놀이를 통해 고사의 재연이 주로 이루어졌다. 산대 위에서 행해진 잡상놀이는 전형적인 상황이나 사람들이 익히 아는 이야기가 공연됐을 것이다. 침향산 또한 산의 형태를 갖춘 구조물로, 그 안에는 산대와 마찬가지로 각종 잡상이 진열된다. 침향산은 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산사나 동물 등으로 꾸미고, 이를 밀고 당길 수 있게 제작했다.

예산붕의 잡상놀이는 단순한 진열이 아니라 고사의 재현으로, 대개 산대잡상의 경우 강태공이나 공자, 빈풍칠월豳風七月 등을 형상화했다. 이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당시 유행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기완별록奇玩別錄』에 서술된 산대는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곳슬 바라보니 금강이 온다  허황 말이로다 이 어이 움이랴
틀 우 가 며 군인들이 메여 오 가에 곡곡쥬란 가온 쳡쳡쳥
암셕도 의연고 송쥭도 로와라 속에 졀이 잇고 동구 밧게 홍문이라
셩이라  즁은 가복 합장고 팔션녀 바라보고 셕인갓치 셧 거동
우읍다 져 화상이 혼칠 일허다
봉마다 셧는 선녀 화안셩모 랑 낭에 가화 곳고 화관에 금봉며
쌍환녹운 두 귀 밋 귀에골이 흔들니 능나의상 고 금슈원 화려다
깁붓와 가지로 반만 면 락말낙 션년히 고은  구룸으로 나려온 듯
셩진의 놉품 도 속졀이 젼혀 업 윤회에 괴로옴을 한번 면키 얼여웨라
이  일홈 금강이 번연히 의제로세 셩진과 팔션녀가 형에셔 만나쓰니
남악에 금강이 잇쓸 리가 만무다 도 의연고 제도가 방다

이 산대의 이름은 ‘금강산’인데, 『구운몽』의 성진과 팔선녀의 상봉 대목을 보여주고 있다. 산대의 외양은 네 면에 난간을 설치하고 그 위에 첩첩이 산이 들어서 있으며, 기암괴석과 송죽 사이로 절과 홍문이 있다. 성진은 가사를 입고 팔선녀를 바라보고 있고, 팔선녀는 각 봉우리 위에 있는데 가화를 꽂고 화관에 금봉채를 하고 능라의상•금수원삼을 입었다. “한곳을 바라보니 금강산이 온다 하니/ 허황한 말이로다 산이 어이 움직이랴”라는 구절을 통해 이것이 산의 형태를 갖추고 움직일 수 있는 예산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인같이 섰는 거동”과 “산봉마다 섰는 선녀”라는 구절에서 여기에 묘사된 연희가 잡상놀이임이 드러난다.

특징 및 의의

산대를 무대에서 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고,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산대를 무대로서 활용한 경우이고, 둘째는 산대를 무대 배경을 위한 구조물로서 이용한 경우이다. 전자는 산대 위에 잡상을 설치하고 연행하는 잡상놀이이고, 후자는 산대 앞에서 가면극•줄타기•땅재주 등의 잡희가 연행된 것이다. 한국 전통연희에서 주요 무대 구조물이자 무대였던 산대는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무대 공간으로서 신성한 산을 설행하는 전통은 동북아시아에서 삼신산三神山(봉래산蓬萊山)과 곤륜산崑崙山 등 중국 고대 신화에 기반을 둔 것으로 동질적이다. 고대의 제왕들은 불로장생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신성한 산을 조성하여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했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환상이 점차 약화되면서 산대의 설행은 왕조의 영속성을 주지시키는 이념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공연문화의 전통(사진실, 태학사, 2002), 산대와 채붕(김은영, 생활문물연구10, 국립민속박물관, 2003),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박정혜, 일지사, 2000),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최윤영, 태학사, 2011), 中國雜技史(傅起鳳•傅騰龍, 上海人民出版社,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