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이호승(李鎬丞)

정의

조선 후기 전국을 떠돌며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연희를 공연했던 남성 유랑예인집단.

역사

조선 후기 들어 유랑예인집단이 활발한 연행 활동을 펼친 배경으로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사회적 분업과 생산물의 상품화가 이루어져 상품 유통•교환 시장이 확대된 점을 들 수 있다. 시전市廛 체계가 붕괴하고 이를 대체하는 사상私商 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1천여 개에 달하는 장시場市가 설치되었으며, 여러 고을이 큰 시장권을 형성하고 장시 간의 그물 같은 연결망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정기 시장의 성립은 유랑예인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연행 공간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사당패대광대패솟대쟁이패초라니패풍각쟁이패광대패걸립패•중매구•굿중패 등 다양한 유랑예인집단이 있었다. 이 중 남사당패는 사당패, 굿중패 등과 더불어 재승才僧 계통 연희 집단에 해당한다. 재승은 불교와 관련된 연희자를 가리키는데,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고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지속되었다. 『고려사高麗史』 1056년(문종 10) 9월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매매하고, 잡인들과 어울려서 술주정하며 기생들과 뒤섞여 놀고,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고 다니는 재승들이 있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도 하지 않으며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민이 되었다. 『문종실록文宗實錄』 1451년(문종 원년) 6월 10일 조에 의하면,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재승 계통 연희자들도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승광대僧廣大는 수척水尺과 함께 웃고 희학하는 놀이인 우희優戲를 담당했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재승 동윤洞允의 이야기는 재승들이 조선시대의 연희 담당층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남사당패는 남성만으로 구성된 연희집단으로,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이 부족해지자 여장한 남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사당패는 1930년대까지 전국을 유랑하면서 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이후 급속한 사회•문화적 상황 변화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54년에는 남사당패 일원이었던 남운용南雲龍(1907∼1978)을 비롯한 일부 연희자들이 ‘안성 농악대’를 결성해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상황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펼쳐진 전통문화 계승 운동은 옛 남사당패 연희자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제공했다. 남운용은 과거에 함께 활동했던 연희자들을 모아 ‘인형극회 남사당’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1964년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남사당패 인형극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인형극회 남사당’은 예전의 남사당패가 연행했던 여러 연희 종목을 복원하고자 노력했고, 단체명도 ‘민속극회 남사당’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남사당패는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뿐만 아니라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등의 종목들을 복원해 냈다. 이러한 결과 1988년 남사당패 연행 종목 전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확대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내용

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에 놓고 40∼50명의 연희자들로 구성되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 남성들의 연희집단이다. 남사당패 조직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는 엄격한 명령과 규율로 남사당패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했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한 명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명인 경우도 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許可’라는 뜻이다.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갈 때,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사전 승낙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한 사람은 남사당패 은어로 ‘밥’이라는 뜻인 ‘글’의 임무를 담당했다. 뜬쇠란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연행하는 종목의 규모에 따라 해당 연희를 익힌 ‘가열(보통 기능자)’들을 두게 되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꼭두쇠의 판단에 따라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뜬쇠에게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점차 재주를 익혀 가열로 성장한다. 이들은 가열이 되기까지는 여장女裝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남사당패는 수동모[男] 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을 하는 특수한 집단이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수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사당패에서는 이 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는데, 이는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갖기 위한 목적과 아울러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남사당패는 향촌 지배층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허가를 받고 숙식과 약간의 노자만 받을 수 있으면 마을의 큰 공터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남사당패는 주로 장터•파시波市•마을 행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펼쳤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을 열려고 할 때 포구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사당)•창기娼妓•주파酒婆•화랑花郞(무당의 지아비인 광대)•악공樂工•뇌자櫑子(초라니)•마조馬弔(투전)•도사屠肆(소나 돼지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당•광대•악공•초라니 등 유랑예인에 해당하는 연희자들을 언급한 것은 이들이 조창과 포구에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남사당패는 마을의 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전남 완도군 금당도 동계洞契의 1862년부터 1927년까지의 지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동계책』에는 1880년에서 1905년 사이에 남사당과 가객에게 여섯 번 돈을 지출한 항목이 보인다.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과 평택, 충청남도 당진과 대전광역시 대덕, 전라남도 강진과 구례, 경상남도 진주와 남해, 황해도 송화와 은율 등지이다. 이곳들은 대부분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시장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남사당패는 공연을 펼칠 수 없는 겨울철에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치며 겨울을 났다고 한다.

특징 및 의의

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따라서 남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승려나 보살이 직접 사당패걸립패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아미타를 생각하여 떼어 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시주한 사람 명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연 목적과도 일치한다.

남사당패의 연희 종목 가운데 덧뵈기는 양주 별산대놀이와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덜미는 흔히 꼭두각시놀이라고 불리는 인형극이다. 버나는 대접돌리기, 살판은 땅재주인 근두, 어름은 줄타기로서 곡예에 해당하는 전문적 종목들이고, 풍물 역시 다양한 악기 연주에 해당한다. 또한, 지금은 전승이 단절되었지만 과거에 연행했다는 환술도 대표적 전통연희 종목이었다.

남사당패는 가면극인 덧뵈기•인형극꼭두각시놀음•줄타기•대접돌리기•땅재주 등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자산인 산악백희散樂百戲에 속하는 전통연희 종목들을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는 전문예인집단으로서, 한국 전통연희 문화의 수준과 깊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해어화사(이능화, 동양서원, 1927), 감로탱에 묘사된 전통연희와 유랑예인집단(전경욱, 공연문화연구20,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 남사당패연구(심우성, 동문선, 1989), 도서지역의 민속연희와 남사당노래 연구(이경엽, 한국민속학33, 한국민속학회, 2001),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

남사당패

남사당패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용어

집필자 이호승(李鎬丞)

정의

조선 후기 전국을 떠돌며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연희를 공연했던 남성 유랑예인집단.

역사

조선 후기 들어 유랑예인집단이 활발한 연행 활동을 펼친 배경으로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사회적 분업과 생산물의 상품화가 이루어져 상품 유통•교환 시장이 확대된 점을 들 수 있다. 시전市廛 체계가 붕괴하고 이를 대체하는 사상私商 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1천여 개에 달하는 장시場市가 설치되었으며, 여러 고을이 큰 시장권을 형성하고 장시 간의 그물 같은 연결망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정기 시장의 성립은 유랑예인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연행 공간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사당패•대광대패•솟대쟁이패•초라니패•풍각쟁이패•광대패•걸립패•중매구•굿중패 등 다양한 유랑예인집단이 있었다. 이 중 남사당패는 사당패, 굿중패 등과 더불어 재승才僧 계통 연희 집단에 해당한다. 재승은 불교와 관련된 연희자를 가리키는데,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고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지속되었다. 『고려사高麗史』 1056년(문종 10) 9월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매매하고, 잡인들과 어울려서 술주정하며 기생들과 뒤섞여 놀고,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고 다니는 재승들이 있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도 하지 않으며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민이 되었다. 『문종실록文宗實錄』 1451년(문종 원년) 6월 10일 조에 의하면,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재승 계통 연희자들도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승광대僧廣大는 수척水尺과 함께 웃고 희학하는 놀이인 우희優戲를 담당했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재승 동윤洞允의 이야기는 재승들이 조선시대의 연희 담당층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남사당패는 남성만으로 구성된 연희집단으로, 사당패가 인기를 끌면서 기예를 갖춘 사당이 부족해지자 여장한 남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사당패는 1930년대까지 전국을 유랑하면서 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이후 급속한 사회•문화적 상황 변화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54년에는 남사당패 일원이었던 남운용南雲龍(1907∼1978)을 비롯한 일부 연희자들이 ‘안성 농악대’를 결성해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상황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펼쳐진 전통문화 계승 운동은 옛 남사당패 연희자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제공했다. 남운용은 과거에 함께 활동했던 연희자들을 모아 ‘인형극회 남사당’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1964년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남사당패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인형극회 남사당’은 예전의 남사당패가 연행했던 여러 연희 종목을 복원하고자 노력했고, 단체명도 ‘민속극회 남사당’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남사당패는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뿐만 아니라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등의 종목들을 복원해 냈다. 이러한 결과 1988년 남사당패 연행 종목 전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확대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내용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에 놓고 40∼50명의 연희자들로 구성되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 남성들의 연희집단이다. 남사당패 조직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는 엄격한 명령과 규율로 남사당패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했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한 명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명인 경우도 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許可’라는 뜻이다.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갈 때,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사전 승낙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한 사람은 남사당패 은어로 ‘밥’이라는 뜻인 ‘글’의 임무를 담당했다. 뜬쇠란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연행하는 종목의 규모에 따라 해당 연희를 익힌 ‘가열(보통 기능자)’들을 두게 되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꼭두쇠의 판단에 따라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뜬쇠에게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점차 재주를 익혀 가열로 성장한다. 이들은 가열이 되기까지는 여장女裝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남사당패는 수동모[男] 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男色을 하는 특수한 집단이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수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사당패에서는 이 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는데, 이는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갖기 위한 목적과 아울러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남사당패는 향촌 지배층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허가를 받고 숙식과 약간의 노자만 받을 수 있으면 마을의 큰 공터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남사당패는 주로 장터•파시波市•마을 행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펼쳤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을 열려고 할 때 포구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사당)•창기娼妓•주파酒婆•화랑花郞(무당의 지아비인 광대)•악공樂工•뇌자櫑子(초라니)•마조馬弔(투전)•도사屠肆(소나 돼지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당•광대•악공•초라니 등 유랑예인에 해당하는 연희자들을 언급한 것은 이들이 조창과 포구에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남사당패는 마을의 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전남 완도군 금당도 동계洞契의 1862년부터 1927년까지의 지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동계책』에는 1880년에서 1905년 사이에 남사당과 가객에게 여섯 번 돈을 지출한 항목이 보인다.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과 평택, 충청남도 당진과 대전광역시 대덕, 전라남도 강진과 구례, 경상남도 진주와 남해, 황해도 송화와 은율 등지이다. 이곳들은 대부분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시장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남사당패는 공연을 펼칠 수 없는 겨울철에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치며 겨울을 났다고 한다.

특징 및 의의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따라서 남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승려나 보살이 직접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아미타를 생각하여 떼어 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시주한 사람 명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연 목적과도 일치한다.

남사당패의 연희 종목 가운데 덧뵈기는 양주 별산대놀이와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덜미는 흔히 꼭두각시놀이라고 불리는 인형극이다. 버나는 대접돌리기, 살판은 땅재주인 근두, 어름은 줄타기로서 곡예에 해당하는 전문적 종목들이고, 풍물 역시 다양한 악기 연주에 해당한다. 또한, 지금은 전승이 단절되었지만 과거에 연행했다는 환술도 대표적 전통연희 종목이었다.

남사당패는 가면극인 덧뵈기•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줄타기•대접돌리기•땅재주 등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자산인 산악백희散樂百戲에 속하는 전통연희 종목들을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는 전문예인집단으로서, 한국 전통연희 문화의 수준과 깊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문헌

조선해어화사(이능화, 동양서원, 1927), 감로탱에 묘사된 전통연희와 유랑예인집단(전경욱, 공연문화연구20,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 남사당패연구(심우성, 동문선, 1989), 도서지역의 민속연희와 남사당노래 연구(이경엽, 한국민속학33, 한국민속학회, 2001), 한국의 전통연희(전경욱, 학고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