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놀음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인형극

집필자 서연호(徐淵昊)

정의

꼭두각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한국의 유일한 전승 인형극.

개관

꼭두각시놀음을 전승해 온 사당패에서는 이 놀음을 덜미라고도 한다.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놀린다는 의미에서 생긴 별칭이다. 꼭두각시뿐만 아니라 박첨지와 홍동지 같은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일명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놀음 대신에 ‘극劇’을 붙여 꼭둑각시극•박첨지극•홍동지극으로 혼용한 경우도 있다.

예부터 인형을 가리키는 말로 꼭두(꼭둑) 또는 꼭두각시가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국어에서 꼭두(곡두, 곡뒤, 꼭뒤)는 허깨비[幻影]•뒤꼭대기[後腦]•인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꼭두(정수리나 꼭대기)와 꼭뒤(뒤통수의 한가운데)는 독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때로는 접두어로서 꼭두놀리다(인형 조종)•꼭지마리•꼭두머리(맨 처음)•꼭두새벽•꼭두쇠•꼭뒤누르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이와 같은 어휘들은 모두 인형 또는 인형극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꼭두각시놀음은 우리 조상인 북방 민족의 민속, 특히 장례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형 조각물과 어린이의 놀이인 각시인형놀음이라는 바탕 위에, 중국 또는 고대 동서 루트(실크로드)를 통해 관련 영향을 받음으로써 더욱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장례 인형으로는 부족 국가였던 동옥저와 고구려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모습을 닮은 목상을 만들었다는 사례가 있고, 또한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옛날부터 풀•나무•종이•천과 같은 소재로 손쉽게 인형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는 각시인형놀음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한편, 중국 문헌에 많이 나오는 산악잡희散樂雜戲를 보면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환술幻術이라는 용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 환술 가운데에는 굴뢰자窟礧子, 일명 괴뢰자魁礧子라는 인형극이 들어 있다. 보통 중국에서는 꼭두를 곽독郭禿이라 하는데, 이는 동서 루트를 거쳐 멀리 지중해 연안의 고대 셈족어로부터 유래했다. 우가리트(Ougarit) 신화에 나오는 구스(gdš)라는 말이 인형을 가리키는 집시어의 쿠클리(kukli), 인도의 쿠쿨라(kukula), 중국의 곽독, 한반도의 꼭두, 일본의 구구쓰(クグツ)로 전이되었다는 논리로서, 꼭두설 중에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우리나라의 꼭두각시놀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나라의 마단임馬端臨이 편찬한 『문헌통고文獻通考』에 고구려 관련 기록으로 “괴뢰傀儡와 월조越調•이빈곡夷賓曲은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파괴한 후에 진상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인용되기도 했다. 당나라에 패망한 668년 당시 고구려는 인형극이 매우 성행했으며 이적이 승전 기념물로 중국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몇 개의 인형만 진상했다기보다는 고구려인 인형사와 악사를 강제로 중국으로 끌고 가서 인형극 작품을 공연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인형극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인 『풍속통의風俗通義』는 2세기 한漢 말에 응소應劭가 편찬한 것으로, 원전原典은 전하지 않고 『속한서續漢書』(일명 『후한서後漢書』)에 유소劉昭의 보주補注로 인용되었다. 이 책에서는 인형극을 곽독郭禿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곽독이 한사군 시기 낙랑의 대방군帶方郡에 중국의 산악잡희와 더불어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방군 지역은 당시 동서 교역의 루트이며 중국의 문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이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에서 자생해 전승되던 꼭두각시놀음이 중국 곽독의 영향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것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면서 마침내 곽독과는 다른 독자적인 우리만의 꼭두각시놀음으로 성립되고 발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인형사들은 중국인들이 연행 했던 곽독을 그대로 모방하여 공연하기보다는 그에 비견할 만한 ‘고구려식 인형극’의 창작을 시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로 꼭두각시놀음을 연구한 김재철金在喆은 “처음에는 단순한 인형의 명칭으로서 각시였던 것이 중국 인형극이 조선에 전래하자 각시 위에 꼭두를 붙이게 된 듯하며, 꼭두각시라는 것은 괴뢰의 여역[傀儡女役]이라는 뜻인 듯하다.”라고 했다. 한편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는 일본의 구구쓰傀儡子의 어원이 한국어 꼭두가 아니라, 민속학자 안도 마사쓰구安藤正次가 밝힌 대로 한국의 광대廣大에서 유래된 용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가 말하는 이론적 근거는 한국의 ng 발음은 일본어에서 ga, gi, gu, ge, go로 되는데, koang(광)은 kugufh(구구)로 되고, tai(대)는 tu(쓰)로 되어 구구쓰라는 일본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꼭두각시놀음 및 유사한 인형극에 관한 기록 자료는 다음과 같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고려에 목우희가 있었음을, 최승로崔承老는 『고려사高麗史』에서 우인偶人을 만드는 데에 낭비가 심하다고 기록했다.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시 <부답병서復答幷序>•<관롱환유작觀弄幻有作>에서 고려시대의 꼭두각시놀음을 묘사했다. 조선시대 성현은 <관나시觀儺詩>•<관괴뢰잡희시觀傀儡雜戲詩>, 나식羅湜은 <괴뢰부傀儡賦>, 박승임朴承任은 <괴뢰붕傀儡棚>, 강이천姜彛天은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 송만재宋晩載는 <관우희觀優戲>에서 각각 꼭두각시놀음을 묘사했다. 일제강점기 송석하宋錫夏는 「조선의 인형놀음」, 아유카이 후사노신鮎具房之進는 「목우희木牛戲」, 미타무라 엔교三田村鳶魚는 「박첨지가 가르치는 인형제작과정」에서 각각 꼭두각시놀음을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은 실제 공연 방식이나 공연 대본이 채록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 그동안 꼭두각시놀음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출판한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꼭두각시놀음이 전국 30여 곳에서 전승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에서 묘사된 여러 인물의 형상을 그려 보면, 조선시대 나식이 지은 <괴뢰부>에 “기이한 소리를 지르는 사람”, “민둥머리에 얼굴은 붉고, 긴 소매로 춤추는 곽랑”, “깃발을 숙이고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 “아이를 곁에 둔 여인”, “재판 도중에 뇌물을 받고 부자의 청을 들어 주는 관리” 등이 보인다. 강이천의 <남성관희자>에는 “얼굴이 안반같이 넓으면서 고함을 지르는 인물”, “노기를 띠고 소맷자락 휘두르며 춤추는 인물”, “방망이를 들고 치고받는 더벅머리 귀신 같은 남성”, “칼을 뽑아 스스로 자살하는 백정 같은 놈”,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다가 까마귀에게 던져 주는 엄마” 등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미타무라 엔교가 조사한 구파발 박첨지놀음 기록에도 “평안 감사의 장례에 참가했던 홍동지를 사형시키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남사당패의 연희자 가운데 인형사를 덜미쇠 또는 대잡이라고 하는데, 인형의 손잡이인 나무 막대를 잡고 조종한다는 의미이다. 대잡이는 기능이 우수하고 경험이 풍부한 인형사가 맡고, 보통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겸한다. 대잡이를 곁에서 보조하는 인형사를 대잡이손이라 하며, 무대 밖에 앉아서 인형들(실제로는 대잡이)과 재담(대사)을 주고받는 광대를 산받이라고 한다. 산받이는 장구를 치면서 악사(재비)를 겸하기도 하며, 악사들이 별도로 반주를 해 주기도 한다. 산받이의 어원으로는 앞서 말한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놀이꾼인 사니(saniyy)가 우리의 ‘산이’(광대, 산받이)가 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전기 조명이 없었던 시절에는 기름을 묻힌 솜방망이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 무대 곁에 서서, 인형이 잘 보이도록 비춰 주는 조명수도 있었다.

현재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낮에 공연하지만 과거에는 야외 무대(포장)에서 밤에 공연했고, 많은 사람이 무대 앞과 주변에서 관람했다. 이때 조명은 인형이 출현하는 부분만 밝도록 배려함으로써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타오르는 불빛과 재치 있게 움직이는 인형의 모습이 조화되어 여러 가지 형상과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용

꼭두각시놀음의 거리는 한판의 놀음을 구성하는 마당, 즉 장면을 일컫는다. 현재까지 채록된 공통적인 거리들은 박첨지 유람 거리, 피조리 거리, 꼭두각시 거리, 이심이 거리, 매사냥 거리, 상여 거리, 절 짓고 허는 거리 등 일곱 거리(장면)로 요약된다. 이 같은 거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형들을 중심으로 붙인 명칭이다. 그러나 채록본마다 거리의 명칭이나 숫자에는 차이가 나타난다.

이들 거리마다 다양한 배역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먼저 박첨지 유람 거리의 주인공이기도 한 박첨지는 늙은 노인으로, 장면마다 자주 등장하며 해설자의 역할을 겸한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한 때문인지 인형들 가운데서 얼굴이 제일 둥글고 크며, 늙은 얼굴에는 주름이 많고 아래턱이 움직인다.

피조리 거리에는 박첨지의 두 조카딸로 간주되는 피조리가 등장한다.(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조카딸들은 몸체가 작은 젊은 여자 인형으로,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각자 상대역인 상좌 중을 유혹하는 교태로운 몸짓을 한다. 꼭두각시 거리의 주인공이면서 박첨지의 아내로 등장하는 꼭두각시는 박첨지 다음으로 얼굴이 큰 인형이며 아래턱이 움직인다. 크고 억센 표정의 얼굴에는 크고 진한 색깔의 주근깨가 퍼져 있어 노쇠한 여인으로 보인다. 꼭두각시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것이 돌모리집이다. 박첨지의 첩인 돌모리집은 일명 덜머리집이라고도 한다. 본처인 꼭두각시와 한바탕 싸워서 이기는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은 빈손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조선시대 용산구 원효로 강변(용강) 입구를 돌모리(덜머리)라고 했는데, 술집이 많았던 곳이다. 돌모리는 이곳에서 술을 팔았던 여인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명칭이다. 손님을 유혹하는 젊은 작부酌婦처럼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고 파란색 치마를 입고 있다.

이심이 거리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등장하는 이심이는 이무기를 가리키는 말로서,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한 채 연못이나 강에 사는 짐승이다. 인형은 천으로 긴 자루같이 만들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온몸에는 굵은 비늘이 달려 있다. 넓적한 입을 벌리면 붉은 속내가 드러나 무서운 느낌을 주며, 주둥이에는 긴 수염이 붙어 있다. 홍동지는 이심미 거리에 주로 등장하지만 다른 거리에서도 여러 가지 인상적인 역할을 한다. 사악한 대상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물리치는 젊은 역사力士의 모습이다. 홍동지는 붉은 피부의 벌거벗은 맨몸에 과장되게 커다란 생식기를 달고 나온다. 기다란 두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생식기에는 고무로 된 호스(조선시대에는 식물의 대롱)가 장치되어 있어서 가끔 객석을 향해 오줌을 갈기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잡이가 미리 입에 물을 머금고 있다가 호스로 뿜어내는 것이다.

매사냥 거리에는 매와 함께 꿩 인형이 등장한다. 이들 인형은 모두 나무로 조각하여 만들었으며, 꿩은 막대기에 고정된 채 움직이고 매는 줄타기를 하면서 움직인다. 이때 사냥을 주도하는 인물은 평안 감사이다. 평안도의 최고 지도자로서 정치에 힘을 쏟아야 할 감사가 한가하게 꿩사냥(일명 매사냥)이나 다니고, 모친의 장례 때 개고기를 먹다가 상여를 잃어버리거나 그것을 제물로 올리는 불경스러운 만행을 저지른다. 머리에는 건巾을 쓰고 몸에는 검은 옷을 입으며, 턱에는 두터운 수염을 붙였다.

상여 거리에 등장하는 상여를 메는 상두꾼들은 화려하고 규모 있게 제작된 상여에 몸이 끈으로 고정되어 있다. 열두 개의 크기가 작은 이들 인형은 상여의 양편에 매달려서 상여와 함께 움직인다. 이상과 같은 인물 외에 꼭두각시놀음의 각 거리에는 다양한 성격과 생김새의 동방노인, 표생원, 영노, 깜빡이(묵대사), 작은박첨지, 홍백가, 상주, 박첨지 손자, 귀팔이, 사령(관속), 잡탈중, 목낭청, 청노새 같은 작은 인형들이 등장한다.

채록본별 등장 거리와 등장인물의 서로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재철 채록본(대잡이 박영하, 전광식의 구술)•김우 채록본•박헌봉 채록본(남운룡 구술)•이두현 채록본(남운룡, 송복산 구술)에는 동방노인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동방노인은 일명 동방삭東方朔 또는 동방석이라 부르며,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장수한 노인을 일컫는다. 중국 한나라 때 서왕모가 심은 복숭아를 따 먹고 그처럼 장수했다고 하는데, 이심이에게 잡아먹히는 인물로 등장한다.

김재철 채록본에는 표생원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이 채록본에서는 표생원이 꼭두각시의 남편으로 등장하는데, 다른 채록본에서는 모두 박첨지가 꼭두각시의 남편이다.

최상수 채록본(대잡이 노득필의 구술), 박헌봉 채록본에는 영노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영노는 몹시 굶주려 배가 고픈 귀신으로서 왜인倭人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심이 거리에서 이심이에게 잡아먹힌다. 살구색 얼굴에 무엇이든 잡아먹을 수 있는 입은 붉게 칠했다. 영노는 다른 민속탈춤에도 등장하는데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 용머리의 새, 뿔이 달린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서산 박첨지놀이에는 명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박헌봉 채록본, 이두현 채록본에는 깜빡이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채록본에서는 깜백이 또는 깜벡이로 기록되어 있다. 인형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깜빡거린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다른 채록본에서는 묵대사默大師 또는 현묵대사로 등장한다. 민속극 탈춤에서 눈끔적이탈과 유사하다. 깜빡이는 눈을 뜨면 양반의 꼴이 보기 싫어서 감고 다닌다.

이두현 채록본에는 작은 박첨지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작은 박첨지는 박첨지에게 자신이 키가 더 크니 형님이라 부르라고 한다. 형제간에 이렇게 무례할 정도로 박씨 집안이 무질서함을 암시한다. 이 채록본에 등장하는 홍백가는 앞면과 뒷면의 색깔이 다르다. 한 면은 붉고 다른 한 면은 흰색으로 제작되어 아버지가 둘인 인형으로 등장한다. 그의 모친이 평소 두 남자와 관계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또한 상주喪主는 상제喪制라 호칭되기도 하며 평안 감사의 아들로 등장한다.

서연호 채록본(대잡이 박용태 구술)에 등장하는 귀팔이는 귀를 팔랑팔랑 움직이는 인형이다. 김재철 채록본•최상수 채록본에 등장하는 관속官屬은 심우성 채록본에서는 사령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평안 감사를 보좌하는 인물이다. 김재철 채록본에는 잡탈중이 등장한다. 김우 채록본에 등장하는 목낭청睦郎廳은 <춘향전>에 나오는 인물에 빗대어 주견主見 없이 행동하는 인물을 가리키는데, 상좌를 꾸짖는 역할로 등장한다.

꼭두각시 인형의 종류는 인형의 조종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막대기 인형[杖頭形]이 주종을 이루며, 여기에 천을 자루 또는 장갑같이 만들어 조종하는 주머니 인형[布袋形]도 있다. 신체 부위에 줄을 매어 조종하는 독립적인 줄 인형[懸絲形](마리오네트 인형)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입술에 줄을 장치해 잡아당기면 말을 하듯이 입술을 움직이는 인형들은 여럿이다. 줄을 인형 내부의 조종용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인형의 몸통에 줄을 꿰어 양편에서 잡아당기며 조종하는 줄타기 인형[走線形]은 매사냥에서 유일하게 전승된다.

꼭두각시극의 극적 요소로서 재담은 극 중 전개 장면을 읽게 하는 장치로서 매우 중요하다. 등장인물들과 대잡이, 산받이 간에 서로 주고받는 재담은 해당 극의 대사라는 형태로 대화체 또는 노래로서 청중에게 전달된다. 등장인물 간에 주고받는 재담은 흔히 대잡이들의 출신지에 따른 사투리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고, 등장 인형들이 부르는 노래(삽입가요)는 관객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가 대부분이다. 가끔 자신의 유식有識을 자랑하기 위해 중국의 한시를 읊조리는 대목도 있는데, 재담과 제대로 조화되지 않는 무리無理를 드러내기도 한다.

꼭두각시극의 장면 만들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첫째, 각 장면은 줄거리에 의해서 연결되는 구성이 아닌, 화소話素를 중심으로 한 대결 양상이라는 점에서 개별성이 강하다. 즉,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사실적 또는 내용적인 연결은 없고, 다만 동일한 등장인물이 출현할 때 전체적인 논리적 상관성이 유지될 뿐이다. 예컨대 박첨지는 해설자와 등장인물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겸하는 주요 배역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공연 도중 그때그때마다 즉흥적이며 자유롭게 제시하는 화소와 극적 동기에 따라서 전체 장면이 만들어지는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극 중 장소와 극 중 시간은 화소에 따라서 자유롭게 설정되는데, 이런 원리는 공연 시간을 단축하거나 늘리는 데 자주 이용된다.

둘째, 인물의 등퇴장과 행위 방법이 형식화되었다. 인물들은 “팔도강산 유람차로 나왔다.”, “춤 한 번 추자고 나왔다.” 등의 자기소개를 하면서 등장하거나 춤을 추면서 등장한다. 또는 “홍동지를 내보내야겠다.”와 같이 남의 부름에 의해서 등장한다. 예컨대 “나는 들어가신다.”, “또 부를 때가 있을 테니 들어가거라.” 등의 대사는 퇴장과 관련된 약속어이다. 장단을 치라고 할 때는 불림(장면의 시작을 알리는 말) “쳐라.”를 하고, 멈추라고 할 때에도 “쉬이…….”라는 신호를 한다. “인사나 하게.”, “절을 짓는다.” 등과 같이 앞으로 전개해야 할 행위를 지시하는 말도 있다.

셋째, 행위 도중에 조종자들은 산받이나 악사에게 개입하고, 상대적으로 산받이나 악사나 관중 또한 공연에 개입한다. 꼭두각시놀음의 장면들은 대잡이의 재능과 즉흥성에 좌우되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이 조종자의 주관적•객관적•제3자적 행위를 자유롭게 변화시킨다.

넷째, 재담 도중에 가끔씩 부르는 노래 역시 그들이 대신한다. 이른바 ‘목소리 출연’인 것이다. 이러한 조종의 역할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연출의 방향을 잡아 주는 일은 산받이가 맡아서 한다. 산받이는 무대 밖에 앉아 있으므로 인형의 움직임과 관중의 반응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미타무라 엔교三田村鳶魚는 대잡이와 재담을 주고받는 산받이나 악사가 무대 포장 속에 들어가 공연한 경우도 있었고, 무대를 산대山臺라 부르며 무대에 특수한 장치를 해서 공연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연희자들 모두가 무대 안으로 들어가서 공연할 수 있을 만큼 포장을 넓게 설치했다는 것이며, 또한 산대라는 명칭은 가면희의 무대인 산대 또는 산대놀이에서 함께 놀았던 데서 유래된 명칭으로서, 여기서 산대 박첨지놀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하였다. 요즘처럼 산받이나 악사가 포장 밖에 앉아서 인형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공연하는 방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통일성이나 감상의 분위기를 깨뜨릴 위험이 많고, 포장 속과 포장 밖 양쪽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청각을 분산시킬 소지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수한 장치란 무대 뒤에 별도로 그림을 그린 후막을 설치한 것을 이른다. 인형들이 노는 무대에는 아무런 장치가 없으므로 시각적인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했는데, 후면에 무대를 감싸는 넓은 배경화를 설치함으로써 인형들이 시골의 자연적 풍치 가운데서 놀고 있음을 연상하도록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꼭두각시놀음에서도 무대 미술적인 고려가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주목할 만한 기록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편, 1930년대 송석하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미타무라가 기록한 자료와 동일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 사진을 보면, 서커스 공연장과 같은 가설극장을 꾸미고 그 내부의 전면에 넓은 가설무대를 만든 것이 확인된다. 바로 그 가설무대 위의 중앙에 인형극 공연 무대(포장)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무대를 중심으로 등장 인형이 움직이는 높은 천장에 넓은 막幕이 하나 쳐져 있고, 무대 후면과 양편에 무대 높이로 역시 넓은 막이 하나 둘러쳐져 있다. 이로서 전자를 후막 배경으로, 후자를 전막 전경으로 볼 수 있다. 전경에는 가까이 보이는 산언덕이 그려져 있고, 배경에는 양편에 나무가 우거진 산언덕 사이로 멀리 바다가 보이며, 바다 가운데는 작은 섬이 떠 있는 그림이다. 인형극의 등장인물들이 활동하는 환경이 현실감 있게 연상되는 그림이다.

꼭두각시놀음의 무대를 대잡이들은 포장布帳이라 불렀다. 3m 안팎의 평방에 네 기둥을 세우고, 지상에서 1m 20㎝ 정도의 높이 위에 인형이 등장해서 노는 가로 2m 50㎝ 정도, 세로 70㎝ 정도의 공간(무대)만 남겨 놓고 사방을 모두 포장으로 둘러친 공중무대空中舞臺이다. 무대 면의 안쪽 공간에는 등장 인형의 주 조종자인 대잡이가 중심에 앉고, 그 양옆에 대잡이손이 각각 앉아 인형의 조종과 등퇴장을 돕는다. 이때 대잡이들의 머리와 조종하는 모습은 무대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무대 면 밖의 약간 비스듬한 자리(좌우는 꼭 정해져 있지 않다)에는 받는 재담꾼이자 소리꾼인 산받이와 재비(악사)들이 관중석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위치에서 무대의 전면을 보고 앉아 놀이를 진행시킨다.

한편, 조사 자료에서 김재철은 백포白布를 친다고 했으며, 남운용•양도일의 패에서는 흑포黑布를 친다고 했다. 과거의 공중무대는 2층이고 상층과 하층 사이에는 계단이 있었다. 실제로 극이 연출되는 공연 무대는 상층이었으며 하층은 인형 조종자들의 공간으로, 인형을 놀리는 인형 조종자가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포장을 친 것이다.

현재 꼭두각시놀음은 사당놀이보존회에서 연행되고 있으며, 이 놀음은 1964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 8월에는 ‘남사당놀이’로 명칭이 변경되어, 꼭두각시놀음(덜미)과 더불어 풍물놀이•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음)•버나(대접돌리기) 등이 모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2009년에는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특징 및 의의

오늘날 남사당의 꼭두각시놀음은 유랑연희패의 전통을 잇고, 서산 박첨지놀이마을 토박이 대패의 전통을 잇고 있다. 꼭두각시놀음은 고대 동양 목조 인형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인형극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희귀한 예능이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현재보다 인형의 종류가 많았고 조종 방법에도 기교가 넘쳤던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전승되는 꼭두각시놀음만이 아니라 과거에는 동물 그림자 인형놀음[動物偶影戲], 만석승놀음[曼碩僧戲], 일인一人 조종 꼭두각시놀음, 구파발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꼭두각시놀음 등이 공연되었던 자료를 볼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을 한자어로 가면희假面戲라 기록한 점으로 보아 탈춤과 같은 놀이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의 『구구쓰기傀儡子記』에 의하면, 일본의 구구쓰는 한반도에서 전파되었으며, 인형놀음만이 아니라 타인을 흉내 내는 여러 가지 광대놀음들을 곁들여 공연했다고 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대체로 열 거리 내외로 전체적인 구성이 이루어지고, 전체가 통일성을 이루는 구성이기보다는 몇 가지 이야기, 즉 화소話素를 중심으로 놀이를 전개한다. 박첨지의 탈선, 피조리들의 파계, 부인과 첩 사이의 갈등, 사람을 해치는 이심이 퇴치, 평안 감사의 횡포와 부도덕, 절 짓기를 통한 평화와 행운의 기원 등이 화소를 이룬다. 인형극이니만큼 인형들의 동작이나 춤, 반주 음악이나 노래에 치중하며, 대잡이의 숙련된 실력이나 창의적인 연출에 따라 공연의 수준에 차이가 심한 것이 사실이다. 숱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상관관계를 얼마나 긴밀하고 능숙하게 엮어 나가느냐 하는 데서 연극적 긴장과 흥미를 자아낼 수 있다. 유능한 대잡이들이 점차 사라지는 오늘날의 꼭두각시놀음은 겨우 전승의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부다이시布袋戲나 일본의 분라쿠文樂처럼 기능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훌륭한 전승력을 지닌 연희 예술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연극사(김재철, 청진서관, 1933), 조선의 인형극(송석하, 민속예술, 1929),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서연호, 연극과 인간, 2001), 꼭두각시놀이(서연호, 열화당, 1990), 사당패 연구(심우성, 동화출판공사, 1974), 토우(이난영, 대원사, 1998), 한국가면극(이두현, 한국가면극연구회, 1969), 한국전통극 꼭두각시놀음 텍스트연구(김청자, 한국연극학8, 한국연극학회, 1996), 古要神社の人形戲野村伸一(自然と文化55, 1997), 木偶戲(鮎具房之進, 朝鮮印刷株式會社, 1938), 人形劇の成立に關する硏究(角田一朗, 旭屋書房, 1964).

꼭두각시놀음

꼭두각시놀음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 인형극

집필자 서연호(徐淵昊)

정의

꼭두각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한국의 유일한 전승 인형극.

개관

꼭두각시놀음을 전승해 온 남사당패에서는 이 놀음을 덜미라고도 한다.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놀린다는 의미에서 생긴 별칭이다. 꼭두각시뿐만 아니라 박첨지와 홍동지 같은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일명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놀음 대신에 ‘극劇’을 붙여 꼭둑각시극•박첨지극•홍동지극으로 혼용한 경우도 있다.

예부터 인형을 가리키는 말로 꼭두(꼭둑) 또는 꼭두각시가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국어에서 꼭두(곡두, 곡뒤, 꼭뒤)는 허깨비[幻影]•뒤꼭대기[後腦]•인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꼭두(정수리나 꼭대기)와 꼭뒤(뒤통수의 한가운데)는 독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때로는 접두어로서 꼭두놀리다(인형 조종)•꼭지마리•꼭두머리(맨 처음)•꼭두새벽•꼭두쇠•꼭뒤누르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이와 같은 어휘들은 모두 인형 또는 인형극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꼭두각시놀음은 우리 조상인 북방 민족의 민속, 특히 장례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형 조각물과 어린이의 놀이인 각시인형놀음이라는 바탕 위에, 중국 또는 고대 동서 루트(실크로드)를 통해 관련 영향을 받음으로써 더욱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장례 인형으로는 부족 국가였던 동옥저와 고구려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모습을 닮은 목상을 만들었다는 사례가 있고, 또한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옛날부터 풀•나무•종이•천과 같은 소재로 손쉽게 인형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는 각시인형놀음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한편, 중국 문헌에 많이 나오는 산악잡희散樂雜戲를 보면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환술幻術이라는 용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 환술 가운데에는 굴뢰자窟礧子, 일명 괴뢰자魁礧子라는 인형극이 들어 있다. 보통 중국에서는 꼭두를 곽독郭禿이라 하는데, 이는 동서 루트를 거쳐 멀리 지중해 연안의 고대 셈족어로부터 유래했다. 우가리트(Ougarit) 신화에 나오는 구스(gdš)라는 말이 인형을 가리키는 집시어의 쿠클리(kukli), 인도의 쿠쿨라(kukula), 중국의 곽독, 한반도의 꼭두, 일본의 구구쓰(クグツ)로 전이되었다는 논리로서, 꼭두설 중에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우리나라의 꼭두각시놀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나라의 마단임馬端臨이 편찬한 『문헌통고文獻通考』에 고구려 관련 기록으로 “괴뢰傀儡와 월조越調•이빈곡夷賓曲은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파괴한 후에 진상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인용되기도 했다. 당나라에 패망한 668년 당시 고구려는 인형극이 매우 성행했으며 이적이 승전 기념물로 중국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몇 개의 인형만 진상했다기보다는 고구려인 인형사와 악사를 강제로 중국으로 끌고 가서 인형극 작품을 공연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인형극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인 『풍속통의風俗通義』는 2세기 한漢 말에 응소應劭가 편찬한 것으로, 원전原典은 전하지 않고 『속한서續漢書』(일명 『후한서後漢書』)에 유소劉昭의 보주補注로 인용되었다. 이 책에서는 인형극을 곽독郭禿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곽독이 한사군 시기 낙랑의 대방군帶方郡에 중국의 산악잡희와 더불어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방군 지역은 당시 동서 교역의 루트이며 중국의 문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이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에서 자생해 전승되던 꼭두각시놀음이 중국 곽독의 영향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것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면서 마침내 곽독과는 다른 독자적인 우리만의 꼭두각시놀음으로 성립되고 발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인형사들은 중국인들이 연행 했던 곽독을 그대로 모방하여 공연하기보다는 그에 비견할 만한 ‘고구려식 인형극’의 창작을 시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로 꼭두각시놀음을 연구한 김재철金在喆은 “처음에는 단순한 인형의 명칭으로서 각시였던 것이 중국 인형극이 조선에 전래하자 각시 위에 꼭두를 붙이게 된 듯하며, 꼭두각시라는 것은 괴뢰의 여역[傀儡女役]이라는 뜻인 듯하다.”라고 했다. 한편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는 일본의 구구쓰傀儡子의 어원이 한국어 꼭두가 아니라, 민속학자 안도 마사쓰구安藤正次가 밝힌 대로 한국의 광대廣大에서 유래된 용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가 말하는 이론적 근거는 한국의 ng 발음은 일본어에서 ga, gi, gu, ge, go로 되는데, koang(광)은 kugufh(구구)로 되고, tai(대)는 tu(쓰)로 되어 구구쓰라는 일본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꼭두각시놀음 및 유사한 인형극에 관한 기록 자료는 다음과 같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고려에 목우희가 있었음을, 최승로崔承老는 『고려사高麗史』에서 우인偶人을 만드는 데에 낭비가 심하다고 기록했다. 이규보李奎報는 그의 시 <부답병서復答幷序>•<관롱환유작觀弄幻有作>에서 고려시대의 꼭두각시놀음을 묘사했다. 조선시대 성현은 <관나시觀儺詩>•<관괴뢰잡희시觀傀儡雜戲詩>, 나식羅湜은 <괴뢰부傀儡賦>, 박승임朴承任은 <괴뢰붕傀儡棚>, 강이천姜彛天은 <남성관희자南城觀戲子>, 송만재宋晩載는 <관우희觀優戲>에서 각각 꼭두각시놀음을 묘사했다. 일제강점기 송석하宋錫夏는 「조선의 인형놀음」, 아유카이 후사노신鮎具房之進는 「목우희木牛戲」, 미타무라 엔교三田村鳶魚는 「박첨지가 가르치는 인형제작과정」에서 각각 꼭두각시놀음을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은 실제 공연 방식이나 공연 대본이 채록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 그동안 꼭두각시놀음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출판한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꼭두각시놀음이 전국 30여 곳에서 전승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에서 묘사된 여러 인물의 형상을 그려 보면, 조선시대 나식이 지은 <괴뢰부>에 “기이한 소리를 지르는 사람”, “민둥머리에 얼굴은 붉고, 긴 소매로 춤추는 곽랑”, “깃발을 숙이고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 “아이를 곁에 둔 여인”, “재판 도중에 뇌물을 받고 부자의 청을 들어 주는 관리” 등이 보인다. 강이천의 <남성관희자>에는 “얼굴이 안반같이 넓으면서 고함을 지르는 인물”, “노기를 띠고 소맷자락 휘두르며 춤추는 인물”, “방망이를 들고 치고받는 더벅머리 귀신 같은 남성”, “칼을 뽑아 스스로 자살하는 백정 같은 놈”,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다가 까마귀에게 던져 주는 엄마” 등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미타무라 엔교가 조사한 구파발 박첨지놀음 기록에도 “평안 감사의 장례에 참가했던 홍동지를 사형시키는 장면”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남사당패의 연희자 가운데 인형사를 덜미쇠 또는 대잡이라고 하는데, 인형의 손잡이인 나무 막대를 잡고 조종한다는 의미이다. 대잡이는 기능이 우수하고 경험이 풍부한 인형사가 맡고, 보통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겸한다. 대잡이를 곁에서 보조하는 인형사를 대잡이손이라 하며, 무대 밖에 앉아서 인형들(실제로는 대잡이)과 재담(대사)을 주고받는 광대를 산받이라고 한다. 산받이는 장구를 치면서 악사(재비)를 겸하기도 하며, 악사들이 별도로 반주를 해 주기도 한다. 산받이의 어원으로는 앞서 말한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놀이꾼인 사니(saniyy)가 우리의 ‘산이’(광대, 산받이)가 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전기 조명이 없었던 시절에는 기름을 묻힌 솜방망이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 무대 곁에 서서, 인형이 잘 보이도록 비춰 주는 조명수도 있었다.

현재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낮에 공연하지만 과거에는 야외 무대(포장)에서 밤에 공연했고, 많은 사람이 무대 앞과 주변에서 관람했다. 이때 조명은 인형이 출현하는 부분만 밝도록 배려함으로써 관중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타오르는 불빛과 재치 있게 움직이는 인형의 모습이 조화되어 여러 가지 형상과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용

꼭두각시놀음의 거리는 한판의 놀음을 구성하는 마당, 즉 장면을 일컫는다. 현재까지 채록된 공통적인 거리들은 박첨지 유람 거리, 피조리 거리, 꼭두각시 거리, 이심이 거리, 매사냥 거리, 상여 거리, 절 짓고 허는 거리 등 일곱 거리(장면)로 요약된다. 이 같은 거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형들을 중심으로 붙인 명칭이다. 그러나 채록본마다 거리의 명칭이나 숫자에는 차이가 나타난다.

이들 거리마다 다양한 배역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먼저 박첨지 유람 거리의 주인공이기도 한 박첨지는 늙은 노인으로, 장면마다 자주 등장하며 해설자의 역할을 겸한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한 때문인지 인형들 가운데서 얼굴이 제일 둥글고 크며, 늙은 얼굴에는 주름이 많고 아래턱이 움직인다.

피조리 거리에는 박첨지의 두 조카딸로 간주되는 피조리가 등장한다.(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조카딸들은 몸체가 작은 젊은 여자 인형으로,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각자 상대역인 상좌 중을 유혹하는 교태로운 몸짓을 한다. 꼭두각시 거리의 주인공이면서 박첨지의 아내로 등장하는 꼭두각시는 박첨지 다음으로 얼굴이 큰 인형이며 아래턱이 움직인다. 크고 억센 표정의 얼굴에는 크고 진한 색깔의 주근깨가 퍼져 있어 노쇠한 여인으로 보인다. 꼭두각시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것이 돌모리집이다. 박첨지의 첩인 돌모리집은 일명 덜머리집이라고도 한다. 본처인 꼭두각시와 한바탕 싸워서 이기는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은 빈손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조선시대 용산구 원효로 강변(용강) 입구를 돌모리(덜머리)라고 했는데, 술집이 많았던 곳이다. 돌모리는 이곳에서 술을 팔았던 여인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명칭이다. 손님을 유혹하는 젊은 작부酌婦처럼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고 파란색 치마를 입고 있다.

이심이 거리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등장하는 이심이는 이무기를 가리키는 말로서,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한 채 연못이나 강에 사는 짐승이다. 인형은 천으로 긴 자루같이 만들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온몸에는 굵은 비늘이 달려 있다. 넓적한 입을 벌리면 붉은 속내가 드러나 무서운 느낌을 주며, 주둥이에는 긴 수염이 붙어 있다. 홍동지는 이심미 거리에 주로 등장하지만 다른 거리에서도 여러 가지 인상적인 역할을 한다. 사악한 대상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물리치는 젊은 역사力士의 모습이다. 홍동지는 붉은 피부의 벌거벗은 맨몸에 과장되게 커다란 생식기를 달고 나온다. 기다란 두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생식기에는 고무로 된 호스(조선시대에는 식물의 대롱)가 장치되어 있어서 가끔 객석을 향해 오줌을 갈기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잡이가 미리 입에 물을 머금고 있다가 호스로 뿜어내는 것이다.

매사냥 거리에는 매와 함께 꿩 인형이 등장한다. 이들 인형은 모두 나무로 조각하여 만들었으며, 꿩은 막대기에 고정된 채 움직이고 매는 줄타기를 하면서 움직인다. 이때 사냥을 주도하는 인물은 평안 감사이다. 평안도의 최고 지도자로서 정치에 힘을 쏟아야 할 감사가 한가하게 꿩사냥(일명 매사냥)이나 다니고, 모친의 장례 때 개고기를 먹다가 상여를 잃어버리거나 그것을 제물로 올리는 불경스러운 만행을 저지른다. 머리에는 건巾을 쓰고 몸에는 검은 옷을 입으며, 턱에는 두터운 수염을 붙였다.

상여 거리에 등장하는 상여를 메는 상두꾼들은 화려하고 규모 있게 제작된 상여에 몸이 끈으로 고정되어 있다. 열두 개의 크기가 작은 이들 인형은 상여의 양편에 매달려서 상여와 함께 움직인다. 이상과 같은 인물 외에 꼭두각시놀음의 각 거리에는 다양한 성격과 생김새의 동방노인, 표생원, 영노, 깜빡이(묵대사), 작은박첨지, 홍백가, 상주, 박첨지 손자, 귀팔이, 사령(관속), 잡탈중, 목낭청, 청노새 같은 작은 인형들이 등장한다.

채록본별 등장 거리와 등장인물의 서로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재철 채록본(대잡이 박영하, 전광식의 구술)•김우 채록본•박헌봉 채록본(남운룡 구술)•이두현 채록본(남운룡, 송복산 구술)에는 동방노인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동방노인은 일명 동방삭東方朔 또는 동방석이라 부르며,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장수한 노인을 일컫는다. 중국 한나라 때 서왕모가 심은 복숭아를 따 먹고 그처럼 장수했다고 하는데, 이심이에게 잡아먹히는 인물로 등장한다.

김재철 채록본에는 표생원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이 채록본에서는 표생원이 꼭두각시의 남편으로 등장하는데, 다른 채록본에서는 모두 박첨지가 꼭두각시의 남편이다.

최상수 채록본(대잡이 노득필의 구술), 박헌봉 채록본에는 영노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영노는 몹시 굶주려 배가 고픈 귀신으로서 왜인倭人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심이 거리에서 이심이에게 잡아먹힌다. 살구색 얼굴에 무엇이든 잡아먹을 수 있는 입은 붉게 칠했다. 영노는 다른 민속탈춤에도 등장하는데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 용머리의 새, 뿔이 달린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서산 박첨지놀이에는 명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박헌봉 채록본, 이두현 채록본에는 깜빡이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채록본에서는 깜백이 또는 깜벡이로 기록되어 있다. 인형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깜빡거린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다른 채록본에서는 묵대사默大師 또는 현묵대사로 등장한다. 민속극 탈춤에서 눈끔적이탈과 유사하다. 깜빡이는 눈을 뜨면 양반의 꼴이 보기 싫어서 감고 다닌다.

이두현 채록본에는 작은 박첨지 거리가 독립되어 있다. 작은 박첨지는 박첨지에게 자신이 키가 더 크니 형님이라 부르라고 한다. 형제간에 이렇게 무례할 정도로 박씨 집안이 무질서함을 암시한다. 이 채록본에 등장하는 홍백가는 앞면과 뒷면의 색깔이 다르다. 한 면은 붉고 다른 한 면은 흰색으로 제작되어 아버지가 둘인 인형으로 등장한다. 그의 모친이 평소 두 남자와 관계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또한 상주喪主는 상제喪制라 호칭되기도 하며 평안 감사의 아들로 등장한다.

서연호 채록본(대잡이 박용태 구술)에 등장하는 귀팔이는 귀를 팔랑팔랑 움직이는 인형이다. 김재철 채록본•최상수 채록본에 등장하는 관속官屬은 심우성 채록본에서는 사령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평안 감사를 보좌하는 인물이다. 김재철 채록본에는 잡탈중이 등장한다. 김우 채록본에 등장하는 목낭청睦郎廳은 <춘향전>에 나오는 인물에 빗대어 주견主見 없이 행동하는 인물을 가리키는데, 상좌를 꾸짖는 역할로 등장한다.

꼭두각시 인형의 종류는 인형의 조종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막대기 인형[杖頭形]이 주종을 이루며, 여기에 천을 자루 또는 장갑같이 만들어 조종하는 주머니 인형[布袋形]도 있다. 신체 부위에 줄을 매어 조종하는 독립적인 줄 인형[懸絲形](마리오네트 인형)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입술에 줄을 장치해 잡아당기면 말을 하듯이 입술을 움직이는 인형들은 여럿이다. 줄을 인형 내부의 조종용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인형의 몸통에 줄을 꿰어 양편에서 잡아당기며 조종하는 줄타기 인형[走線形]은 매사냥에서 유일하게 전승된다.

꼭두각시극의 극적 요소로서 재담은 극 중 전개 장면을 읽게 하는 장치로서 매우 중요하다. 등장인물들과 대잡이, 산받이 간에 서로 주고받는 재담은 해당 극의 대사라는 형태로 대화체 또는 노래로서 청중에게 전달된다. 등장인물 간에 주고받는 재담은 흔히 대잡이들의 출신지에 따른 사투리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고, 등장 인형들이 부르는 노래(삽입가요)는 관객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가 대부분이다. 가끔 자신의 유식有識을 자랑하기 위해 중국의 한시를 읊조리는 대목도 있는데, 재담과 제대로 조화되지 않는 무리無理를 드러내기도 한다.

꼭두각시극의 장면 만들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첫째, 각 장면은 줄거리에 의해서 연결되는 구성이 아닌, 화소話素를 중심으로 한 대결 양상이라는 점에서 개별성이 강하다. 즉,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사실적 또는 내용적인 연결은 없고, 다만 동일한 등장인물이 출현할 때 전체적인 논리적 상관성이 유지될 뿐이다. 예컨대 박첨지는 해설자와 등장인물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겸하는 주요 배역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공연 도중 그때그때마다 즉흥적이며 자유롭게 제시하는 화소와 극적 동기에 따라서 전체 장면이 만들어지는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극 중 장소와 극 중 시간은 화소에 따라서 자유롭게 설정되는데, 이런 원리는 공연 시간을 단축하거나 늘리는 데 자주 이용된다.

둘째, 인물의 등퇴장과 행위 방법이 형식화되었다. 인물들은 “팔도강산 유람차로 나왔다.”, “춤 한 번 추자고 나왔다.” 등의 자기소개를 하면서 등장하거나 춤을 추면서 등장한다. 또는 “홍동지를 내보내야겠다.”와 같이 남의 부름에 의해서 등장한다. 예컨대 “나는 들어가신다.”, “또 부를 때가 있을 테니 들어가거라.” 등의 대사는 퇴장과 관련된 약속어이다. 장단을 치라고 할 때는 불림(장면의 시작을 알리는 말) “쳐라.”를 하고, 멈추라고 할 때에도 “쉬이…….”라는 신호를 한다. “인사나 하게.”, “절을 짓는다.” 등과 같이 앞으로 전개해야 할 행위를 지시하는 말도 있다.

셋째, 행위 도중에 조종자들은 산받이나 악사에게 개입하고, 상대적으로 산받이나 악사나 관중 또한 공연에 개입한다. 꼭두각시놀음의 장면들은 대잡이의 재능과 즉흥성에 좌우되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이 조종자의 주관적•객관적•제3자적 행위를 자유롭게 변화시킨다.

넷째, 재담 도중에 가끔씩 부르는 노래 역시 그들이 대신한다. 이른바 ‘목소리 출연’인 것이다. 이러한 조종의 역할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연출의 방향을 잡아 주는 일은 산받이가 맡아서 한다. 산받이는 무대 밖에 앉아 있으므로 인형의 움직임과 관중의 반응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미타무라 엔교三田村鳶魚는 대잡이와 재담을 주고받는 산받이나 악사가 무대 포장 속에 들어가 공연한 경우도 있었고, 무대를 산대山臺라 부르며 무대에 특수한 장치를 해서 공연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연희자들 모두가 무대 안으로 들어가서 공연할 수 있을 만큼 포장을 넓게 설치했다는 것이며, 또한 산대라는 명칭은 가면희의 무대인 산대 또는 산대놀이에서 함께 놀았던 데서 유래된 명칭으로서, 여기서 산대 박첨지놀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하였다. 요즘처럼 산받이나 악사가 포장 밖에 앉아서 인형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공연하는 방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통일성이나 감상의 분위기를 깨뜨릴 위험이 많고, 포장 속과 포장 밖 양쪽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청각을 분산시킬 소지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수한 장치란 무대 뒤에 별도로 그림을 그린 후막을 설치한 것을 이른다. 인형들이 노는 무대에는 아무런 장치가 없으므로 시각적인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했는데, 후면에 무대를 감싸는 넓은 배경화를 설치함으로써 인형들이 시골의 자연적 풍치 가운데서 놀고 있음을 연상하도록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꼭두각시놀음에서도 무대 미술적인 고려가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주목할 만한 기록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편, 1930년대 송석하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미타무라가 기록한 자료와 동일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 사진을 보면, 서커스 공연장과 같은 가설극장을 꾸미고 그 내부의 전면에 넓은 가설무대를 만든 것이 확인된다. 바로 그 가설무대 위의 중앙에 인형극 공연 무대(포장)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무대를 중심으로 등장 인형이 움직이는 높은 천장에 넓은 막幕이 하나 쳐져 있고, 무대 후면과 양편에 무대 높이로 역시 넓은 막이 하나 둘러쳐져 있다. 이로서 전자를 후막 배경으로, 후자를 전막 전경으로 볼 수 있다. 전경에는 가까이 보이는 산언덕이 그려져 있고, 배경에는 양편에 나무가 우거진 산언덕 사이로 멀리 바다가 보이며, 바다 가운데는 작은 섬이 떠 있는 그림이다. 인형극의 등장인물들이 활동하는 환경이 현실감 있게 연상되는 그림이다.

꼭두각시놀음의 무대를 대잡이들은 포장布帳이라 불렀다. 3m 안팎의 평방에 네 기둥을 세우고, 지상에서 1m 20㎝ 정도의 높이 위에 인형이 등장해서 노는 가로 2m 50㎝ 정도, 세로 70㎝ 정도의 공간(무대)만 남겨 놓고 사방을 모두 포장으로 둘러친 공중무대空中舞臺이다. 무대 면의 안쪽 공간에는 등장 인형의 주 조종자인 대잡이가 중심에 앉고, 그 양옆에 대잡이손이 각각 앉아 인형의 조종과 등퇴장을 돕는다. 이때 대잡이들의 머리와 조종하는 모습은 무대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무대 면 밖의 약간 비스듬한 자리(좌우는 꼭 정해져 있지 않다)에는 받는 재담꾼이자 소리꾼인 산받이와 재비(악사)들이 관중석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위치에서 무대의 전면을 보고 앉아 놀이를 진행시킨다.

한편, 조사 자료에서 김재철은 백포白布를 친다고 했으며, 남운용•양도일의 패에서는 흑포黑布를 친다고 했다. 과거의 공중무대는 2층이고 상층과 하층 사이에는 계단이 있었다. 실제로 극이 연출되는 공연 무대는 상층이었으며 하층은 인형 조종자들의 공간으로, 인형을 놀리는 인형 조종자가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포장을 친 것이다.

현재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놀이보존회에서 연행되고 있으며, 이 놀음은 1964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 8월에는 ‘남사당놀이’로 명칭이 변경되어, 꼭두각시놀음(덜미)과 더불어 풍물놀이•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음)•버나(대접돌리기) 등이 모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2009년에는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특징 및 의의

오늘날 남사당의 꼭두각시놀음은 유랑연희패의 전통을 잇고, 서산 박첨지놀이는 마을 토박이 광대패의 전통을 잇고 있다. 꼭두각시놀음은 고대 동양 목조 인형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인형극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희귀한 예능이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현재보다 인형의 종류가 많았고 조종 방법에도 기교가 넘쳤던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전승되는 꼭두각시놀음만이 아니라 과거에는 동물 그림자 인형놀음[動物偶影戲], 만석승놀음[曼碩僧戲], 일인一人 조종 꼭두각시놀음, 구파발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꼭두각시놀음 등이 공연되었던 자료를 볼 수 있다. 꼭두각시놀음을 한자어로 가면희假面戲라 기록한 점으로 보아 탈춤과 같은 놀이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의 『구구쓰기傀儡子記』에 의하면, 일본의 구구쓰는 한반도에서 전파되었으며, 인형놀음만이 아니라 타인을 흉내 내는 여러 가지 광대놀음들을 곁들여 공연했다고 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대체로 열 거리 내외로 전체적인 구성이 이루어지고, 전체가 통일성을 이루는 구성이기보다는 몇 가지 이야기, 즉 화소話素를 중심으로 놀이를 전개한다. 박첨지의 탈선, 피조리들의 파계, 부인과 첩 사이의 갈등, 사람을 해치는 이심이 퇴치, 평안 감사의 횡포와 부도덕, 절 짓기를 통한 평화와 행운의 기원 등이 화소를 이룬다. 인형극이니만큼 인형들의 동작이나 춤, 반주 음악이나 노래에 치중하며, 대잡이의 숙련된 실력이나 창의적인 연출에 따라 공연의 수준에 차이가 심한 것이 사실이다. 숱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상관관계를 얼마나 긴밀하고 능숙하게 엮어 나가느냐 하는 데서 연극적 긴장과 흥미를 자아낼 수 있다. 유능한 대잡이들이 점차 사라지는 오늘날의 꼭두각시놀음은 겨우 전승의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부다이시布袋戲나 일본의 분라쿠文樂처럼 기능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훌륭한 전승력을 지닌 연희 예술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연극사(김재철, 청진서관, 1933), 조선의 인형극(송석하, 민속예술, 1929), 꼭두각시놀음의 역사와 원리(서연호, 연극과 인간, 2001), 꼭두각시놀이(서연호, 열화당, 1990), 남사당패 연구(심우성, 동화출판공사, 1974), 토우(이난영, 대원사, 1998), 한국가면극(이두현, 한국가면극연구회, 1969), 한국전통극 꼭두각시놀음 텍스트연구(김청자, 한국연극학8, 한국연극학회, 1996), 古要神社の人形戲野村伸一(自然と文化55, 1997), 木偶戲(鮎具房之進, 朝鮮印刷株式會社, 1938), 人形劇の成立に關する硏究(角田一朗, 旭屋書房,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