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裏面)

한자명

裏面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최동현(崔東現)

정의

판소리에서 사설 혹은 음악의 리얼리티(사실성)를 뜻하는 말.

내용

이면(裏面)은 사전적으로는 보이는 면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보이지 않는 면(속) 또는 사물의 보이지 않는 뒷면을 가리킨다. 그러나 판소리에서는 사설 혹은 음악의 리얼리티(사실성)를 뜻한다. 또 신재효(申在孝)는 그가 쓴 『판소리 사설집』에서 이 용어를 행위의 상황과 사실에 꼭 들어맞는 표출(表出)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면이란 말은 사용 시기가 오래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한 수준과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이 용어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판소리는 문자로 된 사설을 노래로 부르는 공연 예술이다. 공연되는 판소리는 사설(문학적인 측면)과 음악과 너름새(극적인 측면)가 동시적으로 결합된 상태로 표출(表出)된다. 사설은 공연 이전에 존재하여 공연의 바탕이 된다. 판소리 공연에는 소리꾼뿐만 아니라 고수의 존재도 포함된다. 판소리의 극적인 측면은 창자와 고수의 행동으로 나타나고, 고수의 북장단과 추임새, 사설은 소리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판소리의 여러 국면에서 이면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이면이란 용어의 쓰임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면이 틀리다, 이면이 당치 않다
    이 말은 주로 사설을 대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신재효본 <춘향가(春香歌)>에서 “옥중 고생하는 터에 복채를 달란 말이 이면은 틀렸으나, 점이라 하는 것은 신으로만 하는 터니 무물(無物)이면 불성(不成)이라 정성을 안 들이면 귀신 감동 못 할 터니 복채를 내어놓소.” 또는 “향단이 나가더니 다담같이 차린단 말 이면이 당챦것다. 금채 놓은 왜염반에 갈분의이 꿀종자며…….”와 같이 사용한다. 여기서는 어떠한 내용에 대해 이면이 틀리다, 혹은 이면이 마땅치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즉 옥중 고생을 하고 있는데 무슨 복채를 달라고 할 수 있겠으며, 갑자기 차리는 상에 어떻게 수많은 음식을 차려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 이면이란 ‘행위와 상황과 사실에 꼭 들어맞는 표출(表出)’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사설에 표현된 내용이 행위와 상황과 사실에 맞지 않다면, 곧 이면에 맞지 않다면 사설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신재효는 상차림의 경우에는 간단한 사설로 바꾸었다. 그러나 복채는 취소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가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옥중에서 고생하는 춘향에게 복채라는 대가를 요구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볼 때 정당한 행위로 이해될 수 없다. 소경은 여기서 “점이라 하는 것은 신으로만 하는 터니 무물(無物)이면 불성(不成)이라 정성을 안 들이면 귀신 감동 못 할”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복채를 요구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 없는 야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점괘가 현실화되게 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는 말이다. 새로운 문맥과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2. 소리의 이면
    이 말은 판소리 사설과 사설을 노래하는 소리 사이의 관계 양상을 말할 때 쓴다. 우선 ‘소리의 이면’이란 말은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알지 못하고”, 또는 “소리를 수만독하면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알게 되고”와 같이 사용한다. 소리는 소리꾼과 고수에 의해서 표현되는 모든 양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꼭 ‘소리’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작과 표정 등 너름새(극적인 요소)도 중요한 부분이다. 고수의 북장단과 추임새 또한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소리는 물체의 진동이라고 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감각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리의 이면’이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소리가 대신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설로 표현된 것이지만 사설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 사설은 언어(개념)로 되어 있지만 공연되는 소리는 물리적 감각적 대상(메시지―물체)으로 되어 있다. 또한 언어라는 단일한 대상이 공연에서는 소리, 몸짓, 표정, 북소리 등으로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설과 소리는 각각 청중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설의 의미와 공연되는 소리의 의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거리가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공연되는 소리가 훌륭하다는 것과 사설이 훌륭하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설의 의미를 잘 전달했다고 해서 좋은 소리라고 할 수도 없다. 같은 사설이라도 소리로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면이 맞다, 혹은 이면이 틀리다
    이 말은 소리꾼들이 많이 사용한다. 예컨대 성창순은 “<심청이 죽은 후 심봉사가 비문을 안고 우는 대목>에서부터 <심봉사 눈 뜨는 대목>까지를 좋아하고 무대에서도 자주 불렀다. 그 대목들은 ‘이것이 보성소리의 진수’라고 할 만큼 이면이 맞는다.”라고 하였다. 판소리는 전승 예술이다. 전승 예술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공연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형태가 존재한다. 소리꾼이 소리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 공연의 전통 속에서 이룩된 정형화된 형태를 배운다는 뜻이다. 정형화된 형태 속에는 공연에서 표출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배운 것이 이면이 잘 맞는다는 것은, 소리의 정형화된 형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소리를 들은 청중들이 이해한 의미가 서로 잘 맞는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연하는 소리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배운 소리가 “행위와 상황과 사실에 꼭 들어맞는 표출(表出)”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이면을 그린다
    이 말은 오랜 판소리 공연 전통 속에서 정형화되어 형성된 의미에 새롭게 창조해내는 의미를 더 넣는 과정을 가리킨다. 예컨대 “사설의 내용을 잘 삭이고 익혀 제대로 된 감정처리를 하는 것을 ‘이면 그리기’라고 한다.”와 같은 쓰임새가 그렇다. 아무리 판소리가 전승 예술이라고 할지라도 창자가 공연을 할 때는 배운 것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맞게 새로운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이면 그리기’라고 한다. ‘이면 그리기’를 통해 창자는 전승된 판소리의 이면을 단순히 재생하는 자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면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임방울(林芳蔚)은 “이면이 소리 망치는 것”이라고 했고, 김연수는 “이면도 모르고 소리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이면’은 공연되는 소리 이전에 존재하여 소리를 공연으로 생산해내는 것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전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임방울은 판소리 공연에서 창조적인 면이 없이 정형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면도 모르면서 소리한다.”라고 임방울을 폄하했다는 김연수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판소리는 전승 예술이기 때문에 오랜 공연의 전통 속에서 정형화된 형태가 존재한다. 이를 무시하고는 제대로 된 판소리를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면 또한 반드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면을 아는 것이 판소리 창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창자는 정형화된 형태의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개발해야만 한다. 김연수는 오랜 공연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형태를 지나치게 무시할 경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리얼리티(reality)
    이면을 사설이나 음악의 리얼리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면을 리얼리티라고 했을 경우에는 우선 리얼리티란 개념 자체가 매우 복잡하여 쉽게 가닥을 잡을 수 없다. 사설의 리얼리티란 사설이 현실을 얼마나 잘 재현했는가에 따라 판단될 것이지만, 공연되는 소리의 리얼리티란 소리가 사설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했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사설의 경우에는 오랫동안의 문학적 관습에 의해 어느 정도 그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공연의 경우에는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수단의 질료가 서로 달라서 판단의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보통 말하듯이 그저 음고(音高)가 높은 것이 산이 높은 것을, 음고가 낮은 것이 바다가 깊은 것을, 음을 길게 빼는 것이 거리가 먼 것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문제점이 많다. 음고가 높다는 것은 소리를 내는 물체의 진동수가 많다는 것이며, 산이 높다는 것은 수평면으로부터 산꼭대기까지의 공간적 거리가 크다는 뜻이다. 음이 길다는 것은 소리를 내는 물체의 진동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현상이며, 거리가 멀다는 것은 두 지점간의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는 현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동질성이 없다. 또 모든 사설들을 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판소리의 의미 작용에 있어서 이렇듯 사실성만을 고집할 경우,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매너리즘에 빠져 예술로서 성공할 수 없다. 판소리는 늘 새로운 ‘이면 그리기’를 통해서 새롭게 탄생되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도 사실성만으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이면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고, 판소리의 공연과 감상에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럴 경우 사설의 이면이 틀리거나 마땅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면을 맞게 하기 위해 상황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나 사설의 개작 또는 음악의 변화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판소리 향유 집단 내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대로 통용되고, 그렇지 못하면 폐기된다. 그런데 그 판소리 향유 집단도 다양하므로, 그에 따라 다양한 유파바디의 차이가 발생한다.

참고문헌

판소리의 역사적 이해(서종문, 태학사, 2006), 판소리 이면에 관하여(최동현, 판소리연구14, 판소리학회, 2002),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4).

이면

이면
한자명

裏面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최동현(崔東現)

정의

판소리에서 사설 혹은 음악의 리얼리티(사실성)를 뜻하는 말.

내용

이면(裏面)은 사전적으로는 보이는 면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보이지 않는 면(속) 또는 사물의 보이지 않는 뒷면을 가리킨다. 그러나 판소리에서는 사설 혹은 음악의 리얼리티(사실성)를 뜻한다. 또 신재효(申在孝)는 그가 쓴 『판소리 사설집』에서 이 용어를 행위의 상황과 사실에 꼭 들어맞는 표출(表出)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면이란 말은 사용 시기가 오래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한 수준과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이 용어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판소리는 문자로 된 사설을 노래로 부르는 공연 예술이다. 공연되는 판소리는 사설(문학적인 측면)과 음악과 너름새(극적인 측면)가 동시적으로 결합된 상태로 표출(表出)된다. 사설은 공연 이전에 존재하여 공연의 바탕이 된다. 판소리 공연에는 소리꾼뿐만 아니라 고수의 존재도 포함된다. 판소리의 극적인 측면은 창자와 고수의 행동으로 나타나고, 고수의 북장단과 추임새, 사설은 소리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판소리의 여러 국면에서 이면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이면이란 용어의 쓰임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면이 틀리다, 이면이 당치 않다
이 말은 주로 사설을 대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신재효본 <춘향가(春香歌)>에서 “옥중 고생하는 터에 복채를 달란 말이 이면은 틀렸으나, 점이라 하는 것은 신으로만 하는 터니 무물(無物)이면 불성(不成)이라 정성을 안 들이면 귀신 감동 못 할 터니 복채를 내어놓소.” 또는 “향단이 나가더니 다담같이 차린단 말 이면이 당챦것다. 금채 놓은 왜염반에 갈분의이 꿀종자며…….”와 같이 사용한다. 여기서는 어떠한 내용에 대해 이면이 틀리다, 혹은 이면이 마땅치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즉 옥중 고생을 하고 있는데 무슨 복채를 달라고 할 수 있겠으며, 갑자기 차리는 상에 어떻게 수많은 음식을 차려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 이면이란 ‘행위와 상황과 사실에 꼭 들어맞는 표출(表出)’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사설에 표현된 내용이 행위와 상황과 사실에 맞지 않다면, 곧 이면에 맞지 않다면 사설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신재효는 상차림의 경우에는 간단한 사설로 바꾸었다. 그러나 복채는 취소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가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옥중에서 고생하는 춘향에게 복채라는 대가를 요구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볼 때 정당한 행위로 이해될 수 없다. 소경은 여기서 “점이라 하는 것은 신으로만 하는 터니 무물(無物)이면 불성(不成)이라 정성을 안 들이면 귀신 감동 못 할”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복채를 요구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 없는 야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점괘가 현실화되게 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는 말이다. 새로운 문맥과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소리의 이면
이 말은 판소리 사설과 사설을 노래하는 소리 사이의 관계 양상을 말할 때 쓴다. 우선 ‘소리의 이면’이란 말은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알지 못하고”, 또는 “소리를 수만독하면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알게 되고”와 같이 사용한다. 소리는 소리꾼과 고수에 의해서 표현되는 모든 양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꼭 ‘소리’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작과 표정 등 너름새(극적인 요소)도 중요한 부분이다. 고수의 북장단과 추임새 또한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소리는 물체의 진동이라고 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감각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리의 이면’이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소리가 대신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설로 표현된 것이지만 사설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 사설은 언어(개념)로 되어 있지만 공연되는 소리는 물리적 감각적 대상(메시지―물체)으로 되어 있다. 또한 언어라는 단일한 대상이 공연에서는 소리, 몸짓, 표정, 북소리 등으로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설과 소리는 각각 청중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설의 의미와 공연되는 소리의 의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거리가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공연되는 소리가 훌륭하다는 것과 사설이 훌륭하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설의 의미를 잘 전달했다고 해서 좋은 소리라고 할 수도 없다. 같은 사설이라도 소리로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면이 맞다, 혹은 이면이 틀리다
이 말은 소리꾼들이 많이 사용한다. 예컨대 성창순은 “<심청이 죽은 후 심봉사가 비문을 안고 우는 대목>에서부터 <심봉사 눈 뜨는 대목>까지를 좋아하고 무대에서도 자주 불렀다. 그 대목들은 ‘이것이 보성소리의 진수’라고 할 만큼 이면이 맞는다.”라고 하였다. 판소리는 전승 예술이다. 전승 예술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공연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형태가 존재한다. 소리꾼이 소리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 공연의 전통 속에서 이룩된 정형화된 형태를 배운다는 뜻이다. 정형화된 형태 속에는 공연에서 표출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배운 것이 이면이 잘 맞는다는 것은, 소리의 정형화된 형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소리를 들은 청중들이 이해한 의미가 서로 잘 맞는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연하는 소리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배운 소리가 “행위와 상황과 사실에 꼭 들어맞는 표출(表出)”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면을 그린다
이 말은 오랜 판소리 공연 전통 속에서 정형화되어 형성된 의미에 새롭게 창조해내는 의미를 더 넣는 과정을 가리킨다. 예컨대 “사설의 내용을 잘 삭이고 익혀 제대로 된 감정처리를 하는 것을 ‘이면 그리기’라고 한다.”와 같은 쓰임새가 그렇다. 아무리 판소리가 전승 예술이라고 할지라도 창자가 공연을 할 때는 배운 것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맞게 새로운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이면 그리기’라고 한다. ‘이면 그리기’를 통해 창자는 전승된 판소리의 이면을 단순히 재생하는 자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면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임방울(林芳蔚)은 “이면이 소리 망치는 것”이라고 했고, 김연수는 “이면도 모르고 소리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이면’은 공연되는 소리 이전에 존재하여 소리를 공연으로 생산해내는 것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전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임방울은 판소리 공연에서 창조적인 면이 없이 정형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면도 모르면서 소리한다.”라고 임방울을 폄하했다는 김연수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판소리는 전승 예술이기 때문에 오랜 공연의 전통 속에서 정형화된 형태가 존재한다. 이를 무시하고는 제대로 된 판소리를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면 또한 반드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면을 아는 것이 판소리 창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창자는 정형화된 형태의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개발해야만 한다. 김연수는 오랜 공연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형태를 지나치게 무시할 경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얼리티(reality)
이면을 사설이나 음악의 리얼리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면을 리얼리티라고 했을 경우에는 우선 리얼리티란 개념 자체가 매우 복잡하여 쉽게 가닥을 잡을 수 없다. 사설의 리얼리티란 사설이 현실을 얼마나 잘 재현했는가에 따라 판단될 것이지만, 공연되는 소리의 리얼리티란 소리가 사설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했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사설의 경우에는 오랫동안의 문학적 관습에 의해 어느 정도 그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공연의 경우에는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수단의 질료가 서로 달라서 판단의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보통 말하듯이 그저 음고(音高)가 높은 것이 산이 높은 것을, 음고가 낮은 것이 바다가 깊은 것을, 음을 길게 빼는 것이 거리가 먼 것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문제점이 많다. 음고가 높다는 것은 소리를 내는 물체의 진동수가 많다는 것이며, 산이 높다는 것은 수평면으로부터 산꼭대기까지의 공간적 거리가 크다는 뜻이다. 음이 길다는 것은 소리를 내는 물체의 진동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현상이며, 거리가 멀다는 것은 두 지점간의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는 현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동질성이 없다. 또 모든 사설들을 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판소리의 의미 작용에 있어서 이렇듯 사실성만을 고집할 경우,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매너리즘에 빠져 예술로서 성공할 수 없다. 판소리는 늘 새로운 ‘이면 그리기’를 통해서 새롭게 탄생되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도 사실성만으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이면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고, 판소리의 공연과 감상에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럴 경우 사설의 이면이 틀리거나 마땅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면을 맞게 하기 위해 상황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나 사설의 개작 또는 음악의 변화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판소리 향유 집단 내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대로 통용되고, 그렇지 못하면 폐기된다. 그런데 그 판소리 향유 집단도 다양하므로, 그에 따라 다양한 유파와 바디의 차이가 발생한다.

참고문헌

판소리의 역사적 이해(서종문, 태학사, 2006), 판소리 이면에 관하여(최동현, 판소리연구14, 판소리학회, 2002),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집문당,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