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申在孝)

한자명

申在孝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김종철(金鍾澈)

정의

판소리 사설의 정리와 개작, 단가 창작, 판소리 이론 탐구, 판소리 창자 교육 및 후원에 힘 쓴 판소리 활동가.

개관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백원(百源), 호(號)는 동리(桐里)이다. 신재효의 선대(先代)는 서울에 살았고 대대로 하급 무반직을 지냈으며, 부친 신광흡(申光洽, 1771~1844)이 서울에서 고창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다가 고창으로 옮겨가 고창의 향리가 되었고 또한 관약방(官藥房)을 운영하였다. 신재효는 고창에서 태어나 이방(吏房), 호장(戶長) 등 고창의 향리(鄕吏)를 역임했다. 1876년 이재민들을 대상으로 한 진휼을 위해 돈을 기부하였으며, 경복궁 중건에 원납전을 내어 1877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의 명예 직함을 받았다. 신재효는 한문을 배워 몇 편의 한시(漢詩)를 남겼으나 무엇보다 그의 두드러진 문학·예술 활동은 판소리 관련 활동이다.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등 판소리 관련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향리의 직책에서 물러난 1860년 이후로 추정된다. 개인적인 취향 외에 그가 판소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는 판소리가 발달한 호남 지역에서 생장하였다는 것과 특히 전라도 감영(監營)과 각 군현(郡縣)의 이서(吏胥)들이 관청에서의 각종 연회(宴會) 때 판소리 창자들의 선발과 초청에 관여한 풍속을 들 수 있다. 나아가 그의 향리로서의 신분 의식도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활동의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밑에서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은 향리는 양반 계층 보다 낮은 신분이어서 관직 진출과 사회적 대우 등에서 큰 차별을 받았으며, 신재효가 향리 생활을 했던 19세기 후반기는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향리 계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악화된 때였다. 신재효는 이러한 향리에 대한 신분 제약과 사회적 인식에서 유발된 심리적 갈등을 판소리를 매개로 표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용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가적 면모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판소리 사설 정리 및 개작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 중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이다. 신재효는 열두마당 중 <춘향가(春香歌)>, <심청가(沈淸歌)>, <토별가(兎鼈歌)>, <박타령>, <적벽가(赤壁歌)>, <변강쇠가> 등 모두 여섯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개작하였다. 열두마당 중 이상의 여섯마당을 정리 대상으로 삼은 것은 20세기 이후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의 다섯마당을 중심으로 판소리가 전승되는 것과 관련지어 볼 때 당대의 판소리 흐름을 상당히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재효의 사설 정리와 개작에서 특이한 것은 춘향가이다. 신재효는 춘향가를 남창(男唱)·여창(女唱)·동창(童唱)의 세 가지로 사설을 정리, 개작했으나 현재 『여창춘향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신재효는 『남창춘향가』에서 전체 줄거리는 다른 춘향가와 마찬가지로 유지하였으나 세부 내용은 적지 않게 바꾸었다. 그네 뛰는 춘향을 발견하고 이 도령이 방자를 보내 불렀을 때 춘향이 가지 않고 향단을 보내 살피게 하고, 이 도령과 춘향이 글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바꾼 것, 춘향이 하옥되었을 때 꿈에 황릉묘로 가지 않고 천장전으로 가는 것으로 바꾼 것 등이 대표적이다. 『동창춘향가』는 남창과 달리 춘향과 이 도령이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대목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 사설의 개작은 남창만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가 춘향가를 셋으로 나눈 것은 판의 분화 및 창자의 특성을 고려한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심청가, 적벽가, 토별가, 흥보가 및 변강쇠가의 사설 정리와 개작의 전체적 방향은 서로 유사하나 개별 작품마다의 양상은 다르다. 이 중에서 토별가는 완판본으로 출판된 것이 특기할 만한 것이며, 변강쇠가는 <변강쇠타령> 또는 <가루지기타령> 사설의 유일본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신재효는 사설을 정리하면서 한자어 및 한문 어구를 많이 활용하여 사설이 난해하게 되거나 창으로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게 된 측면이 있다. 아울러 신재효는 사설을 개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다른 가객 <몽중가>는 옥중에서 어사 보고 산물을 한다는데 이 사설 짓는 이는 신행길을 차렸으니 좌상 처분 어떠할지”(남창춘향가)라든가, “가만가만 빈 말씀을 알 수가 없건마는 제사를 지내실 제 축문이 있겠기에 이 사설 짓는 사람 제 의사로 지었으니 공명 선생 아시면 꾸중이나 안 하실지”(적벽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신재효가 서술자의 목소리에 자신의 비판적 목소리를 실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향단이 나가더니 다담같이 차린단 말 이면에 당찮것다.”(동창춘향가), “토끼가 나올 적에 이비 삼려 보단 말은 아마도 망발인게 짐승은 짐승끼리 사람 말을 빌려다가 서로 문답하려니와 사람이야 짐승 보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토별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신재효는 작중 상황 또는 공연 상황에 개입하기도 한다. “양반의 사랑가라 사설이 유식하여 우슴집이 적다 하고 진멋진 도련님이 육담 장난으로 너름새 해가며 판사귐를 하는데 이런 야단이 없어”(동창춘향가), “흥보댁이 할 수 없어 죽기로 자처하고 복 못 탄 신세 자탄 진양조로 섧게 울 제 맛있는 사람들은 귀에서도 눈물 난다.”(박타령)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작가 또는 서술자의 작중 개입은 신재효 사설의 특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의 개작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로는 신재효가 개작을 통해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것이 대표적이고, 부정적 평가로는 신재효가 개작을 통해 판소리 사설의 민중적 성격을 제거하고 중세적 질서를 옹호하는 이념을 강화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합리성의 추구는 이면에 맞게 시설을 개작한 것에서 두드러지며, 중세적 이념의 강화는 주인공의 행위를 도덕적 당위로 견인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그런데 신재효의 사설에는 합리성이 일관되게 지배적이지 않으며 또한 평민적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이 속한 향리 계층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추가하는가 하면, 요호부민(饒戶富民)을 옹호하는 내용을 반영하기도 하여 일률적으로 그의 개작을 평가하기 힘들다.

  2. 판소리 단가 및 기타 창작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 정리와 개작 외에 다양한 시가(詩歌)를 창작하거나 개작 또는 수집했다. <오섬가(烏蟾歌)>, <광대가(廣大歌)>, <허두가(虛頭歌)>, <치산가(治産歌)>, <성조가(成造歌)>, <단잡가(短雜歌)>, <도리화가(桃李花歌)>, <권유가(勸遊歌)>, <방아타령>, <명당축원(明堂祝願)>, <갈처사십보가(葛處士十步歌)>, <어부사(漁父詞)>, <호남가(湖南歌)>, <구구가(九九歌)>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은 장르가 단일하지 않아 판소리 단가(短歌), 가사(歌辭), 잡가(雜歌) 등이 혼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섬가>처럼 판소리 단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단형 판소리에 가까운 새로운 양식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오섬가>는 까마귀와 두꺼비가 사랑과 슬픔을 주제로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대 중국의 사례와 함께 춘향가와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및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광대가(廣大歌)>는 신재효가 자신의 판소리 이론과 역대 명창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 것이다. 「허두가」는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판소리 창자의 목을 고르고 소리판의 분위를 잡는 단가(短歌)들로 구성된 것으로 <고고천변(皐皐天邊)>, <새타령>, <소상팔경(瀟湘八景)>, <궁장가(宮墻歌)>, <숭유가(崇儒歌)>, <태평가(太平歌)>, <북정가(北征歌)>, <효도가(孝道歌)>, <달거리>, <금화사가(金華寺歌)>, <역려가(逆旅歌)>, <역대가(歷代歌)>, <대관강산(大觀江山)> 등 모두 13편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작품별로 다양한 양식과 주제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어느 작품이 신재효의 창작이며, 어느 작품이 신재효의 개작이며, 어느 작품이 수집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치산가>는 향리 계층이면서 부자이기도 한 신재효의 경제 의식 및 사회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도리화가>는 1870년 작으로 신재효가 제자인 진채선에 대한 애정 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잡가>는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과 가람본 단잡가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합쳐 13편이다. 개별 작품의 길이와 내용이 다양한데, 이 속에 신재효의 집을 묘사한 노래와 신재효 자신을 소개한 노래, 그리고 서양 열강의 침략을 비판한 노래 등이 들어 있다. <명당축원>, <성조가>, <방아타령> 등은 경복궁 낙성 축하를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처사십보가>는 한 걸음에서 열 걸음까지 나아가며 노래하는 형식인데 중세적 가치관의 붕괴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자는 내용으로 동학사상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데 신재효의 창작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권유가>는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것이며, <어부사>는 기존의 어부사와 유사하며, <호남가>는 현재 단가로 불리는 <호남가>와 비슷하나 신재효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다.

  3. 판소리 이론 탐구와 비평 활동
    신재효의 판소리 이론 탐구는 <광대가>에 집약되어 있다. <광대가>에서 신재효는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판소리의 4대 법례로 제시하고 또 역대 명창들의 특색을 비유의 방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이론 탐구는 정현석과 같은 당시 판소리 향유자들의 적극적인 향유 취향에 대응하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틀을 정립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신재효의 영향을 받은 김세종이 판소리 연행에서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원리와 너름새의 방법 등을 주장했는데 이 점에서 신재효의 이론 탐구와 비평 활동은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4. 판소리 창자 교육과 후원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따르면 신재효가 활동하던 시기에 어떤 창자라도 신재효의 지침과 평가를 받지 않고는 명창의 반열에 들 수 없었다면서 이날치, 박만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진채선, 허금파 등이 신재효의 지침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재효는 동편제서편제의 창자들에게 두루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신재효가 판소리 창자들을 모아 교육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정현석(鄭顯奭)의 『증동리신군서(贈桐里申君序)』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신재효는 판소리 창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창자들에게 사설의 뜻을 가르치거나 비속한 표현을 고쳐서 익히게 하는 등의 교육을 했다. 정현석은 신재효에게 배운 이경태(李慶泰)의 창을 들어보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는 신재효에게 사설 교육과 음악 교육과 관련된 주문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재효의 판소리 교육 방향이 상층의 판소리 향유자의 취향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창자 교육에서 교사 역할을 한 창자로는 김세종이 알려져 있으며, 신재효의 교육에 의해 진채선과 허금파와 같은 여류 명창이 배출된 것은 특기할 사항이다.

신재효가 정리 및 개작한 판소리 사설은 창을 전제로 한 것들이지만 신재효 자신이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재효바디의 판소리 마당이나 신재효의 더늠이 전승되지 않는다. 또 신재효가 벌교의 김문옥과 고창의 홍두평으로 하여금 자신이 정리 및 개작한 판소리 사설과 자신이 지은 단가의 창을 짜게 해서 진채선에게 부르게 했다는 정보가 조사된 바 있으나 그 창본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북 김제의 창자 김이수(金二洙)가 신재효의 사설을 창으로 부른다고 하나 그 창법은 이날치 계통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다른 창자들에게 널리 전파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신재효가 정리 및 개작을 한 사설에 상응하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으로 짜인 창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신재효의 사설은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과 단가들이 필사본으로 집대성된 것은 『신오위장본집(申五衛將本集)』(6책)으로 서울대학교 가람문고로 소장되어 있다. 개인 소장의 『동리유집초(桐里遺集抄)』에는 <오섬가>, <토별가> 및 <허두가>가 필사되어 있다. 고창판소리박물관에는 심청가(신씨가장본), 적벽가(성두본), 적벽가(신씨가장본), 토별가(성두본), 박타령(신씨가장본), 변강쇠가(성두본) 등이 소장되어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과 단가 및 신재효 전기 자료들이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 의해 영인본으로 집대성되어 간행(1969)된 바 있으며, 강한영에 의해 사설들이 원문과 현대어 표기 및 교주 작업이 이루어진 바 있다.

특징 및 의의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신재효가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니면서 판소리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판소리 사설 정리·개작자 및 교육자의 역할을 한 것은 호남 지역 향리 계층의 문화적 관습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호남 지역 향리들의 판소리 창자 후원 및 관리가 이 지역에서 형성된 관습이라면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둘째, 그의 판소리 활동은 서울의 기술직 중인들이 한문 문학에 주력하고, 역시 서울의 서리 계층 출신인 김천택(金天澤), 김수장(金壽長), 박효관(朴孝寬), 안민영(安玟英) 등이 시조 창작에 주력한 것과 비교하여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즉 중인 계층의 다양한 문화적 동향 속에서 고창을 기반으로 한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지역과 예술 장르 두 측면에서 분명한 독자성을 갖는 것이다. 셋째, 그가 정리·개작한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에 잘 드러나듯이 그의 판소리 활동은 복합적 의식의 산물인 것이 특징이다. 그가 판소리 사설에 드러난 의식의 경우 어느 하나로 그 주된 방향을 단정하기 힘들 정도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옹호, 평민 의식의 긍정, 자신이 속한 향리 집단에 대한 비판 의식, 요호부민에 대한 동정 등등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표현의 측면에서도 창으로 구현하기 힘들 정도의 한문 투에서부터 유랑 연예인들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전아한 표현에서 외설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미적 지향에서도 비장과 골계 그리고 기괴미 등을 적극 추구하고 있다. 신재효 사설의 이러한 다양한 의식과 표현 방식 및 미적 지향의 공존과 복합은 다른 판소리 사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여러 모로 판소리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가 정리·개작한 여섯마당은 비록 열두마당 전부는 아니지만 개인에 의한 최초의 판소리 사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창자가 아닌 인물의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작업은 이후 이해조의 『옥중화(獄中花)』, 『강상련(江上蓮)』, 『연의각』 등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둘째, 그가 정리·개작한 사설들은 연행 현장에서 창으로 불리고 또 전승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는 후대 명창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남창춘향가』의 서두 부분이 김창환(金昌煥), 정광수, 김소희(金素姬) 등에 의해 수용되었고, 임방울의 유명한 더늠이 된 <쑥대머리>의 사설 역시 『남창춘향가』에서 온 것이다. 셋째, 그가 정리·개작한 판소리 사설 여섯마당은 판소리 사설의 역사적 변이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 창본과 판소리계 소설의 성립 연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은 비교적 그 정리·개작 연대가 분명하므로 비교의 방법으로 여러 판소리 창본과 판소리계 소설의 성립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넷째, 그의 판소리 이론 정립과 비평 활동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판소리가 판소리 비평 활동과 이론적 탐구를 필요로 할 만큼 성장했음을 말하며, 신재효가 그러한 필요에 선구적으로 부응했음을 뜻한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신재효와 같은 시기에 정춘풍이 판소리 비평으로 신재효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으니 이 시기에 판소리 비평 활동이 판소리계 내부에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그의 판소리 창자 교육과 후원 역시 판소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판소리 후원은 신재효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닌 인물이 교육까지 담당한 것은 신재효가 처음이다. 여섯째, 신재효가 진채선을 비롯한 여류 판소리 창자들을 교육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기생이 판소리 창자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진채선 이전에 판소리를 부른 기생이 있었음은 안민영의 『금옥총부(金玉叢部)』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기생들을 판소리 창자로 교육한 것은 신재효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여성 판소리 창자들이 대거 등장한 점에 비추어 보면 신재효의 여성 창자 교육은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신재효는 독자적인 비평 의식에 입각하여 판소리 사설을 정리 개작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였고 판소리 창자들을 교육하고 후원하였다. 신재효의 이러한 활동과 성과들은 19세기 후반기의 판소리 창자, 향유자, 후원자 등으로 구성된 판소리계의 동향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이자 그 자체가 판소리사에서 길이 기억해야 할 성취이다.

참고문헌

申五衛將本集, 19세기 전라도 고창의 향리세계와 신재효(이훈상, 고문서연구26, 한국고문서학회, 2005), 신재효에 대한 평가(김대행 외,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6), 신재효 연구(서종문·정병헌 편, 태학사, 1997), 신재효 판소리 사설의 연구(정병헌, 평민사, 1986),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강한영 교주, 민중서관, 1971), 신재효 판소리 전집(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세대학교출판부, 1969), 판소리 사설 연구(서종문, 형설출판사, 1984).

신재효

신재효
한자명

申在孝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김종철(金鍾澈)

정의

판소리 사설의 정리와 개작, 단가 창작, 판소리 이론 탐구, 판소리 창자 교육 및 후원에 힘 쓴 판소리 활동가.

개관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백원(百源), 호(號)는 동리(桐里)이다. 신재효의 선대(先代)는 서울에 살았고 대대로 하급 무반직을 지냈으며, 부친 신광흡(申光洽, 1771~1844)이 서울에서 고창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다가 고창으로 옮겨가 고창의 향리가 되었고 또한 관약방(官藥房)을 운영하였다. 신재효는 고창에서 태어나 이방(吏房), 호장(戶長) 등 고창의 향리(鄕吏)를 역임했다. 1876년 이재민들을 대상으로 한 진휼을 위해 돈을 기부하였으며, 경복궁 중건에 원납전을 내어 1877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의 명예 직함을 받았다. 신재효는 한문을 배워 몇 편의 한시(漢詩)를 남겼으나 무엇보다 그의 두드러진 문학·예술 활동은 판소리 관련 활동이다.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등 판소리 관련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향리의 직책에서 물러난 1860년 이후로 추정된다. 개인적인 취향 외에 그가 판소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는 판소리가 발달한 호남 지역에서 생장하였다는 것과 특히 전라도 감영(監營)과 각 군현(郡縣)의 이서(吏胥)들이 관청에서의 각종 연회(宴會) 때 판소리 창자들의 선발과 초청에 관여한 풍속을 들 수 있다. 나아가 그의 향리로서의 신분 의식도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활동의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밑에서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은 향리는 양반 계층 보다 낮은 신분이어서 관직 진출과 사회적 대우 등에서 큰 차별을 받았으며, 신재효가 향리 생활을 했던 19세기 후반기는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향리 계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악화된 때였다. 신재효는 이러한 향리에 대한 신분 제약과 사회적 인식에서 유발된 심리적 갈등을 판소리를 매개로 표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용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가적 면모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피면 다음과 같다.

판소리 사설 정리 및 개작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 중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이다. 신재효는 열두마당 중 <춘향가(春香歌)>, <심청가(沈淸歌)>, <토별가(兎鼈歌)>, <박타령>, <적벽가(赤壁歌)>, <변강쇠가> 등 모두 여섯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개작하였다. 열두마당 중 이상의 여섯마당을 정리 대상으로 삼은 것은 20세기 이후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의 다섯마당을 중심으로 판소리가 전승되는 것과 관련지어 볼 때 당대의 판소리 흐름을 상당히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재효의 사설 정리와 개작에서 특이한 것은 춘향가이다. 신재효는 춘향가를 남창(男唱)·여창(女唱)·동창(童唱)의 세 가지로 사설을 정리, 개작했으나 현재 『여창춘향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신재효는 『남창춘향가』에서 전체 줄거리는 다른 춘향가와 마찬가지로 유지하였으나 세부 내용은 적지 않게 바꾸었다. 그네 뛰는 춘향을 발견하고 이 도령이 방자를 보내 불렀을 때 춘향이 가지 않고 향단을 보내 살피게 하고, 이 도령과 춘향이 글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바꾼 것, 춘향이 하옥되었을 때 꿈에 황릉묘로 가지 않고 천장전으로 가는 것으로 바꾼 것 등이 대표적이다. 『동창춘향가』는 남창과 달리 춘향과 이 도령이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대목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 사설의 개작은 남창만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가 춘향가를 셋으로 나눈 것은 판의 분화 및 창자의 특성을 고려한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심청가, 적벽가, 토별가, 흥보가 및 변강쇠가의 사설 정리와 개작의 전체적 방향은 서로 유사하나 개별 작품마다의 양상은 다르다. 이 중에서 토별가는 완판본으로 출판된 것이 특기할 만한 것이며, 변강쇠가는 <변강쇠타령> 또는 <가루지기타령> 사설의 유일본이어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신재효는 사설을 정리하면서 한자어 및 한문 어구를 많이 활용하여 사설이 난해하게 되거나 창으로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게 된 측면이 있다. 아울러 신재효는 사설을 개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다른 가객 <몽중가>는 옥중에서 어사 보고 산물을 한다는데 이 사설 짓는 이는 신행길을 차렸으니 좌상 처분 어떠할지”(남창춘향가)라든가, “가만가만 빈 말씀을 알 수가 없건마는 제사를 지내실 제 축문이 있겠기에 이 사설 짓는 사람 제 의사로 지었으니 공명 선생 아시면 꾸중이나 안 하실지”(적벽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신재효가 서술자의 목소리에 자신의 비판적 목소리를 실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향단이 나가더니 다담같이 차린단 말 이면에 당찮것다.”(동창춘향가), “토끼가 나올 적에 이비 삼려 보단 말은 아마도 망발인게 짐승은 짐승끼리 사람 말을 빌려다가 서로 문답하려니와 사람이야 짐승 보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토별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신재효는 작중 상황 또는 공연 상황에 개입하기도 한다. “양반의 사랑가라 사설이 유식하여 우슴집이 적다 하고 진멋진 도련님이 육담 장난으로 너름새 해가며 판사귐를 하는데 이런 야단이 없어”(동창춘향가), “흥보댁이 할 수 없어 죽기로 자처하고 복 못 탄 신세 자탄 진양조로 섧게 울 제 맛있는 사람들은 귀에서도 눈물 난다.”(박타령)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작가 또는 서술자의 작중 개입은 신재효 사설의 특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의 개작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로는 신재효가 개작을 통해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것이 대표적이고, 부정적 평가로는 신재효가 개작을 통해 판소리 사설의 민중적 성격을 제거하고 중세적 질서를 옹호하는 이념을 강화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합리성의 추구는 이면에 맞게 시설을 개작한 것에서 두드러지며, 중세적 이념의 강화는 주인공의 행위를 도덕적 당위로 견인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그런데 신재효의 사설에는 합리성이 일관되게 지배적이지 않으며 또한 평민적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이 속한 향리 계층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추가하는가 하면, 요호부민(饒戶富民)을 옹호하는 내용을 반영하기도 하여 일률적으로 그의 개작을 평가하기 힘들다.

판소리 단가 및 기타 창작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 정리와 개작 외에 다양한 시가(詩歌)를 창작하거나 개작 또는 수집했다. <오섬가(烏蟾歌)>, <광대가(廣大歌)>, <허두가(虛頭歌)>, <치산가(治産歌)>, <성조가(成造歌)>, <단잡가(短雜歌)>, <도리화가(桃李花歌)>, <권유가(勸遊歌)>, <방아타령>, <명당축원(明堂祝願)>, <갈처사십보가(葛處士十步歌)>, <어부사(漁父詞)>, <호남가(湖南歌)>, <구구가(九九歌)>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은 장르가 단일하지 않아 판소리 단가(短歌), 가사(歌辭), 잡가(雜歌) 등이 혼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섬가>처럼 판소리 단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단형 판소리에 가까운 새로운 양식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오섬가>는 까마귀와 두꺼비가 사랑과 슬픔을 주제로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대 중국의 사례와 함께 춘향가와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및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광대가(廣大歌)>는 신재효가 자신의 판소리 이론과 역대 명창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 것이다. 「허두가」는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판소리 창자의 목을 고르고 소리판의 분위를 잡는 단가(短歌)들로 구성된 것으로 <고고천변(皐皐天邊)>, <새타령>, <소상팔경(瀟湘八景)>, <궁장가(宮墻歌)>, <숭유가(崇儒歌)>, <태평가(太平歌)>, <북정가(北征歌)>, <효도가(孝道歌)>, <달거리>, <금화사가(金華寺歌)>, <역려가(逆旅歌)>, <역대가(歷代歌)>, <대관강산(大觀江山)> 등 모두 13편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작품별로 다양한 양식과 주제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어느 작품이 신재효의 창작이며, 어느 작품이 신재효의 개작이며, 어느 작품이 수집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치산가>는 향리 계층이면서 부자이기도 한 신재효의 경제 의식 및 사회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도리화가>는 1870년 작으로 신재효가 제자인 진채선에 대한 애정 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잡가>는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과 가람본 단잡가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합쳐 13편이다. 개별 작품의 길이와 내용이 다양한데, 이 속에 신재효의 집을 묘사한 노래와 신재효 자신을 소개한 노래, 그리고 서양 열강의 침략을 비판한 노래 등이 들어 있다. <명당축원>, <성조가>, <방아타령> 등은 경복궁 낙성 축하를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갈처사십보가>는 한 걸음에서 열 걸음까지 나아가며 노래하는 형식인데 중세적 가치관의 붕괴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자는 내용으로 동학사상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데 신재효의 창작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권유가>는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것이며, <어부사>는 기존의 어부사와 유사하며, <호남가>는 현재 단가로 불리는 <호남가>와 비슷하나 신재효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다.

판소리 이론 탐구와 비평 활동
신재효의 판소리 이론 탐구는 <광대가>에 집약되어 있다. <광대가>에서 신재효는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판소리의 4대 법례로 제시하고 또 역대 명창들의 특색을 비유의 방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이론 탐구는 정현석과 같은 당시 판소리 향유자들의 적극적인 향유 취향에 대응하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틀을 정립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신재효의 영향을 받은 김세종이 판소리 연행에서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원리와 너름새의 방법 등을 주장했는데 이 점에서 신재효의 이론 탐구와 비평 활동은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창자 교육과 후원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따르면 신재효가 활동하던 시기에 어떤 창자라도 신재효의 지침과 평가를 받지 않고는 명창의 반열에 들 수 없었다면서 이날치, 박만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진채선, 허금파 등이 신재효의 지침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재효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창자들에게 두루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신재효가 판소리 창자들을 모아 교육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정현석(鄭顯奭)의 『증동리신군서(贈桐里申君序)』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신재효는 판소리 창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창자들에게 사설의 뜻을 가르치거나 비속한 표현을 고쳐서 익히게 하는 등의 교육을 했다. 정현석은 신재효에게 배운 이경태(李慶泰)의 창을 들어보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는 신재효에게 사설 교육과 음악 교육과 관련된 주문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재효의 판소리 교육 방향이 상층의 판소리 향유자의 취향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창자 교육에서 교사 역할을 한 창자로는 김세종이 알려져 있으며, 신재효의 교육에 의해 진채선과 허금파와 같은 여류 명창이 배출된 것은 특기할 사항이다.

신재효가 정리 및 개작한 판소리 사설은 창을 전제로 한 것들이지만 신재효 자신이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재효바디의 판소리 마당이나 신재효의 더늠이 전승되지 않는다. 또 신재효가 벌교의 김문옥과 고창의 홍두평으로 하여금 자신이 정리 및 개작한 판소리 사설과 자신이 지은 단가의 창을 짜게 해서 진채선에게 부르게 했다는 정보가 조사된 바 있으나 그 창본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북 김제의 창자 김이수(金二洙)가 신재효의 사설을 창으로 부른다고 하나 그 창법은 이날치 계통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다른 창자들에게 널리 전파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신재효가 정리 및 개작을 한 사설에 상응하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으로 짜인 창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신재효의 사설은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과 단가들이 필사본으로 집대성된 것은 『신오위장본집(申五衛將本集)』(6책)으로 서울대학교 가람문고로 소장되어 있다. 개인 소장의 『동리유집초(桐里遺集抄)』에는 <오섬가>, <토별가> 및 <허두가>가 필사되어 있다. 고창판소리박물관에는 심청가(신씨가장본), 적벽가(성두본), 적벽가(신씨가장본), 토별가(성두본), 박타령(신씨가장본), 변강쇠가(성두본) 등이 소장되어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과 단가 및 신재효 전기 자료들이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 의해 영인본으로 집대성되어 간행(1969)된 바 있으며, 강한영에 의해 사설들이 원문과 현대어 표기 및 교주 작업이 이루어진 바 있다.

특징 및 의의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신재효가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니면서 판소리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판소리 사설 정리·개작자 및 교육자의 역할을 한 것은 호남 지역 향리 계층의 문화적 관습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호남 지역 향리들의 판소리 창자 후원 및 관리가 이 지역에서 형성된 관습이라면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둘째, 그의 판소리 활동은 서울의 기술직 중인들이 한문 문학에 주력하고, 역시 서울의 서리 계층 출신인 김천택(金天澤), 김수장(金壽長), 박효관(朴孝寬), 안민영(安玟英) 등이 시조 창작에 주력한 것과 비교하여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즉 중인 계층의 다양한 문화적 동향 속에서 고창을 기반으로 한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지역과 예술 장르 두 측면에서 분명한 독자성을 갖는 것이다. 셋째, 그가 정리·개작한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에 잘 드러나듯이 그의 판소리 활동은 복합적 의식의 산물인 것이 특징이다. 그가 판소리 사설에 드러난 의식의 경우 어느 하나로 그 주된 방향을 단정하기 힘들 정도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옹호, 평민 의식의 긍정, 자신이 속한 향리 집단에 대한 비판 의식, 요호부민에 대한 동정 등등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표현의 측면에서도 창으로 구현하기 힘들 정도의 한문 투에서부터 유랑 연예인들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전아한 표현에서 외설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미적 지향에서도 비장과 골계 그리고 기괴미 등을 적극 추구하고 있다. 신재효 사설의 이러한 다양한 의식과 표현 방식 및 미적 지향의 공존과 복합은 다른 판소리 사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신재효의 판소리 활동은 여러 모로 판소리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가 정리·개작한 여섯마당은 비록 열두마당 전부는 아니지만 개인에 의한 최초의 판소리 사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창자가 아닌 인물의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작업은 이후 이해조의 『옥중화(獄中花)』, 『강상련(江上蓮)』, 『연의각』 등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둘째, 그가 정리·개작한 사설들은 연행 현장에서 창으로 불리고 또 전승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는 후대 명창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남창춘향가』의 서두 부분이 김창환(金昌煥), 정광수, 김소희(金素姬) 등에 의해 수용되었고, 임방울의 유명한 더늠이 된 <쑥대머리>의 사설 역시 『남창춘향가』에서 온 것이다. 셋째, 그가 정리·개작한 판소리 사설 여섯마당은 판소리 사설의 역사적 변이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 창본과 판소리계 소설의 성립 연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은 비교적 그 정리·개작 연대가 분명하므로 비교의 방법으로 여러 판소리 창본과 판소리계 소설의 성립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넷째, 그의 판소리 이론 정립과 비평 활동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판소리가 판소리 비평 활동과 이론적 탐구를 필요로 할 만큼 성장했음을 말하며, 신재효가 그러한 필요에 선구적으로 부응했음을 뜻한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신재효와 같은 시기에 정춘풍이 판소리 비평으로 신재효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으니 이 시기에 판소리 비평 활동이 판소리계 내부에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그의 판소리 창자 교육과 후원 역시 판소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판소리 후원은 신재효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닌 인물이 교육까지 담당한 것은 신재효가 처음이다. 여섯째, 신재효가 진채선을 비롯한 여류 판소리 창자들을 교육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기생이 판소리 창자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진채선 이전에 판소리를 부른 기생이 있었음은 안민영의 『금옥총부(金玉叢部)』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기생들을 판소리 창자로 교육한 것은 신재효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여성 판소리 창자들이 대거 등장한 점에 비추어 보면 신재효의 여성 창자 교육은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신재효는 독자적인 비평 의식에 입각하여 판소리 사설을 정리 개작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였고 판소리 창자들을 교육하고 후원하였다. 신재효의 이러한 활동과 성과들은 19세기 후반기의 판소리 창자, 향유자, 후원자 등으로 구성된 판소리계의 동향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이자 그 자체가 판소리사에서 길이 기억해야 할 성취이다.

참고문헌

申五衛將本集, 19세기 전라도 고창의 향리세계와 신재효(이훈상, 고문서연구26, 한국고문서학회, 2005), 신재효에 대한 평가(김대행 외,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6), 신재효 연구(서종문·정병헌 편, 태학사, 1997), 신재효 판소리 사설의 연구(정병헌, 평민사, 1986),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강한영 교주, 민중서관, 1971), 신재효 판소리 전집(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세대학교출판부, 1969), 판소리 사설 연구(서종문, 형설출판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