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가(短歌)

단가

한자명

短歌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권순회(權純會)

정의

판소리마당을 시작하기 전에 창자(唱者)가 목을 풀고 소리판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부르는 짧은 노래.

개관

단가(短歌)는 본래 판소리 도창(導唱)의 기능으로 불렸지만 단가만의 독특한 미학으로 인해 독립된 창곡(唱曲)으로 가창된 경우도 많았다. 단가의 이칭으로는 ‘영산(靈山)’과 ‘허두가(虛頭歌)’가 있다. ‘영산’은 19세기 후반까지 현행 단가를 지칭하는 보편적인 명칭이었다.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제원창선(題遠昌扇)」(1750), 신위(申緯)의 「관극절구(觀劇絶句)」(1826),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戲)」(1843), 유만공(柳晩恭)의 「세시풍요(歲時風謠)」(1843), 이유원(李裕元)의 「영산선성(靈山先聲)」,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 등에서 그 용례가 확인된다. ‘허두가’라는 명칭은 판소리 도창으로서의 기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에서 처음으로 용례가 확인되는데, 「허두가」라는 제목 하에 당시에 불리던 단가 13편을 수록하였다. ‘초두가(初頭歌)’는 ‘허두가’의 이칭이다. 단가는 본래 시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나 20세기 초에는 시조뿐만 아니라 판소리 도창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쓰였다.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 처음 그 용례가 확인되는데, 단가 항목에 <환산별곡(還山別曲)>을 한역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1901년에 필사된 여창 가집 『시가요곡(詩歌謠曲)』에도 「단가별조」라는 명칭이 쓰인 것으로 보아 단가라는 명칭은 19세기 말부터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판소리 도창이 아닌 독자적인 창곡으로 불리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단가라는 명칭이 보다 널리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

단가는 보통 평우조(平羽調) 선율에 중모리장단으로 부른다. 대체로 18세기 후반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 열두마당이 확립되고 우조(羽調) 등 다양한 악곡이 파생되면서 창자가 본 마당을 부르기 전에 목을 고르는 노래의 필요성이 대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형성기를 거쳐 19세기 들어서는 단가가 본격적으로 연창되기 시작한다. 선율과 창법이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창들의 더늠도 등장한다. 송흥록(宋興祿)은 <천봉만학가(千峯萬壑歌)>, 정춘풍(鄭春風)은 <소상팔경(瀟湘八景)>, 염계달(廉季達)은 <백구타령(白鷗打令)>을 더늠으로 남기고 있다.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양상은 당시 판소리를 애호하던 양반 좌상객들이 단가를 듣고 그 감동을 한시로 표현한 작품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관우희」와 「영산선성」이 그것이다. 「관우희」에는 3연부터 8연까지 단가의 연창 장면을, 9연에서 25연까지 판소리 열두마당을 공연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에 단가가 소리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간파할 수 있다. 「영산선성」은 단가만을 대상으로 지어진 시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가의 내용, 소리의 특징, 소리판의 분위기 등 단가의 연창 장면이 오장(五章)에 걸쳐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당시 판소리를 애호하던 양반 좌상객들이 단가를 단순히 목을 푸는 노래로만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심미성을 가진 노래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증거이다.

이들과 함께 신재효와 같이 판소리를 유달리 애호하고 후원하던 전주 관아의 이속층(吏屬層)들의 활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소리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이들은 단가를 애호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단가를 직접 창작하여 자신이 좋아하거나 후원하던 광대에게 주기도 했다. 그 가운데 신재효는 자신이 직접 짓거나 정리한 단가 15편을 남기고 있다. 한편 중인 부호층이 주도하던 조선 후기 서울의 유흥 공간에서 단가는 주로 유흥적 분위기에 걸맞는 독자적 심미성을 띤 창곡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단가의 중요한 기능적 변화가 초래되는 바, 판소리 도창으로서 뿐만 아니라 독자적 심미성을 띤 창곡으로도 향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로 이어진다. 사설이 확대되고 독자적 창곡으로 불리는 예가 대폭 증가하였다. 1910년대 간행된 대부분의 잡가집에 단가는 가곡, 시조 가사, 잡가와 함께 독자적인 가창 장르로 수록되어 있다. 극장에서 판소리의 부분창과 같이 단가를 불렀으며,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레터토리가 형성되었다. 박기홍(朴基洪)이 <대관강산(大觀江山)>, 송만갑(宋萬甲)이 <진국명산(鎭國名山>, 정정렬(丁貞烈)이 <적벽부(赤壁賦)>, 김창룡(金昌龍)이 <장부한(丈夫恨)>, 김정문(金正文)이 <홍문연가(鴻門宴歌)>, 임방울(林芳蔚)이 <호남가(湖南歌)>, 김녹주(金綠珠)가 <편시춘(片時春)>을 잘 불렀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유성기 음반으로 발매되어 상품으로 유통되었다. 1945년 이전에 음반으로 발매된 단가는 238곡이었다. 이는 음반으로 발매된 전통 가요 가운데 대략 10%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이처럼 단가가 대거 음반으로 발매되었던 이유는 대중들의 음악적 수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단가는 판소리 창자뿐만 아니라 가야금이나 잡가 명인도 불렀다. 박팔괘(朴八卦), 심상건(沈相健), 강태홍(姜太弘), 한성기(韓成基), 오태석(吳太石)과 같은 가야금 명인들이 가야금병창으로 단가를 많이 불렀다. 잡가(雜歌) 명창 박춘재(朴春載)의 소리만 모아 놓은 『증보신구시행잡가(增補新舊時行雜歌)』(1916)에는 <소상팔경>과 <불수빈(不須嚬)>이 「단가」와 「단가별조」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악조가 변화되어 평우조가 아닌 평계면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한 가야금병창이나 장고 장단으로 단가를 부르는 경우도 흔했다.

현전하는 단가 사설은 대략 60편 내외이다. 이 가운데 <강상풍월(江上風月)>, <고고천변(皐皐天邊)>, <달거리>, <대관강산>, <불수빈>, <소상팔경>, <죽장망혜>, <진국명산>, <편시춘>, <새타령> 등이 널리 불렸다. 사설은 강호에서의 풍류와 흥취, 삶의 유한성에 대한 탄식을 노래한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유교 이념, 격양가, 지명가사 등 교술적인 내용도 있다. 사설에 투영된 세계관은 다분히 낙천적이다. 강호에서의 흥취와 풍류를 통해 인생무상과 허무를 낙천적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러한 낙천적 의식은 교술적 내용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텍스트로서의 단가의 창조성은 극히 미약하다. 창작된 사설은 의외로 적고 대부분 다른 가창 장르의 사설을 차용하였다. 가사 기원형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이 외에 판소리 사설이나 사설시조에서 차용한 작품도 있는데, 이들은 대개 강호의 흥취나 인생무상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사설의 진술 방식은 대개 평이한 가사체이다. 연의 구분이 없고 후렴구나 조흥구가 쓰이지 않으며 독특한 결사가 있다. 결사는 대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자.”, “태평성대에 아니 놀고 무엇 하리.” 등과 같은 상투적인 것들인데 앞에 펼쳐진 내용을 마무리하고 동시에 소리판의 흥을 돋우어 앞으로 펼쳐질 판소리 본마당을 여는 기능을 담당한다.

특징 및 의의

단가의 본래적 기능은 판소리마당을 부르기 전에 목을 풀고 소리판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 본 마당과 구분되는 미학적 특성으로 인해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독자적인 창곡으로도 향유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에는 개별 시가 갈래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고 잡가 등 다른 가창 장르와 함께 널리 향유되었다. 따라서 단가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시가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갈래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가란 무엇이냐(판소리 다섯마당, 뿌리깊은나무 편, 한국 브리태니커회사, 1982), 단가의 사적 전개와 문학적 특성 연구(권순회,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단가집성(김진영·이기형 교주, 월인, 2002), 목풀이 노래의 이름에 대하여(장석규, 문학과언어13, 문학과언어연구회, 1992), 영산과 단가(이혜구, 국어국문학22, 국어국문학회, 1960), 영산(단가) 재고(권오경, 한중인문학연구11, 한중인문학회, 2003), 판소리 단가의 연원과 광대의 가창 문화 연구(손태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판소리 허두가의 성격과 기능(이원수, 한국판소리·고전문학연구, 아세아문화사, 1983).

단가

단가
한자명

短歌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권순회(權純會)

정의

판소리 본 마당을 시작하기 전에 창자(唱者)가 목을 풀고 소리판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부르는 짧은 노래.

개관

단가(短歌)는 본래 판소리 도창(導唱)의 기능으로 불렸지만 단가만의 독특한 미학으로 인해 독립된 창곡(唱曲)으로 가창된 경우도 많았다. 단가의 이칭으로는 ‘영산(靈山)’과 ‘허두가(虛頭歌)’가 있다. ‘영산’은 19세기 후반까지 현행 단가를 지칭하는 보편적인 명칭이었다.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제원창선(題遠昌扇)」(1750), 신위(申緯)의 「관극절구(觀劇絶句)」(1826),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戲)」(1843), 유만공(柳晩恭)의 「세시풍요(歲時風謠)」(1843), 이유원(李裕元)의 「영산선성(靈山先聲)」,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 등에서 그 용례가 확인된다. ‘허두가’라는 명칭은 판소리 도창으로서의 기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에서 처음으로 용례가 확인되는데, 「허두가」라는 제목 하에 당시에 불리던 단가 13편을 수록하였다. ‘초두가(初頭歌)’는 ‘허두가’의 이칭이다. 단가는 본래 시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나 20세기 초에는 시조뿐만 아니라 판소리 도창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쓰였다.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 처음 그 용례가 확인되는데, 단가 항목에 <환산별곡(還山別曲)>을 한역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1901년에 필사된 여창 가집 『시가요곡(詩歌謠曲)』에도 「단가별조」라는 명칭이 쓰인 것으로 보아 단가라는 명칭은 19세기 말부터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판소리 도창이 아닌 독자적인 창곡으로 불리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단가라는 명칭이 보다 널리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

단가는 보통 평우조(平羽調) 선율에 중모리장단으로 부른다. 대체로 18세기 후반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 열두마당이 확립되고 우조(羽調) 등 다양한 악곡이 파생되면서 창자가 본 마당을 부르기 전에 목을 고르는 노래의 필요성이 대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형성기를 거쳐 19세기 들어서는 단가가 본격적으로 연창되기 시작한다. 선율과 창법이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창들의 더늠도 등장한다. 송흥록(宋興祿)은 <천봉만학가(千峯萬壑歌)>, 정춘풍(鄭春風)은 <소상팔경(瀟湘八景)>, 염계달(廉季達)은 <백구타령(白鷗打令)>을 더늠으로 남기고 있다.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양상은 당시 판소리를 애호하던 양반 좌상객들이 단가를 듣고 그 감동을 한시로 표현한 작품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관우희」와 「영산선성」이 그것이다. 「관우희」에는 3연부터 8연까지 단가의 연창 장면을, 9연에서 25연까지 판소리 열두마당을 공연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에 단가가 소리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간파할 수 있다. 「영산선성」은 단가만을 대상으로 지어진 시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가의 내용, 소리의 특징, 소리판의 분위기 등 단가의 연창 장면이 오장(五章)에 걸쳐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당시 판소리를 애호하던 양반 좌상객들이 단가를 단순히 목을 푸는 노래로만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심미성을 가진 노래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증거이다.

이들과 함께 신재효와 같이 판소리를 유달리 애호하고 후원하던 전주 관아의 이속층(吏屬層)들의 활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소리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이들은 단가를 애호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단가를 직접 창작하여 자신이 좋아하거나 후원하던 광대에게 주기도 했다. 그 가운데 신재효는 자신이 직접 짓거나 정리한 단가 15편을 남기고 있다. 한편 중인 부호층이 주도하던 조선 후기 서울의 유흥 공간에서 단가는 주로 유흥적 분위기에 걸맞는 독자적 심미성을 띤 창곡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단가의 중요한 기능적 변화가 초래되는 바, 판소리 도창으로서 뿐만 아니라 독자적 심미성을 띤 창곡으로도 향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로 이어진다. 사설이 확대되고 독자적 창곡으로 불리는 예가 대폭 증가하였다. 1910년대 간행된 대부분의 잡가집에 단가는 가곡, 시조 가사, 잡가와 함께 독자적인 가창 장르로 수록되어 있다. 극장에서 판소리의 부분창과 같이 단가를 불렀으며,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레터토리가 형성되었다. 박기홍(朴基洪)이 <대관강산(大觀江山)>, 송만갑(宋萬甲)이 <진국명산(鎭國名山>, 정정렬(丁貞烈)이 <적벽부(赤壁賦)>, 김창룡(金昌龍)이 <장부한(丈夫恨)>, 김정문(金正文)이 <홍문연가(鴻門宴歌)>, 임방울(林芳蔚)이 <호남가(湖南歌)>, 김녹주(金綠珠)가 <편시춘(片時春)>을 잘 불렀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유성기 음반으로 발매되어 상품으로 유통되었다. 1945년 이전에 음반으로 발매된 단가는 238곡이었다. 이는 음반으로 발매된 전통 가요 가운데 대략 10%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이처럼 단가가 대거 음반으로 발매되었던 이유는 대중들의 음악적 수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단가는 판소리 창자뿐만 아니라 가야금이나 잡가 명인도 불렀다. 박팔괘(朴八卦), 심상건(沈相健), 강태홍(姜太弘), 한성기(韓成基), 오태석(吳太石)과 같은 가야금 명인들이 가야금병창으로 단가를 많이 불렀다. 잡가(雜歌) 명창 박춘재(朴春載)의 소리만 모아 놓은 『증보신구시행잡가(增補新舊時行雜歌)』(1916)에는 <소상팔경>과 <불수빈(不須嚬)>이 「단가」와 「단가별조」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악조가 변화되어 평우조가 아닌 평계면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한 가야금병창이나 장고 장단으로 단가를 부르는 경우도 흔했다.

현전하는 단가 사설은 대략 60편 내외이다. 이 가운데 <강상풍월(江上風月)>, <고고천변(皐皐天邊)>, <달거리>, <대관강산>, <불수빈>, <소상팔경>, <죽장망혜>, <진국명산>, <편시춘>, <새타령> 등이 널리 불렸다. 사설은 강호에서의 풍류와 흥취, 삶의 유한성에 대한 탄식을 노래한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유교 이념, 격양가, 지명가사 등 교술적인 내용도 있다. 사설에 투영된 세계관은 다분히 낙천적이다. 강호에서의 흥취와 풍류를 통해 인생무상과 허무를 낙천적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러한 낙천적 의식은 교술적 내용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텍스트로서의 단가의 창조성은 극히 미약하다. 창작된 사설은 의외로 적고 대부분 다른 가창 장르의 사설을 차용하였다. 가사 기원형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이 외에 판소리 사설이나 사설시조에서 차용한 작품도 있는데, 이들은 대개 강호의 흥취나 인생무상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사설의 진술 방식은 대개 평이한 가사체이다. 연의 구분이 없고 후렴구나 조흥구가 쓰이지 않으며 독특한 결사가 있다. 결사는 대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자.”, “태평성대에 아니 놀고 무엇 하리.” 등과 같은 상투적인 것들인데 앞에 펼쳐진 내용을 마무리하고 동시에 소리판의 흥을 돋우어 앞으로 펼쳐질 판소리 본마당을 여는 기능을 담당한다.

특징 및 의의

단가의 본래적 기능은 판소리 본 마당을 부르기 전에 목을 풀고 소리판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 본 마당과 구분되는 미학적 특성으로 인해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독자적인 창곡으로도 향유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에는 개별 시가 갈래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고 잡가 등 다른 가창 장르와 함께 널리 향유되었다. 따라서 단가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시가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갈래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가란 무엇이냐(판소리 다섯마당, 뿌리깊은나무 편, 한국 브리태니커회사, 1982), 단가의 사적 전개와 문학적 특성 연구(권순회,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단가집성(김진영·이기형 교주, 월인, 2002), 목풀이 노래의 이름에 대하여(장석규, 문학과언어13, 문학과언어연구회, 1992), 영산과 단가(이혜구, 국어국문학22, 국어국문학회, 1960), 영산(단가) 재고(권오경, 한중인문학연구11, 한중인문학회, 2003), 판소리 단가의 연원과 광대의 가창 문화 연구(손태도,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판소리 허두가의 성격과 기능(이원수, 한국판소리·고전문학연구, 아세아문화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