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廣大)

광대

한자명

廣大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손태도(孫泰度)

정의

판소리에서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는 말.

내용

광대(廣大)가 본디 판소리 창자를 뜻한 말은 아니었다. 광대란 말은 원래 가면(假面)을 뜻하던 말이었다. 조선시대 국가기관이었던 사역원(司譯院)에서 만든 중국어 어휘 사전인 『역어유해(譯語類解)』(1690)에서 ‘假面◦광대’라 하여 ‘가면(假面)’을 우리말로는 ‘광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면과 같은 물건을 광대라고 하는 것은 “나례청의 잡상(雜像), 주지(注之), 광대(廣大) 등의 물품을 우변 나례청은 이미 이전에 쓰던 것으로 수리해 만들었는데”(『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8년 8월 20일),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사용할 주지(注之) 및 작은 주지 한 개, 평량자 50개, 절요마(折要馬), 광대(廣大) 등에 들어갈 채색”(「나례청등록」, 1626) 등의 기록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전남 낙안 읍성이나 진도 소포리 농악잡색들이 쓰는 가면을 역시 광대라고 하는 것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분명 가면을 광대라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사람을 광대라 한다.”(『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전영보’)라고 한 언급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사람도 광대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가면 자체를 광대라고 하다가 그 뜻이 다시 확대되어 가면을 쓰고 연희를 하는 사람까지도 광대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1930년대에 당시 연극학자였던 김재철은 ‘광대란 말은 원래 가면을 쓰고 연희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근래에는 줄타기 하는 사람이나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판소리 창자를 광대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무렵에는 ‘광대’라면 주로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가면을 뜻하던 말이 가면을 쓰고 연희를 하는 사람을 넘어, 가면을 쓰지 않는 줄타기꾼에도 쓰이고 심지어 1930년대 무렵에는 왜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게 되었을까?

적어도 고려 1040년(정종 6)에 가면을 광대라고 부른 것은 우리나라 궁궐에 들어온 중국의 나례(儺禮)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례란 것은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례신들을 앞세워 잡귀잡신들을 몰아내는 것인데, 그 대표적 나례신인 방상시[方相氏]는 그 가면의 크기가 1926년 순종황제 국장 때 만들어진 것의 경우 가로 76㎝, 세로 72㎝로 매우 컸다. 중국의 나례 의식과 함께 들어온 이 큰 가면들을 당시에는 ‘큰 것’이라고 하고, 적기로는 ‘광대(廣大. 넓을 광, 큰 대)’라 하였을 것이다. 가면의 다른 말인 ‘탈’도 역시 이 나례에서 나왔다. 나례 때 가면을 쓴 나례인들이 탈, 곧 잡귀잡신 계통의 것들을 몰아내기에, 그러한 ‘탈’을 몰아낼 때 사용하는 가면도 역시 탈이라 하게 된 것이다.

종래 가면에 대한 우리나라 고유의 말이 있었겠지만,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 때의 가면들이 너무 발달되어 있었기에, 이후 이 가면과 관계되는 말로 ‘광대’ 혹은 ‘탈’이란 나례 계통의 말이 쓰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광대를 쓰는 사람도 점차 ‘광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가면을 쓰면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양주별산대), ‘탈을 집에 두면 제사도 못 지낸다’(은율탈춤)라고 하여 실제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 평민들은 가면을 쓰기 꺼렸다. 그래서 강릉 관노가면극은 말 그대로 관노(官奴)에 의해, 하회탈놀이도 원래 풍산 류씨 집안의 노비들에 의해, 양주별산대도 주로 천민 신분의 무부(巫夫)들에 의해 놀아졌다. 이른바 천민들이나 가면들을 썼던 것이다. 여기서 ‘광대’란 것이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는 사람을 넘어 그러한 가면을 쓰는 부류의 사람들 곧 천민 계통의 일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까지 쓰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재철이 살았던 1930년대 무렵에는 가면극, 인형극 등을 하던 광대 신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줄타기나 판소리 쪽에 이들 광대 신분의 사람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남아 있어 당시에는 ‘광대’라면 줄타기 광대나 판소리 광대, 그 중에서도 판소리 광대를 주로 말하게 된 것이다.

판소리가 성립된 조선 후기 때도 마찬가지다. 양반들은 광대들의 여러 놀음들 중 판소리에 주로 관심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광대’라고 하면 그것은 곧 판소리 광대를 말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재효(申在孝)는 판소리 광대에 대한 노래를 그냥 <광대가(廣大歌)>라고 했다. 그러나 ‘광대’란 말은 이러한 판소리 광대를 가리키기에 앞서 ‘광대’ 신분의 사람을 가리켰다는 것을 항상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근대 무렵의 명창들은 “우리들은 전에 명창들을 보아도 상당한 집 자손들입니다. ‘광대’라고 천대받기는 참말 억울한 일입니다.”(이동백), “우리는 광대라 해서 뭇 사람들에게 멸시를 많이 당해 왔습니다.”(오태석)라고 말하고 했다.

이러한 광대 신분의 사람들에는 경기 이남의 무부(巫夫)·악공·광대들인 이른바 화랑이집단과 경기 이북의 악공·광대들인 이른바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있었다. 이 중 17~18세기에 종래의 재담소리를 넘어 판소리에까지 나아간 사람들은 멀리로는 신라 화랑(花郞)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경기 이남의 화랑이집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공연 문화의 성숙으로 종래의 일회적이고 웃음 일변도의 재담소리를 넘어 보다 지속적으로 향유할 만한 공연물이 요구될 때, 무당서사시인 서사무가에 비견될 수 있는 광대서사시인 판소리에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들은 화랑이, 곧 무부로 무당과 그러한 서사무가 문화를 오랫동안 공유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멀리로는 기생(妓生)의 아들로 기본적으로 무속과는 관계가 없었던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종래의 재담소리에 머물렀다. 오늘날에도 전승되는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타령>, <개타령> 등 서도 계통의 재담소리들은 이들 경기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에 의해 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이들 광대들은 하나의 신분 집단이었기에 시대를 내려올수록 계급내혼(階級內婚)을 통해 그 수가 많아져, 1836년 경기도에만 하더라도 이들의 수가 4만 명(경기도 창재 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에 이를 정도여서 전국적으로는 수십 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창우(倡優), 곧 광대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신분 해방 이후에도 종래 천민 신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오직 민속예능에만 종사하였기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 공연예술계에 남아 활동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원로 국악인들은 이러한 광대 집안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 사회에서 이들은 천시되어 일반 평민들과 같이 살지도 못했다. 이를테면, 경기 이남의 화랑이집단 사람들은 마을 앞 시냇가나 마을 뒤 산 밑 같은 일반 평민들이 사는 마을과 멀리 떨어져 살았고, 경기 이북 재인촌 사람들은 각 군(郡)마다 한두 개씩 있었던 재인촌 혹은 광대촌이라 불린 특수마을들에서 자기들끼리만 살았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앞에서는 광대란 말 자체를 쓸 수 없었다. 그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오히려 이들 광대 집안 계통의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전통 국악인 집안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광대란 말도 이제 전문적인 공연예술인을 뜻하는 긍정적인 말이 되어, 이제는 그들 앞에서도 광대란 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특정 계급의 사람들은 특정 종류의 노래를 불렀던 신분 제도가 유지된 조선시대 말까지도 판소리는 광대들이 부른 소리였다. 그래서 역대 판소리 창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1940)에서는 광대 출신이 아닌 소리꾼들에 대해서는 권삼득(비가비), 정춘풍(비가비) 등처럼 반드시 ‘비가비’란 것을 명시했다. 비가비는 ‘비갑(非甲)이’ 곧 ‘광대 신분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란 말이었다.

특징 및 의의

신분 제도가 유지되었던 조선시대 말까지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민속예능을 담당해 왔던 집단이었고, 이들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속예능사의 중심이었다. 이들 광대들에 의해 우리나라의 주요한 민속예능들이 대부분 성립, 발전,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근대 무렵까지도 민속예능을 공식적으로 담당한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광대라는 수십 만 명의 전문적 민속예능 집단의 사람들이 있었던 나라는 사실상 우리나라밖에 없었다 할 것이다.

참고문헌

광대란 무엇인가(송석하, 조광 2월호, 1936), 광대의 가창 문화(손태도, 집문당, 2003), 조선연극사(김재철, 조선어문학회, 1933), 조선창극사(정노식, 조선일보사출판부, 1940),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광대

광대
한자명

廣大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판소리 > 용어

집필자 손태도(孫泰度)

정의

판소리에서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는 말.

내용

광대(廣大)가 본디 판소리 창자를 뜻한 말은 아니었다. 광대란 말은 원래 가면(假面)을 뜻하던 말이었다. 조선시대 국가기관이었던 사역원(司譯院)에서 만든 중국어 어휘 사전인 『역어유해(譯語類解)』(1690)에서 ‘假面◦광대’라 하여 ‘가면(假面)’을 우리말로는 ‘광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면과 같은 물건을 광대라고 하는 것은 “나례청의 잡상(雜像), 주지(注之), 광대(廣大) 등의 물품을 우변 나례청은 이미 이전에 쓰던 것으로 수리해 만들었는데”(『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8년 8월 20일),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사용할 주지(注之) 및 작은 주지 한 개, 평량자 50개, 절요마(折要馬), 광대(廣大) 등에 들어갈 채색”(「나례청등록」, 1626) 등의 기록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전남 낙안 읍성이나 진도 소포리 농악의 잡색들이 쓰는 가면을 역시 광대라고 하는 것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분명 가면을 광대라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사람을 광대라 한다.”(『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전영보’)라고 한 언급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사람도 광대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가면 자체를 광대라고 하다가 그 뜻이 다시 확대되어 가면을 쓰고 연희를 하는 사람까지도 광대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1930년대에 당시 연극학자였던 김재철은 ‘광대란 말은 원래 가면을 쓰고 연희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근래에는 줄타기 하는 사람이나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판소리 창자를 광대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무렵에는 ‘광대’라면 주로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가면을 뜻하던 말이 가면을 쓰고 연희를 하는 사람을 넘어, 가면을 쓰지 않는 줄타기꾼에도 쓰이고 심지어 1930년대 무렵에는 왜 판소리 창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게 되었을까?

적어도 고려 1040년(정종 6)에 가면을 광대라고 부른 것은 우리나라 궁궐에 들어온 중국의 나례(儺禮)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례란 것은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례신들을 앞세워 잡귀잡신들을 몰아내는 것인데, 그 대표적 나례신인 방상시[方相氏]는 그 가면의 크기가 1926년 순종황제 국장 때 만들어진 것의 경우 가로 76㎝, 세로 72㎝로 매우 컸다. 중국의 나례 의식과 함께 들어온 이 큰 가면들을 당시에는 ‘큰 것’이라고 하고, 적기로는 ‘광대(廣大. 넓을 광, 큰 대)’라 하였을 것이다. 가면의 다른 말인 ‘탈’도 역시 이 나례에서 나왔다. 나례 때 가면을 쓴 나례인들이 탈, 곧 잡귀잡신 계통의 것들을 몰아내기에, 그러한 ‘탈’을 몰아낼 때 사용하는 가면도 역시 탈이라 하게 된 것이다.

종래 가면에 대한 우리나라 고유의 말이 있었겠지만,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 때의 가면들이 너무 발달되어 있었기에, 이후 이 가면과 관계되는 말로 ‘광대’ 혹은 ‘탈’이란 나례 계통의 말이 쓰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광대를 쓰는 사람도 점차 ‘광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가면을 쓰면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양주별산대), ‘탈을 집에 두면 제사도 못 지낸다’(은율탈춤)라고 하여 실제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 평민들은 가면을 쓰기 꺼렸다. 그래서 강릉 관노가면극은 말 그대로 관노(官奴)에 의해, 하회탈놀이도 원래 풍산 류씨 집안의 노비들에 의해, 양주별산대도 주로 천민 신분의 무부(巫夫)들에 의해 놀아졌다. 이른바 천민들이나 가면들을 썼던 것이다. 여기서 ‘광대’란 것이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는 사람을 넘어 그러한 가면을 쓰는 부류의 사람들 곧 천민 계통의 일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까지 쓰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재철이 살았던 1930년대 무렵에는 가면극, 인형극 등을 하던 광대 신분의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줄타기나 판소리 쪽에 이들 광대 신분의 사람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남아 있어 당시에는 ‘광대’라면 줄타기 광대나 판소리 광대, 그 중에서도 판소리 광대를 주로 말하게 된 것이다.

판소리가 성립된 조선 후기 때도 마찬가지다. 양반들은 광대들의 여러 놀음들 중 판소리에 주로 관심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광대’라고 하면 그것은 곧 판소리 광대를 말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재효(申在孝)는 판소리 광대에 대한 노래를 그냥 <광대가(廣大歌)>라고 했다. 그러나 ‘광대’란 말은 이러한 판소리 광대를 가리키기에 앞서 ‘광대’ 신분의 사람을 가리켰다는 것을 항상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근대 무렵의 명창들은 “우리들은 전에 명창들을 보아도 상당한 집 자손들입니다. ‘광대’라고 천대받기는 참말 억울한 일입니다.”(이동백), “우리는 광대라 해서 뭇 사람들에게 멸시를 많이 당해 왔습니다.”(오태석)라고 말하고 했다.

이러한 광대 신분의 사람들에는 경기 이남의 무부(巫夫)·악공·광대들인 이른바 화랑이집단과 경기 이북의 악공·광대들인 이른바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있었다. 이 중 17~18세기에 종래의 재담소리를 넘어 판소리에까지 나아간 사람들은 멀리로는 신라 화랑(花郞)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경기 이남의 화랑이집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공연 문화의 성숙으로 종래의 일회적이고 웃음 일변도의 재담소리를 넘어 보다 지속적으로 향유할 만한 공연물이 요구될 때, 무당서사시인 서사무가에 비견될 수 있는 광대서사시인 판소리에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들은 화랑이, 곧 무부로 무당과 그러한 서사무가 문화를 오랫동안 공유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멀리로는 기생(妓生)의 아들로 기본적으로 무속과는 관계가 없었던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종래의 재담소리에 머물렀다. 오늘날에도 전승되는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타령>, <개타령> 등 서도 계통의 재담소리들은 이들 경기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에 의해 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이들 광대들은 하나의 신분 집단이었기에 시대를 내려올수록 계급내혼(階級內婚)을 통해 그 수가 많아져, 1836년 경기도에만 하더라도 이들의 수가 4만 명(경기도 창재 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에 이를 정도여서 전국적으로는 수십 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창우(倡優), 곧 광대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신분 해방 이후에도 종래 천민 신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오직 민속예능에만 종사하였기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 공연예술계에 남아 활동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원로 국악인들은 이러한 광대 집안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 사회에서 이들은 천시되어 일반 평민들과 같이 살지도 못했다. 이를테면, 경기 이남의 화랑이집단 사람들은 마을 앞 시냇가나 마을 뒤 산 밑 같은 일반 평민들이 사는 마을과 멀리 떨어져 살았고, 경기 이북 재인촌 사람들은 각 군(郡)마다 한두 개씩 있었던 재인촌 혹은 광대촌이라 불린 특수마을들에서 자기들끼리만 살았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앞에서는 광대란 말 자체를 쓸 수 없었다. 그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오히려 이들 광대 집안 계통의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전통 국악인 집안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광대란 말도 이제 전문적인 공연예술인을 뜻하는 긍정적인 말이 되어, 이제는 그들 앞에서도 광대란 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특정 계급의 사람들은 특정 종류의 노래를 불렀던 신분 제도가 유지된 조선시대 말까지도 판소리는 광대들이 부른 소리였다. 그래서 역대 판소리 창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1940)에서는 광대 출신이 아닌 소리꾼들에 대해서는 권삼득(비가비), 정춘풍(비가비) 등처럼 반드시 ‘비가비’란 것을 명시했다. 비가비는 ‘비갑(非甲)이’ 곧 ‘광대 신분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란 말이었다.

특징 및 의의

신분 제도가 유지되었던 조선시대 말까지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민속예능을 담당해 왔던 집단이었고, 이들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속예능사의 중심이었다. 이들 광대들에 의해 우리나라의 주요한 민속예능들이 대부분 성립, 발전,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근대 무렵까지도 민속예능을 공식적으로 담당한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광대라는 수십 만 명의 전문적 민속예능 집단의 사람들이 있었던 나라는 사실상 우리나라밖에 없었다 할 것이다.

참고문헌

광대란 무엇인가(송석하, 조광 2월호, 1936), 광대의 가창 문화(손태도, 집문당, 2003), 조선연극사(김재철, 조선어문학회, 1933), 조선창극사(정노식, 조선일보사출판부, 1940),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