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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에 대한 검색결과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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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 내용
解放村
해방촌解放村은 광복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와 월남민, 6·25전쟁 이후 피란민과 이재민이 정착하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의 해방촌은 용산구 용산동에 위치하는마을로, 남산의 서남부 구릉지를 사람들이 임시 거처를 사용하면서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광복 후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해방동으로 불리었으나 대개 해방촌으로 불리었다.남산 기슭의 언덕에 새로 조성된 해방촌은 광복 이전까지 산림지역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사용되었다가 광복 후 미군정청이 관할하였다. 월남민들은 1946년경 당시 비어 있던 육군 관사를 집단 점거해서 살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군정은 이들 불법 체류민을 강제로 퇴거시켰고, 퇴거민들은 지금의 이태원동·용산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후 1960년대 해방촌은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로 이주한농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도심에서 인접한 곳에 정착한 주거 공간이었다.본래 해방촌은 귀국 동포 및 월남민을 주축으로 광복 후 조성된 마을이었다. 하지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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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 지역사례
解放村
현재 해방촌은 서울시 용산구와 구로구, 경기도 광명 지역의 일부 불량 주거지 및 공장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용산구에 위치한 해방촌은 행정구역상 용산 2가동으로, 용산동 4가까지 포함한다. 용산동 4가 중 미군기지가 있던 곳은 제외된다. 주한미군 용산기지는 이전 계획에 따라 2017년부터 미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기지로 이전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이래 군사 요충지로,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대가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용산동 2가 역시 미군부대 시설이 있던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해방촌 영역이다. 경기도 광명의 해방촌은 옥길동에 위치하며, 해방촌길을 따라 다수의 조립식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서울 구로구 해방촌은 온수동에 있었으며, 현재 이곳은 온수동연립주택 <> 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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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 참고문헌
解放村
도시지역의 형성 및 생태적과정에 관한 연구(이문웅,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6), 서울시 해방촌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도시재생(이나영 외, 한국도시지리학회지21, 한국도시지리학회, 2018),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권기봉, 알마, 2008), 월남인 마을 해방촌(용산2가동) 연구(이신철, 서울학연구14,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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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 특징 및 의의
解放村
해방촌은 한국의 근현대 이주민의 역사 장소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군 주둔, 광복 후 미군정의 관할과 월남민 정착, 산업화 시대의 농촌에서 상경한 이주민 정착,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 유입 등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장소이다. 해방촌에 정착한 사람들은 크게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1940~1950년대 광복 이후에는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과 6·25전쟁 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정착하였고, 1960~1970년에는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개발로 시골에서 상경한 이촌향도민이 정착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는 미군 등 외국인이 거주하며 다문화 주거지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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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 내용
板子村
판자촌板子村은 임시 거처를 위하여 판자, 천막, 목재 조각 등을 이용하여 지은 집들로 형성된 무허가 불량 주택지를 일컫는다. 기원은 조선시대 유랑민들이 도성 밖에 토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근대 무허가 불량 주택지는 일제강점기토막촌에서 광복과 6·25전쟁을 거쳐 월남민과 도시의 이재민이 구릉지, 공터, 천변 등에 주거 형태로 모여 살면서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등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들이 높은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구릉지, 공터 등에 토굴土窟이나 토막土幕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토막민으로 불렸다. 토막민은 대부분 빈곤한 행상, 일용 노동자 등 하층민 또는 빈민층이었다.1945년 광복 이후 해외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귀국하면서 주택난이 심하여졌다. 1946~1947년 2년에 걸쳐 월남한 피란민들 역시 도시로 몰려들면서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주하였다. 이들은 주로 미군이 남긴 목재 조각과 깡통 등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6·25전쟁이 끝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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