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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에 대한 검색결과 6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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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
歲畵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신년을 송축하기 위해 선물하던 그림과 풍속.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
세화
歲畵
신년을 송축하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던 그림.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
세화본향당본풀이
천도, 백줏도, 금상님이 제주특별자치도 구좌읍 세화리 본향당의 당신으로 좌정하게 된 내력을 담은 당본풀이.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신화 -
화
靴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관복에 착용한 목이 긴 신.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
세의
歲儀
세밑[除夕]에 친지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물건. 궤세(饋歲), 세궤(歲饋), 세찬(歲饌)이라고도 한다. 세찬은 세밑에 선사하는 물건, 혹은 세배 온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을 가리킨다. 세밑이 다가오면 설날 차례(茶禮)를 지내기 위해서 제수를 장만해야 하는 데다 정초에 식구들이 먹고 하객을 접대하려면 세찬을 넉넉하게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찬은살림살이의 정도에 따라 또는 차례를 지내는 집이나 안 지내는 집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으나 모두 흰떡을 장만했다.
한국세시풍속사전 > 겨울(冬) > 12월 >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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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배 - 정의
門排
제석(除夕) 때 한 해 동안의 질병과 재난 등을 막기 위해 나례(儺禮)를 행한 후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문간에 붙이는 그림이나 글씨. 주로 문짝에 붙이기 때문에 ‘문화(門畵)’라고도 하였으며, ‘세화(歲畵)’ 또는 ‘문배세화’라고도 하였다. 문배(門排)와 세화는 혼동될 수 있는데 세시기류의 문헌에는 대체로 문배는 제석 때 나례를 행하고 난 뒤 새벽에 문간에 붙이는 그림을 그리고 세화는 정초에 궁중에서 신년을 송축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반사(頒賜)하던 그림을 가리킨다.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
세화 - 변천 및 현황
歲畵
현전하는 문헌에서 세화풍습의 시작에 관해 언급한 구체적인 예는 아직까지 찾을 수 없고,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이른 기록은 고려말 이색(李穡)이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2 ‘세화십장생도찬(歲畵十長生圖讚)’에서 몸이 아파 왕으로부터 하사받은십장생도를 꺼내 보며 장수를 기원하고 성은에 감사하는 내용을 적고 있는데, 세화풍습의 존재와 ‘십장생’이라는 그림의 화제 그리고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송축용의 용도를 함축하고 있어 고려말 세화풍습의 존재 양상을 알려주는 예이다.조선시대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공적인 기록물들과 개인 문집류에 세화에 대한 기록이 꾸준히 보인다. 조선 초기 성현(成俔)이 『허백당집(虛白堂集)』에서 왕으로부터 ‘세화십장생(歲畵十長生)’과 ‘추응토박도(秋應兎搏圖)’를 하사 받았음을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세화의 제작과 금지에 대한 기사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나타난다. 『태종실록』 8년(1408) 11월 2일 병오(丙午)에 도화원에 명하여 국상(國喪)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
세화 - 개관
歲畵
세화歲畵를 주고받는 풍속의 기원에 관해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재앙을 막기 위해 문에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붙였던 문신門神과 더불어 연말 연초에 그림을 매개로 이루어진 벽사진경辟邪進慶을 위한 풍속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은 몸이 아파 왕으로부터 하사받은십장생도를 꺼내 보며 장수를 기원하고 성은에 감사하는 내용을 남겼는데(『목은시고』 권12), 현전하는 세화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공적인 기록물과 개인 문집류에서 ‘세화’의 제작과 주고받은 기록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세화는 궁궐에서 시작된 풍속으로 그림의 제작은도화서의 화원들이 맡았으며, 매년 필요한 양을 그려 내면 등급을 매겨 골라서 내용으로 하고, 나머지는 재상과 근신들에게 하사하였다(『중종실록』 5년(1510) 9월 29일). 세화 풍속은 조선 초기부터 관례적으로 이루어져, 조선 초기에 국상國喪 3년 동안에는 세화를 바치지 말라는 기사가 나오며(『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
세화 - 세화
歲畵
세화는 새해를 송축하는 의미로 주고받던 그림이므로 길상적 내용의 주제들이 주로 그려졌다. 또한 매년 화원들이 그려 낸 세화에 등급을 매겼으므로 화격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매년 많은 양이 반사를 목적으로 그려졌으나 현존하는 그림들 가운데 세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밝혀진 그림은 없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한 해 동안의 건강과 행복, 장수를 기원하곤 한다.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현존하는 수노인도를 비롯한 여러신선도와 십장생도 가운데도 세화 용도로 사용되었던 그림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년에 송축의 의미로 세화를 주고받는 것은 지금은 사라진 풍속이다.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
세화 - 내용
歲畵
세화로는 신선도, 모란도, 십장생도 등 다양한 화제가 그려졌다. 고려 말 이색이 받은 세화는 <십장생도>였으며, 조선 초 성현成俔, 1439~1504은 <십장생도>와 <추응토박도秋應兎搏圖>를 받았다. 조선 중기 정홍명鄭弘溟,1582~1650은 <신선도>를 세화로 받았던 기록을 남기고 있다(『기암집畸庵集』 권8 ‘희제세화戱題歲畵’). 조선 후기 양주익梁周翊, 1722~1802 역시 정조로부터 ‘남극노성도南極老星圖’ 두 폭과 용을 탄 신선그림 두 폭을 받고 감사의 글을 남겼다. 새해를 송축하는 선물용으로 하사하던 그림이므로 한 해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신선도>와 같은 길상적인 주제가 주로 그려졌으며, <신선도> 중에서 <수성노인도>가 가장 많이 그려졌고, 형태는 낱장보다는병풍으로 된 것들이 많았다. 세화는 조선 초부터 많은 양이 제작되었다. 중종 이전에는 세화가 매년 60장 정도 제작되었는데 중종 연간에는 수백 장에 달하는 세화가 제작되어 이를 감해야 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
세화 - 유래
歲畵
세화(歲畵)를 주고받는 풍속이 언제부터 행해졌는지 정확한 유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까지는 연말 연초 재앙을 막기 위해 문에 붙였던 문신(門神)과 연관된 연원을 가진 것으로 본다.문배(門排)는 제석(除夕)에 잡귀를 쫓고 새벽이 되면 대문에 문신상(門神像)을 붙여 잡귀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풍습으로 중국 남방의 농경적 무(巫)문화인나례(儺禮)와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나례풍습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문배와 더불어 세화풍습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전하는 문헌을 살펴보면, 문배와 세화는 대체로 구별해서 쓰이고 있고 그려지는 형상도 차이를 보여 세화의 유래에 관해서는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중종실록(中宗實錄)』 5년(1510) 9월 29일(壬午) 정언 민수천(閔壽千)은 궁중의 공예가 정밀하지 못함을 언급하면서, “세화는 세시에 미리 화사(畵師)로 하여금 각기 화초·인물·누각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아는 재상에게 명하여 그 우열을 상하 등급으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
세화 - 기타
歲畵
세화의 유래에 관해서는 많은 이설들이 있지만 모두 세화를 문신(門神)관 연계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세화와 문신이 동일한 유래를 가졌는지에 관한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 박미(朴彌)의 『분서집(汾西集)』 권1 ‘병자란후집구장병장기(丙子亂後集舊藏屛障記)」’에서 “일곱 번째는 열 폭 모란병풍이다. 지금 두 폭은 잃어버렸고 나머지도 점점 완연한 색채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도교의 초제(醮祭)시 해당 관서에서 옛 제도에 따라 나눠준 것이다. 또한 좀 작은 열 폭병풍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꽃과 새들을 그린 것으로 오유(烏有) 선생의 작품이다. 두 그림은 옛날부터 짝을 이뤄 하나가 되었다. 예조는 전적을 모으고 서사를 담당하는 곳이다. 녹봉의 등급을 매겨 우수한 자를 취하여 새해에 임금께 진상하니 세화라 한다. 또한 십장생이라 부르는 것도 있는데 모두 같은 것들이다.”고 하였다.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
세화 - 내용과 특징
歲畵
기록에 나와 있는 세화로 그려진 화제(畵題)는 주로 인물과 화훼·영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화제들을 보면 십장생도(十長生圖: 『세시풍요(歲時風謠)』에 거북과 학으로 나와 있으나 십장생도를 언급한 것으로 보임.)·모란도·추응토박도·신선도[현존 기록에 신선도 가운데는 ‘수성노인도(壽星老人圖)’ 예가 가장 많이 언급됨. 또는 신선으로 나옴.]·선녀·닭·범 등이 나온다. 그러나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어떤 그림이 세화로 반사되었던 것인지를 알 수 없어 구체적인 그림의 모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중기 정홍명(鄭弘溟)은 『기암집(畸庵集)』 권8 ‘희제세화(戱題歲畵)’에서 신선이가지를 쥐고 학을 탄 모습, 꽃을 들고 사슴을 탄 신선 등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함께 그림에 대한 감상까지 구체적으로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 양주익(梁周翊)은 정조로부터 ‘남극노성도(南極老星圖)’ 두 폭과 용을 탄 신선그림 두 폭을 받고 감사의 글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글에서도 학을 타고 내려오는 신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正月) > 1월 > 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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