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배(胸背)

한자명

胸背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은주(李恩珠)

정의

조선시대에 왕·왕세자·왕세손의 곤룡포융복, 군복, 그리고 관리들의 흑단령, 왕비 이하 내외명부의 예복에 부착하여 신분과 품계를 드러내던 원형 또는 방형의 장식물.

내용

흉배胸背는 15세기 이후 왕실 남녀와 공주·옹주, 남편인 의빈, 종친과 부인, 백관과 부인 등이 예복에 사용하던 일종의 신분 상징물이었다. 그 외에 공인工人의 관복이나 서민들의 혼례복에도 사용되었으나 이는 신분의 표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장식물로 사용된 것이다. 왕세자빈 이상의 왕실 인물들은 가슴과 등에 장식하는 흉배와 좌우 어깨의 견화肩花까지 네 장의 원형 보補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용보龍補’이다. 왕이 용보를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용흉배龍胷背 기록이 『세종실록世宗實錄』 권30, 1425년(세종 7) 11월 15일 기사에 보이기 때문에 이전부터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 권125, 1449년(세종 31) 9월 2일 기사를 보면 조선 초기 왕과 왕세자의 용보 정착 과정에 대한 전말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즉위 초 사조룡보를 사용하였다. 그 후 오조룡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1444년 황제가 오조룡보를 보내옴으로써 왕의 오조룡보가 정착되었다. 5년 후인 1449년에는 왕세자가 비로소 사조룡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왕의 오조룡보와 왕세자의 사조룡보 제도는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용보의 바탕 색상은 곤룡포의 색상과 같이 하였으므로 왕의 오조룡보는 대홍색 바탕의 용보를 사용하였고 아청색 곤룡포를 착용하는 왕세자는 아청색 바탕의 용보를 사용하였다.
한편 왕실 여성의 흉배·견화 제도는 네 차례에 걸쳐 문양의 종류가 변화하였다. 제1기(15세기 중반~17세기 전반)에는 적계흉배翟雞胷背(적흉배翟胸背·작흉배雀胸背)를 사용하였다. 왕비 흉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1603년(선조 36) 명나라에서 보낸 예물 목록에서 보인다. ‘연암화저사철채수적계보자단삼緣暗花紵絲綴綵繡翟雞補子’과 ‘녹암화저사철채수적계보자협단삼綠暗花紵絲綴綵繡翟雞補子夾團衫’이라는 기록이다. ‘연緣’은 ‘녹綠’의 오기로 보인다. 왕비에게 보낸 단삼용 흉배는 왕의 용문과는 달리 적계보자翟雞補子로 명시되어 있다. ‘적계翟雞’라는 문양은 1403년 하피문양霞帔紋樣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1450년의 배자문양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때는 왕과 왕세자의 흉배제도가 정비된 시기이므로 왕비는 적계흉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460년 빈씨嬪氏 집에 납징納徴한 예물 중에 금배견화대홍단자장삼金背肩花大紅段子長杉 기록이 보인다. 금흉배견화를 장식한 대홍단자장삼으로 짐작된다. 세자빈도 흉배·견화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흉배의 문양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왕세자가 1449년에 비로소 사조룡보를 사용하는 제도가 정착되었으므로 세자빈 역시 보補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며 1460년 세자빈의 흉배 문양은 왕비의 것과 같은 적계흉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의 왕실 여성 보에는 직조나 자수를 사용하였다.
제2기(17세기)에는 적보자翟補子를 사용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명나라에서 보낸 사여복 중 녹암화저사철수적보자겹단삼綠暗花紵絲綴繡翟補子夾團衫에서 ‘적보자’ 명칭이 확인된다.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仁穆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에 기록된 인목왕후의 습의에는 작견화흉배雀肩花胸排를 갖춘 적의的衣가 있다. ‘작雀’은 ‘적翟’으로 짐작된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적계문翟雞紋은 군왕비의 며느리인 장자부인長子夫人의 문양인 반면, 적문翟紋은 군왕비의 문양이었다. 왕실 여성의 흉배 문양의 등급이 초기의 장자부인 문양에서 군왕비 문양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자수와 기화起畫 등으로 제작한 적흉배와 견화를 사용하였다.
제3기(18세기)는 인조와 장렬왕후의 가례가 있던 1638년(인조 16)부터 1751년(영조 27)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반포 이전 시기에 해당된다. 직금 또는 자수로 제작한 원형 봉보鳳補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마지막 봉흉배 기록은 1750년경의 『상방정례尙方定例』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왕대비 이하 왕세자빈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봉흉배·견화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문鳳紋은 명나라의 친왕비급에서 사용하던 문양이다.
제4기(18세기 말 이후)는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가 반포된 1751년 이후부터 대한제국까지이다. 이때 비로소 왕실 여성들은 왕실 남성들과 동일한, 금수원룡보金繡圓龍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용문은 황후의 문양이므로 이 시기부터는 최고 등급의 보를 사용하게 된다. 왕비는 국왕과 같은 오조룡문五爪龍紋을, 왕세자빈은 왕세자와 같은 사조룡문四爪龍紋을 사용하였다. 왕세자빈 이상은 원형의 용보를 흉배·견화 네 장의 보를 사용하였고 왕세손빈은 방형의 삼조룡三爪龍 흉배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왕의 후궁은 이전 시기에 왕실 여성이 사용하던 원형의 봉보를 사용하였고 공주와 옹주는 방형 봉흉배를 사용하였다. 원형과 방형, 용과 봉으로 왕실 여성의 신분을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실과 반가의 구별은 문양에도 있었으나 금사金絲 사용으로 철저하게 신분을 구별하였다.

특징 및 의의

한편 문무관의 흉배 사용에 대한 논의는 세종 대부터 있었으나 1454년(단종 2)에 비로소 정3품 당상관 이상만 단령 관복에 사용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세조 대 이후 단령 중 흑단령에만 흉배를 다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왕실과는 달리, 방형 흉배만을 사용하였는데 명나라 문무관 흉배제도에서 이등을 낮추는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을 적용하여 조선의 1품은 명나라 3품의 흉배를 사용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문관 1품은 공작孔雀, 2품은 운안雲雁, 무관 1품과 2품은 호표虎豹, 문관 3품은 백한白鷳, 무관 3품은 웅비熊羆, 대군은 기린麒麟, 대사헌은 해치獬豸, 도통사는 사자, 왕자와 군은 백택白澤을 사용하도록 명시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1품에서 9품까지 저猪·록鹿·아鵝·안雁 등을 사용하도록 했으나 수개월 후 중종반정(1505)이 일어나 다시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흉배제도는 변화를 거듭하여 변화해 갔다. 숙종 대에는 6품까지 흉배 사용 범위를 확대하였고 1745년(영조 21)에는 9품까지 확대하면서 이를 이듬해인 1746년에 『속대전續大典』에 명시하였다. 또한 정조 대 이후 당상관과 당하관으로만 구분하는 흉배제도가 정착되어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왕실 인물 중 대군大君은 기린흉배를 사용하였다. 기린은 원래 오색의 화려한 빛깔의 털을 가지고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또는 두 개가 있는 동물이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형태는 백택과 비슷하지만 말발굽과 같은 발을 가진 것이 차이점이다. 기린흉배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소장 중인 기린흉배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왕자군은 백택흉배를 사용하였다. 백택은 인간의 말을 하며, 세상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다고 하는 신령스런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발가락이 갈라져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1613년 익사공신翼社功臣 정원군定遠君의 초상화, 1714년 연잉군延礽君 초상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1882년 이후 거북흉배를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은 흥선대원군의 사진과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공주·옹주의 남편인 의빈儀賓은 금사로 수놓은 쌍학흉배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문관 흉배는 새를 주문主紋으로 하는 ‘날짐승흉배’이다. 날짐승흉배의 등급은 날짐승의 크기에 의해 정해졌으며 역사상 네 단계로 변화했다. 제1기에는 공작흉배(1품)와 운안흉배(2품), 백한흉배(3품)가 사용되었다. 그들의 부인에게도 동일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제도에 등장하지 않는 노사흉배鷺鷥胸背가 부인 무덤에서 수의에 장식된 상태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공작흉배의 공작은 공작 특유의 관우와 화려한 꼬리털이 특징이다. 운안흉배의 운안은 갈색의 큰 새인데 머리와 꼬리에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그래서인지 날짐승흉배 중 가장 먼저 쇠퇴하였다. 백한흉배의 백한은 흰색 새로 관우가 있고 여러 가닥의 긴 꼬리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2기에는 기존의 공작, 운안과 백한흉배 외에 선학과 노사흉배가 추가되어 가장 많은 종류의 흉배가 사용되었다. 선학은 정수리의 단정丹頂이 특징이며 몸은 하얗고 꼬리는 뭉툭한 편인데 꼬리 좌우로 흑령黑翎이라고 하는 나뭇잎 모양의 깃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노사는 백한과 유사하지만 꼬리털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제3기의 당상관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한흉배를 사용하여 종류가 단순화되었으며 모두 흰 색으로 주문을 정리하였다. 제4기는 문관 당상관의 쌍학흉배, 당하관의 단학흉배로, 더욱 단순화되었으며 새의 마릿수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제도는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쌍학흉배와 단학흉배의 구분은 정조 대(1795)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 이후 학은 불로초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무관 흉배는 제정 당시 1·2품은 호표흉배虎豹胸背, 3품 당상관은 웅비흉배熊羆胸背를 사용하였다. 소위 ‘길짐승흉배’라는 것을 사용하였는데 1691년(숙종 17)과 1734년(영조 10)에 무관들이 문관용 학흉배를 사용하는 사례가 있어 금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실제 사용된 무관의 흉배 제도는 법전과는 달랐다. 흉배에 사용된 길짐승무늬의 종류는 호랑이, 표범, 해치, 사자 등 4종이었다. 아직까지 웅비흉배는 확인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 무관의 흉배는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호표와 웅비, 두 종류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호표흉배만 확인되었다. 전傳 오자치吳自治 초상화에서 호표흉배를 볼 수 있고, 진주 류씨 부인 박씨 묘 출토 호표흉배가 있다. 16세기 후기에는 호표흉배가 호흉배虎胸背와 표흉배豹胸背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 후부터 18세기 후기 영조 말년까지 호흉배가 확인된다. 1604년의 선무공신宣武功臣 조경趙儆(1541~1609) 초상화와 1613년의 위성공신衛聖功臣 한천두 초상화, 1623년 정사공신 이원영 초상화 등에서 시작되어 영조 말 『등준시첩登俊試帖』(1774)까지 호흉배가 사용되었다. 17세기 초 호흉배에는 황색 호랑이가 묘사되었으나 18세기 영조 때는 백호白虎가 사용되었다. 1756년(영조 3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영조 대의 무관 1품 흉배가 사자흉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자흉배보다는 호랑이흉배를 즐겨 사용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해치흉배는 단종 대에 3품 대사헌大司憲의 흉배로 제정되었다. 해치는 선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전설 속의 동물로, 몸 전체는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 뿔 하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해치흉배를 사용한 명나라 무관들의 영향으로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무관들도 해치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18세기 전기 영조 대까지 해치흉배 사용은 지속되었다. 대체로 무관 2품의 흉배로 사용되었다. 1609년 사망한 조경의 묘에서도 해치흉배 1점이 출토되었다. 이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해치흉배 유물이다. 그 후 1623년 정사공신靖社功臣 초상화와 1624년 진무공신振武功臣 초상화 등에서 해치흉배가 확인된다. 경기도박물관 소장의 정사공신丁巳功臣 이중로李重老(1577~1624) 초상화(보물 제1174호)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일본 교토대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조 초기 이봉상李鳳祥(1676~1728)의 초상화에서 마지막 해치흉배를 볼 수 있다.
사자흉배는 단종 대 흉배 제도에 따르면 도통사의 흉배이다. 16세기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별내면 무연고 여자 묘에서 출토된 직금흉배사자문 필단 치마 1점이 있기는 하지만 흉배로 사용된 사자흉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후기에는 인조 대의 흉배 유물에서부터 정조대의 초상화까지 사자흉배가 확인된다. 순조 초기까지도 사자흉배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17세기 전기 정사공신 신경유申景裕(1581~1633) 초상화, 진무공신 김완金完(1577~1635) 초상화와 신경유 묘 사자흉배,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의 현종 대 김여온의 사자흉배, 숙종 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무관 초상화 등이 있다. 정조 대까지 사자흉배를 사용한 무관 초상화가 남아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18세기 중기 사자흉배를 비롯하여, 영조 말기의 『등준시첩』에서 영조 대의 사자흉배를 볼 수 있으며, 성균관대학교박물관의 신응주申應周(1747~1804) 초상화와 개인 소장의 이창운李昌運(1713~1791) 초상화를 통해 정조 대의 사자흉배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18세기 후기부터는 쌍호흉배와 단호흉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호랑이는 줄무늬의 호랑이가 아니라 청나라 무관 3품 흉배에 해당하는 표범무늬의 흉배이다.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조 대 이명준李命峻(1699~1774) 초상화에는 종2품 소금대素金帶에 표범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정조 대(1784)의 이주국李柱國(1721~1798) 초상화에는 종2품 학정대에 표범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따라서 쌍호· 단호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표흉배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 한편 19세기의 신홍주申鴻周(1772~1829)와 신헌申櫶(1810~1888), 신정희申正熙(1833~1895) 등의 무관 초상화에서는 쌍호흉배가 확인된다. 그 외에 단호흉배 유물도 여러 점 현전하고 있다. 이렇듯, 무관의 흉배 제도는 문관의 흉배제도보다 단순한 제도가 적용되었으나 법전에 나타나는 제도와 실제 사용된 흉배와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가 부인들도 예복에 흉배를 사용하였다. 16세기까지는 남자들과 같은 도안의 흉배를 사용하였다. 인천 석남동 무연고 여자 묘에서는 공작흉배가 출토되었으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파평 윤씨 묘 흉배는 노사흉배이다. 연안 김씨 묘에서는 백한흉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진주 류씨의 배위 박씨 묘에서는 호표흉배가 출토되었으며 호흉배가 출토되었다. 경기도 용인 영덕동 여자묘에서는 직금호흉배필단으로 만든 여자단령이 출토되었다. 17세기 중기 이후에는 수자흉배壽字胷背와 봉흉배 등이 등장하여 남자 흉배와 차별화되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사천 목씨(1657~1699) 묘에서는 목숨 수壽 자를 모란으로 둘러싼 ‘수자흉배’가 있고 충북대학교박물관에는 청송 심씨(1683~1718) 묘에서 출토된 ‘수자흉배’가 있다. 또 17세기 말 이단하李端夏(1625~1689) 부인 원삼에는 봉흉배가 장식되어 있다. 안동 권씨 묘에서는 당의에 부착된 봉흉배가 출토되었다. 공주·옹주와 대군부인과 군부인의 흉배는 봉흉배이기는 하지만 금사를 사용하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는 덕온공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19세기 전기의 금사 봉흉배가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淑善翁主(1793~1836) 묘에서 출토된 원삼용 금사 봉흉배가 있다. 반가 부인들의 봉흉배는 채색사로만 수를 놓았으나 왕실 인물들의 봉흉배는 봉을 금사로 수놓아서 차별화하였다. 19세기 이후 여성들의 흉배 사용은 감소된 듯하다. 혼례용 원삼에만 간혹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흉배의 크기는 후대로 갈수록 점차 축소되었다. 17세기까지는 30~40cm 정도의 큰 흉배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크기가 줄어들어 20세기 초에는 20cm보다 작은 크기로 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흉배는 남자 흉배보다 작은 편이다. 흉배의 표현 방식은 세 종류로 구분되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유물로 볼 때 시기별로 변화되는 특징을 보였다. 초기에는 흉배단자처럼 흉배가 직조된 옷감으로 옷을 제작하여 사용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전기까지는 직조된 흉배를 잘라서 사용하는 방식이, 그리고 17세기 이후에는 수를 놓은 자수흉배가 주로 사용되었다. 자수를 위한 흉배본은 유지에 만들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에 여러 점의 흉배 자수본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大明會典, 續大典, 朝鮮王朝實錄, 날짐승흉배의 감정을 위한 기준 설명(이은주·하명은, 한복문화10-3, 한복문화학회, 2007), 사진과 해설로 보는 온양민속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 1996),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흉배제도와 실제(이은주, 복식58-5, 한국복식학회, 2008), 조선시대 왕실여성의 흉배제도 변화에 관한 연구(김영선,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조선시대 초상화3(국립중앙박물관, 2009).

흉배

흉배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은주(李恩珠)

정의

조선시대에 왕·왕세자·왕세손의 곤룡포와 융복, 군복, 그리고 관리들의 흑단령, 왕비 이하 내외명부의 예복에 부착하여 신분과 품계를 드러내던 원형 또는 방형의 장식물.

내용

흉배胸背는 15세기 이후 왕실 남녀와 공주·옹주, 남편인 의빈, 종친과 부인, 백관과 부인 등이 예복에 사용하던 일종의 신분 상징물이었다. 그 외에 공인工人의 관복이나 서민들의 혼례복에도 사용되었으나 이는 신분의 표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장식물로 사용된 것이다. 왕세자빈 이상의 왕실 인물들은 가슴과 등에 장식하는 흉배와 좌우 어깨의 견화肩花까지 네 장의 원형 보補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용보龍補’이다. 왕이 용보를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용흉배龍胷背 기록이 『세종실록世宗實錄』 권30, 1425년(세종 7) 11월 15일 기사에 보이기 때문에 이전부터 사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 권125, 1449년(세종 31) 9월 2일 기사를 보면 조선 초기 왕과 왕세자의 용보 정착 과정에 대한 전말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즉위 초 사조룡보를 사용하였다. 그 후 오조룡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1444년 황제가 오조룡보를 보내옴으로써 왕의 오조룡보가 정착되었다. 5년 후인 1449년에는 왕세자가 비로소 사조룡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왕의 오조룡보와 왕세자의 사조룡보 제도는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용보의 바탕 색상은 곤룡포의 색상과 같이 하였으므로 왕의 오조룡보는 대홍색 바탕의 용보를 사용하였고 아청색 곤룡포를 착용하는 왕세자는 아청색 바탕의 용보를 사용하였다.한편 왕실 여성의 흉배·견화 제도는 네 차례에 걸쳐 문양의 종류가 변화하였다. 제1기(15세기 중반~17세기 전반)에는 적계흉배翟雞胷背(적흉배翟胸背·작흉배雀胸背)를 사용하였다. 왕비 흉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1603년(선조 36) 명나라에서 보낸 예물 목록에서 보인다. ‘연암화저사철채수적계보자단삼緣暗花紵絲綴綵繡翟雞補子’과 ‘녹암화저사철채수적계보자협단삼綠暗花紵絲綴綵繡翟雞補子夾團衫’이라는 기록이다. ‘연緣’은 ‘녹綠’의 오기로 보인다. 왕비에게 보낸 단삼용 흉배는 왕의 용문과는 달리 적계보자翟雞補子로 명시되어 있다. ‘적계翟雞’라는 문양은 1403년 하피문양霞帔紋樣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1450년의 배자문양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때는 왕과 왕세자의 흉배제도가 정비된 시기이므로 왕비는 적계흉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460년 빈씨嬪氏 집에 납징納徴한 예물 중에 금배견화대홍단자장삼金背肩花大紅段子長杉 기록이 보인다. 금흉배견화를 장식한 대홍단자장삼으로 짐작된다. 세자빈도 흉배·견화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흉배의 문양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왕세자가 1449년에 비로소 사조룡보를 사용하는 제도가 정착되었으므로 세자빈 역시 보補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며 1460년 세자빈의 흉배 문양은 왕비의 것과 같은 적계흉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의 왕실 여성 보에는 직조나 자수를 사용하였다.제2기(17세기)에는 적보자翟補子를 사용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명나라에서 보낸 사여복 중 녹암화저사철수적보자겹단삼綠暗花紵絲綴繡翟補子夾團衫에서 ‘적보자’ 명칭이 확인된다.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仁穆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에 기록된 인목왕후의 습의에는 작견화흉배雀肩花胸排를 갖춘 적의的衣가 있다. ‘작雀’은 ‘적翟’으로 짐작된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적계문翟雞紋은 군왕비의 며느리인 장자부인長子夫人의 문양인 반면, 적문翟紋은 군왕비의 문양이었다. 왕실 여성의 흉배 문양의 등급이 초기의 장자부인 문양에서 군왕비 문양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자수와 기화起畫 등으로 제작한 적흉배와 견화를 사용하였다.제3기(18세기)는 인조와 장렬왕후의 가례가 있던 1638년(인조 16)부터 1751년(영조 27)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반포 이전 시기에 해당된다. 직금 또는 자수로 제작한 원형 봉보鳳補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마지막 봉흉배 기록은 1750년경의 『상방정례尙方定例』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왕대비 이하 왕세자빈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봉흉배·견화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문鳳紋은 명나라의 친왕비급에서 사용하던 문양이다.제4기(18세기 말 이후)는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가 반포된 1751년 이후부터 대한제국까지이다. 이때 비로소 왕실 여성들은 왕실 남성들과 동일한, 금수원룡보金繡圓龍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용문은 황후의 문양이므로 이 시기부터는 최고 등급의 보를 사용하게 된다. 왕비는 국왕과 같은 오조룡문五爪龍紋을, 왕세자빈은 왕세자와 같은 사조룡문四爪龍紋을 사용하였다. 왕세자빈 이상은 원형의 용보를 흉배·견화 네 장의 보를 사용하였고 왕세손빈은 방형의 삼조룡三爪龍 흉배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왕의 후궁은 이전 시기에 왕실 여성이 사용하던 원형의 봉보를 사용하였고 공주와 옹주는 방형 봉흉배를 사용하였다. 원형과 방형, 용과 봉으로 왕실 여성의 신분을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실과 반가의 구별은 문양에도 있었으나 금사金絲 사용으로 철저하게 신분을 구별하였다.

특징 및 의의

한편 문무관의 흉배 사용에 대한 논의는 세종 대부터 있었으나 1454년(단종 2)에 비로소 정3품 당상관 이상만 단령 관복에 사용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세조 대 이후 단령 중 흑단령에만 흉배를 다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왕실과는 달리, 방형 흉배만을 사용하였는데 명나라 문무관 흉배제도에서 이등을 낮추는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을 적용하여 조선의 1품은 명나라 3품의 흉배를 사용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문관 1품은 공작孔雀, 2품은 운안雲雁, 무관 1품과 2품은 호표虎豹, 문관 3품은 백한白鷳, 무관 3품은 웅비熊羆, 대군은 기린麒麟, 대사헌은 해치獬豸, 도통사는 사자, 왕자와 군은 백택白澤을 사용하도록 명시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1품에서 9품까지 저猪·록鹿·아鵝·안雁 등을 사용하도록 했으나 수개월 후 중종반정(1505)이 일어나 다시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흉배제도는 변화를 거듭하여 변화해 갔다. 숙종 대에는 6품까지 흉배 사용 범위를 확대하였고 1745년(영조 21)에는 9품까지 확대하면서 이를 이듬해인 1746년에 『속대전續大典』에 명시하였다. 또한 정조 대 이후 당상관과 당하관으로만 구분하는 흉배제도가 정착되어 말기까지 지속되었다.왕실 인물 중 대군大君은 기린흉배를 사용하였다. 기린은 원래 오색의 화려한 빛깔의 털을 가지고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또는 두 개가 있는 동물이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형태는 백택과 비슷하지만 말발굽과 같은 발을 가진 것이 차이점이다. 기린흉배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소장 중인 기린흉배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왕자군은 백택흉배를 사용하였다. 백택은 인간의 말을 하며, 세상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다고 하는 신령스런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발가락이 갈라져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1613년 익사공신翼社功臣 정원군定遠君의 초상화, 1714년 연잉군延礽君 초상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1882년 이후 거북흉배를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은 흥선대원군의 사진과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공주·옹주의 남편인 의빈儀賓은 금사로 수놓은 쌍학흉배를 사용하였다.조선시대 문관 흉배는 새를 주문主紋으로 하는 ‘날짐승흉배’이다. 날짐승흉배의 등급은 날짐승의 크기에 의해 정해졌으며 역사상 네 단계로 변화했다. 제1기에는 공작흉배(1품)와 운안흉배(2품), 백한흉배(3품)가 사용되었다. 그들의 부인에게도 동일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제도에 등장하지 않는 노사흉배鷺鷥胸背가 부인 무덤에서 수의에 장식된 상태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공작흉배의 공작은 공작 특유의 관우와 화려한 꼬리털이 특징이다. 운안흉배의 운안은 갈색의 큰 새인데 머리와 꼬리에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그래서인지 날짐승흉배 중 가장 먼저 쇠퇴하였다. 백한흉배의 백한은 흰색 새로 관우가 있고 여러 가닥의 긴 꼬리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제2기에는 기존의 공작, 운안과 백한흉배 외에 선학과 노사흉배가 추가되어 가장 많은 종류의 흉배가 사용되었다. 선학은 정수리의 단정丹頂이 특징이며 몸은 하얗고 꼬리는 뭉툭한 편인데 꼬리 좌우로 흑령黑翎이라고 하는 나뭇잎 모양의 깃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노사는 백한과 유사하지만 꼬리털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제3기의 당상관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한흉배를 사용하여 종류가 단순화되었으며 모두 흰 색으로 주문을 정리하였다. 제4기는 문관 당상관의 쌍학흉배, 당하관의 단학흉배로, 더욱 단순화되었으며 새의 마릿수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제도는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쌍학흉배와 단학흉배의 구분은 정조 대(1795)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 이후 학은 불로초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한편 무관 흉배는 제정 당시 1·2품은 호표흉배虎豹胸背, 3품 당상관은 웅비흉배熊羆胸背를 사용하였다. 소위 ‘길짐승흉배’라는 것을 사용하였는데 1691년(숙종 17)과 1734년(영조 10)에 무관들이 문관용 학흉배를 사용하는 사례가 있어 금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실제 사용된 무관의 흉배 제도는 법전과는 달랐다. 흉배에 사용된 길짐승무늬의 종류는 호랑이, 표범, 해치, 사자 등 4종이었다. 아직까지 웅비흉배는 확인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 무관의 흉배는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호표와 웅비, 두 종류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호표흉배만 확인되었다. 전傳 오자치吳自治 초상화에서 호표흉배를 볼 수 있고, 진주 류씨 부인 박씨 묘 출토 호표흉배가 있다. 16세기 후기에는 호표흉배가 호흉배虎胸背와 표흉배豹胸背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 후부터 18세기 후기 영조 말년까지 호흉배가 확인된다. 1604년의 선무공신宣武功臣 조경趙儆(1541~1609) 초상화와 1613년의 위성공신衛聖功臣 한천두 초상화, 1623년 정사공신 이원영 초상화 등에서 시작되어 영조 말 『등준시첩登俊試帖』(1774)까지 호흉배가 사용되었다. 17세기 초 호흉배에는 황색 호랑이가 묘사되었으나 18세기 영조 때는 백호白虎가 사용되었다. 1756년(영조 3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영조 대의 무관 1품 흉배가 사자흉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자흉배보다는 호랑이흉배를 즐겨 사용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한편 해치흉배는 단종 대에 3품 대사헌大司憲의 흉배로 제정되었다. 해치는 선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전설 속의 동물로, 몸 전체는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 뿔 하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해치흉배를 사용한 명나라 무관들의 영향으로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무관들도 해치흉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18세기 전기 영조 대까지 해치흉배 사용은 지속되었다. 대체로 무관 2품의 흉배로 사용되었다. 1609년 사망한 조경의 묘에서도 해치흉배 1점이 출토되었다. 이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해치흉배 유물이다. 그 후 1623년 정사공신靖社功臣 초상화와 1624년 진무공신振武功臣 초상화 등에서 해치흉배가 확인된다. 경기도박물관 소장의 정사공신丁巳功臣 이중로李重老(1577~1624) 초상화(보물 제1174호)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일본 교토대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조 초기 이봉상李鳳祥(1676~1728)의 초상화에서 마지막 해치흉배를 볼 수 있다.사자흉배는 단종 대 흉배 제도에 따르면 도통사의 흉배이다. 16세기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별내면 무연고 여자 묘에서 출토된 직금흉배사자문 필단 치마 1점이 있기는 하지만 흉배로 사용된 사자흉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후기에는 인조 대의 흉배 유물에서부터 정조대의 초상화까지 사자흉배가 확인된다. 순조 초기까지도 사자흉배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17세기 전기 정사공신 신경유申景裕(1581~1633) 초상화, 진무공신 김완金完(1577~1635) 초상화와 신경유 묘 사자흉배,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의 현종 대 김여온의 사자흉배, 숙종 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무관 초상화 등이 있다. 정조 대까지 사자흉배를 사용한 무관 초상화가 남아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18세기 중기 사자흉배를 비롯하여, 영조 말기의 『등준시첩』에서 영조 대의 사자흉배를 볼 수 있으며, 성균관대학교박물관의 신응주申應周(1747~1804) 초상화와 개인 소장의 이창운李昌運(1713~1791) 초상화를 통해 정조 대의 사자흉배를 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18세기 후기부터는 쌍호흉배와 단호흉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호랑이는 줄무늬의 호랑이가 아니라 청나라 무관 3품 흉배에 해당하는 표범무늬의 흉배이다.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조 대 이명준李命峻(1699~1774) 초상화에는 종2품 소금대素金帶에 표범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정조 대(1784)의 이주국李柱國(1721~1798) 초상화에는 종2품 학정대에 표범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따라서 쌍호· 단호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표흉배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 한편 19세기의 신홍주申鴻周(1772~1829)와 신헌申櫶(1810~1888), 신정희申正熙(1833~1895) 등의 무관 초상화에서는 쌍호흉배가 확인된다. 그 외에 단호흉배 유물도 여러 점 현전하고 있다. 이렇듯, 무관의 흉배 제도는 문관의 흉배제도보다 단순한 제도가 적용되었으나 법전에 나타나는 제도와 실제 사용된 흉배와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반가 부인들도 예복에 흉배를 사용하였다. 16세기까지는 남자들과 같은 도안의 흉배를 사용하였다. 인천 석남동 무연고 여자 묘에서는 공작흉배가 출토되었으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파평 윤씨 묘 흉배는 노사흉배이다. 연안 김씨 묘에서는 백한흉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진주 류씨의 배위 박씨 묘에서는 호표흉배가 출토되었으며 호흉배가 출토되었다. 경기도 용인 영덕동 여자묘에서는 직금호흉배필단으로 만든 여자단령이 출토되었다. 17세기 중기 이후에는 수자흉배壽字胷背와 봉흉배 등이 등장하여 남자 흉배와 차별화되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사천 목씨(1657~1699) 묘에서는 목숨 수壽 자를 모란으로 둘러싼 ‘수자흉배’가 있고 충북대학교박물관에는 청송 심씨(1683~1718) 묘에서 출토된 ‘수자흉배’가 있다. 또 17세기 말 이단하李端夏(1625~1689) 부인 원삼에는 봉흉배가 장식되어 있다. 안동 권씨 묘에서는 당의에 부착된 봉흉배가 출토되었다. 공주·옹주와 대군부인과 군부인의 흉배는 봉흉배이기는 하지만 금사를 사용하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는 덕온공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19세기 전기의 금사 봉흉배가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淑善翁主(1793~1836) 묘에서 출토된 원삼용 금사 봉흉배가 있다. 반가 부인들의 봉흉배는 채색사로만 수를 놓았으나 왕실 인물들의 봉흉배는 봉을 금사로 수놓아서 차별화하였다. 19세기 이후 여성들의 흉배 사용은 감소된 듯하다. 혼례용 원삼에만 간혹 사용되었다.일반적으로 흉배의 크기는 후대로 갈수록 점차 축소되었다. 17세기까지는 30~40cm 정도의 큰 흉배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크기가 줄어들어 20세기 초에는 20cm보다 작은 크기로 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흉배는 남자 흉배보다 작은 편이다. 흉배의 표현 방식은 세 종류로 구분되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유물로 볼 때 시기별로 변화되는 특징을 보였다. 초기에는 흉배단자처럼 흉배가 직조된 옷감으로 옷을 제작하여 사용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전기까지는 직조된 흉배를 잘라서 사용하는 방식이, 그리고 17세기 이후에는 수를 놓은 자수흉배가 주로 사용되었다. 자수를 위한 흉배본은 유지에 만들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에 여러 점의 흉배 자수본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大明會典, 續大典, 朝鮮王朝實錄, 날짐승흉배의 감정을 위한 기준 설명(이은주·하명은, 한복문화10-3, 한복문화학회, 2007), 사진과 해설로 보는 온양민속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 1996),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흉배제도와 실제(이은주, 복식58-5, 한국복식학회, 2008), 조선시대 왕실여성의 흉배제도 변화에 관한 연구(김영선,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조선시대 초상화3(국립중앙박물관,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