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옷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권혜진(權惠珍)
갱신일 2018-10-29

정의

홍색 바탕에 길상무늬를 가득 수놓아 꾸민 전통 여성 혼례복.

역사

조선시대 원삼과 함께 여성 혼례복으로 착용했던 활옷은 궁중 여성 혼례복 중 하나인 홍장삼紅長衫에서 유래한 자수복식이다. 박규수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에 의하면 대군이나 왕자의 처인 외명부 1품의 혼례복인 홍삼紅衫을 민간여성의 혼례복으로 착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풍속은 특별한 날에 높은 계급의 복식이나 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섭성攝盛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한편, 『거가잡복고』의 내복편內服篇에는 “홍장삼이라는 것이 있는데 붉은 비단을 바탕으로 하여 두루 연꽃을 가득히 수놓아”라고 하여, 홍색 바탕에 길상무늬를 가득 수놓아 장식하는 홍장삼과 활옷의 공통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활옷 수본 중에는 ‘홍장삼 수초 저동궁’이라는 묵서가 남아 있는 순조의 삼녀인 덕온공주(1822~1844)의 길례(1837)를 위해 제작된 활옷 수본이 있다. 덕온공주의 활옷 수본은 궁중 여성 혼례복 중 수를 놓아 장식한 홍장삼이 민간여성 혼례복인 활옷으로 허락된 복식임을 밝히는 근거가 된다.
조선시대는 유교문화에 의해 어린이 복식을 제외한 화려한 자수복식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하지만 일생에 가장 경사스러운 날에 입는 혼례복만큼은 아름다운 길상무늬를 수놓은 활옷이 허락되었다.
활옷이라는 명칭의 기원은 화의花衣,華衣 등의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근대 국문소설에서도 ‘할옷’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크다[大]라는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인 ‘하’와 ‘옷’이 만나 ‘혼례라는 중요한 예식에 입는 큰 옷’을 의미하는 ‘할옷’라는 순우리말 명칭을 이루고 ‘할옷’이 이후에 ‘활옷’으로 변화된 것으로도 본다.

내용

활옷의 구성은 배자처럼 맞깃에 색동과 흰색 한삼이 달린 넓은 소매를 달고 앞길 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으며 무(윗옷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 대는 딴 폭) 없이 겨드랑이 아래로 트여 있는 원삼과 비슷한 형태이다. 자수복식인 활옷은 뒷길을 중심선에서 잇지 않고 하나로 마름질해 수를 놓고, 깃은 원삼과 같이 따로 재단해 달지 않고 몸판 부분 천은 안감 쪽으로 꺾어 넣으며, 뒷고대 부분만 옷감을 따로 덧대 막았다. 활옷도, 겉감은 홍색 비단, 안감은 청색 비단을 사용해 혼례를 통해 신랑과 신부가 인연을 맺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했다.
궁중 활옷인 복온공주 활옷은 좁은 동정을 달았지만 일반적인 활옷은 흰색 한지를 목둘레에 넓게 덧댄다. 특히 뒷고대 부분은 둥근 반원 모양으로 덧대는데 이것은 신부의 머리단장을 위해 바른 머릿기름으로부터 오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앞길보다 20 정도 긴 뒷길의 끝자락에는 몸판과 같은 홍색 옷감으로 손잡이를 달아 준 활옷이 많다. 이는 혼례식 때 활옷의 옷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수모手母, 首母가 뒷자락을 들어 주기 위한 것이다. 복식 전체를 수놓아 장식하는 혼례복인 활옷은 개인이 제작하기 힘든 예복으로 대부분 대여를 해서 입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여복의 특징들이 활옷에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신부를 단장하는 역할을 하는 수모는 활옷뿐 아니라 큰머리장식, 혼례에 필요한 물품까지도 대여해 주었기 때문에 근대 혼례 사진에 나타난 왕족과 양반 그리고 민간 신부의 차림새는 크게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여풍속은 근대까지 이어져 근대 신문기사에 나타난 세물전 광고를 통해 활옷을 대여해 착용하는 풍속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복온공주 활옷은 심지를 따로 덧대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활옷은 대부분 옷감과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한 두꺼운 심지를 덧댄다. 이는 수가 놓인 옷감을 보강하여 무거운 수를 지지하고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하는 구성법이다. 소매부분에도 역시 배접한 심지를 대기 때문에 무거운 소매가 당겨지지 않도록 몸판과 이어지지 않는 진동 아래 부분 소매는 터놓는다. 복온공주 활옷에는 단추를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궁중발기」의 기록에도 홍장삼용 단추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활옷에는 동정 아래 양쪽으로 짧은 고름이 달려 있어 단추가 아닌 고름을 매어 옷을 여미는 경우가 더 많다. 활옷은 원삼과 같이 허리에 옷감으로 만든 대대를 매야 하는데, 활옷과 대대가 온전히 한 벌로 전해지는 유물은 적다.
다양한 종류의 길상무늬를 서로 어우러지게 회화풍의 충전구도로 수놓는 활옷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 서 있는 신부의 자세를 고려하여 주로 밖으로 드러나는 뒷길과 소매의 뒷면에 자수무늬가 집중되어 있다. 앞길은 소매로 가려지지 않는 어깨부분과 아랫자락 부분에만 무늬를 수를 놓는다. 또한 소매 끝에 달리는 흰색 한삼의 아랫부분에도 수를 놓아 장식한 경우가 많다. 각종 꽃무늬와 보물무늬를 수놓은 복온공주 활옷 유형을 제외한 대부분의 활옷은 일반적으로 앞길 어깨 부분에는 연꽃을 든 동자상과 함께 ‘이성지합二姓之合’, ‘백복지원百福之源’ 등의 길상어문을 수놓았다. 활옷의 앞길 아래 자락 부분과 소매 한삼 뒷부분에는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는 구봉무늬를 수놓는다. 활옷의 뒷길과 소매 부분에는 위쪽으로는 모란무늬를 아래쪽으로는 연꽃무늬를 수놓는다. 뒷길 모란무늬 위로 중심에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무늬를 수놓고, 모란무늬 가장자리와 사이사이에 길상어문이나 작은 새와
나비 등을 수놓는다. 뒷길 아래쪽 연꽃무늬 아래로는 흉배의 아래 부분에 수놓는 산을 중심으로 한 반원형의 물결무늬를 수놓고, 연꽃이 피어오르는 양쪽 가장자리에 백로 한 쌍을 수놓아 금슬 좋은 부부가 될 것을 기원한다.

특징 및 의의

궁중 홍장삼에서 비롯된 활옷은 궁중 활옷과 민간 활옷 두 종류로 나뉜다. 현재 전해지는 궁중 활옷은 두 가지이다. 순조의 차녀인 복온공주(1818~1832)가 1830년 길례 때 착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활옷이 있다. 1959년 창덕궁 화재로 소실된 궁중 활옷의 복제본이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각각 소장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궁중 활옷은 자수와 전체적인 구성방법과 장식 형태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양한 꽃무늬와 보배무늬를 나란히 수놓고 원앙금원문 금박과 함께 장식한 복온공주 활옷과 비슷한 유형의 활옷 유물로는 시카고필드박물관 소장 활옷(no.33156)이 있다. 브루클린미술관 소장 활옷(no.27.977.4)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옷에는 복온공주 활옷의 꽃무늬와 같은 유형의 자수가 일부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덕온공주 활옷 수본을 포함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활옷 수본 일부에 복온공주 활옷과 비슷한 유형의 꽃무늬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몇몇 예를 제외한 대부분의 활옷 유물은 창덕궁 활옷에 나타난 자수와 구성을 따르고 있다. 장식성이 강한 복온공주
활옷의 자수보다는 혼례와 관련된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한 창덕궁 활옷의 자수무늬를 더 선호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민간 활옷은 대부분 창덕궁 활옷 유형에 속하지만 정형화된 무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변형된 무늬를 수놓아 각자 다양한 개성을 드러냈다. 신랑 신부가 자식을 많이 낳아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오랫동안 회로하며 살기 바라는 무늬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활옷은 신부를 아름답게 꾸며 주는 옷이기도 하지만 신부의 새로운 삶에 축복을 기원하는 부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옷이다.
색상과 장식성에 있어서 궁중과 민간의 차이가 큰 원삼에 비해 활옷은 궁중과 민간 모두에서 홍색 바탕에 자수로 장식하는 같은 조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더 우월한 조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신분에서 향유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여성복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복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활옷 유물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국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이 서구에 문호를 개방했던 1920년대 근대 초기 아름다운 자수복식이자 혼례복인 활옷을 해외 수집가들이 수집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居家雜服考, 국립고궁박물관 활옷 수본에 관한 연구(권혜진·홍나영, 한국의류학회지32-8, 한국의류학회, 2008),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활옷의 조형성 연구(권혜진·김지연, 복식63-7, 한국복식학회, 2013), 시카고필드박물관 소장 활옷에 대한 연구(권혜진·홍나영, 복식59-6, 한국복식학회, 2009), 활옷의 역사와 조형성 연구(권혜진,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활옷

활옷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권혜진(權惠珍)
갱신일 2018-10-29

정의

홍색 바탕에 길상무늬를 가득 수놓아 꾸민 전통 여성 혼례복.

역사

조선시대 원삼과 함께 여성 혼례복으로 착용했던 활옷은 궁중 여성 혼례복 중 하나인 홍장삼紅長衫에서 유래한 자수복식이다. 박규수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에 의하면 대군이나 왕자의 처인 외명부 1품의 혼례복인 홍삼紅衫을 민간여성의 혼례복으로 착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풍속은 특별한 날에 높은 계급의 복식이나 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섭성攝盛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한편, 『거가잡복고』의 내복편內服篇에는 “홍장삼이라는 것이 있는데 붉은 비단을 바탕으로 하여 두루 연꽃을 가득히 수놓아”라고 하여, 홍색 바탕에 길상무늬를 가득 수놓아 장식하는 홍장삼과 활옷의 공통점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활옷 수본 중에는 ‘홍장삼 수초 저동궁’이라는 묵서가 남아 있는 순조의 삼녀인 덕온공주(1822~1844)의 길례(1837)를 위해 제작된 활옷 수본이 있다. 덕온공주의 활옷 수본은 궁중 여성 혼례복 중 수를 놓아 장식한 홍장삼이 민간여성 혼례복인 활옷으로 허락된 복식임을 밝히는 근거가 된다.조선시대는 유교문화에 의해 어린이 복식을 제외한 화려한 자수복식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하지만 일생에 가장 경사스러운 날에 입는 혼례복만큼은 아름다운 길상무늬를 수놓은 활옷이 허락되었다.활옷이라는 명칭의 기원은 화의花衣,華衣 등의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근대 국문소설에서도 ‘할옷’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크다[大]라는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인 ‘하’와 ‘옷’이 만나 ‘혼례라는 중요한 예식에 입는 큰 옷’을 의미하는 ‘할옷’라는 순우리말 명칭을 이루고 ‘할옷’이 이후에 ‘활옷’으로 변화된 것으로도 본다.

내용

활옷의 구성은 배자처럼 맞깃에 색동과 흰색 한삼이 달린 넓은 소매를 달고 앞길 길이가 뒷길이보다 짧으며 무(윗옷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 대는 딴 폭) 없이 겨드랑이 아래로 트여 있는 원삼과 비슷한 형태이다. 자수복식인 활옷은 뒷길을 중심선에서 잇지 않고 하나로 마름질해 수를 놓고, 깃은 원삼과 같이 따로 재단해 달지 않고 몸판 부분 천은 안감 쪽으로 꺾어 넣으며, 뒷고대 부분만 옷감을 따로 덧대 막았다. 활옷도, 겉감은 홍색 비단, 안감은 청색 비단을 사용해 혼례를 통해 신랑과 신부가 인연을 맺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했다.궁중 활옷인 복온공주 활옷은 좁은 동정을 달았지만 일반적인 활옷은 흰색 한지를 목둘레에 넓게 덧댄다. 특히 뒷고대 부분은 둥근 반원 모양으로 덧대는데 이것은 신부의 머리단장을 위해 바른 머릿기름으로부터 오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앞길보다 20 정도 긴 뒷길의 끝자락에는 몸판과 같은 홍색 옷감으로 손잡이를 달아 준 활옷이 많다. 이는 혼례식 때 활옷의 옷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수모手母, 首母가 뒷자락을 들어 주기 위한 것이다. 복식 전체를 수놓아 장식하는 혼례복인 활옷은 개인이 제작하기 힘든 예복으로 대부분 대여를 해서 입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여복의 특징들이 활옷에 나타나 있다.조선시대 신부를 단장하는 역할을 하는 수모는 활옷뿐 아니라 큰머리장식, 혼례에 필요한 물품까지도 대여해 주었기 때문에 근대 혼례 사진에 나타난 왕족과 양반 그리고 민간 신부의 차림새는 크게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여풍속은 근대까지 이어져 근대 신문기사에 나타난 세물전 광고를 통해 활옷을 대여해 착용하는 풍속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복온공주 활옷은 심지를 따로 덧대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활옷은 대부분 옷감과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한 두꺼운 심지를 덧댄다. 이는 수가 놓인 옷감을 보강하여 무거운 수를 지지하고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하는 구성법이다. 소매부분에도 역시 배접한 심지를 대기 때문에 무거운 소매가 당겨지지 않도록 몸판과 이어지지 않는 진동 아래 부분 소매는 터놓는다. 복온공주 활옷에는 단추를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궁중발기」의 기록에도 홍장삼용 단추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활옷에는 동정 아래 양쪽으로 짧은 고름이 달려 있어 단추가 아닌 고름을 매어 옷을 여미는 경우가 더 많다. 활옷은 원삼과 같이 허리에 옷감으로 만든 대대를 매야 하는데, 활옷과 대대가 온전히 한 벌로 전해지는 유물은 적다.다양한 종류의 길상무늬를 서로 어우러지게 회화풍의 충전구도로 수놓는 활옷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 서 있는 신부의 자세를 고려하여 주로 밖으로 드러나는 뒷길과 소매의 뒷면에 자수무늬가 집중되어 있다. 앞길은 소매로 가려지지 않는 어깨부분과 아랫자락 부분에만 무늬를 수를 놓는다. 또한 소매 끝에 달리는 흰색 한삼의 아랫부분에도 수를 놓아 장식한 경우가 많다. 각종 꽃무늬와 보물무늬를 수놓은 복온공주 활옷 유형을 제외한 대부분의 활옷은 일반적으로 앞길 어깨 부분에는 연꽃을 든 동자상과 함께 ‘이성지합二姓之合’, ‘백복지원百福之源’ 등의 길상어문을 수놓았다. 활옷의 앞길 아래 자락 부분과 소매 한삼 뒷부분에는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는 구봉무늬를 수놓는다. 활옷의 뒷길과 소매 부분에는 위쪽으로는 모란무늬를 아래쪽으로는 연꽃무늬를 수놓는다. 뒷길 모란무늬 위로 중심에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무늬를 수놓고, 모란무늬 가장자리와 사이사이에 길상어문이나 작은 새와나비 등을 수놓는다. 뒷길 아래쪽 연꽃무늬 아래로는 흉배의 아래 부분에 수놓는 산을 중심으로 한 반원형의 물결무늬를 수놓고, 연꽃이 피어오르는 양쪽 가장자리에 백로 한 쌍을 수놓아 금슬 좋은 부부가 될 것을 기원한다.

특징 및 의의

궁중 홍장삼에서 비롯된 활옷은 궁중 활옷과 민간 활옷 두 종류로 나뉜다. 현재 전해지는 궁중 활옷은 두 가지이다. 순조의 차녀인 복온공주(1818~1832)가 1830년 길례 때 착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활옷이 있다. 1959년 창덕궁 화재로 소실된 궁중 활옷의 복제본이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각각 소장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궁중 활옷은 자수와 전체적인 구성방법과 장식 형태에서 큰 차이가 있다.다양한 꽃무늬와 보배무늬를 나란히 수놓고 원앙금원문 금박과 함께 장식한 복온공주 활옷과 비슷한 유형의 활옷 유물로는 시카고필드박물관 소장 활옷(no.33156)이 있다. 브루클린미술관 소장 활옷(no.27.977.4)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옷에는 복온공주 활옷의 꽃무늬와 같은 유형의 자수가 일부 장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덕온공주 활옷 수본을 포함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활옷 수본 일부에 복온공주 활옷과 비슷한 유형의 꽃무늬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몇몇 예를 제외한 대부분의 활옷 유물은 창덕궁 활옷에 나타난 자수와 구성을 따르고 있다. 장식성이 강한 복온공주활옷의 자수보다는 혼례와 관련된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한 창덕궁 활옷의 자수무늬를 더 선호했던 결과로 볼 수 있다.근대 이후 민간 활옷은 대부분 창덕궁 활옷 유형에 속하지만 정형화된 무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변형된 무늬를 수놓아 각자 다양한 개성을 드러냈다. 신랑 신부가 자식을 많이 낳아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오랫동안 회로하며 살기 바라는 무늬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활옷은 신부를 아름답게 꾸며 주는 옷이기도 하지만 신부의 새로운 삶에 축복을 기원하는 부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옷이다.색상과 장식성에 있어서 궁중과 민간의 차이가 큰 원삼에 비해 활옷은 궁중과 민간 모두에서 홍색 바탕에 자수로 장식하는 같은 조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더 우월한 조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신분에서 향유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여성복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복식이라 할 수 있다.현재 활옷 유물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국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이 서구에 문호를 개방했던 1920년대 근대 초기 아름다운 자수복식이자 혼례복인 활옷을 해외 수집가들이 수집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居家雜服考, 국립고궁박물관 활옷 수본에 관한 연구(권혜진·홍나영, 한국의류학회지32-8, 한국의류학회, 2008),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활옷의 조형성 연구(권혜진·김지연, 복식63-7, 한국복식학회, 2013), 시카고필드박물관 소장 활옷에 대한 연구(권혜진·홍나영, 복식59-6, 한국복식학회, 2009), 활옷의 역사와 조형성 연구(권혜진,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