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홍나영(洪那英)
갱신일 2018-10-11

정의

하반신에 천을 둘러 입는 옷.

역사

치마의 역사는 고대로 올라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치마는 여성들이 착용한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예복에는 남자들도 예복용 치마인 ‘상裳’을 입었다. 벽화 중 쌍영총의 남자 주인공을 비롯해 남자들도 치마를 입은 모습이 일부 확인된다. 또한 조선시대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 등 예복에도 상이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의 치마는 허리에서부터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곧게 주름을 잡은 양식이다. 치마를 입고 저고리를 겉으로 내어 입었으므로 치마허리의 모양은 확인할 수 없다. 치맛단에는 선을 별도로 댄 것도 있고, 별도의 선 장식을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중에서 특이한 것은 색동치마이다. 색동치마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나타나는 양식인데, 서로 다른 색상이 세로 방향으로 연결된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치마의 양식은 백제와 신라를 포함해 삼국이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상류층 사이에서 당唐의 복식이 유행하면서 치마를 가슴 높이 올려 매어 입는 방식이 유행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토용土俑에서 저고리를 안에 넣고 치마를 가슴 높이 올려 입은 모습이 확인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저고리를 겉으로 내어 입는 양식과 안으로 넣어 입는 양식이 공존한 것으로 보인다. 송宋의 사신인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간 후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 여인들이 황색 치마를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선군旋裙’이라는 치마를 입는데, 여러 겹 겹쳐 입고 폭이 넓을수록 좋아한다고 기록하였다. 선군은 송나라 여자 복식에도 등장하는 명칭인데, 송의 선군은 앞뒤가 갈라지고 말을 탈 때 입었던 옷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치마를 먼저 입고 저고리를 밖으로 내어 입는 양식으로 일원화一元化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길었으므로 치마를 허리에 둘러 입었다. 한편 16세기에는 뒤가 길게 끌리는 예복용 치마가 있었으며, 이것은 출토유물로 확인된다. 이 치마들은 뒷자락이 바닥에 끌리고 앞은 뒤보다 짧아 바닥에 맞닿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치마 앞폭에 가로 주름인 터크tuck를 깊게 잡아 치마의 앞뒤 길이가 자연스레 차이나게 하거나, 길이가 다른 앞뒤 폭 길이 차이를 옆선에서 다트dart로 처리한 양식이다. 이러한 치마를 입게 되면 뒷 실루엣이 길고 풍성하여 우아한 멋을 보여준다. 이러한 치마 양식은 17세기 이후 유물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출토유물 중에는 치마 아랫단에 가로로 단을 한 번 더 접힌 접음단 치마와 접음단 솜치마도 있다.
18세기 이후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치마는 길어졌다. 저고리가 점점 가슴 위로 올라가자 치마를 입는 위치도 올라갔다. 결국 저고리가 아주 짧았던 19세기에는 치마허리가 밖으로 드러날 지경이었으며, 치마허리를 아무리 가슴 높이 올려 매어도 살을 다 가리기 어려웠다. 따라서 별도의 허리띠를 만들어 가슴을 가릴 정도였다. 이러한 양식은 구한말 서구식 복식의 영향으로 다시 긴 저고리가 유행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개화기에 들어 여성들이 치마를 입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여성의 사회활동의 증가와 함께 전통적인 치마에 대한 개선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활동을 방해하는 치마 길이가 발목을 드러낼 정도로 짧아졌다. 길이가 짧은 통치마가 새로이 등장해 신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하지만 여자 치마에서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어깨허리의 등장이었다.
서구식 여성 교육기관이었던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의 체조를 위해 선교사에 의해 개발된 어깨허리는 서구식 패턴을 가슴 윗부분에 달아 만들었다. 그 모양이 마치 조끼의 윗부분과 같다고 하여 ‘조끼허리’라고도 불렀다. 새로운 어깨허리는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어깨허리를 단 통치마가 여학생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신여성 사이에서만 애용되었다. 하지만 어깨허리의 편리함으로 인해 1970년대 이후로는 기존 치마허리의 착용이 익숙한 노인세대조차 어깨허리를 단 치마를 입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치마의 실루엣은 여러 겹 입은 속곳으로 인해 매우 부풀어져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상체는 꼭 끼게 하체는 풍성한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여자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지고 각종 속곳이 줄어들고 고쟁이속치마만 입게 되면서 치마의 폭과 실루엣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복이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예복으로만 착용되는 1970년대부터는 다시 폭이 넓은 치마가 유행하였다. 다만 조선시대와 달리 치마의 실루엣이 A자 모양이 되도록 하여 풍성한 실루엣을 유지하면서도 날씬해 보이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내용

치마는 여자의 하반신에 입는 옷 중에서 가장 겉에 입는 것이다. 치마는 한자로 ‘군裙’ 혹은 ‘상裳’에 해당되지만 조선시대 문헌에는 우리말의 음을 따서 ‘赤亇’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赤亇’의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 1420년(세종 2) 9월 원경왕후元敬王后 천전의薦奠儀에 처음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치마 양식은 허리나 가슴에 두르는 띠 부분과 그 아래에 몸을 가리도록 덮는 치마 부분으로 나뉜다. 몸에 두르도록 하는 흰색 넓은 띠 부분은 ‘치마허리’라고 부른다. 치마허리는 치마폭과 연결되어 있다. 치마 너비는 원하는 옷감의 폭만큼 세로로 이어 붙인 다음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 치마허리와 연결하여 만든다. 예복용 치마는 일상용 치마에 비해 치마를 더 넓고 길게 만든다. 치마는 연령과 용도 혹은 착용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옷감과 색상이 사용된다.
오늘날은 겹치마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조선시대에는 계절이나 용도에 따라 다양한 치마가 있었다. 일상용 치마는 계절별로 소재나 바느질법 혹은 손질법이 다양하였다. 여름철에는 홑치마를 많이 입었는데, 여름철 홑치마 중에서 풀을 먹인 후 다듬이질과 다림질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대기 위에 펴서 햇볕에 말려 손질한 치마를 ‘쟁치마’라고 하였다. ‘쟁’이란 ‘재양載陽’의 준말로 재양틀에 대고 꿰매거나 재양판板에 붙여 말리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를 ‘쟁친다’고 하였다.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솜치마나 누비치마를 애용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솜치마나 누비치마는 사라지고 겹이나 홑으로 만든 치마가 보편화되었다. 겹치마는 계절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예복용일 경우는 계절에 관계없이 겹치마를 주로 입었다. 그러나 예복용 치마 중에도 홑으로 만든 치마가 있었다. 치마의 좌우 옆선과 아랫단 등 가랑자리에 이색異色의 선을 댄 치마이며, 흔히 ‘선단치마’라고도 부른다.
금박을 장식한 예복용 치마는 ‘스란치마’라고 한다. ‘스란’이란 ‘슬란膝襴’에서 온 말로 직금織金이 무릎 부분에 오도록 만든 치마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직금이 두 군데 들어갈 경우 무릎 부분의 직금이 훨씬 넓고 아랫단의 직금은 없거나 좁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는 직금보다 금박이 많이 애용되면서 스란단을 별도의 천에 만들어 치마에 붙이는 식으로 변화되었다. 이 경우 스란단을 가로로 두 단을 댄 것은 ‘대란치마’라고 하였는데, 직금 치마와 마찬가지로 무릎 부분에 댄 장식단이 아래에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스란단을 댄 치마들은 내외명부內外命婦와 같이 상당히 높은 신분의 여성만이 입을 수 있었으며, 그중에서 대란치마는 왕비에게만 허용된 것이다.
한편 궁중복식 중에는 예복 위에만 덧입는 ‘웃치마’, ‘전행웃치마’ 등의 의례용 치마가 있다. 웃치마는 다른 치마보다 길이와 폭이 좁지만 무릎 부분에 금박단을 장식한 것이다. 궁중정재에서 여기女妓들이 착용한 것이 궁중기록화에서 확인된다. 전행웃치마는 왕비나 왕대비 등 왕실 여인들이 대례복을 입을 때 착용했던 치마이다. 치마허리에 주름을 곧게 잡은 세 자락을 연결한 것이다. 착용하면 뒤로 위치하게 될 좌우의 두 자락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길이이며, 앞자락은 바닥과 가지런할 정도의 길이로 만들었다. 전행웃치마에도 금박장식이 되어 있다.
반면 서민들은 폭도 좁고 길이도 짧은 치마를 입었다. ‘두루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행에 지장 없도록 짧기 때문에 발목 부분에서 속곳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일할 때는 신분에 관계없이 ‘행주치마’라고 부르는 흰색 앞치마를 입었다. 허리에 둘러 입으며 치마 뒷부분을 여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치마보다 폭이 좁고 길이도 바닥에서 20 이상 올라올 정도로 짧았다. 행주치마는 보통 무명이나 삼베로 만들지만 상류층 사이에선 모시로 만든 것도 있었다. 또한 ‘쓰개치마’는 치마의 폭을 좁게 만들어 여성의 내외용 쓰개로 활용한 것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남녀에 관계없이 치마를 많이 입혔는데, 이를 ‘두렁치마’라고 한다. 배탈이 나지 않게 덮어 주기 위한 목적이며, 누비로도 만들었다.
치마의 색상은 연령별로 차이가 있었다. 치마의 색상은 처음에는 비교적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고 황색 치마도 애용된 편이지만, 후기로 갈수록 색상은 청·홍 두 색상 위주로 단순화되었다. 홍색 치마는 주로 미혼여성이나 새댁이, 청색 치마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 일상에도 입었고 특히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에 애용하였다. 옥색 치마는 제삿날에도 입지만 평상시에 입어도 무방하였고, 노인용이나 여름철 색상으로 애호되었다. 왕실 여성들은 자색 치마도 즐겨 입었다. 흰색 치마는 여름철 치마로 신분에 관계없이 즐겨 입었지만 검은색 치마는 선호되는 색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일할 때 검은색 치마를 입어 쉽게 치마의 오염이 드러나는 것을 피했으며, 강원도 강릉 등 일부 지방에서는 혼수로 검정 치마를 준비해 부엌일을 할 때 착용했다고도 한다.

특징 및 의의

우리나라의 치마는 풍성한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 여러 겹의 속곳을 받쳐 입었으나 속치마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속치마로 활용된 치마에는 ‘대슘치마’나 ‘무지기치마’가 있는데, 이들은 궁중이나 양반들의 예장용이었을 뿐 평상시에 입는 옷은 아니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치마는 둘러 입는 형식으로 신체 치수에 비교적 구애를 덜 받는 편이었다. 옷감도 직사각형으로 재단되므로 치맛감은 때로는 이불이나 요의 옷감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하는 등 활용도가 높은 편이었다.

참고문헌

금선단 치마 입고 어디 다녀오셨을까(문경새재박물관, 민속원, 2005), 조선시대 여인의 멋과 차림새(박성실·조효숙·이은주, 단국대학교출판부, 2005).

치마

치마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홍나영(洪那英)
갱신일 2018-10-11

정의

하반신에 천을 둘러 입는 옷.

역사

치마의 역사는 고대로 올라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치마는 여성들이 착용한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예복에는 남자들도 예복용 치마인 ‘상裳’을 입었다. 벽화 중 쌍영총의 남자 주인공을 비롯해 남자들도 치마를 입은 모습이 일부 확인된다. 또한 조선시대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 등 예복에도 상이 포함되어 있다.고구려의 치마는 허리에서부터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곧게 주름을 잡은 양식이다. 치마를 입고 저고리를 겉으로 내어 입었으므로 치마허리의 모양은 확인할 수 없다. 치맛단에는 선을 별도로 댄 것도 있고, 별도의 선 장식을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중에서 특이한 것은 색동치마이다. 색동치마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나타나는 양식인데, 서로 다른 색상이 세로 방향으로 연결된 것이다.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치마의 양식은 백제와 신라를 포함해 삼국이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상류층 사이에서 당唐의 복식이 유행하면서 치마를 가슴 높이 올려 매어 입는 방식이 유행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토용土俑에서 저고리를 안에 넣고 치마를 가슴 높이 올려 입은 모습이 확인된다.이후 고려시대에는 저고리를 겉으로 내어 입는 양식과 안으로 넣어 입는 양식이 공존한 것으로 보인다. 송宋의 사신인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간 후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 여인들이 황색 치마를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선군旋裙’이라는 치마를 입는데, 여러 겹 겹쳐 입고 폭이 넓을수록 좋아한다고 기록하였다. 선군은 송나라 여자 복식에도 등장하는 명칭인데, 송의 선군은 앞뒤가 갈라지고 말을 탈 때 입었던 옷이라고 한다.조선시대에는 치마를 먼저 입고 저고리를 밖으로 내어 입는 양식으로 일원화一元化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길었으므로 치마를 허리에 둘러 입었다. 한편 16세기에는 뒤가 길게 끌리는 예복용 치마가 있었으며, 이것은 출토유물로 확인된다. 이 치마들은 뒷자락이 바닥에 끌리고 앞은 뒤보다 짧아 바닥에 맞닿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치마 앞폭에 가로 주름인 터크tuck를 깊게 잡아 치마의 앞뒤 길이가 자연스레 차이나게 하거나, 길이가 다른 앞뒤 폭 길이 차이를 옆선에서 다트dart로 처리한 양식이다. 이러한 치마를 입게 되면 뒷 실루엣이 길고 풍성하여 우아한 멋을 보여준다. 이러한 치마 양식은 17세기 이후 유물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출토유물 중에는 치마 아랫단에 가로로 단을 한 번 더 접힌 접음단 치마와 접음단 솜치마도 있다.18세기 이후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치마는 길어졌다. 저고리가 점점 가슴 위로 올라가자 치마를 입는 위치도 올라갔다. 결국 저고리가 아주 짧았던 19세기에는 치마허리가 밖으로 드러날 지경이었으며, 치마허리를 아무리 가슴 높이 올려 매어도 살을 다 가리기 어려웠다. 따라서 별도의 허리띠를 만들어 가슴을 가릴 정도였다. 이러한 양식은 구한말 서구식 복식의 영향으로 다시 긴 저고리가 유행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개화기에 들어 여성들이 치마를 입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여성의 사회활동의 증가와 함께 전통적인 치마에 대한 개선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활동을 방해하는 치마 길이가 발목을 드러낼 정도로 짧아졌다. 길이가 짧은 통치마가 새로이 등장해 신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하지만 여자 치마에서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어깨허리의 등장이었다.서구식 여성 교육기관이었던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의 체조를 위해 선교사에 의해 개발된 어깨허리는 서구식 패턴을 가슴 윗부분에 달아 만들었다. 그 모양이 마치 조끼의 윗부분과 같다고 하여 ‘조끼허리’라고도 불렀다. 새로운 어깨허리는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어깨허리를 단 통치마가 여학생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신여성 사이에서만 애용되었다. 하지만 어깨허리의 편리함으로 인해 1970년대 이후로는 기존 치마허리의 착용이 익숙한 노인세대조차 어깨허리를 단 치마를 입게 되었다.한편 조선시대 치마의 실루엣은 여러 겹 입은 속곳으로 인해 매우 부풀어져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상체는 꼭 끼게 하체는 풍성한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여자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지고 각종 속곳이 줄어들고 고쟁이와 속치마만 입게 되면서 치마의 폭과 실루엣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복이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예복으로만 착용되는 1970년대부터는 다시 폭이 넓은 치마가 유행하였다. 다만 조선시대와 달리 치마의 실루엣이 A자 모양이 되도록 하여 풍성한 실루엣을 유지하면서도 날씬해 보이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내용

치마는 여자의 하반신에 입는 옷 중에서 가장 겉에 입는 것이다. 치마는 한자로 ‘군裙’ 혹은 ‘상裳’에 해당되지만 조선시대 문헌에는 우리말의 음을 따서 ‘赤亇’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赤亇’의 기록은 『세종실록世宗實錄』 1420년(세종 2) 9월 원경왕후元敬王后 천전의薦奠儀에 처음 등장한다.우리나라의 치마 양식은 허리나 가슴에 두르는 띠 부분과 그 아래에 몸을 가리도록 덮는 치마 부분으로 나뉜다. 몸에 두르도록 하는 흰색 넓은 띠 부분은 ‘치마허리’라고 부른다. 치마허리는 치마폭과 연결되어 있다. 치마 너비는 원하는 옷감의 폭만큼 세로로 이어 붙인 다음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 치마허리와 연결하여 만든다. 예복용 치마는 일상용 치마에 비해 치마를 더 넓고 길게 만든다. 치마는 연령과 용도 혹은 착용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옷감과 색상이 사용된다.오늘날은 겹치마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조선시대에는 계절이나 용도에 따라 다양한 치마가 있었다. 일상용 치마는 계절별로 소재나 바느질법 혹은 손질법이 다양하였다. 여름철에는 홑치마를 많이 입었는데, 여름철 홑치마 중에서 풀을 먹인 후 다듬이질과 다림질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대기 위에 펴서 햇볕에 말려 손질한 치마를 ‘쟁치마’라고 하였다. ‘쟁’이란 ‘재양載陽’의 준말로 재양틀에 대고 꿰매거나 재양판板에 붙여 말리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를 ‘쟁친다’고 하였다.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솜치마나 누비치마를 애용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솜치마나 누비치마는 사라지고 겹이나 홑으로 만든 치마가 보편화되었다. 겹치마는 계절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예복용일 경우는 계절에 관계없이 겹치마를 주로 입었다. 그러나 예복용 치마 중에도 홑으로 만든 치마가 있었다. 치마의 좌우 옆선과 아랫단 등 가랑자리에 이색異色의 선을 댄 치마이며, 흔히 ‘선단치마’라고도 부른다.금박을 장식한 예복용 치마는 ‘스란치마’라고 한다. ‘스란’이란 ‘슬란膝襴’에서 온 말로 직금織金이 무릎 부분에 오도록 만든 치마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직금이 두 군데 들어갈 경우 무릎 부분의 직금이 훨씬 넓고 아랫단의 직금은 없거나 좁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는 직금보다 금박이 많이 애용되면서 스란단을 별도의 천에 만들어 치마에 붙이는 식으로 변화되었다. 이 경우 스란단을 가로로 두 단을 댄 것은 ‘대란치마’라고 하였는데, 직금 치마와 마찬가지로 무릎 부분에 댄 장식단이 아래에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스란단을 댄 치마들은 내외명부內外命婦와 같이 상당히 높은 신분의 여성만이 입을 수 있었으며, 그중에서 대란치마는 왕비에게만 허용된 것이다.한편 궁중복식 중에는 예복 위에만 덧입는 ‘웃치마’, ‘전행웃치마’ 등의 의례용 치마가 있다. 웃치마는 다른 치마보다 길이와 폭이 좁지만 무릎 부분에 금박단을 장식한 것이다. 궁중정재에서 여기女妓들이 착용한 것이 궁중기록화에서 확인된다. 전행웃치마는 왕비나 왕대비 등 왕실 여인들이 대례복을 입을 때 착용했던 치마이다. 치마허리에 주름을 곧게 잡은 세 자락을 연결한 것이다. 착용하면 뒤로 위치하게 될 좌우의 두 자락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길이이며, 앞자락은 바닥과 가지런할 정도의 길이로 만들었다. 전행웃치마에도 금박장식이 되어 있다.반면 서민들은 폭도 좁고 길이도 짧은 치마를 입었다. ‘두루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행에 지장 없도록 짧기 때문에 발목 부분에서 속곳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일할 때는 신분에 관계없이 ‘행주치마’라고 부르는 흰색 앞치마를 입었다. 허리에 둘러 입으며 치마 뒷부분을 여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치마보다 폭이 좁고 길이도 바닥에서 20 이상 올라올 정도로 짧았다. 행주치마는 보통 무명이나 삼베로 만들지만 상류층 사이에선 모시로 만든 것도 있었다. 또한 ‘쓰개치마’는 치마의 폭을 좁게 만들어 여성의 내외용 쓰개로 활용한 것이었다.어린 아이들에게도 남녀에 관계없이 치마를 많이 입혔는데, 이를 ‘두렁치마’라고 한다. 배탈이 나지 않게 덮어 주기 위한 목적이며, 누비로도 만들었다.치마의 색상은 연령별로 차이가 있었다. 치마의 색상은 처음에는 비교적 다양한 색상이 사용되었고 황색 치마도 애용된 편이지만, 후기로 갈수록 색상은 청·홍 두 색상 위주로 단순화되었다. 홍색 치마는 주로 미혼여성이나 새댁이, 청색 치마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 일상에도 입었고 특히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에 애용하였다. 옥색 치마는 제삿날에도 입지만 평상시에 입어도 무방하였고, 노인용이나 여름철 색상으로 애호되었다. 왕실 여성들은 자색 치마도 즐겨 입었다. 흰색 치마는 여름철 치마로 신분에 관계없이 즐겨 입었지만 검은색 치마는 선호되는 색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일할 때 검은색 치마를 입어 쉽게 치마의 오염이 드러나는 것을 피했으며, 강원도 강릉 등 일부 지방에서는 혼수로 검정 치마를 준비해 부엌일을 할 때 착용했다고도 한다.

특징 및 의의

우리나라의 치마는 풍성한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 여러 겹의 속곳을 받쳐 입었으나 속치마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속치마로 활용된 치마에는 ‘대슘치마’나 ‘무지기치마’가 있는데, 이들은 궁중이나 양반들의 예장용이었을 뿐 평상시에 입는 옷은 아니었다.한편 우리나라의 치마는 둘러 입는 형식으로 신체 치수에 비교적 구애를 덜 받는 편이었다. 옷감도 직사각형으로 재단되므로 치맛감은 때로는 이불이나 요의 옷감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하는 등 활용도가 높은 편이었다.

참고문헌

금선단 치마 입고 어디 다녀오셨을까(문경새재박물관, 민속원, 2005), 조선시대 여인의 멋과 차림새(박성실·조효숙·이은주, 단국대학교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