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관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장경희(張慶姬)
갱신일 2018-10-23

정의

조선시대 고위층 사대부가 편복 차림 위에 착용하던 관.

내용

주자학朱子學을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는 주자朱子에게 영향을 미친 북송대北宋代 학자들을 흠모하여 그들이 착용했던 관을 따라 썼다. 그중 정자관은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착용했던 관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자는 정호程顥(1032~1085)와 정이程頤(1033~1107) 형제를 가리키며, 둘을 아울러 이정二程이라고도 한다. 이들 형제가 착용한 두건을 정자건程子巾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의 예서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는 이들의 문집인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정이가 썼던 두건의 치수를 인용하고 있다. 또 『명신록名臣錄』을 언급하면서 정이가 편복을 입고 착용한 통이 높고 첨이 낮은 모자에 끈을 매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조선 전기 명종 때 편찬된 『청강선생후청세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의하면 당시 사대부들이 주자관朱子冠·겸계관謙溪冠·동파관東坡冠·충정관沖正冠 등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자 가운데 특히 정자관과 동파관은 『경도잡지京都雜誌』를 통해 알 수 있듯 정조 대에 이르러 평상시에도 착용될 정도로 애용되었고, 조선 후기 이전까지 혼용되었다.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삼재도회三才圖會』의 내용을 인용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동파건東坡巾’을 정자관이라고 부른다고 하였고, 1758년(영조 3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영조가 정자관과 동파관의 형태에 대하여 물었을 때 특진관 홍상한洪象漢이 양자가 대동소이하다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조선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정자관과 동파관을 동일시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채李采(1745~1820)의 초상화에서도 그 인식이 확인된다. 이채는 머리 위에 네모진 이중 관모를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화면 오른쪽 위 제발題跋에 이채 스스로 “관은 정자관을 쓰고 옷은 문공(주자)의 심의를 입고 있다冠程子冠 衣文公深衣.”라고 썼다. 이로 미루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정자관은 직선적이며 동파관과 유사한 관모를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각종 초상화나 흑백 사진 및 각 박물관에 유존하는 정자관 유물은 이전 시기의 네모진 정자관과 달리 산처럼 뾰족한 형태이다. 예를 들어 1894~1901년에 조선을 방문한 테일러의 그림이나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관을 역임한 김가진의 사진, 1896년 화가 커즌G. Curzon이 그린 대원군의 모습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정자관을 말총으로 만들며 그 모양은 여섯 봉우리가 삐죽 솟아 있듯 하다고 묘사하거나, 뾰족탑이나 상중관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로 미루어 지금 형태의 정자관은 19세기 말에 비로소 고위층 관료를 중심으로 편복 차림 위에 유행하여, 그들의 신분과 계층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95년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상투를 잘랐고, 그에 따라 정자관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당시 채용신이 그린 여러 초상화를 통해 구한말에 신분의 상징으로 실내에서 착용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점차 정자관의 착용이 줄어 그것을 제작하는 기술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을 지정하고 정자관 제작 기술을 지니고 있는 김공춘을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이후 2009년에 들어 그를 명예보유자로 인정하고, 동시에 그의 딸인 김혜정을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정자관은 북송대의 유학자 이정 형제가 착용하던 모자에서 유래하여 조선 사대부들이 애호하던 관이다. 말총으로 봉우리가 뾰족뾰족한 삼산관三山冠처럼 만들며, 조선의 사대부들이 편복 차림으로 실내에서 착용하였다. 그 전형적인 형태와 특징은 19세기 후반 초상화나 사진 및 유물을 통해 볼 수 있다.
정자관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말총의 투명한 성질을 활용하여 탕건을 만들어 쓰고 그 위에 정자관을 겹쳐 쓴 것은 조선의 독자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의 고위층 관료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계층을 상징하여 산처럼 뾰족한 형태로 만들었으며, 단층의 정자관보다 상하 2층으로 중첩된 정자관을 애용한 것도 조선적인 특징이다. 이처럼 정자관은 조선 사대부의 빼어난 미감과 조선 장인의 창안으로 만든 독특한 모자이다. 오늘날 말총으로 정자관을 만드는 기술은 국가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관모와 수식(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단국대학교출판부, 1993), 서양인이 본 조선말기 남성모자(최재영,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조선시대 관모공예사 연구(장경희, 경인문화사, 2004), 탕건장(장경희, 화산문화, 2000).

정자관

정자관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장경희(張慶姬)
갱신일 2018-10-23

정의

조선시대 고위층 사대부가 편복 차림 위에 착용하던 관.

내용

주자학朱子學을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는 주자朱子에게 영향을 미친 북송대北宋代 학자들을 흠모하여 그들이 착용했던 관을 따라 썼다. 그중 정자관은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착용했던 관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자는 정호程顥(1032~1085)와 정이程頤(1033~1107) 형제를 가리키며, 둘을 아울러 이정二程이라고도 한다. 이들 형제가 착용한 두건을 정자건程子巾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의 예서 『상변통고常變通攷』에서는 이들의 문집인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정이가 썼던 두건의 치수를 인용하고 있다. 또 『명신록名臣錄』을 언급하면서 정이가 편복을 입고 착용한 통이 높고 첨이 낮은 모자에 끈을 매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조선 전기 명종 때 편찬된 『청강선생후청세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의하면 당시 사대부들이 주자관朱子冠·겸계관謙溪冠·동파관東坡冠·충정관沖正冠 등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자 가운데 특히 정자관과 동파관은 『경도잡지京都雜誌』를 통해 알 수 있듯 정조 대에 이르러 평상시에도 착용될 정도로 애용되었고, 조선 후기 이전까지 혼용되었다.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삼재도회三才圖會』의 내용을 인용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동파건東坡巾’을 정자관이라고 부른다고 하였고, 1758년(영조 3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영조가 정자관과 동파관의 형태에 대하여 물었을 때 특진관 홍상한洪象漢이 양자가 대동소이하다고 대답하였다.이렇게 조선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정자관과 동파관을 동일시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채李采(1745~1820)의 초상화에서도 그 인식이 확인된다. 이채는 머리 위에 네모진 이중 관모를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화면 오른쪽 위 제발題跋에 이채 스스로 “관은 정자관을 쓰고 옷은 문공(주자)의 심의를 입고 있다冠程子冠 衣文公深衣.”라고 썼다. 이로 미루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정자관은 직선적이며 동파관과 유사한 관모를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각종 초상화나 흑백 사진 및 각 박물관에 유존하는 정자관 유물은 이전 시기의 네모진 정자관과 달리 산처럼 뾰족한 형태이다. 예를 들어 1894~1901년에 조선을 방문한 테일러의 그림이나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관을 역임한 김가진의 사진, 1896년 화가 커즌G. Curzon이 그린 대원군의 모습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정자관을 말총으로 만들며 그 모양은 여섯 봉우리가 삐죽 솟아 있듯 하다고 묘사하거나, 뾰족탑이나 상중관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로 미루어 지금 형태의 정자관은 19세기 말에 비로소 고위층 관료를 중심으로 편복 차림 위에 유행하여, 그들의 신분과 계층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1895년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상투를 잘랐고, 그에 따라 정자관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당시 채용신이 그린 여러 초상화를 통해 구한말에 신분의 상징으로 실내에서 착용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점차 정자관의 착용이 줄어 그것을 제작하는 기술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을 지정하고 정자관 제작 기술을 지니고 있는 김공춘을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이후 2009년에 들어 그를 명예보유자로 인정하고, 동시에 그의 딸인 김혜정을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정자관은 북송대의 유학자 이정 형제가 착용하던 모자에서 유래하여 조선 사대부들이 애호하던 관이다. 말총으로 봉우리가 뾰족뾰족한 삼산관三山冠처럼 만들며, 조선의 사대부들이 편복 차림으로 실내에서 착용하였다. 그 전형적인 형태와 특징은 19세기 후반 초상화나 사진 및 유물을 통해 볼 수 있다.정자관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말총의 투명한 성질을 활용하여 탕건을 만들어 쓰고 그 위에 정자관을 겹쳐 쓴 것은 조선의 독자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의 고위층 관료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계층을 상징하여 산처럼 뾰족한 형태로 만들었으며, 단층의 정자관보다 상하 2층으로 중첩된 정자관을 애용한 것도 조선적인 특징이다. 이처럼 정자관은 조선 사대부의 빼어난 미감과 조선 장인의 창안으로 만든 독특한 모자이다. 오늘날 말총으로 정자관을 만드는 기술은 국가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관모와 수식(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단국대학교출판부, 1993), 서양인이 본 조선말기 남성모자(최재영,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조선시대 관모공예사 연구(장경희, 경인문화사, 2004), 탕건장(장경희, 화산문화,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