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오선희(吳宣希)
갱신일 2018-10-23

정의

신체나 의복에 부착하여 몸을 치장하는 도구.

내용

인간에게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이 있으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장신구를 널리 착용해 왔다. 우리나라 역시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이미 옥석玉石을 갈아 만든 관옥管玉이나 짐승의 뼈로 만든 목걸이 장식이 발견되는 등 장신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청동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도의 공예기술로 만든 화려한 금·은·금동제 장신구가 제작되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미적 욕구의 충족에서 출발한 장신구는 사회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기능과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신체에 부착하여 악귀를 쫓는 주술적 의미를 내포하거나 통과의례를 치르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착용자의 신분과 경제적 상태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신라 사람들을 가리켜 “여자들이 미발美髮을 머리에 동이고 주채珠綵로써 장식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고리·목걸이·팔찌·반지와 같이 몸에 차는 장신구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새와 꽃, 당초문 등이 섬세하게 장식된 왕비의 금제金製 뒤꽂이가 발굴되어 화려한 공예 기술을 보여 준다.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에 언급된 통일신라의 장신구인 소梳(빗)와 채釵의 재료로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통해 들어오는 슬슬전瑟瑟鈿(터키석이나 에메랄드 등 푸른색 보석류), 대모玳瑁, 상아象牙 등이 있어, 국내외 재료를 이용해 다채로운 빗과 비녀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된 유물 양에 편차가 커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들 삼국시대의 장신구는 나라별로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 준다. 특히 고구려 귀고리는 굵은 고리의 태환식太鐶式, 백제 귀걸이는 무령왕릉에서의 출토품을 제외하면 대체로 장식이 간결하고 소박한 가는 고리의 세환식細鐶式이 출토된다. 신라 귀고리에는 태환식과 세환식이 공존하며 영락瓔珞 장식과 누금세공鏤金細工으로 화려하게 제작되었다. 목걸이는 금이나 유리, 각종 옥을 연결한 형태였으며 중심부에 곡옥曲玉을 장식한 경우가 많다. 팔찌는 금속제 환環이나 옥, 유리구슬을 연결한 형태가 있었다. 팔찌의 경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왕비의 팔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양각되었으며, 경상북도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의 팔찌는 누금 세공에 보석을 감입嵌入하여 화려하게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뒤이어 고려시대에도 다양한 장신구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다. 금· 은·청동류의 동곳, 봉황·닭 모양의 비녀, 대모로 만든 빗이 남아 있어 머리 장식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순금 귀걸이 및 당초문·톱니문 등을 새기거나 보석을 감입한 금·은 반지가 전해진다. 고려 불화를 통해서도 왕비와 시녀들이 붉은색 댕기를 드리고 화려한 장식비녀를 꽂은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윤리와 규범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이는 복식을 비롯한 여러 장신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신체를 훼손하거나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고대부터 화려하게 발달했던 목걸이나 팔찌, 귀고리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대신 옷과 몸가짐의 매무새를 정돈하는 데 필수적인 용품들에 장식을 추가하거나 실용적 도구를 장신구로 사용하는 등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하는 조선시대 장신구만의 독특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유교는 내세보다 현세에서의 행복을 중요시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상으로, 장신구의 문양에서도 부귀와 장수, 복록福祿, 벽사 등 기복을 상징하는 것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여성 장신구에서는 지조와 정절을 상징하는 매화와 대나무 문양, 다남을 상징하는 고추·가지·석류, 부부금슬을 염원하는 나비, 원앙 등의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여성을 향한 사회적 시선을 대변하며 부계중심적인 당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가치 기준을 말해 준다. 반면, 남성 장신구에서는 선비의 덕을 상징하는 사군자문이나 장수를 상징하는 문양, 백성을 다스리는 이념을 담은 문양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는 가체금지령을 계기로 머리 장식과 노리개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가체 사용이 제한되고 얹은머리 대신 쪽머리가 권장되면서 가체에 치중하던 사치가 머리 장신구로 옮아갔으며, 이로 인해 종류가 다양해지고 장식이 점차 화려해졌다. 비녀[簪]는 쪽머리의 필수품으로서 역할이 확대되면서 잠두簪頭의 모양과 크기 및 장식이 다채로워졌으며, 일상용으로는 짧고 장식이 소박한 것을 사용하고 의례용으로는 길고 화려한 비녀를 꽂았다. 비녀와 함께 쪽머리에 덧꽂는 뒤꽂이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귀이개나 빗치개와 같이 실용적인 용도를 겸한 것도 사용되었다. 특정 계층의 머리장식으로 발달한 것에는 떨잠첩지가 있다. 떨잠은 의식儀式 때 왕비를 비롯하여 내외명부內外命婦가 큰머리어여머리에 꽂던 최고의 머리 장식이다. 새나 벌 모양 등을 용수철로 달아 놓은 ‘떨새’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면서 장식적인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첩지는 쪽머리의 가르마 부분에 장식하는 것으로써 궁중과 상류층 여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계급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여 황후는 용첩지, 비빈妃嬪은 봉첩지, 내외명부는 개구리첩지를 사용했다. 첩지는 쪽머리 위에 얹힌 족두리를 고정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신분을 나타내는 사회적 상징물로 정착되었다. 머리 장식 외 잘 알려진 여인들의 장신구로는 다채로운 장식과 율동감으로 정숙성과 절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 복식에 화려함을 더해 주던 노리개가 있었다.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 등에 차는 것이며, 궁중을 비롯한 상류 사회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패용하였다. 주체의 개수에 따라 단작單作노리개에서 삼작三作노리개까지 있었는데, 단작노리개와 같이 간단한 것은 평상시에 착용하고 삼작三作노리개 이상은 의례용으로 착용하였다. 장도粧刀나 바늘집, 침통針筒 등 실용적 용도를 지닌 것을 주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향노리개는 은은한 향을 풍김으로써 여인의 매력을 높임과 동시에 위급 상황에서의 비상약으로 쓰였으며, 줄향노리개, 향주머니 노리개, 향갑香匣노리개 등 다양한 형태로 애용되었다.
조선시대 남성의 장신구에는 수식首飾과 입식立飾이 있다. 기혼 남성은 반드시 상투머리를 해야 했으며 이를 고정하기 위해 동곳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동곳은 다리가 하나인 작은 기둥과 같은 형태로, 상투 아래쪽에서 올려 꽂아 상투가 풀어지지 않고 고정되도록 하였다. 신분에 따른 제약은 없었으나 상류층은 옥·산호珊瑚·호박琥珀 등으로, 서민층은 은이나 백동으로 만드는 등 재료에 차등을 두고 사용하였다. 상투머리를 튼 후에는 이를 단단히 매고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망건網巾을 착용하는데, 망건의 부속품인 관자貫子와 풍잠風簪은 장식의 역할도 겸하였다. 관자는 망건의 좌우에 달아 당줄을 꿰어 거는 작은 고리이며, 재료와 문양에 따라 품계나 신분을 표시하였다. 금관자와 옥관자가 매우 귀중하게 사용되었으며, ‘도리옥’이라고 하는 질이 좋고 무늬가 없는 옥관자를 최고로 여겼다. 품계가 높을수록 무늬가 없고 소박한 것을 사용한 특징이 있는데, 여기에는 겸손함을 보이고 교만함을 자제하는 뜻이 담겨 있다. 풍잠은 망건 상부의 중앙에 꾸미는 장식품이며, 갓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무·대모玳瑁·옥·수정水晶 등의 재료로 반달형으로 만들었으며, 나무나 우각牛角으로 된 풍잠 가운데는 빗살이 부착된 것도 있다. 입식에는 정자頂子와 갓끈(입영笠 纓)이 있다. 정자는 갓[黑笠]이나 전립戰笠의 정상에 장식한 것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직품에 따라 백옥·수정 등의 정자를 달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품계에 따라 금·은·옥·수정 등으로 재료의 차이가 있었으며, 전립에는 금동金銅이나 은정자를 달고 갓에는 옥정자를 달았다. 옥정자의 대표적인 것은 백로白鷺(해오라기)의 형상을 조각한 옥로玉鷺이며 청렴결백한 관리를 상징하였다. 갓끈은 본래 갓을 매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헝겊으로 만들었으나 끈의 기능보다 장식의 역할이 부각되며 사치의 대상이 되었다. 옥·마노·호박·산호·수정 등으로 만들었으며, 신분이나 갓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흥선대원군 집정 시에는 의관문물의 간소화 시책에 따라 대나무를 사용하도록 하여 죽영竹纓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그 밖의 패식품佩飾品으로는 지환指環과 귀걸이, 주머니가 있다. 지환에는 한 짝인 반지, 두 짝인 가락지, 두 짝이 붙어 있는 합반지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특히 가락지가 애용되었다. 남녀의 애정과 혼인의 징표로 여겨졌으며, 반지는 미혼여성, 가락지는 기혼여성이 착용하였다. 귀고리는 원래 귀천에 관계없이 남녀 모두 착용하였으며 사대부가의 남성들도 금·은 귀고리를 하였다. 그러나 귀를 뚫는 것이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불효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여성에 한해 의식이나 혼례 때에 귀에 거는 형태의 귀걸이를 사용하였다. 주머니는 돌쟁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널리 찼으며 둥근 모양의 두루주머니夾囊(염낭)과 각진 모양의 귀주머니角囊(각낭)이 있었다. 대개 벽사의 뜻이 있는 붉은색의 비단이나 무명으로 만들며, 부귀·장생을 상징하는 길상문양의 수繡와 금박으로 꾸몄다. 기타 남성 장신구로는 선추扇錘가 있었다. 선추는 부채의 쇠고리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식품이었다. 양반이라도 과거를 치르지 않고 가문의 덕으로 특별 임용된 음관蔭官이나 당상관 미만의 무관은 사용할 수 없는, 신분 표시가 되는 지체 높은 장식이다. 선추에는 부채의 미적 효과를 높이는 장식성 외에 나침반, 의료용 침통, 귀이개와 이쑤시개를 넣은 초혜집 등을 달아 실용성도 갖추었다.

특징 및 의의

장신구는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차적 목적에서 출발하여 신분과 계급을 상징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조들의 삶과 함께하면서 장신구는 삼국시대의 찬란한 금제 장신구들에서 조선시대의 소박하면서도 다채로운 장신구들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거쳐 왔다. 단순한 장식 수단을 넘어 외래 문물과의 교류사를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하였으며, 부귀영화富貴榮華·길상벽사吉祥辟邪 등 생활 주체의 서사와 소망이 직접적으로 담겨 있는 등 장신구는 복식문화의 일부분으로서 당대의 정서와 미감이 투영된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덕목을 강조한 조선 사회의 풍조는 신분의 차이를 강조하도록 하였으며, 장신구를 착용하는 데에도 계급에 따라 종류·색·문양·소재에 차이를 두었다. 금· 은·옥·비취翡翠·산호·마노瑪瑙·호박 등을 소재로 하는 장신구는 상류층에서 사용하였으며 가보로 대물림되기도 하였다. 이조차 명明나라에 금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과 함께 조공을 면하기 위한 정책으로 복식뿐 아니라 각종 기물에 이르기까지 금의 사용을 금지해 순금純金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궁중에서도 주로 도금鍍金을 사용하였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야 순금으로 된 장신구를 사용하였다. 금 외에도 각종 보패류寶貝類와 옥석류玉石類를 사용하고 파란[琺瑯], 비취모翡翠毛 등으로 장식함으로써 단아하고 간결하면서도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일반 서민들은 동銅·백동·나무·뿔[角]·뼈[骨] 등의 소재에 간결한 조형의 장신구를 사용하였다. 사용 문양에도 마찬가지로 차등을 두었는데, 특히 용과 봉황 문양은 왕실의 권위와 기품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궁중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혼례시에는 신분과 품계를 초월하여 일반 여성들도 용잠龍簪을 꽂고 각종 비녀떨잠 등으로 장식하는 등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예외적으로 기녀들은 규제의 대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각종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담인복식미술관 개관도록(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9), 우리옷과 장신구(이경자·홍나영·장숙환, 열화당, 2003), 조선여인의 미(부산박물관, 2005),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이난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장신구

장신구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오선희(吳宣希)
갱신일 2018-10-23

정의

신체나 의복에 부착하여 몸을 치장하는 도구.

내용

인간에게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이 있으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장신구를 널리 착용해 왔다. 우리나라 역시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이미 옥석玉石을 갈아 만든 관옥管玉이나 짐승의 뼈로 만든 목걸이 장식이 발견되는 등 장신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청동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도의 공예기술로 만든 화려한 금·은·금동제 장신구가 제작되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미적 욕구의 충족에서 출발한 장신구는 사회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기능과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신체에 부착하여 악귀를 쫓는 주술적 의미를 내포하거나 통과의례를 치르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착용자의 신분과 경제적 상태를 표시하기도 하였다.『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신라 사람들을 가리켜 “여자들이 미발美髮을 머리에 동이고 주채珠綵로써 장식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귀고리·목걸이·팔찌·반지와 같이 몸에 차는 장신구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새와 꽃, 당초문 등이 섬세하게 장식된 왕비의 금제金製 뒤꽂이가 발굴되어 화려한 공예 기술을 보여 준다.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에 언급된 통일신라의 장신구인 소梳(빗)와 채釵의 재료로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통해 들어오는 슬슬전瑟瑟鈿(터키석이나 에메랄드 등 푸른색 보석류), 대모玳瑁, 상아象牙 등이 있어, 국내외 재료를 이용해 다채로운 빗과 비녀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된 유물 양에 편차가 커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들 삼국시대의 장신구는 나라별로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 준다. 특히 고구려 귀고리는 굵은 고리의 태환식太鐶式, 백제 귀걸이는 무령왕릉에서의 출토품을 제외하면 대체로 장식이 간결하고 소박한 가는 고리의 세환식細鐶式이 출토된다. 신라 귀고리에는 태환식과 세환식이 공존하며 영락瓔珞 장식과 누금세공鏤金細工으로 화려하게 제작되었다. 목걸이는 금이나 유리, 각종 옥을 연결한 형태였으며 중심부에 곡옥曲玉을 장식한 경우가 많다. 팔찌는 금속제 환環이나 옥, 유리구슬을 연결한 형태가 있었다. 팔찌의 경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왕비의 팔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양각되었으며, 경상북도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의 팔찌는 누금 세공에 보석을 감입嵌入하여 화려하게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뒤이어 고려시대에도 다양한 장신구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다. 금· 은·청동류의 동곳, 봉황·닭 모양의 비녀, 대모로 만든 빗이 남아 있어 머리 장식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순금 귀걸이 및 당초문·톱니문 등을 새기거나 보석을 감입한 금·은 반지가 전해진다. 고려 불화를 통해서도 왕비와 시녀들이 붉은색 댕기를 드리고 화려한 장식비녀를 꽂은 모습 등을 볼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윤리와 규범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이는 복식을 비롯한 여러 장신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신체를 훼손하거나 사치품으로 여겨지는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고대부터 화려하게 발달했던 목걸이나 팔찌, 귀고리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대신 옷과 몸가짐의 매무새를 정돈하는 데 필수적인 용품들에 장식을 추가하거나 실용적 도구를 장신구로 사용하는 등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하는 조선시대 장신구만의 독특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유교는 내세보다 현세에서의 행복을 중요시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상으로, 장신구의 문양에서도 부귀와 장수, 복록福祿, 벽사 등 기복을 상징하는 것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여성 장신구에서는 지조와 정절을 상징하는 매화와 대나무 문양, 다남을 상징하는 고추·가지·석류, 부부금슬을 염원하는 나비, 원앙 등의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여성을 향한 사회적 시선을 대변하며 부계중심적인 당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가치 기준을 말해 준다. 반면, 남성 장신구에서는 선비의 덕을 상징하는 사군자문이나 장수를 상징하는 문양, 백성을 다스리는 이념을 담은 문양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는 가체금지령을 계기로 머리 장식과 노리개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가체 사용이 제한되고 얹은머리 대신 쪽머리가 권장되면서 가체에 치중하던 사치가 머리 장신구로 옮아갔으며, 이로 인해 종류가 다양해지고 장식이 점차 화려해졌다. 비녀[簪]는 쪽머리의 필수품으로서 역할이 확대되면서 잠두簪頭의 모양과 크기 및 장식이 다채로워졌으며, 일상용으로는 짧고 장식이 소박한 것을 사용하고 의례용으로는 길고 화려한 비녀를 꽂았다. 비녀와 함께 쪽머리에 덧꽂는 뒤꽂이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귀이개나 빗치개와 같이 실용적인 용도를 겸한 것도 사용되었다. 특정 계층의 머리장식으로 발달한 것에는 떨잠과 첩지가 있다. 떨잠은 의식儀式 때 왕비를 비롯하여 내외명부內外命婦가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던 최고의 머리 장식이다. 새나 벌 모양 등을 용수철로 달아 놓은 ‘떨새’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면서 장식적인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첩지는 쪽머리의 가르마 부분에 장식하는 것으로써 궁중과 상류층 여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계급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여 황후는 용첩지, 비빈妃嬪은 봉첩지, 내외명부는 개구리첩지를 사용했다. 첩지는 쪽머리 위에 얹힌 족두리를 고정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신분을 나타내는 사회적 상징물로 정착되었다. 머리 장식 외 잘 알려진 여인들의 장신구로는 다채로운 장식과 율동감으로 정숙성과 절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 복식에 화려함을 더해 주던 노리개가 있었다.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 등에 차는 것이며, 궁중을 비롯한 상류 사회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패용하였다. 주체의 개수에 따라 단작單作노리개에서 삼작三作노리개까지 있었는데, 단작노리개와 같이 간단한 것은 평상시에 착용하고 삼작三作노리개 이상은 의례용으로 착용하였다. 장도粧刀나 바늘집, 침통針筒 등 실용적 용도를 지닌 것을 주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향노리개는 은은한 향을 풍김으로써 여인의 매력을 높임과 동시에 위급 상황에서의 비상약으로 쓰였으며, 줄향노리개, 향주머니 노리개, 향갑香匣노리개 등 다양한 형태로 애용되었다.조선시대 남성의 장신구에는 수식首飾과 입식立飾이 있다. 기혼 남성은 반드시 상투머리를 해야 했으며 이를 고정하기 위해 동곳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동곳은 다리가 하나인 작은 기둥과 같은 형태로, 상투 아래쪽에서 올려 꽂아 상투가 풀어지지 않고 고정되도록 하였다. 신분에 따른 제약은 없었으나 상류층은 옥·산호珊瑚·호박琥珀 등으로, 서민층은 은이나 백동으로 만드는 등 재료에 차등을 두고 사용하였다. 상투머리를 튼 후에는 이를 단단히 매고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망건網巾을 착용하는데, 망건의 부속품인 관자貫子와 풍잠風簪은 장식의 역할도 겸하였다. 관자는 망건의 좌우에 달아 당줄을 꿰어 거는 작은 고리이며, 재료와 문양에 따라 품계나 신분을 표시하였다. 금관자와 옥관자가 매우 귀중하게 사용되었으며, ‘도리옥’이라고 하는 질이 좋고 무늬가 없는 옥관자를 최고로 여겼다. 품계가 높을수록 무늬가 없고 소박한 것을 사용한 특징이 있는데, 여기에는 겸손함을 보이고 교만함을 자제하는 뜻이 담겨 있다. 풍잠은 망건 상부의 중앙에 꾸미는 장식품이며, 갓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무·대모玳瑁·옥·수정水晶 등의 재료로 반달형으로 만들었으며, 나무나 우각牛角으로 된 풍잠 가운데는 빗살이 부착된 것도 있다. 입식에는 정자頂子와 갓끈(입영笠 纓)이 있다. 정자는 갓[黑笠]이나 전립戰笠의 정상에 장식한 것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직품에 따라 백옥·수정 등의 정자를 달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품계에 따라 금·은·옥·수정 등으로 재료의 차이가 있었으며, 전립에는 금동金銅이나 은정자를 달고 갓에는 옥정자를 달았다. 옥정자의 대표적인 것은 백로白鷺(해오라기)의 형상을 조각한 옥로玉鷺이며 청렴결백한 관리를 상징하였다. 갓끈은 본래 갓을 매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헝겊으로 만들었으나 끈의 기능보다 장식의 역할이 부각되며 사치의 대상이 되었다. 옥·마노·호박·산호·수정 등으로 만들었으며, 신분이나 갓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흥선대원군 집정 시에는 의관문물의 간소화 시책에 따라 대나무를 사용하도록 하여 죽영竹纓이 유행하기도 하였다.그 밖의 패식품佩飾品으로는 지환指環과 귀걸이, 주머니가 있다. 지환에는 한 짝인 반지, 두 짝인 가락지, 두 짝이 붙어 있는 합반지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특히 가락지가 애용되었다. 남녀의 애정과 혼인의 징표로 여겨졌으며, 반지는 미혼여성, 가락지는 기혼여성이 착용하였다. 귀고리는 원래 귀천에 관계없이 남녀 모두 착용하였으며 사대부가의 남성들도 금·은 귀고리를 하였다. 그러나 귀를 뚫는 것이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불효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여성에 한해 의식이나 혼례 때에 귀에 거는 형태의 귀걸이를 사용하였다. 주머니는 돌쟁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널리 찼으며 둥근 모양의 두루주머니夾囊(염낭)과 각진 모양의 귀주머니角囊(각낭)이 있었다. 대개 벽사의 뜻이 있는 붉은색의 비단이나 무명으로 만들며, 부귀·장생을 상징하는 길상문양의 수繡와 금박으로 꾸몄다. 기타 남성 장신구로는 선추扇錘가 있었다. 선추는 부채의 쇠고리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식품이었다. 양반이라도 과거를 치르지 않고 가문의 덕으로 특별 임용된 음관蔭官이나 당상관 미만의 무관은 사용할 수 없는, 신분 표시가 되는 지체 높은 장식이다. 선추에는 부채의 미적 효과를 높이는 장식성 외에 나침반, 의료용 침통, 귀이개와 이쑤시개를 넣은 초혜집 등을 달아 실용성도 갖추었다.

특징 및 의의

장신구는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차적 목적에서 출발하여 신분과 계급을 상징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조들의 삶과 함께하면서 장신구는 삼국시대의 찬란한 금제 장신구들에서 조선시대의 소박하면서도 다채로운 장신구들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거쳐 왔다. 단순한 장식 수단을 넘어 외래 문물과의 교류사를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하였으며, 부귀영화富貴榮華·길상벽사吉祥辟邪 등 생활 주체의 서사와 소망이 직접적으로 담겨 있는 등 장신구는 복식문화의 일부분으로서 당대의 정서와 미감이 투영된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유교 덕목을 강조한 조선 사회의 풍조는 신분의 차이를 강조하도록 하였으며, 장신구를 착용하는 데에도 계급에 따라 종류·색·문양·소재에 차이를 두었다. 금· 은·옥·비취翡翠·산호·마노瑪瑙·호박 등을 소재로 하는 장신구는 상류층에서 사용하였으며 가보로 대물림되기도 하였다. 이조차 명明나라에 금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과 함께 조공을 면하기 위한 정책으로 복식뿐 아니라 각종 기물에 이르기까지 금의 사용을 금지해 순금純金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궁중에서도 주로 도금鍍金을 사용하였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야 순금으로 된 장신구를 사용하였다. 금 외에도 각종 보패류寶貝類와 옥석류玉石類를 사용하고 파란[琺瑯], 비취모翡翠毛 등으로 장식함으로써 단아하고 간결하면서도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일반 서민들은 동銅·백동·나무·뿔[角]·뼈[骨] 등의 소재에 간결한 조형의 장신구를 사용하였다. 사용 문양에도 마찬가지로 차등을 두었는데, 특히 용과 봉황 문양은 왕실의 권위와 기품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궁중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혼례시에는 신분과 품계를 초월하여 일반 여성들도 용잠龍簪을 꽂고 각종 비녀와 떨잠 등으로 장식하는 등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예외적으로 기녀들은 규제의 대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각종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담인복식미술관 개관도록(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9), 우리옷과 장신구(이경자·홍나영·장숙환, 열화당, 2003), 조선여인의 미(부산박물관, 2005),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이난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