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양노(尹良老)
갱신일 2018-10-23

정의

옷감, 실, 한지 등을 염료로 물들이는 일.

역사

옷감이나 실 등을 염색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염액의 추출, 침수, 매염처리 등 단계별 작업 과정과 그에 따른 크고 작은 기술이 필요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 복식에 표현된 색, 천마총 출토 말안장에 붙어 있던 염색된 천 조각,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 깔개의 색채, 삼국의 복식과 관련한 명칭에 사용한 색명을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염색한 옷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침염뿐 아니라 홀치기 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술과 염색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내용

우리나라 염색의 시대적 변천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소매·깃·밑단 부분에 다른 색의 옷감으로 선을 두른 옷을 입은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산리水山里 고분 벽화에서는 색동치마를,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에서는 홀치기 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낸 옷을 입은 모습도 보인다.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삼국시대 관련 자료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오채복五彩服·자대수포紫大袖袍·황삼黃衫·적황고赤黃袴·청금고靑錦袴·자라대紫羅帶 등은 모두 옷에 대한 명칭인데, 제각기 색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염색 천으로 만든 옷임을 말해 준다.
백제의 관인官人들은 비의緋依를 입고 자紫·조皂·적赤·청靑·황黃·백白색의 대를 띠어 계급을 구분하였다. 또 신라는 최대의 군단인 구서당九誓幢과 십정十停의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구서당의 옷깃은 위로부터 녹綠―자紫―백白―비緋―흑黑―벽碧―적赤―청靑색으로 정하고, 십정은 옷깃의 색을 위로부터 청―흑―황―녹색으로 하여 계급을 구분하였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이미 사회적 소통으로서의 색채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색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염색 장인이 전문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비해 많은 식물이 자생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식물의 꽃, 잎, 뿌리 등에서 추출한 염액을 이용한 침염 기술이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통일신라시대: 834년(흥덕왕 9)에 내려진 복식금제 중에는 색과 관련한 금령도 포함되었다. 즉 진골대등은 자황赭黃을 금하고 6두품은 자황·자자분紫紫粉·금설홍金屑紅을 금하고, 5두품은 자황·자자분·황설홍黃屑紅·비색緋色을 금하고, 4두품 이하 평인은 자황·자자분·황설비黃屑緋·홍멸자紅滅紫색을 금하였다. 삼국시대와는 전혀 다른 색명이고 또 당시 유행했던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색에 대한 금령이 내려진 원인은 이전 시대와는 생소한 색명과 색을 내기 위한 염료, 또는 염색된 옷감의 수입 등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색명들은 단색염이 아니고 여러 단계 색차를 두고 염색했거나 중염이나 매염제를 써서 다양한 간색을 내는 염색 기술상의 발전을 의미한다. 또 당풍의 유입과 함께 중국의 염색 기술과 정보도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궁중에서의 염색은 염궁染宮·홍전紅典· 소방전蘇芳典·찬염전攢染典에서 전문 인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볼 때 천마총에서 출토된 말안장에 붙어 있던 홍색과 자색의 천 조각 역시 홍전과 소방전에서 염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한편 일본은 752년 6월 15일부터 7월 8일 사이에 일본의 몇몇 귀족과 왕족들이 신라사절을 통해 신라로부터 염료와 안료를 구입했는데 염료는 소방과 자근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소방을 구입한 기록은 짧은 기간 동안 12건이나 되며, 1인이 적게는 20근에서 많게는 810근을 구입하였다. 당시 소방은 타이나 미얀마 등에서 생산되어 신라로 유입되었다. 신라는 국내 소비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 등에 판매하였으므로, 염료 거래 사실은 대외 무역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당시 일본은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아마도 이러한 귀한 염료로 염색할 수 있는 염색 장인도 일본에 보내졌다. 또한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에서 만들어 보낸 색전色氈, 채전彩氈 역시 신라의 염색 문화와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3. 고려시대: 고려 방언으로 염染을 ‘몰체리沒涕里’라고 하는데, 염색 용액을 끓여 옷감을 담가 물들이는 침염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에서 백성까지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 그대로의 모시를 선호하여 염색술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는 왕비나 부인夫人은 홍색을 고상히 여기며 가을과 겨울용 치마에 간혹 황견黃絹을 사용하는데, 어떤 것은 짙고 어떤 것은 엷다고 기록하여 다양한 색보다는 오히려 색의 농담을 살리는 침염이 유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종 때 도염서都染署를 설치하여 염색과 염료 생산을 담당하는데 영令 한 명, 승丞 두 명, 그 밑에 여섯 명을 두고 주로 붉은색 염색을 담당하였다. 1308년에는 도염서와 잡직서를 합쳐 직염국織染局으로 통합되었다가 1310년 다시 도염서로 개칭했다.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고려시대 중국 무역에 필요한 어휘를 정리해 놓은 학습서인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는 의외로 색과 관련한 많은 어휘들이 수록되었다. 예를 들어 감차할·곡도숑·관록·백지록·남·남송(연한 송화색)·녹·뉴청柳靑 뉴황硫黃·다갈茶褐·다홍多紅·분홍·은홍銀紅·도홍桃紅·장색醬色·진자眞紫·침향沈 香·애갈艾褐·밀갈蜜褐·대홍大紅·도홍桃紅·응배갈鹰背褐· 밀갈密褐·백아白魚·사향갈麝香褐·석청石靑·섬황閃黃·소홍小紅·심청深靑·육홍肉紅·아황鵝黃·압두록·앵가록鸚哥綠·야토로·연야토록·엳가은·오烏·유록油綠·은갈銀褐· 자紫·장색醬色·적색赤色·주황朱黃·천홍茜紅·형갈荊褐·명황明黃·남황藍黃·천분홍淺粉紅·심분홍深粉紅·매홍梅紅·행황杏黃·천색淺色·운벽雲碧·금홍金紅·홍매화紅梅花·홍紅· 황黃 등이다.
한편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 사절이 고려를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힐막纈幕을 쳤는데 이 힐막은 옛 제도에는 없었던 것으로 본래 무늬 비단으로 그 빛깔은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여 있어 화려한 것이 볼 만하다 하였다. 힐막의 무늬 위에는 불꽃무늬[火珠]가 있고, 천막의 사방 끝은 넝쿨문양[寶網]으로 드리웠다. 또 순천관의 조전詔殿과 중국 정사와 부사의 자리,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에서 공식 회합을 할 때에는 수놓은 천막인 수막繡幕을 드리우는데, 수막의 장식은 오색으로 하며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 위에서 드리운다. 드리우는 천에는 원앙새, 날고 있는 난새, 화단花團 등을 수놓았다. 또 고려의 습속에는 장막을 칠 때 10여 폭마다 수놓은 그림[繡圖]을 하나씩 걸어 둔다. 수놓은 그림은 붉은 바탕에 녹색으로 테두리를 둘렀고 오색을 섞어 산, 꽃, 놀고 있는 짐승을 수놓았다. 정교하게 수놓은 천막을 능가하고 여기에는 꽃과 대나무, 새와 짐승, 과일 등의 그림도 있는데 하나같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고려시대의 염색은 옷감 자체보다는 오히려 특히 많은 동식물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수놓은 수막과 중국 사절에게 지급되는 수놓은 베개[繡枕], 연회상을 차리고 덮어 놓은 수보자기 등 주로 정교한 수를 놓기 위한 실 염색이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색명들은 고려시대의 자수와 색실 염색 기술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또한 『고려도경』에서는 사절을 위한 연회에서 사용한 술의 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음식재료에 곱게 물들여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을 느끼는 식문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다양한 직물 명칭이 보이고 대부분 색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함께 표기되어 있어 옷의 미적 효과를 높이려고 염색이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과 전세 유물을 보더라도 조선시대 저고리는 길이가 점점 짧아지면서 겨드랑이 밑·고름·깃·회장·끝동 등에 다른 색 천을 사용하여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여성미를 강조하고, 때로는 작은 부위에 강조색을 사용하여 리듬감과 미적 효과를 높인 것이 많다.
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물품이나 교역품에 필요한 염색은 상의원에 소속된 청염장靑染匠 열 명과 홍염장紅染匠 열 명, 제용감에 소속된 홍염장 열 명과 청염장 스무 명의 전문 인력이 담당하였다. 한편 지방 관청 소속 외공장外工匠에는 염색과 관련한 공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궁궐 밖에서는 가내수공업 형태나 각 가정에서 염색을 직접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에 오면서 사염 장인의 수가 증가하여 1789년(정조 13)에는 관청에 소속된 염색 장인을 모두 폐지하였던 것으로도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오방 정색正色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하였기 때문에 궁궐 밖 반가에서는 오히려 수없이 많은 간색間色을 사용함으로써 가가호호 풍부한 색채 감각과 염색술이 비법처럼 전수되었을 것이다. 한 예로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붉은색 계통의 색명이 수십여 가지에 달하고, 같은 색명이라고 해도 짙은 분홍·중분홍·옅은 분홍 등 색상의 명도와 채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로 인해 간색을 내려고 매염제를 사용하고 염색 견뢰도를 높이기 위한 후처리나 보관법 등도 개발되었다. 이러한 비법들은 『규합총서閨閤叢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탁지준절度支準折』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염재, 매염재, 염색 방법이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전통 염색의 맥으로 이어진다.
5. 개항기: 갑신의제개혁과 개항은 전통 염색 기술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말 서양의 화학 염료가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일본은 자국의 염색 산업을 부흥하려는 목적으로 화학 염료를 우리나라에서 판매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오방위의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은 우리나라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쪽염색을 못하게 저지하고 천연 염색의 낮은 견뢰도를 비방하는 내용의 광고 문구를 내세워 화학 염료 판매망을 넓혀 갔다.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漢城周報』 4호에 실린 세창양행世昌洋行의 광고[告白]을 보면, 수입된 각종 서양 옷감들과 함께 각색 염료를 판매하는 광고가 실려 있다. 또 1892년경 광고에는 쪽염을 대신하는 인디고와 왜청이 수입되어 판매되었으며 꼭두서니 염액도 액상으로 추출하여 두 병에 15냥 정도 가격으로 판매하였다.
심지어 1905년 10월 흰옷은 비위생적이며 뒤진 문명의 징표라 하면서 흰옷 대신 검정색이나 색깔 있는 옷을 입으라는 법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또한 1907년 6월 27일자 『만세보萬歲報』에 실린 룡표·꼿표·표물감 광고는 “빛도 곱고 들이기 쉬운 물감, 빨아도 빠지지 않고 벗지도 않는 참 좋은 물감”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전통적 색 정서가 반영된 전통염색 기술은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화학 염료에 밀려 더는 발전하지 못했다.
6. 1980년대 이후: 서양 옷감과 나일론 보급, 서양 복식 문화 유입으로 전통 소재 및 전통 염색에 대한 보급과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198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천연 염색은 마치 섬유 공예 작품을 위한 염색 수단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였다. 다행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해외 여러 나라에 우리의 전통 문화를 알리기 위하여 1980년대 초부터 우리 전통색, 천염염색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전통 염색의 산업화와 활성화 그리고 표준화를 위한 정부 지원 프로젝트가 다수 진행되었다. 천연 염색가 또는 공예가들도 염색 교육 및 전시 등을 통해 일반인도 천연 염색과 전통 염색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지역마다 체험 교육이 활성화되었다.
현재 국가에서는 전통 염색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과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9호 홍염장을 지정하여 현대 사회 속에서 잊혀 가는 전통 염색의 맥을 잇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염색과 관련해 현전하는 기록과 기술 전승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을 기본으로 하여 염재 분류뿐 아니라 염색 결과 역시 오방 정색과 오방 간색의 색채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주로 정색과 간색을 내는 침염이 발달한 반면, 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염색한 천을 기본으로 그 위에 문양을 내는 문양염이 발달하였다.
전통 염색의 염색 방법, 순서, 염액 추출 등은 다른 나라와 별 차이가 없으나 잿물[灰汁]·명반明礬·철장鐵漿· 식초나 오미자·조개껍질·석회石灰 등 매염제는 전통방식을 따르고 있다. 잿물은 예로부터 주로 명아주나 노린재·콩깍지·쪽대·잇대·동백나무·쑥대를 태운 재를 물에 내려 사용하였는데, 특히 명아주 태운 잿물은 잇꽃 염색에 주로 사용하며 노린재나무의 잿물은 주로 자초를 염색할 때 사용한다. 꼭두서니소방목으로 붉은색을 염색할 때는 명반을 사용하며 철장은 주로 검은색 계통의 색으로 염색할 때 많이 사용한다. 현미를 발효한 현미초나 오미자초, 매실은 홍색 염색에 많이 사용하였고, 특히 오미자초는 홍화 염색에 많이 사용하였다. 또 석회는 쪽을 발효할 때 반드시 필요한데,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는 꼬막 껍질을 주로 사용한다.
염색한 천이나 실을 보관할 때는 발색이나 변색을 막기 위한 풀 먹이기와 다듬이질도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풀먹이기는 대왕풀·우뭇가사리· 발효풀·감자풀을 주로 많이 썼는데, 대왕풀은 일명 백급, 자란紫蘭이라는 난초 뿌리를 물에 불려 불에 얹으면 풀기가 베어 나오는데, 아교를 조금 넣으면 좋다. 『규합총서』에는 특히 쪽으로 염색한 옷감은 대왕풀을 먹이지 않으면 쪽빛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명주를 비롯한 견섬유는 우뭇가사리 풀을 먹여 보관하는데, 오래 두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쑤는 방법은 우뭇가사리를 물에 불려 약한 불에서 끓인 후 채반 위에 고운 면주머니를 깔고 내린 물을 사용한다. 발효풀은 쌀로 풀을 쒀서 사용하면 변색되기 때문에 반드시 쌀밥을 해서 밥이 상하면 그것으로 풀을 쑤는데 발효풀은 풀 기운이 쌔고 얼룩이 지지 않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감자풀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방에서 주로 많이 하는 방법인데, 감자를 갈아 전분을 가라앉혀 물을 버리고 이것으로 풀을 쑨다. 그 외에도 생토란, 녹말풀, 계란 흰자도 사용하는데 특히 계란 흰자는 충분히 거품을 내어 사용하면 광택이 나며 또 아교와 함께 쓰면 염색천이 가죽처럼 뻣뻣하다.
이처럼 풀을 먹여 보관하는 방법 외에도 다듬이질과 홍두깨질을 하면 천의 외관이 마치 코팅한 것처럼 윤기가 나는데, 소음 발생 때문에 요즘은 발효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하여 표면의 광택을 살린다. 오래된 홍화로 염색한 천은 식초 물로 수세하면 다시 선명한 색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염색한 모시 옷감은 감물 들인 종이에 싸서 보관하면 옷감의 손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참고문헌

閨閤叢書, 三國史記, 荷齋日記, 신라수공업사연구(박남수, 성신원, 1995), 자연염색공예(김지희·정관채, 한국공예문화진흥원, 2009), 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최재석, 일지사, 1995), 조선 중세 수공업사 연구(홍희유, 지양사, 1989), 조선시대 복식에 나타난 적색계 색명의 의미(남윤자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한국복식문화사전(김영숙, 미술문화, 1998),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염색

염색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윤양노(尹良老)
갱신일 2018-10-23

정의

옷감, 실, 한지 등을 염료로 물들이는 일.

역사

옷감이나 실 등을 염색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염액의 추출, 침수, 매염처리 등 단계별 작업 과정과 그에 따른 크고 작은 기술이 필요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 복식에 표현된 색, 천마총 출토 말안장에 붙어 있던 염색된 천 조각,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 깔개의 색채, 삼국의 복식과 관련한 명칭에 사용한 색명을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염색한 옷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침염뿐 아니라 홀치기 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술과 염색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내용

우리나라 염색의 시대적 변천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1.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소매·깃·밑단 부분에 다른 색의 옷감으로 선을 두른 옷을 입은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산리水山里 고분 벽화에서는 색동치마를,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에서는 홀치기 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낸 옷을 입은 모습도 보인다.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삼국시대 관련 자료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오채복五彩服·자대수포紫大袖袍·황삼黃衫·적황고赤黃袴·청금고靑錦袴·자라대紫羅帶 등은 모두 옷에 대한 명칭인데, 제각기 색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염색 천으로 만든 옷임을 말해 준다.백제의 관인官人들은 비의緋依를 입고 자紫·조皂·적赤·청靑·황黃·백白색의 대를 띠어 계급을 구분하였다. 또 신라는 최대의 군단인 구서당九誓幢과 십정十停의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구서당의 옷깃은 위로부터 녹綠―자紫―백白―비緋―흑黑―벽碧―적赤―청靑색으로 정하고, 십정은 옷깃의 색을 위로부터 청―흑―황―녹색으로 하여 계급을 구분하였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이미 사회적 소통으로서의 색채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색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염색 장인이 전문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비해 많은 식물이 자생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식물의 꽃, 잎, 뿌리 등에서 추출한 염액을 이용한 침염 기술이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2. 통일신라시대: 834년(흥덕왕 9)에 내려진 복식금제 중에는 색과 관련한 금령도 포함되었다. 즉 진골대등은 자황赭黃을 금하고 6두품은 자황·자자분紫紫粉·금설홍金屑紅을 금하고, 5두품은 자황·자자분·황설홍黃屑紅·비색緋色을 금하고, 4두품 이하 평인은 자황·자자분·황설비黃屑緋·홍멸자紅滅紫색을 금하였다. 삼국시대와는 전혀 다른 색명이고 또 당시 유행했던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색에 대한 금령이 내려진 원인은 이전 시대와는 생소한 색명과 색을 내기 위한 염료, 또는 염색된 옷감의 수입 등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색명들은 단색염이 아니고 여러 단계 색차를 두고 염색했거나 중염이나 매염제를 써서 다양한 간색을 내는 염색 기술상의 발전을 의미한다. 또 당풍의 유입과 함께 중국의 염색 기술과 정보도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궁중에서의 염색은 염궁染宮·홍전紅典· 소방전蘇芳典·찬염전攢染典에서 전문 인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볼 때 천마총에서 출토된 말안장에 붙어 있던 홍색과 자색의 천 조각 역시 홍전과 소방전에서 염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한편 일본은 752년 6월 15일부터 7월 8일 사이에 일본의 몇몇 귀족과 왕족들이 신라사절을 통해 신라로부터 염료와 안료를 구입했는데 염료는 소방과 자근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소방을 구입한 기록은 짧은 기간 동안 12건이나 되며, 1인이 적게는 20근에서 많게는 810근을 구입하였다. 당시 소방은 타이나 미얀마 등에서 생산되어 신라로 유입되었다. 신라는 국내 소비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 등에 판매하였으므로, 염료 거래 사실은 대외 무역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당시 일본은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아마도 이러한 귀한 염료로 염색할 수 있는 염색 장인도 일본에 보내졌다. 또한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에서 만들어 보낸 색전色氈, 채전彩氈 역시 신라의 염색 문화와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3. 고려시대: 고려 방언으로 염染을 ‘몰체리沒涕里’라고 하는데, 염색 용액을 끓여 옷감을 담가 물들이는 침염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에서 백성까지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 그대로의 모시를 선호하여 염색술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는 왕비나 부인夫人은 홍색을 고상히 여기며 가을과 겨울용 치마에 간혹 황견黃絹을 사용하는데, 어떤 것은 짙고 어떤 것은 엷다고 기록하여 다양한 색보다는 오히려 색의 농담을 살리는 침염이 유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종 때 도염서都染署를 설치하여 염색과 염료 생산을 담당하는데 영令 한 명, 승丞 두 명, 그 밑에 여섯 명을 두고 주로 붉은색 염색을 담당하였다. 1308년에는 도염서와 잡직서를 합쳐 직염국織染局으로 통합되었다가 1310년 다시 도염서로 개칭했다.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고려시대 중국 무역에 필요한 어휘를 정리해 놓은 학습서인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는 의외로 색과 관련한 많은 어휘들이 수록되었다. 예를 들어 감차할·곡도숑·관록·백지록·남·남송(연한 송화색)·녹·뉴청柳靑 뉴황硫黃·다갈茶褐·다홍多紅·분홍·은홍銀紅·도홍桃紅·장색醬色·진자眞紫·침향沈 香·애갈艾褐·밀갈蜜褐·대홍大紅·도홍桃紅·응배갈鹰背褐· 밀갈密褐·백아白魚·사향갈麝香褐·석청石靑·섬황閃黃·소홍小紅·심청深靑·육홍肉紅·아황鵝黃·압두록·앵가록鸚哥綠·야토로·연야토록·엳가은·오烏·유록油綠·은갈銀褐· 자紫·장색醬色·적색赤色·주황朱黃·천홍茜紅·형갈荊褐·명황明黃·남황藍黃·천분홍淺粉紅·심분홍深粉紅·매홍梅紅·행황杏黃·천색淺色·운벽雲碧·금홍金紅·홍매화紅梅花·홍紅· 황黃 등이다.한편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 사절이 고려를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힐막纈幕을 쳤는데 이 힐막은 옛 제도에는 없었던 것으로 본래 무늬 비단으로 그 빛깔은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여 있어 화려한 것이 볼 만하다 하였다. 힐막의 무늬 위에는 불꽃무늬[火珠]가 있고, 천막의 사방 끝은 넝쿨문양[寶網]으로 드리웠다. 또 순천관의 조전詔殿과 중국 정사와 부사의 자리,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에서 공식 회합을 할 때에는 수놓은 천막인 수막繡幕을 드리우는데, 수막의 장식은 오색으로 하며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 위에서 드리운다. 드리우는 천에는 원앙새, 날고 있는 난새, 화단花團 등을 수놓았다. 또 고려의 습속에는 장막을 칠 때 10여 폭마다 수놓은 그림[繡圖]을 하나씩 걸어 둔다. 수놓은 그림은 붉은 바탕에 녹색으로 테두리를 둘렀고 오색을 섞어 산, 꽃, 놀고 있는 짐승을 수놓았다. 정교하게 수놓은 천막을 능가하고 여기에는 꽃과 대나무, 새와 짐승, 과일 등의 그림도 있는데 하나같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이상으로 고려시대의 염색은 옷감 자체보다는 오히려 특히 많은 동식물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수놓은 수막과 중국 사절에게 지급되는 수놓은 베개[繡枕], 연회상을 차리고 덮어 놓은 수보자기 등 주로 정교한 수를 놓기 위한 실 염색이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색명들은 고려시대의 자수와 색실 염색 기술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또한 『고려도경』에서는 사절을 위한 연회에서 사용한 술의 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음식재료에 곱게 물들여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을 느끼는 식문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4. 조선시대: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다양한 직물 명칭이 보이고 대부분 색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함께 표기되어 있어 옷의 미적 효과를 높이려고 염색이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과 전세 유물을 보더라도 조선시대 저고리는 길이가 점점 짧아지면서 겨드랑이 밑·고름·깃·회장·끝동 등에 다른 색 천을 사용하여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여성미를 강조하고, 때로는 작은 부위에 강조색을 사용하여 리듬감과 미적 효과를 높인 것이 많다.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물품이나 교역품에 필요한 염색은 상의원에 소속된 청염장靑染匠 열 명과 홍염장紅染匠 열 명, 제용감에 소속된 홍염장 열 명과 청염장 스무 명의 전문 인력이 담당하였다. 한편 지방 관청 소속 외공장外工匠에는 염색과 관련한 공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궁궐 밖에서는 가내수공업 형태나 각 가정에서 염색을 직접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에 오면서 사염 장인의 수가 증가하여 1789년(정조 13)에는 관청에 소속된 염색 장인을 모두 폐지하였던 것으로도 확인된다.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오방 정색正色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하였기 때문에 궁궐 밖 반가에서는 오히려 수없이 많은 간색間色을 사용함으로써 가가호호 풍부한 색채 감각과 염색술이 비법처럼 전수되었을 것이다. 한 예로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붉은색 계통의 색명이 수십여 가지에 달하고, 같은 색명이라고 해도 짙은 분홍·중분홍·옅은 분홍 등 색상의 명도와 채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로 인해 간색을 내려고 매염제를 사용하고 염색 견뢰도를 높이기 위한 후처리나 보관법 등도 개발되었다. 이러한 비법들은 『규합총서閨閤叢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탁지준절度支準折』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염재, 매염재, 염색 방법이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전통 염색의 맥으로 이어진다.5. 개항기: 갑신의제개혁과 개항은 전통 염색 기술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말 서양의 화학 염료가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일본은 자국의 염색 산업을 부흥하려는 목적으로 화학 염료를 우리나라에서 판매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오방위의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은 우리나라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쪽염색을 못하게 저지하고 천연 염색의 낮은 견뢰도를 비방하는 내용의 광고 문구를 내세워 화학 염료 판매망을 넓혀 갔다.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漢城周報』 4호에 실린 세창양행世昌洋行의 광고[告白]을 보면, 수입된 각종 서양 옷감들과 함께 각색 염료를 판매하는 광고가 실려 있다. 또 1892년경 광고에는 쪽염을 대신하는 인디고와 왜청이 수입되어 판매되었으며 꼭두서니 염액도 액상으로 추출하여 두 병에 15냥 정도 가격으로 판매하였다.심지어 1905년 10월 흰옷은 비위생적이며 뒤진 문명의 징표라 하면서 흰옷 대신 검정색이나 색깔 있는 옷을 입으라는 법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또한 1907년 6월 27일자 『만세보萬歲報』에 실린 룡표·꼿표·표물감 광고는 “빛도 곱고 들이기 쉬운 물감, 빨아도 빠지지 않고 벗지도 않는 참 좋은 물감”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전통적 색 정서가 반영된 전통염색 기술은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화학 염료에 밀려 더는 발전하지 못했다.6. 1980년대 이후: 서양 옷감과 나일론 보급, 서양 복식 문화 유입으로 전통 소재 및 전통 염색에 대한 보급과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198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천연 염색은 마치 섬유 공예 작품을 위한 염색 수단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였다. 다행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해외 여러 나라에 우리의 전통 문화를 알리기 위하여 1980년대 초부터 우리 전통색, 천염염색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전통 염색의 산업화와 활성화 그리고 표준화를 위한 정부 지원 프로젝트가 다수 진행되었다. 천연 염색가 또는 공예가들도 염색 교육 및 전시 등을 통해 일반인도 천연 염색과 전통 염색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지역마다 체험 교육이 활성화되었다.현재 국가에서는 전통 염색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과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9호 홍염장을 지정하여 현대 사회 속에서 잊혀 가는 전통 염색의 맥을 잇고 있다.

특징 및 의의

염색과 관련해 현전하는 기록과 기술 전승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을 기본으로 하여 염재 분류뿐 아니라 염색 결과 역시 오방 정색과 오방 간색의 색채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주로 정색과 간색을 내는 침염이 발달한 반면, 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염색한 천을 기본으로 그 위에 문양을 내는 문양염이 발달하였다.전통 염색의 염색 방법, 순서, 염액 추출 등은 다른 나라와 별 차이가 없으나 잿물[灰汁]·명반明礬·철장鐵漿· 식초나 오미자·조개껍질·석회石灰 등 매염제는 전통방식을 따르고 있다. 잿물은 예로부터 주로 명아주나 노린재·콩깍지·쪽대·잇대·동백나무·쑥대를 태운 재를 물에 내려 사용하였는데, 특히 명아주 태운 잿물은 잇꽃 염색에 주로 사용하며 노린재나무의 잿물은 주로 자초를 염색할 때 사용한다. 꼭두서니와 소방목으로 붉은색을 염색할 때는 명반을 사용하며 철장은 주로 검은색 계통의 색으로 염색할 때 많이 사용한다. 현미를 발효한 현미초나 오미자초, 매실은 홍색 염색에 많이 사용하였고, 특히 오미자초는 홍화 염색에 많이 사용하였다. 또 석회는 쪽을 발효할 때 반드시 필요한데,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는 꼬막 껍질을 주로 사용한다.염색한 천이나 실을 보관할 때는 발색이나 변색을 막기 위한 풀 먹이기와 다듬이질도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풀먹이기는 대왕풀·우뭇가사리· 발효풀·감자풀을 주로 많이 썼는데, 대왕풀은 일명 백급, 자란紫蘭이라는 난초 뿌리를 물에 불려 불에 얹으면 풀기가 베어 나오는데, 아교를 조금 넣으면 좋다. 『규합총서』에는 특히 쪽으로 염색한 옷감은 대왕풀을 먹이지 않으면 쪽빛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명주를 비롯한 견섬유는 우뭇가사리 풀을 먹여 보관하는데, 오래 두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쑤는 방법은 우뭇가사리를 물에 불려 약한 불에서 끓인 후 채반 위에 고운 면주머니를 깔고 내린 물을 사용한다. 발효풀은 쌀로 풀을 쒀서 사용하면 변색되기 때문에 반드시 쌀밥을 해서 밥이 상하면 그것으로 풀을 쑤는데 발효풀은 풀 기운이 쌔고 얼룩이 지지 않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감자풀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방에서 주로 많이 하는 방법인데, 감자를 갈아 전분을 가라앉혀 물을 버리고 이것으로 풀을 쑨다. 그 외에도 생토란, 녹말풀, 계란 흰자도 사용하는데 특히 계란 흰자는 충분히 거품을 내어 사용하면 광택이 나며 또 아교와 함께 쓰면 염색천이 가죽처럼 뻣뻣하다.이처럼 풀을 먹여 보관하는 방법 외에도 다듬이질과 홍두깨질을 하면 천의 외관이 마치 코팅한 것처럼 윤기가 나는데, 소음 발생 때문에 요즘은 발효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하여 표면의 광택을 살린다. 오래된 홍화로 염색한 천은 식초 물로 수세하면 다시 선명한 색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염색한 모시 옷감은 감물 들인 종이에 싸서 보관하면 옷감의 손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참고문헌

閨閤叢書, 三國史記, 荷齋日記, 신라수공업사연구(박남수, 성신원, 1995), 자연염색공예(김지희·정관채, 한국공예문화진흥원, 2009), 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최재석, 일지사, 1995), 조선 중세 수공업사 연구(홍희유, 지양사, 1989), 조선시대 복식에 나타난 적색계 색명의 의미(남윤자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한국복식문화사전(김영숙, 미술문화, 1998),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