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오선희(吳宣希)
갱신일 2018-10-22

정의

둥글게 만들어 손가락에 끼는 고리 모양 장신구.

내용

반지半指, 斑指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지환指環이라고도 하며,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지환을 “가락지 또는 계지戒指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반지를 이르는 명칭으로 계지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지환을 형태에 따라 분류하는 세부 개념으로서의 반지는 한 짝으로 된 것을 말하며, 두 개가 짝을 이룬 형태는 가락지, 두 짝이 붙어 있는 것은 합반지合半指라고 한다.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에는 가락지를 두고 “장식용으로 손가락에 끼는 금·은·주·옥들의 고리. 가락지는 두 짝으로 되고 반지는 한 짝으로 된 것. 지환指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짝을 끼는 반지는 두 짝인 가락지의 반半을 낀다고 하여 ‘반지’로 불렸다고 한다. 가락지는 예로부터 정성을 담은 신표信表로 주고받았으며, 반지는 미혼·기혼을 가리지 않고 끼지만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가락지는 기혼 여자가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기록에서 반지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東明王」에서 처음 보인다. 주몽朱蒙과 송양松讓이 활쏘기 재능을 겨루는데, 주몽이 옥지환을 백 보 밖에 걸어 놓고 활을 쏴 맞추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관습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남아 있는 유물로는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 유적에서 출토된 B.C. 4~2세기의 청동지환과 평양시 낙랑 무덤에서 출토된 B.C. 1세기 후반의 은지환 등이 있다. 이처럼 반지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며, 이 시기부터 활발하게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장신구는 지배계급이나 왕족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반지는 일부에서만 출토되어 특정한 사람들만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신체의 일부분으로서 노동을 해야 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착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관이나 관모, 귀걸이, 허리띠 등의 다른 고분 출토품과 달리 실생활에서도 착용이 간편하면서 계급을 표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반지는 손가락에 착용하는 장신구의 특성 상 형태에 큰 변화 없이 하나의 고리로 된 기본형을 이루고 있으나 나라에 따라 모양이나 세부 장식에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 지역에서는 반지가 많이 출토되지 않았으며, 은제銀製에 장식이 거의 없거나 단순한 경우가 많아 장식적인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의 상징적 의미로 특정 계층에서 착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지역에서는 삼국 중 가장 적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반지를 거의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도 단순한 새김문으로 장식한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 지역의 경우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금제金製 반지가 많이 보이는 특징이 있다. 한 고분에서 열 개 이상의 지환이 출토되고, 피장자의 양손에 모두 반지를 착용한 채로 발굴되거나 열 손가락에 모두 끼고 있던 경우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반지 착용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피장자도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녀 구분 없이 패용된 것으로 보인다. 왕릉王陵급 고분에서 출토된 것일수록 금으로 된 것이 많으며, 누금세공鏤金細工 또는 구슬이나 유리를 상감象嵌하는 기법을 통해 화려하게 장식한 지환이 많다. 가야에서도 금· 은반지가 고루 발견되는 등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장식은 다소 간소하다. 삼국시대 반지는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키노시마沖ノ島 7호 유적과 니자와센즈카新澤千塚 126호분 등에서 신라 또는 삼국시대의 반지와 유사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반지 유물은 금·동·청동 등으로 만든 간결한 고리 모양으로 주로 남아 있다. 반지의 손바닥으로 향하는 부분이 C자 형으로 뚫려 있어 크기 조절이 가능하도록 한 형태도 있으며, 옥玉에 꽃과 새 모양을 조각한 것도 있다. 대몽항쟁기 이후 고려 부녀자들이 원으로 끌려갈 때,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반지를 정표로 받아 끼고 갔다고 한다. 이것이 ‘고려양高麗樣’의 일종으로 원에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한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현대의 반지와 같이 고리형 몸체의 윗부분에 네 개의 집게 모양 발을 물려 보석을 박아 놓은 반지가 수록되어 있다. 성천부사成川府使 심익창沈益昌의 부인 성산 이씨(1651~1671)의 묘에서도 보석을 박은 옥지환과 은지환이 출토되어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형태의 반지가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진주와 홍보석을 박은 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궁중발기[宮中件記]」에도 진주장도금지환珍珠粧鍍金脂環, 진주장옥지환珍珠粧玉脂環, 진주장산호지환珍珠粧珊瑚脂環 등 금속이나 옥석류玉石類에 다른 보석을 감입嵌入하여 장식한 것으로 보이는 반지의 물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반지의 형태는 표면에 무늬를 음각하거나 파란琺瑯(칠보)으로 장식한 반지나 가락지이며, 옥·비취翡翠·밀화蜜花·산호珊瑚 등은 재료 그대로를 살려 장식 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무늬 없는 민지환珉指環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름답게 꾸민 것은 젊은 새댁이 꼈다. 가락지는 상류층과 서민층에서 차별 없이 사용하였으나 옥·비취·산호 등은 상류층에서 착용하였으며, 서민층에서는 간결한 무늬가 새겨진 은이나 백동, 동가락지를 많이 사용하였다. 동가락지는 구리를 몸에 지니면 편두통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민간에서 많이 착용했다고 한다. 장식 무늬로 복福과 장수, 자손번창 등을 기원하는 박쥐문과 수壽·부富· 귀貴·다多·남男·자子의 문자무늬, 국화·매화 등의 화초무늬나 기하무늬[幾何文]를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른 반지를 끼었는데, 『순화궁첩초順和宮帖草』, 『사절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資粧要覽』에는 “10월부터 정월까지, 즉 겨울에는 금지환을 끼고 2월부터 4월까지는 파란지환을 낀다. 5월 단오날이 더워 초사당한삼綃紗唐汗衫을 입을 때에는 옥지환이나 자마노紫瑪瑙지환을 끼고 8월 중순 광사당고의廣紗唐袴衣를 입을 때에는 다시 파란지환을 껴서 9월의 공단당고의貢緞唐袴衣를 입을 때까지 끼게 된다.”라고 하였다. 겨울에는 금반지, 여름에는 옥·마노반지, 봄·가을에는 파란반지 등을 낀 것을 알 수 있다. 금반지는 비빈妃嬪들의 정장正裝에만 끼었으며, 겨울이 아니고 한여름이라도 직금織金 당의스란치마나 대란치마를 갖추고 큰머리 칠보를 하는 예장禮裝 차림에는 금반지를 착용했다. 여름용 반지는 재질이 무른 고급 옥석으로 되어 있어 굵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며, 일할 때를 피하여 나들이 갈 때나 의식儀式이 있을 때 끼었다. 두툼한 은이나 호박가락지는 노리개 대용으로 옷고름에 매어 차기도 했다.

특징 및 의의

반지는 작고 간단하면서도 눈에 잘 띄는 손에 착용하는 장신구로서 고대로부터 실생활에서 신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남녀 간 애정과 신뢰의 정표이자 혼인의 상징물로서 착용하였다. 반지는 가장 작고 소소한 장신구였지만 고대로부터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른 문화와 양식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다채롭게 변화해왔다. 삼국시대의 반지를 통해서는 문화 교류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반지는 장수와 자손번성 등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담인복식미술관 개관도록(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9), 삼국시대 지환에 관한 연구(차현주, 한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장신구(석주선,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1980), 조선시대 후기 궁중패물 연구(박혜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조선여인의 미(부산박물관, 2005),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

반지

반지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오선희(吳宣希)
갱신일 2018-10-22

정의

둥글게 만들어 손가락에 끼는 고리 모양 장신구.

내용

반지半指, 斑指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지환指環이라고도 하며,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지환을 “가락지 또는 계지戒指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반지를 이르는 명칭으로 계지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지환을 형태에 따라 분류하는 세부 개념으로서의 반지는 한 짝으로 된 것을 말하며, 두 개가 짝을 이룬 형태는 가락지, 두 짝이 붙어 있는 것은 합반지合半指라고 한다.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에는 가락지를 두고 “장식용으로 손가락에 끼는 금·은·주·옥들의 고리. 가락지는 두 짝으로 되고 반지는 한 짝으로 된 것. 지환指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짝을 끼는 반지는 두 짝인 가락지의 반半을 낀다고 하여 ‘반지’로 불렸다고 한다. 가락지는 예로부터 정성을 담은 신표信表로 주고받았으며, 반지는 미혼·기혼을 가리지 않고 끼지만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가락지는 기혼 여자가 사용하였다.우리나라 기록에서 반지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東明王」에서 처음 보인다. 주몽朱蒙과 송양松讓이 활쏘기 재능을 겨루는데, 주몽이 옥지환을 백 보 밖에 걸어 놓고 활을 쏴 맞추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관습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남아 있는 유물로는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 유적에서 출토된 B.C. 4~2세기의 청동지환과 평양시 낙랑 무덤에서 출토된 B.C. 1세기 후반의 은지환 등이 있다. 이처럼 반지는 삼국시대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며, 이 시기부터 활발하게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장신구는 지배계급이나 왕족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반지는 일부에서만 출토되어 특정한 사람들만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신체의 일부분으로서 노동을 해야 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착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관이나 관모, 귀걸이, 허리띠 등의 다른 고분 출토품과 달리 실생활에서도 착용이 간편하면서 계급을 표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반지는 손가락에 착용하는 장신구의 특성 상 형태에 큰 변화 없이 하나의 고리로 된 기본형을 이루고 있으나 나라에 따라 모양이나 세부 장식에 차이가 있었다.고구려 지역에서는 반지가 많이 출토되지 않았으며, 은제銀製에 장식이 거의 없거나 단순한 경우가 많아 장식적인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의 상징적 의미로 특정 계층에서 착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지역에서는 삼국 중 가장 적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반지를 거의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도 단순한 새김문으로 장식한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 지역의 경우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금제金製 반지가 많이 보이는 특징이 있다. 한 고분에서 열 개 이상의 지환이 출토되고, 피장자의 양손에 모두 반지를 착용한 채로 발굴되거나 열 손가락에 모두 끼고 있던 경우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반지 착용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피장자도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녀 구분 없이 패용된 것으로 보인다. 왕릉王陵급 고분에서 출토된 것일수록 금으로 된 것이 많으며, 누금세공鏤金細工 또는 구슬이나 유리를 상감象嵌하는 기법을 통해 화려하게 장식한 지환이 많다. 가야에서도 금· 은반지가 고루 발견되는 등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장식은 다소 간소하다. 삼국시대 반지는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키노시마沖ノ島 7호 유적과 니자와센즈카新澤千塚 126호분 등에서 신라 또는 삼국시대의 반지와 유사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고려시대의 반지 유물은 금·동·청동 등으로 만든 간결한 고리 모양으로 주로 남아 있다. 반지의 손바닥으로 향하는 부분이 C자 형으로 뚫려 있어 크기 조절이 가능하도록 한 형태도 있으며, 옥玉에 꽃과 새 모양을 조각한 것도 있다. 대몽항쟁기 이후 고려 부녀자들이 원으로 끌려갈 때,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반지를 정표로 받아 끼고 갔다고 한다. 이것이 ‘고려양高麗樣’의 일종으로 원에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한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현대의 반지와 같이 고리형 몸체의 윗부분에 네 개의 집게 모양 발을 물려 보석을 박아 놓은 반지가 수록되어 있다. 성천부사成川府使 심익창沈益昌의 부인 성산 이씨(1651~1671)의 묘에서도 보석을 박은 옥지환과 은지환이 출토되어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형태의 반지가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진주와 홍보석을 박은 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궁중발기[宮中件記]」에도 진주장도금지환珍珠粧鍍金脂環, 진주장옥지환珍珠粧玉脂環, 진주장산호지환珍珠粧珊瑚脂環 등 금속이나 옥석류玉石類에 다른 보석을 감입嵌入하여 장식한 것으로 보이는 반지의 물목이 기록되어 있다.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반지의 형태는 표면에 무늬를 음각하거나 파란琺瑯(칠보)으로 장식한 반지나 가락지이며, 옥·비취翡翠·밀화蜜花·산호珊瑚 등은 재료 그대로를 살려 장식 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무늬 없는 민지환珉指環은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름답게 꾸민 것은 젊은 새댁이 꼈다. 가락지는 상류층과 서민층에서 차별 없이 사용하였으나 옥·비취·산호 등은 상류층에서 착용하였으며, 서민층에서는 간결한 무늬가 새겨진 은이나 백동, 동가락지를 많이 사용하였다. 동가락지는 구리를 몸에 지니면 편두통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민간에서 많이 착용했다고 한다. 장식 무늬로 복福과 장수, 자손번창 등을 기원하는 박쥐문과 수壽·부富· 귀貴·다多·남男·자子의 문자무늬, 국화·매화 등의 화초무늬나 기하무늬[幾何文]를 주로 사용하였다.조선 후기에는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른 반지를 끼었는데, 『순화궁첩초順和宮帖草』, 『사절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資粧要覽』에는 “10월부터 정월까지, 즉 겨울에는 금지환을 끼고 2월부터 4월까지는 파란지환을 낀다. 5월 단오날이 더워 초사당한삼綃紗唐汗衫을 입을 때에는 옥지환이나 자마노紫瑪瑙지환을 끼고 8월 중순 광사당고의廣紗唐袴衣를 입을 때에는 다시 파란지환을 껴서 9월의 공단당고의貢緞唐袴衣를 입을 때까지 끼게 된다.”라고 하였다. 겨울에는 금반지, 여름에는 옥·마노반지, 봄·가을에는 파란반지 등을 낀 것을 알 수 있다. 금반지는 비빈妃嬪들의 정장正裝에만 끼었으며, 겨울이 아니고 한여름이라도 직금織金 당의에 스란치마나 대란치마를 갖추고 큰머리 칠보를 하는 예장禮裝 차림에는 금반지를 착용했다. 여름용 반지는 재질이 무른 고급 옥석으로 되어 있어 굵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며, 일할 때를 피하여 나들이 갈 때나 의식儀式이 있을 때 끼었다. 두툼한 은이나 호박가락지는 노리개 대용으로 옷고름에 매어 차기도 했다.

특징 및 의의

반지는 작고 간단하면서도 눈에 잘 띄는 손에 착용하는 장신구로서 고대로부터 실생활에서 신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남녀 간 애정과 신뢰의 정표이자 혼인의 상징물로서 착용하였다. 반지는 가장 작고 소소한 장신구였지만 고대로부터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른 문화와 양식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다채롭게 변화해왔다. 삼국시대의 반지를 통해서는 문화 교류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반지는 장수와 자손번성 등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담인복식미술관 개관도록(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9), 삼국시대 지환에 관한 연구(차현주, 한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장신구(석주선,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1980), 조선시대 후기 궁중패물 연구(박혜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조선여인의 미(부산박물관, 2005), 조선조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