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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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순제(姜淳弟)
갱신일 2018-10-05

정의

넓은 의미에서 머리에 쓰는 모든 것으로 추위나 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성 위주의 것과, 더욱 아름답거나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한 장식성 위주의 것, 예를 갖추고 차별화된 신분을 표현하기 위한 대사회적인 의미의 것 등, 머리에 쓰는 모든 것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

개관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자를 사용하였다. 고대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모자는 크게 건巾·입笠·모帽·관冠 등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며, 각 유형에 따라 종류가 대단히 많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우리말로는 ‘쓰개’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쓰개’라는 용어와 구분해서 모자를 ‘관모冠帽’라고 할 때는 신분이나 계급, 의례 등의 사회적인 의의를 가지고 격식을 갖추어 머리에 쓰는 것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벼슬아치들이 착용한 모자는 일반적으로 관모라고 지칭한다.
우리의 복식 관념에서 모자는 단순히 머리를 보호하거나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한 실용적 기능 위주보다 신분을 나타내고 예의를 갖추는 의관의 역할에 더욱 중요성을 두어 다양한 형태로 변화·발전시켜 왔으므로 관모의 의미가 크다.
1. 상고시대 우리의 고유 관모는 삼각 형상의 모부帽部를 기본으로 한 변상弁狀의 관모였다. 우리 관모의 시원형이며 고유성을 지닌 것으로는 절풍折風, 소골蘇骨, 조우식鳥羽飾의 관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헝겊 혹은 가죽 두 장을 앞에서 뒤로 이어 붙임으로써, 착용할 때는 모부가 삼각형의 변상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조우를 장식한 관모는 조우를 장식하지 않은 절풍이나 소골보다 상위 계층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 관모의 특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조우(새 깃)에는 태양숭배 및 영혼불멸사상과 연계된 조류숭배의 관념이 내포되어 있는데, 조우를 머리에 장식하는 것은 수렵시대의 유속이며 한때 아시아 북방 제 민족 사이에 행해졌던 풍습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를 일시적 현상이 아닌 생활 속의 습속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우리 관모에서 조우식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것은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묘 벽화에 다른 빈객들과는 대조적으로 한인韓人 사절만이 조우를 꽂은 관모를 착용한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우식으로는 원래 새의 자연 조우인 깃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금속제를 사용하기도 했다. 신라의 금관총, 서봉총 등에서 발굴된 금관에는 금속제의 조익형鳥翼形 장식도 나타나는데, 조우의 금속화는 수식의 귀족적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밖에 한 장의 헝겊으로 머리를 싸매는 데에서 출발한 건과 햇볕이나 비를 가리는 실용적인 용구로 출발한 입笠의 착용 예가 확인되나, 이들은 모두 단순한 쓰개로서 존재했다.
2.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는 변상의 모帽를 기본으로 했던 우리 고유의 관모들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에 문헌에는 649년(진덕왕 3)에 “처음으로 중국의 복식과 의관을 착용하였다始革中朝衣冠.”라고 하였고, 854년(흥덕왕 29)에 반포된 복식금제에는 복두幞頭가 전 계급 남자의 관모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북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 토용(730~780년), 황성동 고분 출토 토용(649년 이후 늦어도 680년대)에서도 복두가 확인된다.
복두는 당시 당唐에서는 일반 남자들까지 널리 착용하던 관모로써, 문화 교류를 통해 수용된 중국식 관모이다. 처음에는 커다란 한 장의 천 전후좌우에 네 개의 끈[각脚]을 내어 앞 좌우 두 개의 끈은 뒤로 묶고 뒤 두 개의 끈은 상투 앞으로 올려 묶은 형태인 ‘사대건四廗巾’에서 출발하였는데, 점차 전면 머리 위로 올려 묶었던 두 개의 끈은 퇴화하면서 뒤에 묶어 내린 두 개의 끈[이각二脚]만이 남게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경문왕조景文王條에 보면,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의 귀처럼 길어졌는데 이를 복두로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왕후나 관인은 모르고, 오로지 복두장이만 알고 있었다는 복두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이를 통해 이제 복두는 관인뿐만 아니라 왕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둔황 335호 석굴과, 제작 연대가 8세기 초로 인정되고 있는 장회태자 묘의 벽화에도 조우관을 쓴 한인 사절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조우관의 모부는 모두 변상관모로 되어 있으므로, 상대의 조우관은 중국 관모의 수용 이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의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아프라시압 궁정 벽화 인물의 모자는 고식古式의 복두에 조우를 꽂아 장식한 형상이다. 이는 조우관의 모부가 종래의 일률적인 변상관모에서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7세기 후반은 우리 관모제의 변천 과정으로 보면 중요한 전환기로 볼수있다.
3. 고려에서는 일반적으로 복두를 위로는 왕실·귀족으로부터 악공樂工, 조례皂隸, 노비,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착용하였다. 다만 민서들의 관모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되어 있는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 오건사대烏巾四帶는 고식인 사대건이며 한 장의 천으로 머리를 싸맨 형태인 건巾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국관國官, 귀인貴人이 사가에서 쓰는 양대兩帶의 오건은 전면에 올려 매었던 두 개의 끈이 퇴화한 연질軟質의 수각복두垂脚幞頭를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리의 공복에는 경질硬質의 전각복두展脚幞頭가 사용되었으므로, 양대의 오건이라 함은 이와 구분하여 불리던 명칭이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에는 원元의 영향으로 인해, 원나라 관리들이 착용했던 발립鈸笠이 수용되었음은 이 시기 발립 착용 인물의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립은 위가 둥글고 첨(채양)이 작은 평량자형 입자笠子로 모체帽體 정상에 정자장식頂子裝飾을 한 것인데, 첨의 안쪽은 다른 색色으로 꾸며져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367년(공민왕 16)에 입笠 정상의 재료에 차 등을 둔 정자頂子를 장식한 ‘흑립黑笠’을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하였고, 그 밖에 흑초방립, 백방립 등의 명칭도 등장하였다. 이로써, 고려 말기에는 용구로서의 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념 변화의 바탕에는 당시 발립의 수용과 착용이 적잖은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는 나아가 사회적인 관모로 자리매김된 조선 입제의 완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시대 흑립과의 형태나 제작기술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4. 조선시대는 관리의 관복 제도를 명나라보다 두 등급 낮추어 제정하면서 관모도 관품과 용도에 따라 두 등급을 낮추어 제정하였다. 왕을 비롯한 관리의 관모로는 면류관, 원유관, 익선관, 양관, 사모가 있으며, 이를 관품과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착용하였다.
사대부들도 의관정제를 중시하는 관습에 따라서 일상 통행할 때 집 안에 있을 때도 반드시 관모를 착용하였다. 사대부들이 평상시에도 늘 착용했던, 통칭 편복관모는 크게 입의 발달 단계와 편복관[巾制]의 수용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입제: 조선시대의 입笠은 모자집(대우)과 입첨(양태)의 구분이 명확한 평량자형平凉子形 갓과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방립형方笠形 갓으로 구분한다. 패랭이, 초립, 흑립, 백립, 주립, 옥로립, 전립氈笠, 戰笠은 평량자형 갓에 속하는 것들이며, 삿갓이나 방갓은 방립형 갓에 속하는 것으로, 각각은 용도와 신분에 따라 달리 사용되었다. 입笠의 전반적인 발달 단계와 그 사용 행태(입제)를 중심으로 보면, 이들 중 흑립은 제작기술상 평량자형 갓의 가장 초기 형태의 것인 평량자(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조선 입제 발달의 최종 완성품이다. 이로써 협의로 ‘갓’이라고 하면 흑립만을 지칭하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관모를 나타낸다.
흑색의 갓, 즉 흑립은 사실 비기능적이며 비실용적인 모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비단끈과 각종의 옥을 꿰어 목 밑으로 길게 늘인 패영으로 갓을 머리 위에 고정시키고, 비가 오면 그 위에 갈모를 쓰며, 잘 다듬은 나무상자나 생피 갓집에 보관하는 등, 갓에 대한 사랑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지대한 것이었다. 또한 갓을 항상 상석에 걸어 둘 정도로 갓에 들인 관심과 정성은 의관을 존중했던 당시 시대의 복식규범에서 연유한다.
2) 편복관: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갓’에 대신하여 집 안에서 늘 착용한 모자로, ‘○○관’으로 불리는 방관方冠·사방관四方冠, 동파관東坡冠, 와룡관臥龍冠, 정자관程子冠 등 을 총칭하여 ‘편복관’으로 지칭한다. 원래는 중국의 문인, 학자들이 사용한 방건 혹은 사방평정건, 동파건東坡巾, 제갈건諸葛巾, 정자건程子巾 등에서 유래한 것인데, 우리는 이들을 조선시대 인종, 명종 대에 들여와 ‘○○관’이라 부르며 사용하게 되었다.
편복관은 대체로 모두 부드러운 재질로 되어 있어서 쉽고 간편하게 접을 수 있는 ‘건’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특히 ‘○○관’이라 지칭한 데에는 건보다 상위의 개념인 관을 더 애호했던 데에 기인한 것 같다.
집안에서도 늘 의관을 갖추어야 했던 사대부들은 ‘갓’에 비해 다루기 쉽고 손질이 간편하며 쉽게 접을 수 있는 편복관을 애용하였는데, 이러한 의식의 저변에는 당시 조선사회에 팽배하였던 ‘의관정제’의 생활 규범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조선 말 대원군의 의복 간소화 시책으로 편복관이나 종래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큰 갓(흑립)이 점차 사라진다. 대신에 첨이 좁은 작은 갓(소립小笠)이 등장하였는데, 소립은 일반 남자들도 두루 착용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 때에 단발령이 내려지고 남자들이 점차 상투를 틀지 못하게 되면서 평상시에도 갓이나 편복관을 쓰던 전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물론 서구에서 도입된 각종의 해트hat 류가 있었으나 의관정제를 위하여 모자를 반드시 갖추어 써야 했던 우리의 복식 예의는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관리들은 갑오개혁 이후 양복을 예복으로 착용하게 되면서 서구식 모자인 중절모, 중산모, 맥고모자 등의 모자를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예복의 모자는 영국 예복의 모자를 본뜬 것으로 앞뒤가 뾰족 나온 산山자 형인데 모자 정수리에 장식 깃털이 달려 있었다. 또 소례복인 프록코트frock coat에는 영국제 실크해트silk hat를 착용했는데 이를 당시는 ‘진사고모眞絲高帽’라고도 불렸다.
6. 우리의 관모제가 종식된 이후 잠깐 동안 일반 복식에는 양복·한복을 막론하고 서구식 모자를 착용하였다.
당시에 유행한 모자는 모두 해트류로 파나마모panama를 비롯해 중절모, 중산모 등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는 서구에서도 남자들의 모자 착용이 줄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일반인의 모자 착용이 줄어들었고, 1980년대는 중·고등학생의 교복이 폐지됨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제정되었던 일본식 교복과 교모도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은 군인·경찰 등의 제모制帽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헬멧helmet, 방한모, 각종 운동모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으나 예의를 갖추기 위해 모자를 착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자의 모자는 양장과 함께 들어왔지만 서구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특수층에 한하였다. 여성관의 변화로 일반여성들은 외출 시에 착용하던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벗어버리고 그 대신 조바위, 아얌 등을 착용하기도 했으나 양장 착용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도 곧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전통의 관모들이 자취를 감추고 한때 서구식 모자가 이를 대신한 적도 있으나 우리의 생활 규범 속에 굳게 자리했던 ‘정장에는 모자를 갖추어야 한다.’라는 관념은 우리 관모제의 종식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내용

머리에 쓰는 것을 유형별로 보면 크게 건·입·모· 관 등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유형의 모자는 차츰 형태와 제작기술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종류로 분화·발전하거나 소멸의 과정을 겪게 되고, 신분과 용도에 따라 때로는 새로운 형태의 것으로 대치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식 모자의 등장으로 해트류와 캡cap류의 모자가 등장한다.
1. 건: 관모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천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의字義에는 ‘한 장의 헝겊으로 머리를 감싸는 모든 형상의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곧 머리에 덮어 씌워진 후에 비로소 어떤 형태를 이루는 건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건이 점차 여러 형상의 것으로 형태화된 이후에도 착용하지 않을 때는 간단히 접을 수 있었던 것과 상통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부인의 머릿수건이나 남자들이 머리를 덮어 뒤에서 묶어 내린 형상은 가장 원시적인 건의 형상이다.
고려시대에도 조건·문라건 등이 등장하며 이는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했던 가장 소박한 모자의 하나였으며, 복두의 시원형인 사대건도 머리에 덮어 씌워진 후에 형태를 이루었던 하나의 건이다.
조선 초에 두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망건이 생성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 녹사錄事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 서리는 무각평정건을 쓰게 되어 있다. 또 별감은 자건紫巾, 세자궁별감은 청건靑巾, 나장은 조건皁巾, 인로引路는 자건, 학생은 치포건緇布巾을 쓰도록 되어 있다. 선비들은 망건 위에 탕건을 쓰고 그 위에 갓을 썼다. 평소 집안에서 착용한 탕건, 사방관, 동파관, 충정관, 와룡관, 정자관 등도 형상화된 건의 한 유형이며, 유학자들의 유건, 복건 등도 있다. 상중喪中에 쓰는 굴건, 두건도 건의 특수 용례 중 하나이다.
2. 갓: 갓의 한자 표기는 ‘입笠’으로서, 본래의 뜻은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해 식물성 재료를 거칠게 엮어 머리에 쓰는 실용적인 용구인 쓰개 가운데 하나이다.
갓을 착용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양사전良耜傳』, 『무양전無羊傳』에서도 ‘입笠’이 더위와 비를 막는 데에 쓰였다고 언급하고 있어 발생 초기에는 관모적冠帽的 요소보다는 도구적道具的 요소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점차 재료와 제작 방법이 발전하면서 종류와 용도가 확대된다.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서도 활을 당기며 매를 쫒는 <착립기마인물도着笠騎馬人物圖>를 볼 수 있는데, 입은 모정이 둥글고 차양이 넓으며, 끈으로 턱에 걸어 맨 듯한 모습이므로 조선시대 폐양립蔽陽笠과 아주 비슷하다. 『삼국유사』 원성왕조에 ‘착소립着素笠’의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지권 26 여복에 의하면 1367년(공민왕 16) 9월 “백관시착립조알白官始着笠朝謁”이라는 기록과 함께 이후 흑초방립, 백방립 등이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되었으므로, 입은 고려 말에 이르러서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모인 흑립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3. 모: 모는 머리 전면을 싸는 모옥帽屋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관모를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두와 사모가 있다. 복두는 통일신라시대에 당에서 받아들였으며, 고려에 이르러 널리 착용되었다. 고려왕은 조복에 복두를 썼고 이직산원吏職散員들도 복두를 착용하였다. 복두 착용에 대한 금지 또는 허용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왕은 상복에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썼는데, 이는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사모의 전신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복두 대신 사모가 널리 착용되어 관원은 물론 일반 서민도 혼례 때에 착용이 허용되었다.
이밖에도 방한용의 각종 난모류煖帽類, 비를 막기 위한 우모雨帽, 화살을 막기 위한 투구 등의 쓰개도 있었다. 개화기 이후에는 중절모, 맥고모자, 파나마모자 등이 크게 유행하였다.
4. 관: 입, 건, 모에 대비하여 관은 상위의 개념을 갖고 있으면서 형태상으로도 잘 갖추어진 머리쓰개의 의미가 크다. 『후한서舊唐書』 고구려조에 “왕은 백라관을 썼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안악 3호분 묘주의 관은 내관은 흑색이며 외관은 백색으로, 내관과 외관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일종의 이중관이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에서 왕만이 썼다고 하는 백라관일 것이다.
관으로 대표되는 것은 삼국의 금관이다. 금관의 원류는 시베리아 샤만의 녹각관鹿角冠에서 연유한 일종의 무관巫冠에서 발달한 것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호족 내지 왕이 썼다.
고려시대에는 왕의 면류관이 있었고, 건이나 모는 다양한 명칭이 있으나 관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뱃사람이 쓰는 죽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죽관은 삿갓류의 모자에 대한 한자 차용의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관모로 면류관·통천관·원유관· 익선관이 있었고, 신하의 것으로는 양관·제관이 있다. 일반 선비의 것에는 사방관·충정관·동파관·와룡관·정자관 등의 명칭이 있으나 이는 중국에서 문인들이 썼던 방건·충정건·동파건·제갈건·정자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만 명칭에 ‘건’의 상위 개념인 ‘관’을 차용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5. 서구식 모자: 개화기 이후는 서구식의 모자도 사용하게 된다. 형태는 기본적으로 머리[頭]를 덮는 부분인 크라운crown과 햇볕을 가리는 부분인 브림brim으로 구성된다. 서양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브림이 크라운 전체에 맞물려 붙어 있으면 해트hat,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붙어 있는 것은 캡cap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현재는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더 일반적이나,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식 모자는 아래와 같다.
1) 캡: 5~7쪽 정도의 조각을 이어 만든 크라운에 브림(챙)이 앞쪽이나 혹은 옆까지만 붙어있는 형으로, 부분적인 챙을 가진 모자 종류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야구모baseball cap, 수영모swimming cap, 스키모ski cap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근래에 젊은이들이 운동 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야구모를 즐겨 착용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2) 해트: 머리 부분인 크라운과 챙 부분인 브림으로 구성된 모자. 크라운이나 브림의 형상에 따라 여러 가지 해트 류가 있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중산모: 더비derby나 보울러bowler의 별칭이다. 둥근 크라운과 양옆이 약간 올라간 좁은 브림이 달린 형태의 빳빳한 모자이다. 주로 딱딱한 펠트로 만들어진 검정색 모자이며, 영국신사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원래는 영국의 비즈니스맨이 정장차림을 할 때 쓴 것으로, 윌리엄 보울러가 1850년경에 디자인했다고 해서 ‘보울러’라는 이름이 붙었다.
② 중절모: ‘소프트 펠트 해트soft felt hat’로 가장 일반적인 비즈니스 웨어용 모자이다. 크라운의 정상 가운데가 접혀 있는 데서 ‘중절모’라는 이름이 붙었다. 펠트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모양이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③ 맥고모자: 밀짚으로 만든 모자의 총칭이다. 주로 여름에 많이 사용되었다.
④ 실크해트: 원통형의 크라운으로 챙이 비교적 좁게 되어 있는 예장용 모자이다. 모닝코트, 이브닝코트 등 최고급의 예장용에 쓰인다. 원래는 17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 대유행하였던 비버 해트가 기원이며, 비버 모피의 수요 부족으로 인해 실크를 대신 쓴 것이 이 모자의 시초이다. 오페라해트opera hat, 톱 해트top hat, 하이 해트high hat라 부르기도 하고 토퍼topper라는 속칭도 있다. 우리나라는 개화기 초기에 상류층 사이에서 잠시 사용되었다.
⑤ 파나마모: 스트로 해트(밀짚모자)의 일종이다. 원래는 곱고 옅은 빛깔의 파나마풀, 혹은 에콰도르·콜롬비아 등 중남미 야자류의 섬유 등으로 만들었으나 오늘날은 파나마풀과 비슷한 섬유로 만든 것도 이렇게 부른다. 여름에 쓰는 남성용 모자이다. 국상에 백립을 쓰는 우리나라는 단발령 이후 갓 착용이 어렵게 되자, 한 때 백립을 대신하여 파나마모를 사용하기도 했다.
3) 베레beret: 머리에 밀착되는 형태로 둥글납작하고 부드러우며 챙이 없는 모자이다. 한 장의 울이나 펠트로 만들며 빛깔과 소재도 다양하다. 교복을 비롯한 기타 유니폼에 사용하였으며, 요즈음은 예술가들이 즐겨 많이 착용한다.
4) 클로슈cloche: 프랑스어로 ‘종’이란 뜻이다. 크라운이 높고 브림이 종처럼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퍼져 있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모자가 머리 전체를 감쌀 정도이며 거의 눈썹 아래까지 눌러 쓰는 것이 특색이다. 1920~1930년대에 신여성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덕혜옹주가 양장에 클로슈를 쓴 사진도 있다.
5) 보닛bonnet: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며, 뒤에서부터 머리 전체를 싸듯이 가려 얼굴과 이마만 드러낸 모자이다. 크라운이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고, 턱 밑에서 끈으로 매며, 모자 가장자리를 러플로 장식한다. 개화기 초기에 일부 여학생 교복에 사용된 적이 있으며, 오늘날에는 유아용 모자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6) 터번turban: 중동이나 인도에서 많이 쓰는 모자이다. 긴 천을 머리에 둘러 심한 더위를 피하고, 또 바람을 막기 위해서 쓴다. 근래 터번을 모방한 디자인의 모자가 여성의 이브닝드레스에 많이 이용되었다.
7) 토크toque: 작고 챙이 없으며 주름을 많이 잡아 머리에 꼭 맞도록 쓰는 모자이다. 근래에는 혼례용으로 웨딩드레스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19세기에는 이브닝드레스를 착용할 때 함께 썼으며, 꽃이나 베일로 장식하였다.
8) 헬멧helmet: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모자의 일종이다. 철제나 알루미늄제, 플라스틱제 등이 있다. 사이클 등의 운동경기, 공장에서 쓰는 작업모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9) 후드hood: 머리 전체를 덮어 싸는 부드러운 모자로, 턱 밑에서 끈으로 매거나, 케이프나 코트에 달아 방한용으로 머리를 덮어쓰는 두건 모양의 모자이다. 코트나 재킷에 붙은 후드를 비롯하여 스키 등의 스포츠용으로 고안된 것도 있다.

특징 및 의의

우리나라는 예부터 모자를 중요한 복식 요소의 하나로 생각했다. 맨머리는 상민常民이나 죄인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외출할 때는 물론 실내에서도 모자를 착용하였다. 모자를 착용하지 않을 때는 변소에 갈 때, 침상에 들 때, 죄수가 되었을 때 정도이다.
이러한 것은 일차적으로 상고시대 우리 복식이 갖는 엄격한 포피적包被的 성격과 무풍적武風的 요소에 ‘의관정제衣冠整齊’라는 복식에 관한 의례관념儀禮觀念이 더해진 데서 연유한다. 이에 우리나라의 ‘모자’에는 한층 대사회적인 역할을 하는 ‘관모’로서의 의미가 더해진다. 우리 복식의 중요 요소로 자리하게 된 관모는 예를 갖추는 중요한 요소로서 연령별, 신분별, 용도별로 구분하여 사용되어 왔다.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시작된 의복 간소화 시책과 1895년 을미개혁 때 시행된 단발령으로 상투를 틀지 못하게 되면서 평상시에 갓이나 관을 쓰던 전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 의복을 갖추어 입을 때는 반드시 모자를 착용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복식 예의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2000년 역사를 이어 온 우리 두식문화頭飾文化와의 결별, 의관정제라는 것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왔던 ‘신분상징성’의 소멸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는 유교의 가치 이념인 ‘질서’와 ‘규율’, ‘서열의식’과 ‘형식주의’ 등의 개념을 복식에 구현하고, 형식과 격식을 갖춘 복장에서는 위엄과 권위의 가치까지 지향하였다. 의관정제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치 지향의 적극적인 한 표현이었으나 서양복식으로 일반화된 현대사회는 더 이상 신분상징과 직결되는 그러한 가치들을 수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관모’로서의 의미가 강조되던 우리나라의 모자는 이제 시대의 유행을 반영하는 패션물로서의 기능만이 강조될 정도로 그 역할이 변화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圖經, 高麗史, 三國遺事, 복식사전(라사라교육개발원, 라사라, 1991), 우리 관모의 시말에 관한 연구(강순제,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한국의 복식문화사(난사 석주선관장 10주기 기념논총 진행위원회, 학연문화사, 2006).

모자

모자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강순제(姜淳弟)
갱신일 2018-10-05

정의

넓은 의미에서 머리에 쓰는 모든 것으로 추위나 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성 위주의 것과, 더욱 아름답거나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한 장식성 위주의 것, 예를 갖추고 차별화된 신분을 표현하기 위한 대사회적인 의미의 것 등, 머리에 쓰는 모든 것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

개관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모자를 사용하였다. 고대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모자는 크게 건巾·입笠·모帽·관冠 등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며, 각 유형에 따라 종류가 대단히 많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우리말로는 ‘쓰개’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쓰개’라는 용어와 구분해서 모자를 ‘관모冠帽’라고 할 때는 신분이나 계급, 의례 등의 사회적인 의의를 가지고 격식을 갖추어 머리에 쓰는 것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벼슬아치들이 착용한 모자는 일반적으로 관모라고 지칭한다.우리의 복식 관념에서 모자는 단순히 머리를 보호하거나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한 실용적 기능 위주보다 신분을 나타내고 예의를 갖추는 의관의 역할에 더욱 중요성을 두어 다양한 형태로 변화·발전시켜 왔으므로 관모의 의미가 크다.1. 상고시대 우리의 고유 관모는 삼각 형상의 모부帽部를 기본으로 한 변상弁狀의 관모였다. 우리 관모의 시원형이며 고유성을 지닌 것으로는 절풍折風, 소골蘇骨, 조우식鳥羽飾의 관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헝겊 혹은 가죽 두 장을 앞에서 뒤로 이어 붙임으로써, 착용할 때는 모부가 삼각형의 변상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조우를 장식한 관모는 조우를 장식하지 않은 절풍이나 소골보다 상위 계층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 관모의 특징으로까지 자리 잡았다.조우(새 깃)에는 태양숭배 및 영혼불멸사상과 연계된 조류숭배의 관념이 내포되어 있는데, 조우를 머리에 장식하는 것은 수렵시대의 유속이며 한때 아시아 북방 제 민족 사이에 행해졌던 풍습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를 일시적 현상이 아닌 생활 속의 습속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우리 관모에서 조우식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것은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묘 벽화에 다른 빈객들과는 대조적으로 한인韓人 사절만이 조우를 꽂은 관모를 착용한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조우식으로는 원래 새의 자연 조우인 깃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금속제를 사용하기도 했다. 신라의 금관총, 서봉총 등에서 발굴된 금관에는 금속제의 조익형鳥翼形 장식도 나타나는데, 조우의 금속화는 수식의 귀족적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다.그 밖에 한 장의 헝겊으로 머리를 싸매는 데에서 출발한 건과 햇볕이나 비를 가리는 실용적인 용구로 출발한 입笠의 착용 예가 확인되나, 이들은 모두 단순한 쓰개로서 존재했다.2.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는 변상의 모帽를 기본으로 했던 우리 고유의 관모들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에 문헌에는 649년(진덕왕 3)에 “처음으로 중국의 복식과 의관을 착용하였다始革中朝衣冠.”라고 하였고, 854년(흥덕왕 29)에 반포된 복식금제에는 복두幞頭가 전 계급 남자의 관모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북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 토용(730~780년), 황성동 고분 출토 토용(649년 이후 늦어도 680년대)에서도 복두가 확인된다.복두는 당시 당唐에서는 일반 남자들까지 널리 착용하던 관모로써, 문화 교류를 통해 수용된 중국식 관모이다. 처음에는 커다란 한 장의 천 전후좌우에 네 개의 끈[각脚]을 내어 앞 좌우 두 개의 끈은 뒤로 묶고 뒤 두 개의 끈은 상투 앞으로 올려 묶은 형태인 ‘사대건四廗巾’에서 출발하였는데, 점차 전면 머리 위로 올려 묶었던 두 개의 끈은 퇴화하면서 뒤에 묶어 내린 두 개의 끈[이각二脚]만이 남게 된다.『삼국유사三國遺事』 경문왕조景文王條에 보면,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의 귀처럼 길어졌는데 이를 복두로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왕후나 관인은 모르고, 오로지 복두장이만 알고 있었다는 복두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이를 통해 이제 복두는 관인뿐만 아니라 왕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둔황 335호 석굴과, 제작 연대가 8세기 초로 인정되고 있는 장회태자 묘의 벽화에도 조우관을 쓴 한인 사절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조우관의 모부는 모두 변상관모로 되어 있으므로, 상대의 조우관은 중국 관모의 수용 이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또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의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 아프라시압 궁정 벽화 인물의 모자는 고식古式의 복두에 조우를 꽂아 장식한 형상이다. 이는 조우관의 모부가 종래의 일률적인 변상관모에서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7세기 후반은 우리 관모제의 변천 과정으로 보면 중요한 전환기로 볼수있다.3. 고려에서는 일반적으로 복두를 위로는 왕실·귀족으로부터 악공樂工, 조례皂隸, 노비,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착용하였다. 다만 민서들의 관모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되어 있는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 오건사대烏巾四帶는 고식인 사대건이며 한 장의 천으로 머리를 싸맨 형태인 건巾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국관國官, 귀인貴人이 사가에서 쓰는 양대兩帶의 오건은 전면에 올려 매었던 두 개의 끈이 퇴화한 연질軟質의 수각복두垂脚幞頭를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리의 공복에는 경질硬質의 전각복두展脚幞頭가 사용되었으므로, 양대의 오건이라 함은 이와 구분하여 불리던 명칭이었을 것이다.고려 말기에는 원元의 영향으로 인해, 원나라 관리들이 착용했던 발립鈸笠이 수용되었음은 이 시기 발립 착용 인물의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립은 위가 둥글고 첨(채양)이 작은 평량자형 입자笠子로 모체帽體 정상에 정자장식頂子裝飾을 한 것인데, 첨의 안쪽은 다른 색色으로 꾸며져 있다.『고려사高麗史』에는 1367년(공민왕 16)에 입笠 정상의 재료에 차 등을 둔 정자頂子를 장식한 ‘흑립黑笠’을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하였고, 그 밖에 흑초방립, 백방립 등의 명칭도 등장하였다. 이로써, 고려 말기에는 용구로서의 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념 변화의 바탕에는 당시 발립의 수용과 착용이 적잖은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는 나아가 사회적인 관모로 자리매김된 조선 입제의 완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시대 흑립과의 형태나 제작기술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4. 조선시대는 관리의 관복 제도를 명나라보다 두 등급 낮추어 제정하면서 관모도 관품과 용도에 따라 두 등급을 낮추어 제정하였다. 왕을 비롯한 관리의 관모로는 면류관, 원유관, 익선관, 양관, 사모가 있으며, 이를 관품과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착용하였다.사대부들도 의관정제를 중시하는 관습에 따라서 일상 통행할 때 집 안에 있을 때도 반드시 관모를 착용하였다. 사대부들이 평상시에도 늘 착용했던, 통칭 편복관모는 크게 입의 발달 단계와 편복관[巾制]의 수용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1) 입제: 조선시대의 입笠은 모자집(대우)과 입첨(양태)의 구분이 명확한 평량자형平凉子形 갓과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방립형方笠形 갓으로 구분한다. 패랭이, 초립, 흑립, 백립, 주립, 옥로립, 전립氈笠, 戰笠은 평량자형 갓에 속하는 것들이며, 삿갓이나 방갓은 방립형 갓에 속하는 것으로, 각각은 용도와 신분에 따라 달리 사용되었다. 입笠의 전반적인 발달 단계와 그 사용 행태(입제)를 중심으로 보면, 이들 중 흑립은 제작기술상 평량자형 갓의 가장 초기 형태의 것인 평량자(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조선 입제 발달의 최종 완성품이다. 이로써 협의로 ‘갓’이라고 하면 흑립만을 지칭하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관모를 나타낸다.흑색의 갓, 즉 흑립은 사실 비기능적이며 비실용적인 모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비단끈과 각종의 옥을 꿰어 목 밑으로 길게 늘인 패영으로 갓을 머리 위에 고정시키고, 비가 오면 그 위에 갈모를 쓰며, 잘 다듬은 나무상자나 생피 갓집에 보관하는 등, 갓에 대한 사랑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지대한 것이었다. 또한 갓을 항상 상석에 걸어 둘 정도로 갓에 들인 관심과 정성은 의관을 존중했던 당시 시대의 복식규범에서 연유한다.2) 편복관: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갓’에 대신하여 집 안에서 늘 착용한 모자로, ‘○○관’으로 불리는 방관方冠·사방관四方冠, 동파관東坡冠, 와룡관臥龍冠, 정자관程子冠 등 을 총칭하여 ‘편복관’으로 지칭한다. 원래는 중국의 문인, 학자들이 사용한 방건 혹은 사방평정건, 동파건東坡巾, 제갈건諸葛巾, 정자건程子巾 등에서 유래한 것인데, 우리는 이들을 조선시대 인종, 명종 대에 들여와 ‘○○관’이라 부르며 사용하게 되었다.편복관은 대체로 모두 부드러운 재질로 되어 있어서 쉽고 간편하게 접을 수 있는 ‘건’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특히 ‘○○관’이라 지칭한 데에는 건보다 상위의 개념인 관을 더 애호했던 데에 기인한 것 같다.집안에서도 늘 의관을 갖추어야 했던 사대부들은 ‘갓’에 비해 다루기 쉽고 손질이 간편하며 쉽게 접을 수 있는 편복관을 애용하였는데, 이러한 의식의 저변에는 당시 조선사회에 팽배하였던 ‘의관정제’의 생활 규범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 조선 말 대원군의 의복 간소화 시책으로 편복관이나 종래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큰 갓(흑립)이 점차 사라진다. 대신에 첨이 좁은 작은 갓(소립小笠)이 등장하였는데, 소립은 일반 남자들도 두루 착용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 때에 단발령이 내려지고 남자들이 점차 상투를 틀지 못하게 되면서 평상시에도 갓이나 편복관을 쓰던 전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물론 서구에서 도입된 각종의 해트hat 류가 있었으나 의관정제를 위하여 모자를 반드시 갖추어 써야 했던 우리의 복식 예의는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관리들은 갑오개혁 이후 양복을 예복으로 착용하게 되면서 서구식 모자인 중절모, 중산모, 맥고모자 등의 모자를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예복의 모자는 영국 예복의 모자를 본뜬 것으로 앞뒤가 뾰족 나온 산山자 형인데 모자 정수리에 장식 깃털이 달려 있었다. 또 소례복인 프록코트frock coat에는 영국제 실크해트silk hat를 착용했는데 이를 당시는 ‘진사고모眞絲高帽’라고도 불렸다.6. 우리의 관모제가 종식된 이후 잠깐 동안 일반 복식에는 양복·한복을 막론하고 서구식 모자를 착용하였다.당시에 유행한 모자는 모두 해트류로 파나마모panama를 비롯해 중절모, 중산모 등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는 서구에서도 남자들의 모자 착용이 줄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일반인의 모자 착용이 줄어들었고, 1980년대는 중·고등학생의 교복이 폐지됨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제정되었던 일본식 교복과 교모도 사라지게 되었다.오늘날은 군인·경찰 등의 제모制帽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헬멧helmet, 방한모, 각종 운동모 등이 주로 사용되고 있으나 예의를 갖추기 위해 모자를 착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여자의 모자는 양장과 함께 들어왔지만 서구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특수층에 한하였다. 여성관의 변화로 일반여성들은 외출 시에 착용하던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벗어버리고 그 대신 조바위, 아얌 등을 착용하기도 했으나 양장 착용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도 곧 사라지게 되었다.이처럼 전통의 관모들이 자취를 감추고 한때 서구식 모자가 이를 대신한 적도 있으나 우리의 생활 규범 속에 굳게 자리했던 ‘정장에는 모자를 갖추어야 한다.’라는 관념은 우리 관모제의 종식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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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쓰는 것을 유형별로 보면 크게 건·입·모· 관 등의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유형의 모자는 차츰 형태와 제작기술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종류로 분화·발전하거나 소멸의 과정을 겪게 되고, 신분과 용도에 따라 때로는 새로운 형태의 것으로 대치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식 모자의 등장으로 해트류와 캡cap류의 모자가 등장한다.1. 건: 관모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천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의字義에는 ‘한 장의 헝겊으로 머리를 감싸는 모든 형상의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곧 머리에 덮어 씌워진 후에 비로소 어떤 형태를 이루는 건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건이 점차 여러 형상의 것으로 형태화된 이후에도 착용하지 않을 때는 간단히 접을 수 있었던 것과 상통하는 특성이기도 하다.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부인의 머릿수건이나 남자들이 머리를 덮어 뒤에서 묶어 내린 형상은 가장 원시적인 건의 형상이다.고려시대에도 조건·문라건 등이 등장하며 이는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했던 가장 소박한 모자의 하나였으며, 복두의 시원형인 사대건도 머리에 덮어 씌워진 후에 형태를 이루었던 하나의 건이다.조선 초에 두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망건이 생성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 녹사錄事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 서리는 무각평정건을 쓰게 되어 있다. 또 별감은 자건紫巾, 세자궁별감은 청건靑巾, 나장은 조건皁巾, 인로引路는 자건, 학생은 치포건緇布巾을 쓰도록 되어 있다. 선비들은 망건 위에 탕건을 쓰고 그 위에 갓을 썼다. 평소 집안에서 착용한 탕건, 사방관, 동파관, 충정관, 와룡관, 정자관 등도 형상화된 건의 한 유형이며, 유학자들의 유건, 복건 등도 있다. 상중喪中에 쓰는 굴건, 두건도 건의 특수 용례 중 하나이다.2. 갓: 갓의 한자 표기는 ‘입笠’으로서, 본래의 뜻은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해 식물성 재료를 거칠게 엮어 머리에 쓰는 실용적인 용구인 쓰개 가운데 하나이다.갓을 착용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양사전良耜傳』, 『무양전無羊傳』에서도 ‘입笠’이 더위와 비를 막는 데에 쓰였다고 언급하고 있어 발생 초기에는 관모적冠帽的 요소보다는 도구적道具的 요소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점차 재료와 제작 방법이 발전하면서 종류와 용도가 확대된다.고구려 감신총 벽화에서도 활을 당기며 매를 쫒는 를 볼 수 있는데, 입은 모정이 둥글고 차양이 넓으며, 끈으로 턱에 걸어 맨 듯한 모습이므로 조선시대 폐양립蔽陽笠과 아주 비슷하다. 『삼국유사』 원성왕조에 ‘착소립着素笠’의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高麗史』 지권 26 여복에 의하면 1367년(공민왕 16) 9월 “백관시착립조알白官始着笠朝謁”이라는 기록과 함께 이후 흑초방립, 백방립 등이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되었으므로, 입은 고려 말에 이르러서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모인 흑립이 탄생하기에 이른다.3. 모: 모는 머리 전면을 싸는 모옥帽屋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관모를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두와 사모가 있다. 복두는 통일신라시대에 당에서 받아들였으며, 고려에 이르러 널리 착용되었다. 고려왕은 조복에 복두를 썼고 이직산원吏職散員들도 복두를 착용하였다. 복두 착용에 대한 금지 또는 허용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왕은 상복에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썼는데, 이는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사모의 전신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복두 대신 사모가 널리 착용되어 관원은 물론 일반 서민도 혼례 때에 착용이 허용되었다.이밖에도 방한용의 각종 난모류煖帽類, 비를 막기 위한 우모雨帽, 화살을 막기 위한 투구 등의 쓰개도 있었다. 개화기 이후에는 중절모, 맥고모자, 파나마모자 등이 크게 유행하였다.4. 관: 입, 건, 모에 대비하여 관은 상위의 개념을 갖고 있으면서 형태상으로도 잘 갖추어진 머리쓰개의 의미가 크다. 『후한서舊唐書』 고구려조에 “왕은 백라관을 썼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안악 3호분 묘주의 관은 내관은 흑색이며 외관은 백색으로, 내관과 외관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일종의 이중관이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에서 왕만이 썼다고 하는 백라관일 것이다.관으로 대표되는 것은 삼국의 금관이다. 금관의 원류는 시베리아 샤만의 녹각관鹿角冠에서 연유한 일종의 무관巫冠에서 발달한 것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호족 내지 왕이 썼다.고려시대에는 왕의 면류관이 있었고, 건이나 모는 다양한 명칭이 있으나 관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뱃사람이 쓰는 죽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죽관은 삿갓류의 모자에 대한 한자 차용의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조선시대에는 왕의 관모로 면류관·통천관·원유관· 익선관이 있었고, 신하의 것으로는 양관·제관이 있다. 일반 선비의 것에는 사방관·충정관·동파관·와룡관·정자관 등의 명칭이 있으나 이는 중국에서 문인들이 썼던 방건·충정건·동파건·제갈건·정자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만 명칭에 ‘건’의 상위 개념인 ‘관’을 차용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5. 서구식 모자: 개화기 이후는 서구식의 모자도 사용하게 된다. 형태는 기본적으로 머리[頭]를 덮는 부분인 크라운crown과 햇볕을 가리는 부분인 브림brim으로 구성된다. 서양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브림이 크라운 전체에 맞물려 붙어 있으면 해트hat,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붙어 있는 것은 캡cap으로 분류하기도 한다.현재는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더 일반적이나,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식 모자는 아래와 같다.1) 캡: 5~7쪽 정도의 조각을 이어 만든 크라운에 브림(챙)이 앞쪽이나 혹은 옆까지만 붙어있는 형으로, 부분적인 챙을 가진 모자 종류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야구모baseball cap, 수영모swimming cap, 스키모ski cap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근래에 젊은이들이 운동 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야구모를 즐겨 착용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2) 해트: 머리 부분인 크라운과 챙 부분인 브림으로 구성된 모자. 크라운이나 브림의 형상에 따라 여러 가지 해트 류가 있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① 중산모: 더비derby나 보울러bowler의 별칭이다. 둥근 크라운과 양옆이 약간 올라간 좁은 브림이 달린 형태의 빳빳한 모자이다. 주로 딱딱한 펠트로 만들어진 검정색 모자이며, 영국신사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원래는 영국의 비즈니스맨이 정장차림을 할 때 쓴 것으로, 윌리엄 보울러가 1850년경에 디자인했다고 해서 ‘보울러’라는 이름이 붙었다.② 중절모: ‘소프트 펠트 해트soft felt hat’로 가장 일반적인 비즈니스 웨어용 모자이다. 크라운의 정상 가운데가 접혀 있는 데서 ‘중절모’라는 이름이 붙었다. 펠트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모양이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③ 맥고모자: 밀짚으로 만든 모자의 총칭이다. 주로 여름에 많이 사용되었다.④ 실크해트: 원통형의 크라운으로 챙이 비교적 좁게 되어 있는 예장용 모자이다. 모닝코트, 이브닝코트 등 최고급의 예장용에 쓰인다. 원래는 17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 대유행하였던 비버 해트가 기원이며, 비버 모피의 수요 부족으로 인해 실크를 대신 쓴 것이 이 모자의 시초이다. 오페라해트opera hat, 톱 해트top hat, 하이 해트high hat라 부르기도 하고 토퍼topper라는 속칭도 있다. 우리나라는 개화기 초기에 상류층 사이에서 잠시 사용되었다.⑤ 파나마모: 스트로 해트(밀짚모자)의 일종이다. 원래는 곱고 옅은 빛깔의 파나마풀, 혹은 에콰도르·콜롬비아 등 중남미 야자류의 섬유 등으로 만들었으나 오늘날은 파나마풀과 비슷한 섬유로 만든 것도 이렇게 부른다. 여름에 쓰는 남성용 모자이다. 국상에 백립을 쓰는 우리나라는 단발령 이후 갓 착용이 어렵게 되자, 한 때 백립을 대신하여 파나마모를 사용하기도 했다.3) 베레beret: 머리에 밀착되는 형태로 둥글납작하고 부드러우며 챙이 없는 모자이다. 한 장의 울이나 펠트로 만들며 빛깔과 소재도 다양하다. 교복을 비롯한 기타 유니폼에 사용하였으며, 요즈음은 예술가들이 즐겨 많이 착용한다.4) 클로슈cloche: 프랑스어로 ‘종’이란 뜻이다. 크라운이 높고 브림이 종처럼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퍼져 있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모자가 머리 전체를 감쌀 정도이며 거의 눈썹 아래까지 눌러 쓰는 것이 특색이다. 1920~1930년대에 신여성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덕혜옹주가 양장에 클로슈를 쓴 사진도 있다.5) 보닛bonnet: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며, 뒤에서부터 머리 전체를 싸듯이 가려 얼굴과 이마만 드러낸 모자이다. 크라운이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고, 턱 밑에서 끈으로 매며, 모자 가장자리를 러플로 장식한다. 개화기 초기에 일부 여학생 교복에 사용된 적이 있으며, 오늘날에는 유아용 모자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6) 터번turban: 중동이나 인도에서 많이 쓰는 모자이다. 긴 천을 머리에 둘러 심한 더위를 피하고, 또 바람을 막기 위해서 쓴다. 근래 터번을 모방한 디자인의 모자가 여성의 이브닝드레스에 많이 이용되었다.7) 토크toque: 작고 챙이 없으며 주름을 많이 잡아 머리에 꼭 맞도록 쓰는 모자이다. 근래에는 혼례용으로 웨딩드레스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19세기에는 이브닝드레스를 착용할 때 함께 썼으며, 꽃이나 베일로 장식하였다.8) 헬멧helmet: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모자의 일종이다. 철제나 알루미늄제, 플라스틱제 등이 있다. 사이클 등의 운동경기, 공장에서 쓰는 작업모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9) 후드hood: 머리 전체를 덮어 싸는 부드러운 모자로, 턱 밑에서 끈으로 매거나, 케이프나 코트에 달아 방한용으로 머리를 덮어쓰는 두건 모양의 모자이다. 코트나 재킷에 붙은 후드를 비롯하여 스키 등의 스포츠용으로 고안된 것도 있다.

특징 및 의의

우리나라는 예부터 모자를 중요한 복식 요소의 하나로 생각했다. 맨머리는 상민常民이나 죄인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외출할 때는 물론 실내에서도 모자를 착용하였다. 모자를 착용하지 않을 때는 변소에 갈 때, 침상에 들 때, 죄수가 되었을 때 정도이다.이러한 것은 일차적으로 상고시대 우리 복식이 갖는 엄격한 포피적包被的 성격과 무풍적武風的 요소에 ‘의관정제衣冠整齊’라는 복식에 관한 의례관념儀禮觀念이 더해진 데서 연유한다. 이에 우리나라의 ‘모자’에는 한층 대사회적인 역할을 하는 ‘관모’로서의 의미가 더해진다. 우리 복식의 중요 요소로 자리하게 된 관모는 예를 갖추는 중요한 요소로서 연령별, 신분별, 용도별로 구분하여 사용되어 왔다.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시작된 의복 간소화 시책과 1895년 을미개혁 때 시행된 단발령으로 상투를 틀지 못하게 되면서 평상시에 갓이나 관을 쓰던 전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 의복을 갖추어 입을 때는 반드시 모자를 착용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복식 예의도 사라지게 되었다.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2000년 역사를 이어 온 우리 두식문화頭飾文化와의 결별, 의관정제라는 것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왔던 ‘신분상징성’의 소멸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는 유교의 가치 이념인 ‘질서’와 ‘규율’, ‘서열의식’과 ‘형식주의’ 등의 개념을 복식에 구현하고, 형식과 격식을 갖춘 복장에서는 위엄과 권위의 가치까지 지향하였다. 의관정제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치 지향의 적극적인 한 표현이었으나 서양복식으로 일반화된 현대사회는 더 이상 신분상징과 직결되는 그러한 가치들을 수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관모’로서의 의미가 강조되던 우리나라의 모자는 이제 시대의 유행을 반영하는 패션물로서의 기능만이 강조될 정도로 그 역할이 변화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圖經, 高麗史, 三國遺事, 복식사전(라사라교육개발원, 라사라, 1991), 우리 관모의 시말에 관한 연구(강순제, 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한국의 복식문화사(난사 석주선관장 10주기 기념논총 진행위원회, 학연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