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기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송미경(宋美京)
갱신일 2018-10-05

정의

외출할 때 입는 우리나라 고유의 겉옷으로 옆트임이나 뒤트임이 없는 포.

개관

두루마기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으로, 저고리가 길어진 모양이다. 곧은 깃으로 동정과 옷고름이 달려 있다. 섶과 무가 있는 옷으로, 소매는 좁으며 옷 길이는 종아리와 발목길이 사이에 닿는다. 조선시대 고종 대 이후 신분과 무관한 남녀노소 공용의 옷으로 변화하였으며 한복 가운데 대표적인 겉옷이다.
두루마기의 명칭에 관련해 김동욱金東旭(1922~ 1990)은 고려 말 몽골어의 ‘후루막치’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조선에서는 옛날에 사내의 웃옷을 소매를 넓게 하고 옆구리를 터서 세 자락 혹 네 자락은 중치막도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옷은 사방이 터져서 속옷을 가릴 수 없어서 다시 사방을 둘러막은 옷을 만들어서 웃옷의 밑받침으로 입고 또 집에 있을 때에는 간단한 웃옷으로 입기도 하니, 이 옷은 사방이 막혔다 해서 두루마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두루마기는 밑받침 옷이요 웃옷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치막이나 도포를 입지 못하게 한 상민 계급에서나 할 수 없이 웃옷으로 입었습니다. 고종 갑신년에 개혁을 하면서 의복제도를 바꾸면서 넓은 소매와 너털거리는 자락이 있는 창옷·중치막·도포 등이 폐지되고 홀가분한 두루마기가 밑받침 옷에서 웃옷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서 갑오경장 뒤에 널리 퍼져서 누구나 다 입는 웃옷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두루마기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이처럼 두루마기는 트임이 없는 형태에서 옷 이름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27 1776년(영조 52) 영조의 재궁의대梓宮衣襨에 남선단협수주의藍扇緞狹袖周衣 연남궁초협수주의軟藍宮綃狹袖周衣과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4 1800년(정조 24) 정조의 습襲에 보라화한단주의甫羅禾漢緞周衣 기록이 있다. 『순조실록純祖實錄』 권31 1830년(순조 30)에는 “사대부가 많이들 소매가 넓은 주의周衣를 착용하고 초교草轎를 타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는 정해진 의복과 일반적인 탈 것이 아니고 이른바 의복의 요사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여 사대부들이 소매 넓은 주의를 착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서는 1884년(고종 21) 6월 4일 소매가 넓은 도포, 직령, 창의 등 대신 두루마기를 입게 하자 성균관 유생 심노정沈魯 正이 상소하여 “지금 세속에서 말하는 장포長袍나 주의는 더욱이 옛 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순조純祖 30년 익종翼宗께서 대리하시던 경인년(1830)에 명을 내리시기를, 요즈음 들으니 사대부들이 흔히 소매가 넓은 주의를 입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제도인가? 주의는 바로 승려들의 옷으로 요망한 옷이다 …… 이로써 상고하여 보면 소매가 넓은 주의도 오히려 법복이 아닌데, 하물며 소매가 좁은 주의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틀 후에는 성균관 유생 남두희南斗熙 등이 상소하였다. “소매가 좁은 옷과 주의는 이미 선왕의 유법遺法이 아니며 또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가 아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뿐 아니라 실로 사람들의 뜻에도 거슬립니다.”라고 하였다. 그해 6월 17일 의복 제도에 관하여 유생 김건홍金健弘 등이 상소하여 소매 좁은 주의周衣에 대해서 난삼襴衫이나 학창의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대로 변통하여 유생과 하례下隷의 구분을 나타내게 해 줄 것을 청했다.
1895년(고종 32) 3월 29일에는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제부터는 공적인 예복과 사적인 예복에서 답호褡護를 없애고 대궐로 들어올 때만 모帽, 화靴, 사대絲帶를 착용하고, 주의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 종류로 하라.”라고 하였다. 그해 4월 5일에서 의복제도에 대하여 고시하였는데, “공사公私 예복 중에서 답호를 없애고 대궐로 들어올 때에는 모, 화, 사대를 하며 주의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대군주 폐하가 관리와 백성을 똑같이 보는, 넓게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신성한 덕으로, 의복제도에서조차 관리와 백성들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며 또한 검은색으로 한 것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신성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8월 10일 궁내부 대신과 조성 관리 이하의 복장 규정을 봉칙하여 반포하였다. “1. 통상복색通常服色은 편리한 대로 주의, 답호, 사대 차림을 하되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의 관리가 출근할 때에는 구애 없이 입으며 진현進見할 때는 입지 않는다.” 1900년(고종 37) 11월 16일에는 사치를 금지하는 조례를 반포하였다. “칙임관勅任官 및 50결結 이상 납세인이 무늬 있는 비단 주의와 답호, 명주 상하 속옷, 금과 은, 옥류식玉類飾 패물, 은그릇 및 수저를 쓰는 것, 주임관奏任官 및 30결 이상 납세인이 무늬 있는 비단 답호, 무명 주의 및 속옷 상의, 은식銀飾 패물, 은수저를 쓰는 것, 판임관判任官 및 10결 이상 납세인은 무명 답호와 주의를 쓰는 것을 모두 허용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순종실록』 부록 권10에서 1919년(순종 12년) 1월 26일 세 번째 기사에는 고종의 대렴 때 옥색 별문단別紋緞 주의 세 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순종실록』 부록 권13에 따르면 1922년 순종의 대렴 때에는 겹주의袷周衣를 사용했는데, 외공은 옥색 공단 내공은 흰색 삼팔주를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영조부터 순종 대에 걸쳐 주의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영조 국장의 재궁의대梓宮衣襨에는 남선단, 연남궁초 주의를 사용했고 정조 국장의 습襲에는 보라화한단 주의를 사용했다. 고종의 대렴의대로 옥색별문단 주의 세 벌이 사용되었고, 순종의 대렴의대에는 옥색공단(내공 흰색 삼팔주) 겹주의가 사용되었다. 영조와 정조 대에는 남색과 보라색 주의가 사용되었다면 고종과 순종 대에는 옥색 주의가 사용되었다. 주의에는 소매가 좁은 착수窄袖 주의와 소매가 넓은 광수廣袖 주의가 있다. 영조 재궁의대의 기록에는 착수 주의가 사용되었으며, 정조의 습에는 소매에 따른 주의의 구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순조 대의 기록에는 소매가 넓은 주의를 사대부들이 입는다고 했는데, 승려들의 옷이라 요망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출토복식에는 광수 주의가 수습되었는데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혁李爀(1661~1722) 묘의 유물이 있다. 이혁이 생존했던 숙종에서 경종 대에는 일반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대부의 포로 광수 주의가 염습의로 사용되었다. 이연응李沇應(1818~1879) 묘의 출토복식에는 착수 주의가 한 점 수습되었다.
고종 대에 들어오면서 갑신의제개혁에 따라 착수주의를 입게 하지만, 난삼이나 학창의를 입게 하여 유생儒生과 하예下隸를 구별할 수 있게 요청하는 상소를 통해 주의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옷차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갑신의제개혁 이후 두루마기는 사람들에게 착수로 인식되고 있다. 1895년(고종 32)에 주의는 통상 복색으로 사용되며 관리와 백성 모두 검은색 주의를 입음으로써 넓고 공정하고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의 복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풍경을 판화로 묘사한 1921년 키스E. Keith의 채색 목판화 <New Year’s Shopping Seoul> 속에서도 두루마기 입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두루마기는 학생복으로도 착용되었으며,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는 한복의 겉옷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던 차에 마르세유에 들렀던 김활란金活蘭(1899~1970)도 당시에 유행하던 단발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에는 옷고름을 단추로 바꾸어 간편하게 입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남자 두루마기에는 양복지를 사용하여 고종 대 이후 검정색 두루마기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특징 및 의의

두루마기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으로, 삼국시대의 포袍에서 비롯해 현대까지 입는 옷이다. 다른 포 종류가 트임이 있는 옷인데 비해 두루마기는 사방이 막혀 있다는 것에 이름이 붙여졌다. 좁은 소매에 일상복이었던 옷이 조선 고종 대에 남녀노소 귀천상하 구별 없이 역사상 처음으로 평등하게 착용하는 예복이 되었다.

참고문헌

두루마기의 변천에 관한 연구(김미자, 서울여자대학 농촌발전연구총서, 1980), 여성의 빛 김활란(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9), 옷과 그들(김유경, 삼신각, 1994), 전주이씨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경기도박물관, 2001), 조선의 상식(최남선, 두리미디어, 2007).

두루마기

두루마기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송미경(宋美京)
갱신일 2018-10-05

정의

외출할 때 입는 우리나라 고유의 겉옷으로 옆트임이나 뒤트임이 없는 포.

개관

두루마기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으로, 저고리가 길어진 모양이다. 곧은 깃으로 동정과 옷고름이 달려 있다. 섶과 무가 있는 옷으로, 소매는 좁으며 옷 길이는 종아리와 발목길이 사이에 닿는다. 조선시대 고종 대 이후 신분과 무관한 남녀노소 공용의 옷으로 변화하였으며 한복 가운데 대표적인 겉옷이다.두루마기의 명칭에 관련해 김동욱金東旭(1922~ 1990)은 고려 말 몽골어의 ‘후루막치’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조선에서는 옛날에 사내의 웃옷을 소매를 넓게 하고 옆구리를 터서 세 자락 혹 네 자락은 중치막과 도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옷은 사방이 터져서 속옷을 가릴 수 없어서 다시 사방을 둘러막은 옷을 만들어서 웃옷의 밑받침으로 입고 또 집에 있을 때에는 간단한 웃옷으로 입기도 하니, 이 옷은 사방이 막혔다 해서 두루마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두루마기는 밑받침 옷이요 웃옷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치막이나 도포를 입지 못하게 한 상민 계급에서나 할 수 없이 웃옷으로 입었습니다. 고종 갑신년에 개혁을 하면서 의복제도를 바꾸면서 넓은 소매와 너털거리는 자락이 있는 창옷·중치막·도포 등이 폐지되고 홀가분한 두루마기가 밑받침 옷에서 웃옷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서 갑오경장 뒤에 널리 퍼져서 누구나 다 입는 웃옷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두루마기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이처럼 두루마기는 트임이 없는 형태에서 옷 이름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英祖實錄』 권127 1776년(영조 52) 영조의 재궁의대梓宮衣襨에 남선단협수주의藍扇緞狹袖周衣 연남궁초협수주의軟藍宮綃狹袖周衣과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4 1800년(정조 24) 정조의 습襲에 보라화한단주의甫羅禾漢緞周衣 기록이 있다. 『순조실록純祖實錄』 권31 1830년(순조 30)에는 “사대부가 많이들 소매가 넓은 주의周衣를 착용하고 초교草轎를 타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는 정해진 의복과 일반적인 탈 것이 아니고 이른바 의복의 요사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여 사대부들이 소매 넓은 주의를 착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서는 1884년(고종 21) 6월 4일 소매가 넓은 도포, 직령, 창의 등 대신 두루마기를 입게 하자 성균관 유생 심노정沈魯 正이 상소하여 “지금 세속에서 말하는 장포長袍나 주의는 더욱이 옛 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순조純祖 30년 익종翼宗께서 대리하시던 경인년(1830)에 명을 내리시기를, 요즈음 들으니 사대부들이 흔히 소매가 넓은 주의를 입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제도인가? 주의는 바로 승려들의 옷으로 요망한 옷이다 …… 이로써 상고하여 보면 소매가 넓은 주의도 오히려 법복이 아닌데, 하물며 소매가 좁은 주의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틀 후에는 성균관 유생 남두희南斗熙 등이 상소하였다. “소매가 좁은 옷과 주의는 이미 선왕의 유법遺法이 아니며 또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가 아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뿐 아니라 실로 사람들의 뜻에도 거슬립니다.”라고 하였다. 그해 6월 17일 의복 제도에 관하여 유생 김건홍金健弘 등이 상소하여 소매 좁은 주의周衣에 대해서 난삼襴衫이나 학창의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대로 변통하여 유생과 하례下隷의 구분을 나타내게 해 줄 것을 청했다.1895년(고종 32) 3월 29일에는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제부터는 공적인 예복과 사적인 예복에서 답호褡護를 없애고 대궐로 들어올 때만 모帽, 화靴, 사대絲帶를 착용하고, 주의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 종류로 하라.”라고 하였다. 그해 4월 5일에서 의복제도에 대하여 고시하였는데, “공사公私 예복 중에서 답호를 없애고 대궐로 들어올 때에는 모, 화, 사대를 하며 주의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대군주 폐하가 관리와 백성을 똑같이 보는, 넓게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신성한 덕으로, 의복제도에서조차 관리와 백성들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며 또한 검은색으로 한 것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신성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8월 10일 궁내부 대신과 조성 관리 이하의 복장 규정을 봉칙하여 반포하였다. “1. 통상복색通常服色은 편리한 대로 주의, 답호, 사대 차림을 하되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의 관리가 출근할 때에는 구애 없이 입으며 진현進見할 때는 입지 않는다.” 1900년(고종 37) 11월 16일에는 사치를 금지하는 조례를 반포하였다. “칙임관勅任官 및 50결結 이상 납세인이 무늬 있는 비단 주의와 답호, 명주 상하 속옷, 금과 은, 옥류식玉類飾 패물, 은그릇 및 수저를 쓰는 것, 주임관奏任官 및 30결 이상 납세인이 무늬 있는 비단 답호, 무명 주의 및 속옷 상의, 은식銀飾 패물, 은수저를 쓰는 것, 판임관判任官 및 10결 이상 납세인은 무명 답호와 주의를 쓰는 것을 모두 허용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순종실록』 부록 권10에서 1919년(순종 12년) 1월 26일 세 번째 기사에는 고종의 대렴 때 옥색 별문단別紋緞 주의 세 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순종실록』 부록 권13에 따르면 1922년 순종의 대렴 때에는 겹주의袷周衣를 사용했는데, 외공은 옥색 공단 내공은 흰색 삼팔주를 사용했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영조부터 순종 대에 걸쳐 주의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영조 국장의 재궁의대梓宮衣襨에는 남선단, 연남궁초 주의를 사용했고 정조 국장의 습襲에는 보라화한단 주의를 사용했다. 고종의 대렴의대로 옥색별문단 주의 세 벌이 사용되었고, 순종의 대렴의대에는 옥색공단(내공 흰색 삼팔주) 겹주의가 사용되었다. 영조와 정조 대에는 남색과 보라색 주의가 사용되었다면 고종과 순종 대에는 옥색 주의가 사용되었다. 주의에는 소매가 좁은 착수窄袖 주의와 소매가 넓은 광수廣袖 주의가 있다. 영조 재궁의대의 기록에는 착수 주의가 사용되었으며, 정조의 습에는 소매에 따른 주의의 구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순조 대의 기록에는 소매가 넓은 주의를 사대부들이 입는다고 했는데, 승려들의 옷이라 요망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출토복식에는 광수 주의가 수습되었는데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혁李爀(1661~1722) 묘의 유물이 있다. 이혁이 생존했던 숙종에서 경종 대에는 일반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대부의 포로 광수 주의가 염습의로 사용되었다. 이연응李沇應(1818~1879) 묘의 출토복식에는 착수 주의가 한 점 수습되었다.고종 대에 들어오면서 갑신의제개혁에 따라 착수주의를 입게 하지만, 난삼이나 학창의를 입게 하여 유생儒生과 하예下隸를 구별할 수 있게 요청하는 상소를 통해 주의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옷차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갑신의제개혁 이후 두루마기는 사람들에게 착수로 인식되고 있다. 1895년(고종 32)에 주의는 통상 복색으로 사용되며 관리와 백성 모두 검은색 주의를 입음으로써 넓고 공정하고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의 복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풍경을 판화로 묘사한 1921년 키스E. Keith의 채색 목판화 속에서도 두루마기 입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두루마기는 학생복으로도 착용되었으며,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는 한복의 겉옷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던 차에 마르세유에 들렀던 김활란金活蘭(1899~1970)도 당시에 유행하던 단발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에는 옷고름을 단추로 바꾸어 간편하게 입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남자 두루마기에는 양복지를 사용하여 고종 대 이후 검정색 두루마기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특징 및 의의

두루마기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으로, 삼국시대의 포袍에서 비롯해 현대까지 입는 옷이다. 다른 포 종류가 트임이 있는 옷인데 비해 두루마기는 사방이 막혀 있다는 것에 이름이 붙여졌다. 좁은 소매에 일상복이었던 옷이 조선 고종 대에 남녀노소 귀천상하 구별 없이 역사상 처음으로 평등하게 착용하는 예복이 되었다.

참고문헌

두루마기의 변천에 관한 연구(김미자, 서울여자대학 농촌발전연구총서, 1980), 여성의 빛 김활란(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9), 옷과 그들(김유경, 삼신각, 1994), 전주이씨묘 출토복식 조사보고서(경기도박물관, 2001), 조선의 상식(최남선, 두리미디어,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