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민정(李旼靜)
갱신일 2018-10-11

정의

학생들이 입고 다니도록 만든 제복制服.

내용

문헌기록에서 최초의 교복校服은 1411년(태종 11)에 제정된 성균관과 오부五部의 유생儒生들이 착용했던 ‘청금靑衿’으로 볼 수 있다.
근대적 학교가 설립되던 1883년경부터 1895년 12월 단발령 이전까지 학생들은 주로 저고리바지 위에 호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걸치거나 두루마기를 입었다. 머리는 상투를 튼 후에 갓을 쓰거나 땋은머리댕기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단발령 이후 학생모學生帽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학생모에는 교표가 부착되었다. 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및 연세대학교의 전신, 1886년 개교)에서는 한복을 교복으로 착용하였다. 1911년에 겨울철에 검정 솜두루마기를 입고 고름 대신 단추를 달아 입었으며 ‘경신’이라는 글자와 영문 머리글자 ‘KS’를 넣은 단추를 만들어 교표와 같이 옷에 달아 입었다. 이를 시초로 교표와 학교를 상징하는 단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1898년 당시 일본의 근대적 학생복인 쓰메에리詰襟, つめえり(스탠드칼라stand collor)가 달린 교복 양식을 받아들여 소매, 바지 솔기, 모자에 청·홍선을 두른 당복堂服을 제정하였다. 당시는 갑오·을미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으며, 단발령이 내려져 양복 착용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1910년대 국권 상실 이후 공립학교 교사들은 소매 끝, 어깨 위, 모자에 금테가 둘러진 제복을 입고, 칼을 차서 일본 군국주의 통치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반면, 학생들의 교복은 학교장의 재량에 따랐으며 획일화되지 않았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학생들은 깎은 머리에 학생모를 쓰고 자유로이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인 1919년 8월, 교원들의 제복과 패검이 폐지되었다. 대신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고등보통학생들에게 교복이 도입되었다. 이는 규율과 질서를 몸에 배게 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고, 일본에 동화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식 교복은 딱딱한 쓰메에리와 엄격한 색채 제한 등으로 일본의 규율과 질서, 훈련을 상징하였다. 보통학교에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검정 두루마기에 학생모를 교복으로 제정하였다. 당시 양복식 교복은 맞춤이었기 때문에 보통학교에서 양복식 교복을 착용하는 것은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기표가 되기도 하였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이후, 현재 대학교 과정인 전문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대학과 전문학교의 교복은 상의와 하의는 고등보통학교와 유사하였지만, 모자의 형태에서 차별화되었다. 사각모의 네 모서리는 철학·법학·천문학·약학을 상징하였다. 사각모는 동경제국대학에서 시작되어 퍼져 나갔다. 고등보통학교까지는 학생들이 둥근모를 착용한 반면, 사각모는 일반적으로 대학생이 착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사각모가 대학생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한국 최초 여학생 교복은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 학생들이 1886년경 입었던 러시아제 무명의 붉은 치마저고리이다. 선교사들이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불우한 소녀들을 위해 똑같은 옷을 입혀 준 것에서 비롯된 교복은 상하 같은 붉은색의 한복 형태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홍둥이’로 불리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이화학당의 홍색 교복은 정3품 이상 종2품까지의 관복색인 홍색을 침범한 것으로 인식되어 양반 사회에서 반발이 있었다. 1900년경부터 이화학당의 교복은 옥색치마에 흰 저고리로 바뀌었다. 1902년경부터는 각자 집에서 교복을 마련해 오게 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학생 양장 교복은 1907년에 등장한 숙명여학교의 교복으로 자주색 서지serge 옷감으로 만든 원피스, 분홍색으로 안을 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안, 에드워디안 스타일 보닛bonnet, 그리고 구두였다. 숙명여학교의 선구적 양장 차림의 교복은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원래 착용하던 교복인 흰 저고리와 자주색 치마로 바뀌었다. 1920년대까지 여학생복은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한복 일색이었다. 1910년대는 여러 학교에서 한복을 개량하여 긴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를 입게 하고, 쓰개치마장옷을 벗게 하였다. 대신 내외용으로 검정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남학생의 교복이 일본식 양복 교복이었다면, 여학생은 한복을 개량한 교복을 착용하였다. 1920년대부터 대부분 여학생의 복장이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로 통일되면서, 각 학교에서는 학교 특유의 개성과 표지를 교복에서 드러냈다. 치마 끝단에 흰 줄을 물결무늬로 꼬불꼬불하게 넣거나, 형태·색상·옷감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치마 주름의 폭을 넓게 또는 좁게 하는 것으로 학교의 특징을 표시했다. 이 무렵 여성의 체육 교육이 시작되면서 활동이 편해지도록 교복 치마에는 어깨허리를 달고, 저고리도 길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여학생들의 스타일은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았고, 기생들도 여학생 복장을 흉내내었다. 『신여성』 창간호(1923.10)에는 여학생의 교복과 교표를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 바로 기생들이 여학생들의 복장이나 스타일을 흉내 내기 때문에 외양으로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1930년대 후반에 여학생의 교복이 양장화되기 시작하면서 옷차림에 관련된 기생과 여학생의 혼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호수돈여학교(1899년 개교)에서는 1928년부터 저고리를 카키색으로 물들여 착용하다가, 1936년부터 일본 고등여학교 교복 양식인 감색 세일러복 스타일의 상의에 주름치마 교복을 제정하였다. 겨울에는 스웨터를 짜 입기도 하였다.
1938년 7월 19일, 총동원체제에서 총독 이하 관리의 제복제모制服制帽령 이후, 총독부는 학생들의 제복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복 교복을 입어오던 경성부 내의 진명·이화·배화·정신 등 네 학교가 1938년 2학기부터 모두 양복을 제복으로 하고, 머리는 단발로 실시하기로 하였다. 당시 민족 여대의 상징이었던 이화여전에서도 1939년 새 학기부터 한복 제복에서 양복 제복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39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최초의 여성 바지 교복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남학생의 교복은 유사 군복의 형태로 변하였다. 1939년 동복부터 “전 조선의 제 일착”으로 경기도 내 남자 공·사립 중등학교의 제복이 국책에 따라 국방색으로 통일되게 되었다(『동아일보』, 1939. 3.23). 학생들은 국방색 교복과 각반을 차고 전투모를 착용하게 하여 유사시에 그 제복대로 즉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1940년 신학기부터는 전국 35만여 중학생의 제복이 카키색의 쓰메에리 형태로 전국적으로 통일되었다. 남자 중등생의 교복은 국민복 을호 형태로, 모자는 전투모로 통일되었다. 여자 중등생의 교복은 곤색 서지 소재로 세일러 칼라에 치마에 플리츠(접혀진 주름)를 없앴으며, 소매 부분에 커프스를 달아 활동하기 좋게 만들었다. 총독부에서 전시에 활동이 편리하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여성에게 일본 여성의 노동복인 ‘왜바지(몸뻬)’를 입게 하여 일부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왜바지를 교복으로 착용하게 하였다. 바지 교복을 제정하여 왜바지 착용을 피하는 학교도 있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국방색 교복과 각반, 전투모, 몸뻬 같은 전시복 차림의 교복은 사라졌다. 대신 각 학교는 특성과 개성을 살려 양장 교복을 제정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서 제정한 교복과 교모의 경우, 서울대학교 교표가 자수된 베레모 교모에 남학생은 더블 재킷에 타이, 여학생은 감색이나 흑색 투피스(여름에는 흰 블라우스에 스커트)였다. 6·25전쟁 때 교복은 다시 전시 태세복으로 변화하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비상시국에 전시 교육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1951년 법률 178호 교육법 개정이 단행되었다. 중고등학교 3·3제 학제 개편이 포함되어 이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복이 분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청신한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1961년 7월, 남녀 대학생에게 교복을 착용하게 하였다. 값이 싼 국산품 제복에, 특히 여학생은 난잡한 화장 및 머리 모양을 못하게 하였다. 남녀 각 대학생은 반드시 배지를 달고, 야간 대학생도 교복, 교모를 착용하게 하였다. 1961년 군사정부는 대학생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복장 개선을 단행하였다. 여중고생 교복을 치마로 통일하고, 바지를 엄금하게 하였다. 일부 여학교에서는 1970년대 전반까지 바지 차림의 교복이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여학생은 단발을 원칙으로 하였고, 파마가 금지되었다.
1968년 문교부의 ‘중학교 평준화 시책’이 실시되면서 중학생 교복이 시도별로 획일화되었다. 남학생은 겨울에는 검정색 쓰메에리, 여름에는 회색 교복을 입고깎은 머리에 검정색 둥근 모자를 썼다. 서울 시내 중학교의 교복·교모·모표가 통일되었다. 여학생 교복은 여름에는 흰색 윙칼라블라우스에 감색 또는 검은색의 플레어스커트, 겨울에는 감색 또는 검은색 상·하의로 통일되었다. 1976년에는 사립국민학교의 사치성을 없애기 위해 사립학교의 교복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1977년 5월부터 문교부에서는 중고교생 교모와 교복 폐지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교복은 당시 자유와 민주평화를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982년 두발 자율화를 시발로 하여, 자주·창조·자율적인 주권자의 육성을 위한 교육 목표 전환의 일환으로 획일화된 교복 지정을 금지하는 교복 자율화방침이 발표되었다. 이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푸는 한편,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시선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1983년 교복 자율화 조치는 주니어 패션을 대두하게 하였다. 주니어 패션을 중심으로 한 판촉과 아울러 기성복 산업은 패션 산업으로 붐을 이루게 되었다. 각양각색의 학생 스포츠화가 등장하면서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중고생들이 교복을 벗으면서 가장 많이 선택한 옷은 청바지였고, 덕분에 제2의 블루진 붐이 불었다. 한편, 당시 서울에는 광화문, 안국동, 삼각지 등에 전문상가를 이루었던 교복 맞춤집들과 1,500개 교복 봉제업체와 500여 명의 도매업자들은 재고 처분과 실업, 도산의 불안감에 고심하게 되었다.
1990년 1월, 문교부는 자유복제를 채택한 중고등학교에 대해 다시 교복을 입도록 적극 권장하는 방침을 정하였다. 교복 시장이 연간 3,500~4,000억 원(1997년 기준)으로 커졌다. 1998년 3월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중고등학교의 95.5%가 교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대기업의 교복 시장 진출로 지방의 40개 중소 교복 업체가 도산하고 서울까지 확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전의 교복이 학교에 납품하는 체제였다면, 1990년대 학생복 시장은 기성복을 학생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 교복 판촉 전략은 교복을 학생들에게 자율권을 주어 교복 브랜드를 선택하게 하고, 교복을 자신만의 개성 표현의 수단이자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또 하나의 패션을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교복이 패션 상품이자 유행 상품으로 부각되면서 가격이 계속 올라갔다. 1997년 말 IMF 사태로 인해 교복 물려 입기 운동과 교복 공동구매 움직임이 시작되었
다. 이에 맞서 메이저 교복업계에서는 청소년의 취향을 활용하여 10대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모델로 한 스타마케팅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운영, 신소재의 사용, 원단의 고급화와 애프터 서비스 등을 시작하였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방영과 교복 협찬은 교복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싼 정장 같은 남학생 교복과 귀엽고 세련된 여학생들의 교복은 학생들의 환상을 자극했다. 교복 시장은 더욱 고급화되고 세련되어졌다.
2010년대에 이르러 교복은 평등의 수단이라기보다 고급화되거나 위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 교복을 거부하던 대학생들마저 단체로 점퍼를 맞추어 입고 다니며 해당 대학, 학과, 출신고교를 선명하게 새겨 입고 있다. 교복의 고급화, 위계화에 맞서 2010년 6·2 교육감 선거에서는 ‘반값 교복’ 구입 공약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특징 및 의의

신분 철폐와 의무제 교육을 기본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교복은 근대식 학교의 설립과 함께 등장하였다. 교복의 시작은 단발斷髮과 모자에서 시작되었다. 한복 교복에서 양복 교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일반 남녀들이 양복을 착용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었으며, 이는 복식의 양복화에 영향을 미쳤다. 교복은 학교장 재량으로 학교에서 지정하여 입기도 하였지만, 국가의 교육 관장 기관을 통해 지정되기도 하였다. 교복이지정되고 폐지되고, 다시 권장되어 착용되는 동안 정치·경제·사회의 변화가 교복의 형태를 변화시켜왔다. 교복은 통제와 구별짓기라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교복이 학생들을 국가 또는 학교의 통제 하에 두려는 역할이 컸을 때는 빈부 격차로 인한 위화감을 없애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키는 장점이 부각되었다. 한
편, 1990년대 이후 교복 시장이 기성복 체제의 대기업에 잠식되고 유행 상품이 되면서 교복은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상품으로 변해 갔으며, 위계질서와 구별짓기의 수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복식과 이데올로기-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기를 중심으로(이민정,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신여성문화-교복 변천사(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2004), 우리나라 남녀 중고등학교교복 변천에 관한 연구(안인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남녀중등생의 제복(매일신보, 1942. 3. 19), 대학생과 교복(동아일보, 1965. 2. 23), 신입 중학생에게 국방색의 제복(동아일보, 1939. 3. 23), 제일모직, 학생복 사업 중소기업에이양. 중소업체 육성차원(한국경제, 1997. 4. 9), 중학생 교복 다양하게(동아일보,1978. 9. 1), 학생제복흑색실행(동아일보, 1922. 6. 28).

교복

교복
사전위치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의생활

집필자 이민정(李旼靜)
갱신일 2018-10-11

정의

학생들이 입고 다니도록 만든 제복制服.

내용

문헌기록에서 최초의 교복校服은 1411년(태종 11)에 제정된 성균관과 오부五部의 유생儒生들이 착용했던 ‘청금靑衿’으로 볼 수 있다.근대적 학교가 설립되던 1883년경부터 1895년 12월 단발령 이전까지 학생들은 주로 저고리와 바지 위에 호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걸치거나 두루마기를 입었다. 머리는 상투를 튼 후에 갓을 쓰거나 땋은머리에 댕기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단발령 이후 학생모學生帽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학생모에는 교표가 부착되었다. 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 및 연세대학교의 전신, 1886년 개교)에서는 한복을 교복으로 착용하였다. 1911년에 겨울철에 검정 솜두루마기를 입고 고름 대신 단추를 달아 입었으며 ‘경신’이라는 글자와 영문 머리글자 ‘KS’를 넣은 단추를 만들어 교표와 같이 옷에 달아 입었다. 이를 시초로 교표와 학교를 상징하는 단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1898년 당시 일본의 근대적 학생복인 쓰메에리詰襟, つめえり(스탠드칼라stand collor)가 달린 교복 양식을 받아들여 소매, 바지 솔기, 모자에 청·홍선을 두른 당복堂服을 제정하였다. 당시는 갑오·을미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으며, 단발령이 내려져 양복 착용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1910년대 국권 상실 이후 공립학교 교사들은 소매 끝, 어깨 위, 모자에 금테가 둘러진 제복을 입고, 칼을 차서 일본 군국주의 통치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반면, 학생들의 교복은 학교장의 재량에 따랐으며 획일화되지 않았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학생들은 깎은 머리에 학생모를 쓰고 자유로이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인 1919년 8월, 교원들의 제복과 패검이 폐지되었다. 대신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고등보통학생들에게 교복이 도입되었다. 이는 규율과 질서를 몸에 배게 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고, 일본에 동화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식 교복은 딱딱한 쓰메에리와 엄격한 색채 제한 등으로 일본의 규율과 질서, 훈련을 상징하였다. 보통학교에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검정 두루마기에 학생모를 교복으로 제정하였다. 당시 양복식 교복은 맞춤이었기 때문에 보통학교에서 양복식 교복을 착용하는 것은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기표가 되기도 하였다.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이후, 현재 대학교 과정인 전문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대학과 전문학교의 교복은 상의와 하의는 고등보통학교와 유사하였지만, 모자의 형태에서 차별화되었다. 사각모의 네 모서리는 철학·법학·천문학·약학을 상징하였다. 사각모는 동경제국대학에서 시작되어 퍼져 나갔다. 고등보통학교까지는 학생들이 둥근모를 착용한 반면, 사각모는 일반적으로 대학생이 착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사각모가 대학생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한국 최초 여학생 교복은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 학생들이 1886년경 입었던 러시아제 무명의 붉은 치마저고리이다. 선교사들이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불우한 소녀들을 위해 똑같은 옷을 입혀 준 것에서 비롯된 교복은 상하 같은 붉은색의 한복 형태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홍둥이’로 불리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이화학당의 홍색 교복은 정3품 이상 종2품까지의 관복색인 홍색을 침범한 것으로 인식되어 양반 사회에서 반발이 있었다. 1900년경부터 이화학당의 교복은 옥색치마에 흰 저고리로 바뀌었다. 1902년경부터는 각자 집에서 교복을 마련해 오게 하였다.한국 최초의 여학생 양장 교복은 1907년에 등장한 숙명여학교의 교복으로 자주색 서지serge 옷감으로 만든 원피스, 분홍색으로 안을 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안, 에드워디안 스타일 보닛bonnet, 그리고 구두였다. 숙명여학교의 선구적 양장 차림의 교복은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원래 착용하던 교복인 흰 저고리와 자주색 치마로 바뀌었다. 1920년대까지 여학생복은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한복 일색이었다. 1910년대는 여러 학교에서 한복을 개량하여 긴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를 입게 하고, 쓰개치마와 장옷을 벗게 하였다. 대신 내외용으로 검정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1920년대 남학생의 교복이 일본식 양복 교복이었다면, 여학생은 한복을 개량한 교복을 착용하였다. 1920년대부터 대부분 여학생의 복장이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로 통일되면서, 각 학교에서는 학교 특유의 개성과 표지를 교복에서 드러냈다. 치마 끝단에 흰 줄을 물결무늬로 꼬불꼬불하게 넣거나, 형태·색상·옷감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치마 주름의 폭을 넓게 또는 좁게 하는 것으로 학교의 특징을 표시했다. 이 무렵 여성의 체육 교육이 시작되면서 활동이 편해지도록 교복 치마에는 어깨허리를 달고, 저고리도 길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여학생들의 스타일은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았고, 기생들도 여학생 복장을 흉내내었다. 『신여성』 창간호(1923.10)에는 여학생의 교복과 교표를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 바로 기생들이 여학생들의 복장이나 스타일을 흉내 내기 때문에 외양으로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1930년대 후반에 여학생의 교복이 양장화되기 시작하면서 옷차림에 관련된 기생과 여학생의 혼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호수돈여학교(1899년 개교)에서는 1928년부터 저고리를 카키색으로 물들여 착용하다가, 1936년부터 일본 고등여학교 교복 양식인 감색 세일러복 스타일의 상의에 주름치마 교복을 제정하였다. 겨울에는 스웨터를 짜 입기도 하였다.1938년 7월 19일, 총동원체제에서 총독 이하 관리의 제복제모制服制帽령 이후, 총독부는 학생들의 제복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한복 교복을 입어오던 경성부 내의 진명·이화·배화·정신 등 네 학교가 1938년 2학기부터 모두 양복을 제복으로 하고, 머리는 단발로 실시하기로 하였다. 당시 민족 여대의 상징이었던 이화여전에서도 1939년 새 학기부터 한복 제복에서 양복 제복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39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최초의 여성 바지 교복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남학생의 교복은 유사 군복의 형태로 변하였다. 1939년 동복부터 “전 조선의 제 일착”으로 경기도 내 남자 공·사립 중등학교의 제복이 국책에 따라 국방색으로 통일되게 되었다(『동아일보』, 1939. 3.23). 학생들은 국방색 교복과 각반을 차고 전투모를 착용하게 하여 유사시에 그 제복대로 즉시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1940년 신학기부터는 전국 35만여 중학생의 제복이 카키색의 쓰메에리 형태로 전국적으로 통일되었다. 남자 중등생의 교복은 국민복 을호 형태로, 모자는 전투모로 통일되었다. 여자 중등생의 교복은 곤색 서지 소재로 세일러 칼라에 치마에 플리츠(접혀진 주름)를 없앴으며, 소매 부분에 커프스를 달아 활동하기 좋게 만들었다. 총독부에서 전시에 활동이 편리하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여성에게 일본 여성의 노동복인 ‘왜바지(몸뻬)’를 입게 하여 일부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왜바지를 교복으로 착용하게 하였다. 바지 교복을 제정하여 왜바지 착용을 피하는 학교도 있었다.1945년 광복과 더불어 국방색 교복과 각반, 전투모, 몸뻬 같은 전시복 차림의 교복은 사라졌다. 대신 각 학교는 특성과 개성을 살려 양장 교복을 제정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에서 제정한 교복과 교모의 경우, 서울대학교 교표가 자수된 베레모 교모에 남학생은 더블 재킷에 타이, 여학생은 감색이나 흑색 투피스(여름에는 흰 블라우스에 스커트)였다. 6·25전쟁 때 교복은 다시 전시 태세복으로 변화하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비상시국에 전시 교육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1951년 법률 178호 교육법 개정이 단행되었다. 중고등학교 3·3제 학제 개편이 포함되어 이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복이 분리되었다.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청신한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1961년 7월, 남녀 대학생에게 교복을 착용하게 하였다. 값이 싼 국산품 제복에, 특히 여학생은 난잡한 화장 및 머리 모양을 못하게 하였다. 남녀 각 대학생은 반드시 배지를 달고, 야간 대학생도 교복, 교모를 착용하게 하였다. 1961년 군사정부는 대학생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복장 개선을 단행하였다. 여중고생 교복을 치마로 통일하고, 바지를 엄금하게 하였다. 일부 여학교에서는 1970년대 전반까지 바지 차림의 교복이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여학생은 단발을 원칙으로 하였고, 파마가 금지되었다.1968년 문교부의 ‘중학교 평준화 시책’이 실시되면서 중학생 교복이 시도별로 획일화되었다. 남학생은 겨울에는 검정색 쓰메에리, 여름에는 회색 교복을 입고깎은 머리에 검정색 둥근 모자를 썼다. 서울 시내 중학교의 교복·교모·모표가 통일되었다. 여학생 교복은 여름에는 흰색 윙칼라블라우스에 감색 또는 검은색의 플레어스커트, 겨울에는 감색 또는 검은색 상·하의로 통일되었다. 1976년에는 사립국민학교의 사치성을 없애기 위해 사립학교의 교복을 금지하기도 하였다.1977년 5월부터 문교부에서는 중고교생 교모와 교복 폐지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교복은 당시 자유와 민주평화를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982년 두발 자율화를 시발로 하여, 자주·창조·자율적인 주권자의 육성을 위한 교육 목표 전환의 일환으로 획일화된 교복 지정을 금지하는 교복 자율화방침이 발표되었다. 이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푸는 한편,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시선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이었다.1983년 교복 자율화 조치는 주니어 패션을 대두하게 하였다. 주니어 패션을 중심으로 한 판촉과 아울러 기성복 산업은 패션 산업으로 붐을 이루게 되었다. 각양각색의 학생 스포츠화가 등장하면서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중고생들이 교복을 벗으면서 가장 많이 선택한 옷은 청바지였고, 덕분에 제2의 블루진 붐이 불었다. 한편, 당시 서울에는 광화문, 안국동, 삼각지 등에 전문상가를 이루었던 교복 맞춤집들과 1,500개 교복 봉제업체와 500여 명의 도매업자들은 재고 처분과 실업, 도산의 불안감에 고심하게 되었다.1990년 1월, 문교부는 자유복제를 채택한 중고등학교에 대해 다시 교복을 입도록 적극 권장하는 방침을 정하였다. 교복 시장이 연간 3,500~4,000억 원(1997년 기준)으로 커졌다. 1998년 3월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중고등학교의 95.5%가 교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대기업의 교복 시장 진출로 지방의 40개 중소 교복 업체가 도산하고 서울까지 확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이전의 교복이 학교에 납품하는 체제였다면, 1990년대 학생복 시장은 기성복을 학생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 교복 판촉 전략은 교복을 학생들에게 자율권을 주어 교복 브랜드를 선택하게 하고, 교복을 자신만의 개성 표현의 수단이자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또 하나의 패션을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교복이 패션 상품이자 유행 상품으로 부각되면서 가격이 계속 올라갔다. 1997년 말 IMF 사태로 인해 교복 물려 입기 운동과 교복 공동구매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메이저 교복업계에서는 청소년의 취향을 활용하여 10대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모델로 한 스타마케팅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운영, 신소재의 사용, 원단의 고급화와 애프터 서비스 등을 시작하였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방영과 교복 협찬은 교복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싼 정장 같은 남학생 교복과 귀엽고 세련된 여학생들의 교복은 학생들의 환상을 자극했다. 교복 시장은 더욱 고급화되고 세련되어졌다.2010년대에 이르러 교복은 평등의 수단이라기보다 고급화되거나 위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 교복을 거부하던 대학생들마저 단체로 점퍼를 맞추어 입고 다니며 해당 대학, 학과, 출신고교를 선명하게 새겨 입고 있다. 교복의 고급화, 위계화에 맞서 2010년 6·2 교육감 선거에서는 ‘반값 교복’ 구입 공약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특징 및 의의

신분 철폐와 의무제 교육을 기본으로 한 근대적 의미의 교복은 근대식 학교의 설립과 함께 등장하였다. 교복의 시작은 단발斷髮과 모자에서 시작되었다. 한복 교복에서 양복 교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 일반 남녀들이 양복을 착용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었으며, 이는 복식의 양복화에 영향을 미쳤다. 교복은 학교장 재량으로 학교에서 지정하여 입기도 하였지만, 국가의 교육 관장 기관을 통해 지정되기도 하였다. 교복이지정되고 폐지되고, 다시 권장되어 착용되는 동안 정치·경제·사회의 변화가 교복의 형태를 변화시켜왔다. 교복은 통제와 구별짓기라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교복이 학생들을 국가 또는 학교의 통제 하에 두려는 역할이 컸을 때는 빈부 격차로 인한 위화감을 없애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키는 장점이 부각되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교복 시장이 기성복 체제의 대기업에 잠식되고 유행 상품이 되면서 교복은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상품으로 변해 갔으며, 위계질서와 구별짓기의 수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복식과 이데올로기-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기를 중심으로(이민정,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신여성문화-교복 변천사(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2004), 우리나라 남녀 중고등학교교복 변천에 관한 연구(안인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남녀중등생의 제복(매일신보, 1942. 3. 19), 대학생과 교복(동아일보, 1965. 2. 23), 신입 중학생에게 국방색의 제복(동아일보, 1939. 3. 23), 제일모직, 학생복 사업 중소기업에이양. 중소업체 육성차원(한국경제, 1997. 4. 9), 중학생 교복 다양하게(동아일보,1978. 9. 1), 학생제복흑색실행(동아일보, 1922.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