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분양행락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윤정(金潤貞)

정의

중국 당唐나라 무장武將이었던 곽자의郭子儀라는 인물의 생일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

역사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구당서舊唐書』 권卷120 열전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137 열전 「곽자의전郭子儀傳」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이다. 곽자의는 당나라 화주華州, 하남성 정현鄭縣 사람으로, 무과武科에 등제하여 여러 군사軍師를 거쳤다. 곽자의는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과 숙종肅宗 연간에 걸쳐 9년간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안록산의 난755~763(일명 황소의 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난이 일어났을 때 곽자의는 섬서성陝西省 서북방에 있는 삭방朔方의 절도사節度使였는데, 삭방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안록산의 부장이던 사사명史思明을 격퇴하였다. 숙종이 즉위한 후에는 황태자 광평왕廣平王 밑에서 부원사副元師가 되어 관군의 총 지휘를 맡았으며, 위구르의 원군을 얻어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여 당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신으로 극찬을 받았다. 한때 실각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군란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분양汾陽의 군왕郡王에 봉해졌다. 곽자의는 숙종을 이은 대종代宗 때에도 토번吐蕃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며, 덕종德宗 연간까지 그의 공적이 칭송되어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높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왕이 특별히 신하에게 내리던 존칭인 ‘상부尙父’ 칭호를 받았으며 왕의 최고 고문직인 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에 이른다.
곽자의는 키가 6척이 넘고 체모體貌가 수려하고 걸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곽자의가 병을 얻어 85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덕종은 매우 슬퍼하여 조정의 정사를 닷새 동안 폐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의 생전 업적이 얼마나 크게 칭송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곽자의가 받은 공직 가운데 최고 봉직은 63세에 받은 분양 군왕이다. 군왕은 고대 중국의 봉작封爵 가운데 황제의 친족에 버금갈 정도의 지위를 누린 직위이다. 군왕으로 봉작되는 대상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공신이나 황족皇族이 받았고, 과거 명明나라에서 조선 임금에게 내린 봉작도 군왕이었으니 어떤 정도의 지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곽자의는 평생을 무관으로 공을 세우며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85세의 장수를 누렸으며, 부인 왕씨王氏와의 사이에 여덟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과 손자뿐 아니라 사위들도 모두 출중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다. 특히 곽자의의 여섯째 아들 애曖는 대종代宗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애의 딸은 헌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그가 낳은 왕자가 후에 목종황제穆宗皇帝가 된다. 곽자의는 손자들이 많아 그들이 함께 문안을 올리면 일일이 알아보지 못하고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하는 고사가 유명할 정도로 공직생활뿐 아니라 자손까지 번창한 집안을 꾸린 인물이었다. 곽자의의 삶을 일러 “권력이 천하를 흔들어도 조정에서 미워하는 자가 없었으며, 공이 세상을 덮어도 황제가 의심하지 않았으며, 욕심을 다 이룰 정도로 사치하였어도 나쁘다 논하는 자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곽자의는 매우 아름다운 별장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다복과 사치를 누리며 안락태평한 노후를 보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을 일러 ‘곽분양팔자’라 할 정도로 부귀공명과 다복多福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곽자의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문헌의 기록에는 곽자의의 행적에 대한 언급과 곽자의의 복록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곽자의에 대한 내용은 12세기 우리 문헌에 처음 등장하고 다양한 장르 속에서 곽분양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의 문헌 기록에서는 곽분양의 무장으로서 역사적 행적과 관련된 것들이 많고, 18세기 이후 인물이 지니는 함축적 상징성이 강화되는 양상이 보이며,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중반에 다양한 영역과 장르로 확산된 것으로 본다. 언제,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에도 없는 한글 소설 『곽자의전』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아 곽자의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지를 알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곽분양의 생애는 실제보다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우연과 필연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황제를 구하고,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여 분양왕에 봉해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일생을 마친다는 내용으로, 전체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비범하게 탄생한 한 인물이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부귀영화를 얻게 된다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영웅소설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품평이 정형화되어 있는 경우, 그 인물이 표상하는 가치체계와 세계관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자생적인 확산력을 가지고 소설, 그림 등 여러 영역과 장르의 소재가 되어 번져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곽분양은 이러한 과정을 보여 주는 좋은 예로 꼽힌다.

내용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명칭을 풀이하면 각종 복락으로 가득했던 분양의 군왕 곽자의의 노후의 행복한 삶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곽자의의 생일잔치를 그린 이 그림에 대한 명칭은 <곽자의행락도>, <당곽자의행락도>, <분양행락도>, <곽분양도>, <곽자의팔자칠서도>, <곽분양자의행락도>, <곽분양향락도> 등 매우 다양한데, <곽분양행락도>가 가장 많이 통용되는 명칭이다.
당나라의 현존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동일한 명칭과 양식의 그림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곽자의의 초상을 비롯해 곽자의 아들 및 사위, 손자들의 다복함을 담은 장면의 그림들은 다수 남아 있다. 특히 명대에 등장하는 <당곽분양수연도唐郭汾陽壽宴圖>는 생일잔치 그림이라는 동일한 화제를 그린 것이어서 <곽분양행락도>와 유사한 도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여기에 더하여 1792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김정중金正中은 북경의 어느 부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 걸린 <곽분양행락도>를 보았다고 적고 있어 그가 보았던 이 그림이 현재 남아 있는 그림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유추해 볼 만하다. 이뿐 아니라 <곽분양행락도>가 복록의 상징적 의미로 그려졌음을 보여 주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숙종은 “예로부터 완전한 복을 갖춘 자로는 곽자의를 손꼽으니, 아들 사위 모든 손자들이 전부 다 앞에 있네. 이 병풍의 그림이 우연이 아니니, 오래 오래 두고 보아 복수를 누리거라.”라는 제발과 함께 왕자에게 <곽분양행락도>를 주기도 했다 하니, 일찌감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이 곽자의가 누렸던 복록을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1802년에는 순조, 순원후 가례嘉禮에 <곽분양행락도>가 제작 사용되면서 이후 대표적인 가례병풍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700년대 전후한 시기에 <곽분양행락도>가 존재했으며, 19세기 기복호사 풍조의 만연으로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곽분양행락도>는 청록으로 그려진 산수와 세밀한 인물 묘사, 다채로운 색의 사용 등이 특징이다. 대작으로 8폭에서 12폭까지의 병풍으로 꾸며진 것들이 대부분이며, 당대에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곽자의의 별장에서 벌어진 잔치 모습을 중심으로 연폭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화면의 좌측에는 기암절벽, 첩첩산중을 떠올리게 하는 구름에 쌓인 청록의 산수와 폭포가 보인다. 잔치에 초대되어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을 비롯해 잔치의 중심이 되는 곽자의의 용상 주변으로 크고 작은 전각에는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고, 얼굴을 일일이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는 그의 손자들까지 전반적으로 들썩이는 잔치마당이 잘 표현되어 있다.
중앙에는 주인공인 곽자의가 금관을 쓰고 용상에 앉아 마당에서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아들과 사위, 처첩, 신하, 궁녀들이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고있다. 대체로 곽자의의 오른쪽으로는 여덟 아들이, 왼쪽으로는 일곱 사위가 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곽자의의 부인은 중앙 마당 주변 건물에 앉아 역시 잔치 장면을 보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은 이처럼 연폭으로 그려진 잔치마당 장면의 그림이지만, 그림이 갖는 다복多福의 상징성이 점차 강화되면서 연회도, 백자도 등과 섞이면서 다양한 조합의 병풍으로 만들어졌다.

특징 및 의의

이 그림은 흥이 잔뜩 오른 잔치의 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장면과 요소 하나하나가 복록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표현되어 있다. 주변 산과 전각들을 포함해 화면 전체를 휘감듯이 그려진 구름은 그림 전체에 상서로운 기운과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을 표현한다. 춤추는 학과 한가롭게 노니는 사슴역시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먹이를 먹고 있는 공작은 출세를 의미하며, 마당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곳곳에 부귀와 평안을 상징하는 모란이 만발해 있다. 이른바 실존했던 한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인물이 지니는 다복의 상징성과 곳곳에 부귀, 다복, 장수 등 기복의 상징물들을 그려 전체적으로 복록의 상징성으로 가득 찬 그림이 되었다. 결국 <곽분양행락도>는 명예로운 출세, 자손번창, 부富, 장수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누릴 수는 없었지만, 누구나 누리고 싶었던 삶, 그 삶을 함께 하고픈 사람들의 열망이 탄생시킨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곽분양행락도-부귀영화와 장수를 꿈꾸다(김윤정, 월간민화17, 지디 비주얼, 2015), 궁중 장식화의 세계(박정혜, 조선 궁궐의 그림, 돌베개,2012), 조선후기 곽분양행락도 연구(정영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9).

곽분양행락도

곽분양행락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윤정(金潤貞)

정의

중국 당唐나라 무장武將이었던 곽자의郭子儀라는 인물의 생일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

역사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구당서舊唐書』 권卷120 열전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137 열전 「곽자의전郭子儀傳」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이다. 곽자의는 당나라 화주華州, 하남성 정현鄭縣 사람으로, 무과武科에 등제하여 여러 군사軍師를 거쳤다. 곽자의는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6과 숙종肅宗 연간에 걸쳐 9년간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안록산의 난755~763(일명 황소의 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난이 일어났을 때 곽자의는 섬서성陝西省 서북방에 있는 삭방朔方의 절도사節度使였는데, 삭방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안록산의 부장이던 사사명史思明을 격퇴하였다. 숙종이 즉위한 후에는 황태자 광평왕廣平王 밑에서 부원사副元師가 되어 관군의 총 지휘를 맡았으며, 위구르의 원군을 얻어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여 당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신으로 극찬을 받았다. 한때 실각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군란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분양汾陽의 군왕郡王에 봉해졌다. 곽자의는 숙종을 이은 대종代宗 때에도 토번吐蕃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며, 덕종德宗 연간까지 그의 공적이 칭송되어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높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왕이 특별히 신하에게 내리던 존칭인 ‘상부尙父’ 칭호를 받았으며 왕의 최고 고문직인 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에 이른다.곽자의는 키가 6척이 넘고 체모體貌가 수려하고 걸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곽자의가 병을 얻어 85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덕종은 매우 슬퍼하여 조정의 정사를 닷새 동안 폐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의 생전 업적이 얼마나 크게 칭송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곽자의가 받은 공직 가운데 최고 봉직은 63세에 받은 분양 군왕이다. 군왕은 고대 중국의 봉작封爵 가운데 황제의 친족에 버금갈 정도의 지위를 누린 직위이다. 군왕으로 봉작되는 대상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공신이나 황족皇族이 받았고, 과거 명明나라에서 조선 임금에게 내린 봉작도 군왕이었으니 어떤 정도의 지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곽자의는 평생을 무관으로 공을 세우며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85세의 장수를 누렸으며, 부인 왕씨王氏와의 사이에 여덟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과 손자뿐 아니라 사위들도 모두 출중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다. 특히 곽자의의 여섯째 아들 애曖는 대종代宗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애의 딸은 헌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그가 낳은 왕자가 후에 목종황제穆宗皇帝가 된다. 곽자의는 손자들이 많아 그들이 함께 문안을 올리면 일일이 알아보지 못하고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하는 고사가 유명할 정도로 공직생활뿐 아니라 자손까지 번창한 집안을 꾸린 인물이었다. 곽자의의 삶을 일러 “권력이 천하를 흔들어도 조정에서 미워하는 자가 없었으며, 공이 세상을 덮어도 황제가 의심하지 않았으며, 욕심을 다 이룰 정도로 사치하였어도 나쁘다 논하는 자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곽자의는 매우 아름다운 별장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다복과 사치를 누리며 안락태평한 노후를 보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을 일러 ‘곽분양팔자’라 할 정도로 부귀공명과 다복多福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우리나라에 알려진 곽자의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문헌의 기록에는 곽자의의 행적에 대한 언급과 곽자의의 복록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곽자의에 대한 내용은 12세기 우리 문헌에 처음 등장하고 다양한 장르 속에서 곽분양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의 문헌 기록에서는 곽분양의 무장으로서 역사적 행적과 관련된 것들이 많고, 18세기 이후 인물이 지니는 함축적 상징성이 강화되는 양상이 보이며,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중반에 다양한 영역과 장르로 확산된 것으로 본다. 언제,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에도 없는 한글 소설 『곽자의전』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아 곽자의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지를 알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곽분양의 생애는 실제보다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우연과 필연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황제를 구하고,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여 분양왕에 봉해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일생을 마친다는 내용으로, 전체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비범하게 탄생한 한 인물이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부귀영화를 얻게 된다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영웅소설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품평이 정형화되어 있는 경우, 그 인물이 표상하는 가치체계와 세계관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자생적인 확산력을 가지고 소설, 그림 등 여러 영역과 장르의 소재가 되어 번져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곽분양은 이러한 과정을 보여 주는 좋은 예로 꼽힌다.

내용

명칭을 풀이하면 각종 복락으로 가득했던 분양의 군왕 곽자의의 노후의 행복한 삶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곽자의의 생일잔치를 그린 이 그림에 대한 명칭은 , , , , , , 등 매우 다양한데, 가 가장 많이 통용되는 명칭이다.당나라의 현존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동일한 명칭과 양식의 그림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곽자의의 초상을 비롯해 곽자의 아들 및 사위, 손자들의 다복함을 담은 장면의 그림들은 다수 남아 있다. 특히 명대에 등장하는 는 생일잔치 그림이라는 동일한 화제를 그린 것이어서 와 유사한 도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여기에 더하여 1792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김정중金正中은 북경의 어느 부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 걸린 를 보았다고 적고 있어 그가 보았던 이 그림이 현재 남아 있는 그림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유추해 볼 만하다. 이뿐 아니라 가 복록의 상징적 의미로 그려졌음을 보여 주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숙종은 “예로부터 완전한 복을 갖춘 자로는 곽자의를 손꼽으니, 아들 사위 모든 손자들이 전부 다 앞에 있네. 이 병풍의 그림이 우연이 아니니, 오래 오래 두고 보아 복수를 누리거라.”라는 제발과 함께 왕자에게 를 주기도 했다 하니, 일찌감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이 곽자의가 누렸던 복록을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1802년에는 순조, 순원후 가례嘉禮에 가 제작 사용되면서 이후 대표적인 가례병풍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700년대 전후한 시기에 가 존재했으며, 19세기 기복호사 풍조의 만연으로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존하는 는 청록으로 그려진 산수와 세밀한 인물 묘사, 다채로운 색의 사용 등이 특징이다. 대작으로 8폭에서 12폭까지의 병풍으로 꾸며진 것들이 대부분이며, 당대에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곽자의의 별장에서 벌어진 잔치 모습을 중심으로 연폭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화면의 좌측에는 기암절벽, 첩첩산중을 떠올리게 하는 구름에 쌓인 청록의 산수와 폭포가 보인다. 잔치에 초대되어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을 비롯해 잔치의 중심이 되는 곽자의의 용상 주변으로 크고 작은 전각에는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고, 얼굴을 일일이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는 그의 손자들까지 전반적으로 들썩이는 잔치마당이 잘 표현되어 있다.중앙에는 주인공인 곽자의가 금관을 쓰고 용상에 앉아 마당에서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아들과 사위, 처첩, 신하, 궁녀들이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고있다. 대체로 곽자의의 오른쪽으로는 여덟 아들이, 왼쪽으로는 일곱 사위가 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곽자의의 부인은 중앙 마당 주변 건물에 앉아 역시 잔치 장면을 보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은 이처럼 연폭으로 그려진 잔치마당 장면의 그림이지만, 그림이 갖는 다복多福의 상징성이 점차 강화되면서 연회도, 백자도 등과 섞이면서 다양한 조합의 병풍으로 만들어졌다.

특징 및 의의

이 그림은 흥이 잔뜩 오른 잔치의 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장면과 요소 하나하나가 복록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표현되어 있다. 주변 산과 전각들을 포함해 화면 전체를 휘감듯이 그려진 구름은 그림 전체에 상서로운 기운과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을 표현한다. 춤추는 학과 한가롭게 노니는 사슴역시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먹이를 먹고 있는 공작은 출세를 의미하며, 마당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곳곳에 부귀와 평안을 상징하는 모란이 만발해 있다. 이른바 실존했던 한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인물이 지니는 다복의 상징성과 곳곳에 부귀, 다복, 장수 등 기복의 상징물들을 그려 전체적으로 복록의 상징성으로 가득 찬 그림이 되었다. 결국 는 명예로운 출세, 자손번창, 부富, 장수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누릴 수는 없었지만, 누구나 누리고 싶었던 삶, 그 삶을 함께 하고픈 사람들의 열망이 탄생시킨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곽분양행락도-부귀영화와 장수를 꿈꾸다(김윤정, 월간민화17, 지디 비주얼, 2015), 궁중 장식화의 세계(박정혜, 조선 궁궐의 그림, 돌베개,2012), 조선후기 곽분양행락도 연구(정영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