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구곡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황해도 고산군 석담리에 조성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그린 그림.

내용

<고산구곡도>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西人 노론계 문사들이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이이의 학문적 상징 공간으로 삼고,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17세기 후반기부터 제작한 그림이다. <고산구곡도>의 초기 양식은 18세기 이후로 계승되면서 범본範本의 기능을 하였고, 19세기에는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民畵의 화제로도 널리 그려졌다.
고산구곡과 <고산구곡도>는 남송대 주희朱熹, 1130~1200의 사적이자 주자 학문의 본산이라 할 무이구곡武夷九曲과 관련이 깊다. 무이구곡은 주자가 강학과 저술에 몰두하던 공간이었기에 후대에 주자학朱子學의 발양지로 여겨졌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이구곡을 주자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고 상징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무이구곡은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그 의경은 상상 속에서만 떠올려야 했다. 그러한 동경憧憬을 해소해 준 것이 바로 <무이구곡도>였다.
<무이구곡도>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마련된 16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변용과 확산의 과정을 거치며 널리 감상되었다. 수용기인 16세기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무이구곡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개인의 은거처에 구곡을 조성하는 사례가 등장했다.
무이구곡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17세기부터 변화가 생겼다. 즉, 무이구곡에 대한 생각은 이전과 같았지만,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머문 현실 공간 속에 직접 구곡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곡의 경영은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견하여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겼다. 이는 조선구곡의 조성과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게 된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독창적인 조선의 구곡문화가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
조선구곡의 서막은 이이가 은거의 공간으로 조성한 고산구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이는 36세이던 1571년(영조 27) 황해도 고산의 석담리石潭里를 탐방한 뒤 곳곳의 명소에 구곡의 곡명曲名을 부여한 뒤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한글로 각 곡마다 <고산구곡가>를 지었는데, 그 현장을 후대에 ‘고산구곡’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고산구곡을 자주 찾지 못했다. 관직의 임기를 마친 뒤 잠시 휴가를 보내 고자 한시적으로 왕래했을 뿐이다.
이이가 정하고 이름붙인 구곡은 제1곡 관암冠巖·제2곡 화암花巖·제3곡 취병翠屛·제4곡 송애松厓·제5곡 은병隱屛·제6곡 조협釣峽·제7곡 풍암楓巖·제8곡 금탄琴灘·제9곡 문산文山 등이다. 그 뒤 율곡은 2년간의 해주 관찰사직을 마친 1576년(41세)에 고산구곡으로 돌아와 기거할 거처로 청계당聽溪堂을 세웠다. 1578년(43세)에는 청계당 동편에 정사를 짓고 ‘은병정사隱屛精舍’라 이름을 붙이고 고산구곡에서 본격적으로 은거할 준비를 마쳤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
고산구곡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17세기 후반기였다. <고산구곡도>에 처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었다. 송시열은 당시 황폐화된 고산구곡을 정비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차운次韻한 시를 짓게 한 뒤, 이를 그림과 함께 목판화로 제작하여 보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시열이 고산구곡도를 제작한 배경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즉,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이이로부터 이어지는 학통學統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삼고, 정치적 결속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고산구곡도>를 활용하였다.
송시열의 고산구곡도 제작 계획은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산구곡도> 한 점이 1920년대에 간행된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에 사진으로 실려 있다. 두루마리 형식에 각 곡마다 그림 위쪽에 이이가 국문체로 지은 <고산구곡가>와 송시열의 한역시漢譯詩를 적었고, 그의 문인 아홉 사람의 차운시가 각 곡 마다 적혀 있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서인계 문사들은 17세기 이후 <고산구곡도>에 강한 관심과 집착을 보였다.
『조선사료집진속』에 전하는 <고산구곡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이가 지은 <고산구곡가>의 내용에 근거하여 구곡의 경물을 형상화한 점이다. <고산구곡가>에는 ‘하루의 시간’과 ‘한 해의 계절’이 시어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시간과 계절은 그림 속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예컨대 <고산구곡가> 제1곡에서 “일곡은 어드메뇨, 관암冠巖에 해 비췬다.”의 구절은 <고산구곡도>에 관암과 해를 그려 넣은 근거가 된다. 또한 <고산구곡도>에서 소나무 사이에 술 잔을 놓은 벗이 오는가를 바라보고 있는 처사의 모습은 “송간松間늬 녹준綠尊을 노코 벗 오양 보리로다.”는 시구를 형상화한 것이다.
19세기에 그려진 <고산구곡도>의 대표작은 홍익대학교 박물관과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10폭 <고산구곡도병>이다. 두 병풍은 1817년(순조 17) 작으로 글씨 한 폭과 그림 아홉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경물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쌓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고산구곡도병>의 화풍은 19세기에 확산된 남종문인화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약간의 형식화가 진행된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근경의 언덕 묘사에 나타난 피마준披麻皴과 연속적으로 구사한 점묘點描, 먼 산에 반복적으로 들어간 미점米點과 같은 요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를 민화풍으로 계승한 사례는 건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고산구곡도병>에서 살필 수 있다.
이 10폭 병풍 역시 글씨 1면과 그림 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고산구곡도병>은 그림의 구도가 앞 시기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표현상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특히 묘사에 형식화가 두드러진 점과 초보적인 묘사는 민화풍의 일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에 가깝다.
구곡도를 소재로 한 민화는 일반 민화와 달리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의식이 깔려 있는 그림이다. 민화 구곡도류의 수요층은 18세기 후반부터 부를 축적한 상인과 부농富農, 그리고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신흥부유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19세기로 이어진 신흥부유층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의 상승은 양반문화를 동일시 하고자 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이처럼 민화 구곡도가 그려진 중심에는 바로 신흥부유층과 그들의 수요가 있었고, 민화로 그려진 것은 중산층으로 감상층이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은 그림의 화격을 크게 따지지 않았고, 소박한 형식의 그림을 선호했다. 전통적으로 지식인층이 감상하며 선호했던 장르인 소상팔경도류瀟湘八景圖類가 민화로 그려진 현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특징 및 의의

조선시대의 구곡도는 회화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다. 첫째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무이구곡도>를 조선구곡의 조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의 <고산구곡도>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즉, 17세기 이후 <무이구곡도>의 장소성과 화풍을 조선화朝鮮化된 구곡도로 창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 지식인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구곡도를 대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화民畵의 주제와 양식으로 변환을 이룬 점이다. 즉, 구곡도는 한국화韓國化와 대중화라는 두 측면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여 주었다. 특히 조선 말기의 민화가 이루어 낸 한국성과 대중화는 다른 주제나 화목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곡도만이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구곡도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유준영, 고고미술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과 고산구곡도(윤진영, 신사임당 가족의시서화,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2006), 조선사료집진속1(조선사편수회, 1926), 조선시대 구곡도의 수용과 전개(윤진영, 미술사학연구217·218,한국미술사학회, 1998), 조형예술과 성리학 화음동정사에 나타난 구조와 사상적 계보(유준영, 한국미술사 논문집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한국회화의 전통(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

고산구곡도

고산구곡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윤진영(尹軫暎)

정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황해도 고산군 석담리에 조성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그린 그림.

내용

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西人 노론계 문사들이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이이의 학문적 상징 공간으로 삼고,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17세기 후반기부터 제작한 그림이다. 의 초기 양식은 18세기 이후로 계승되면서 범본範本의 기능을 하였고, 19세기에는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民畵의 화제로도 널리 그려졌다.고산구곡과 는 남송대 주희朱熹, 1130~1200의 사적이자 주자 학문의 본산이라 할 무이구곡武夷九曲과 관련이 깊다. 무이구곡은 주자가 강학과 저술에 몰두하던 공간이었기에 후대에 주자학朱子學의 발양지로 여겨졌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이구곡을 주자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고 상징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무이구곡은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그 의경은 상상 속에서만 떠올려야 했다. 그러한 동경憧憬을 해소해 준 것이 바로 였다.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마련된 16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변용과 확산의 과정을 거치며 널리 감상되었다. 수용기인 16세기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면 무이구곡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개인의 은거처에 구곡을 조성하는 사례가 등장했다.무이구곡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17세기부터 변화가 생겼다. 즉, 무이구곡에 대한 생각은 이전과 같았지만,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머문 현실 공간 속에 직접 구곡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곡의 경영은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견하여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겼다. 이는 조선구곡의 조성과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게 된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독창적인 조선의 구곡문화가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조선구곡의 서막은 이이가 은거의 공간으로 조성한 고산구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이는 36세이던 1571년(영조 27) 황해도 고산의 석담리石潭里를 탐방한 뒤 곳곳의 명소에 구곡의 곡명曲名을 부여한 뒤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한글로 각 곡마다 를 지었는데, 그 현장을 후대에 ‘고산구곡’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고산구곡을 자주 찾지 못했다. 관직의 임기를 마친 뒤 잠시 휴가를 보내 고자 한시적으로 왕래했을 뿐이다.이이가 정하고 이름붙인 구곡은 제1곡 관암冠巖·제2곡 화암花巖·제3곡 취병翠屛·제4곡 송애松厓·제5곡 은병隱屛·제6곡 조협釣峽·제7곡 풍암楓巖·제8곡 금탄琴灘·제9곡 문산文山 등이다. 그 뒤 율곡은 2년간의 해주 관찰사직을 마친 1576년(41세)에 고산구곡으로 돌아와 기거할 거처로 청계당聽溪堂을 세웠다. 1578년(43세)에는 청계당 동편에 정사를 짓고 ‘은병정사隱屛精舍’라 이름을 붙이고 고산구곡에서 본격적으로 은거할 준비를 마쳤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고산구곡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17세기 후반기였다. 에 처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었다. 송시열은 당시 황폐화된 고산구곡을 정비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이의 를 차운次韻한 시를 짓게 한 뒤, 이를 그림과 함께 목판화로 제작하여 보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시열이 고산구곡도를 제작한 배경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즉,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이이로부터 이어지는 학통學統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삼고, 정치적 결속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를 활용하였다.송시열의 고산구곡도 제작 계획은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점이 1920년대에 간행된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에 사진으로 실려 있다. 두루마리 형식에 각 곡마다 그림 위쪽에 이이가 국문체로 지은 와 송시열의 한역시漢譯詩를 적었고, 그의 문인 아홉 사람의 차운시가 각 곡 마다 적혀 있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서인계 문사들은 17세기 이후 에 강한 관심과 집착을 보였다.『조선사료집진속』에 전하는 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이가 지은 의 내용에 근거하여 구곡의 경물을 형상화한 점이다. 에는 ‘하루의 시간’과 ‘한 해의 계절’이 시어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시간과 계절은 그림 속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예컨대 제1곡에서 “일곡은 어드메뇨, 관암冠巖에 해 비췬다.”의 구절은 에 관암과 해를 그려 넣은 근거가 된다. 또한 에서 소나무 사이에 술 잔을 놓은 벗이 오는가를 바라보고 있는 처사의 모습은 “송간松間늬 녹준綠尊을 노코 벗 오양 보리로다.”는 시구를 형상화한 것이다.19세기에 그려진 의 대표작은 홍익대학교 박물관과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10폭 이다. 두 병풍은 1817년(순조 17) 작으로 글씨 한 폭과 그림 아홉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경물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쌓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의 화풍은 19세기에 확산된 남종문인화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약간의 형식화가 진행된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근경의 언덕 묘사에 나타난 피마준披麻皴과 연속적으로 구사한 점묘點描, 먼 산에 반복적으로 들어간 미점米點과 같은 요소들이 여기에 속한다.그리고 이를 민화풍으로 계승한 사례는 건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에서 살필 수 있다.이 10폭 병풍 역시 글씨 1면과 그림 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은 그림의 구도가 앞 시기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표현상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특히 묘사에 형식화가 두드러진 점과 초보적인 묘사는 민화풍의 일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에 가깝다.구곡도를 소재로 한 민화는 일반 민화와 달리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의식이 깔려 있는 그림이다. 민화 구곡도류의 수요층은 18세기 후반부터 부를 축적한 상인과 부농富農, 그리고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신흥부유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19세기로 이어진 신흥부유층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의 상승은 양반문화를 동일시 하고자 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이처럼 민화 구곡도가 그려진 중심에는 바로 신흥부유층과 그들의 수요가 있었고, 민화로 그려진 것은 중산층으로 감상층이 확대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은 그림의 화격을 크게 따지지 않았고, 소박한 형식의 그림을 선호했다. 전통적으로 지식인층이 감상하며 선호했던 장르인 소상팔경도류瀟湘八景圖類가 민화로 그려진 현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특징 및 의의

조선시대의 구곡도는 회화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다. 첫째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를 조선구곡의 조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의 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즉, 17세기 이후 의 장소성과 화풍을 조선화朝鮮化된 구곡도로 창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 지식인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구곡도를 대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화民畵의 주제와 양식으로 변환을 이룬 점이다. 즉, 구곡도는 한국화韓國化와 대중화라는 두 측면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여 주었다. 특히 조선 말기의 민화가 이루어 낸 한국성과 대중화는 다른 주제나 화목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곡도만이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구곡도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유준영, 고고미술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과 고산구곡도(윤진영, 신사임당 가족의시서화,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2006), 조선사료집진속1(조선사편수회, 1926), 조선시대 구곡도의 수용과 전개(윤진영, 미술사학연구217·218,한국미술사학회, 1998), 조형예술과 성리학 화음동정사에 나타난 구조와 사상적 계보(유준영, 한국미술사 논문집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한국회화의 전통(안휘준, 문예출판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