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윤정(金潤貞)

정의

농사짓는 일[경耕]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직織]을 주제로 그린 그림.

개관

경직도는 중국의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와 <무일도無逸圖>에 기원을 두고 있다. <빈풍칠월도>는 『시경詩經』 ‘빈풍’ 편의 ‘칠월七月’ 시詩를 전거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시경』의 「빈풍」편은 중국 주周나라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빈豳’나라에서 유행한 노래 모음이다. 그중 ‘칠월’ 시는 빈나라의 농사 세시풍속과 농민의 생활상이 주요 내용인데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잠직업蠶織業의 풍속을 월령月令 형식으로 읊은 것들을 모은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 <빈풍칠월도>이다. <빈풍칠월도>와 유사한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무일도>가 있다. <무일도>는 『서경書經』의 주서周書 「무일無逸」편의 내용을 되새기기 위한 감계적鑑戒的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무일’이란 백성을 책임져야할 통치자는 일신의 즐거움이나 자기 몸의 편안함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무일」편은 통치자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에 관해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에게 충고하기 위해 쓴 글이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란 내용이 선대 임금의 행적을 예로 들어 나와 있다. 이와 같은 <빈풍칠월도>와 <무일도>는 모두 백성들의 생활에 기본이 되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위한 백성들의 노동을 보며 마음에 새겨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감계적 성격의 그림이고, 경직도 또한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그림이다.
경직도는 중국 남송 때 절강성 어잠현於潛縣의 현령을 지낸 누숙樓璹, 1090~1162이 송나라 고종에게 바치기 위하여 그린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으며, 누숙이 그린 것을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라고도 한다. 누숙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 ‘영누공진경직이도시令樓公進耕織二圖詩’에는 후대에 쓴 두 개의 발문이 있는데, 누숙의 경직도와 시를 「무일」편과 「빈풍칠월」편과 더불어 후대까지 전하도록 돌에 새기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누숙은 현령으로 재임할 당시 그 지방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농상農桑의 실정을 21장면의 ‘경도耕圖’와 24장면의 ‘직도織圖’로 그리고 각각 시를 덧붙여 그림을 완성했다.그 후 누숙은 지방 관리로서 공적을 세워 당시의 황제인 고종을 인견하게 되었고 그때 이 경직도를 바쳤다. 이후 <누숙경직도>와 시는 <빈풍도>, <무일도>와 더불어 대표적인 감계화로 여겨졌다.
『시경』은 한 대 이후 학자들에게 주공의 정치철학이 담긴 것으로 받아들여져 조선 왕실에서도 중시되었고 <빈풍칠월도>도 왕도정치라는 유교 이념의 대표적인 시각적 표상으로 중요시되어 자주 거론되었다. <누숙경직도>는 이후 청대 ‘초병적’의 경직도로 이어졌고 이것이 동아시아적인 궁중회화 화제로서 확산되어 위정자의 농본주의 체현의 수단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내용

우리나라도 <무일도>에 대한 기록이 일찍이 고려시대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보이고, 이후 15세기 초에는 <빈풍칠월도>를 그린 기록이 『태종실록』에 있다. 조선시대에 경직도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예는 성현의 『허백당집』에 수록되어 있는 ‘봉교경직도후서奉敎耕織圖後序’이다. 성현의 글에는 “1498년(연산군4) 정조사正朝使 권경우權景佑, 1448~1501가 명나라로부터 가져온 <누숙경직도>를 연산군에게 바쳤고, 연산군은 그 장면들을 묘사하여 채색하도록 화공에게 명하고 임사홍任士洪, 1445~1505에게 서시序詩를 쓰게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누숙경직도>를 출입 시에 보고 반성하니 실로 정치에 도움이 되는 그림이며 빈풍도와 더불어 가치가 큰 그림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17세기 말에는 청나라에서 새롭게 제작된 <패문재경직도佩文齊耕織圖>가 전해져 궁중에서 그려졌다. 경직도의 전거로 언급되는 ‘빈풍칠월’은 규장각 자비대령 화원의 녹취재에 ‘속화’부문의 화제로도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이는 유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인 『시경』에 전거를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세시풍속과 생활전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8세기 이후에는 판화인 <패문재경직도>가 병풍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조선화됨에 따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었다. <패문재경직도>의 구성과 기법을 토대로 하되 소재는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으로 대체된 경직도가 제작되었다. 왕실용으로 사용되었던 경직도는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19세기에는 장터에서 유통될 정도로 널리 유행하였다. 한산거사의 <한양가漢陽歌> 에 “궁궐 정전의 보좌 옆에 경직도 병풍이 놓여 있고 광통교 아래 그림 파는 가게 역시 병풍으로 꾸밀 경직도가 놓여 있다.”라고 묘사된 것은 이러한 정황을 잘 전해 준다. 이후 20세기 전반까지 경직도는 민간에서 널리 애호되었다. 민간에서 유행했던 경직도는 농사 장면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장면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열두달의 계절 변화나 세시풍속 장면을 첨가하여 풍속화적 면모를 보인다.
<빈풍칠월도>와 <무일도>는 전하는 작품이 적어 내용 및 화풍을 일반화하기 어렵다. 다만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해 화풍을 보면 <빈풍칠월도>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농촌의 풍속을 묘사한다는 점과 한 장면에 다양한 생업 장면을 취사 선택하여 담는 자율적인 화면 구성이 특징이다. 산수와 인물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며 각 장앞에 시구를 적고 그림을 배치한 구성이다. <빈풍칠월도>는 크게 농사 전후의 풍속과 농사짓는 장면, 뽕 따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별자리 보기, 뽕잎 따기, 밭 갈기 쟁기질, 농관의 시찰, 새참 나르기, 수확을 축하하는 장면 등 각기 다른 시기에 발생하는 일을 한 화면에 묘사한다.
<누숙경직도>는 농사 장면과 옷감 짜는 장면이 더 상세하게 등장한다. <경직도>에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농사짓는 장면으로는 침종浸種(씨 불리기)으로부터 시작하여 경耕(논갈이), 파욕耙褥(거친 써레질), 초耖(고운 써레질), 녹독碌碡(고무래질), 포앙布秧(씨 뿌리기), 어음淤陰(거름주기), 발앙拔秧(모찌기), 삽앙揷秧(모심기), 일운一耘(애벌 김매기), 이운二耘(두벌김매기), 삼운三耘(세벌 김매기), 관개灌漑(물대기), 수예收刈(벼 베기), 등장登場(볏단 쌓기), 지수持穗(도리깨질), 시양簛揚(벼 까부르기), 농礱(맷돌 갈기), 용대舂碓(방아찧기), 여麗(채 거르기), 입창入倉(창고에 들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
누에 치고 옷감 짜는 장면으로는 욕잠浴蠶(누에알씻기), 하잠下蠶(떨어 놓기), 위잠餧蠶(누에 먹이기), 일면一眠(첫 잠), 이면二眠(두 번째 잠), 삼면三眠(세 번째잠), 분박分箔(잠상 나누기), 채상采桑(뽕잎 따기), 대기大起(잠깨기), 제적提積(걸어 쌓기), 상족上簇(올림), 구박灸箔(잠상 막기), 하족下簇(내림), 택견擇繭(고치 고르기), 교견窖繭(고치 저장), 연사練絲(실 뽑기), 잠아蠶蛾(누에나방), 사사祀謝(제사), 낙사絡絲(실 감기), 경經(세로짜기), 위緯(가로짜기), 직織(베 짜기), 반화攀花(무늬 넣기), 전백剪帛(비단 자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
<누숙경직도>는 청대에 다시 체제가 일부 조정되고 새로운 화풍으로 제작된 <패문재경직도>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현존하는 <패문재경직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그 안에 공간감을 주면서 경직 장면을 배치하는 형식인데, 이러한 형식이 이후 조선 경직도의 주류가 된다.

특징 및 의의

경직도는 대표적인 조선의 감계화이다. 경직도의 배경이 되는 「패문재경직도서」를 통해 보면 강희제는 백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이것이 경직도의 목적이자 성격 임을 밝히고 있다. 농상 작업에 대한 글은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지만 대개 서술의 형태였는데, 누숙의 경직도는 그림과 시가 갖추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통치자가 창과 호로 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하의 원한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제작된 빈풍도, 무일도, 경직도는 유교적 권계주의와 권농의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당초의 빈풍도와 무일도가 권계적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다면 경직도는 권계라는 교화적 기능 위에 더욱 적극적이고 기술적인 권농의 개념이 더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東國歲時記, 慵齋叢話, 조선시대 경직도 연구(김순아,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조선후기 경직도 연구(이수진,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패문재경직도의 수용과 전개(정병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1991).

경직도

경직도
사전위치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화

집필자 김윤정(金潤貞)

정의

농사짓는 일[경耕]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직織]을 주제로 그린 그림.

개관

경직도는 중국의 와 에 기원을 두고 있다. 는 『시경詩經』 ‘빈풍’ 편의 ‘칠월七月’ 시詩를 전거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시경』의 「빈풍」편은 중국 주周나라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빈豳’나라에서 유행한 노래 모음이다. 그중 ‘칠월’ 시는 빈나라의 농사 세시풍속과 농민의 생활상이 주요 내용인데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잠직업蠶織業의 풍속을 월령月令 형식으로 읊은 것들을 모은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 이다. 와 유사한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가 있다. 는 『서경書經』의 주서周書 「무일無逸」편의 내용을 되새기기 위한 감계적鑑戒的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무일’이란 백성을 책임져야할 통치자는 일신의 즐거움이나 자기 몸의 편안함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무일」편은 통치자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에 관해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에게 충고하기 위해 쓴 글이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란 내용이 선대 임금의 행적을 예로 들어 나와 있다. 이와 같은 와 는 모두 백성들의 생활에 기본이 되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위한 백성들의 노동을 보며 마음에 새겨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감계적 성격의 그림이고, 경직도 또한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그림이다.경직도는 중국 남송 때 절강성 어잠현於潛縣의 현령을 지낸 누숙樓璹, 1090~1162이 송나라 고종에게 바치기 위하여 그린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으며, 누숙이 그린 것을 라고도 한다. 누숙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 ‘영누공진경직이도시令樓公進耕織二圖詩’에는 후대에 쓴 두 개의 발문이 있는데, 누숙의 경직도와 시를 「무일」편과 「빈풍칠월」편과 더불어 후대까지 전하도록 돌에 새기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누숙은 현령으로 재임할 당시 그 지방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농상農桑의 실정을 21장면의 ‘경도耕圖’와 24장면의 ‘직도織圖’로 그리고 각각 시를 덧붙여 그림을 완성했다.그 후 누숙은 지방 관리로서 공적을 세워 당시의 황제인 고종을 인견하게 되었고 그때 이 경직도를 바쳤다. 이후 와 시는 , 와 더불어 대표적인 감계화로 여겨졌다.『시경』은 한 대 이후 학자들에게 주공의 정치철학이 담긴 것으로 받아들여져 조선 왕실에서도 중시되었고 도 왕도정치라는 유교 이념의 대표적인 시각적 표상으로 중요시되어 자주 거론되었다. 는 이후 청대 ‘초병적’의 경직도로 이어졌고 이것이 동아시아적인 궁중회화 화제로서 확산되어 위정자의 농본주의 체현의 수단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내용

우리나라도 에 대한 기록이 일찍이 고려시대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보이고, 이후 15세기 초에는 를 그린 기록이 『태종실록』에 있다. 조선시대에 경직도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예는 성현의 『허백당집』에 수록되어 있는 ‘봉교경직도후서奉敎耕織圖後序’이다. 성현의 글에는 “1498년(연산군4) 정조사正朝使 권경우權景佑, 1448~1501가 명나라로부터 가져온 를 연산군에게 바쳤고, 연산군은 그 장면들을 묘사하여 채색하도록 화공에게 명하고 임사홍任士洪, 1445~1505에게 서시序詩를 쓰게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를 출입 시에 보고 반성하니 실로 정치에 도움이 되는 그림이며 빈풍도와 더불어 가치가 큰 그림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17세기 말에는 청나라에서 새롭게 제작된 가 전해져 궁중에서 그려졌다. 경직도의 전거로 언급되는 ‘빈풍칠월’은 규장각 자비대령 화원의 녹취재에 ‘속화’부문의 화제로도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이는 유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인 『시경』에 전거를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세시풍속과 생활전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18세기 이후에는 판화인 가 병풍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조선화됨에 따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었다. 의 구성과 기법을 토대로 하되 소재는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으로 대체된 경직도가 제작되었다. 왕실용으로 사용되었던 경직도는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19세기에는 장터에서 유통될 정도로 널리 유행하였다. 한산거사의 에 “궁궐 정전의 보좌 옆에 경직도 병풍이 놓여 있고 광통교 아래 그림 파는 가게 역시 병풍으로 꾸밀 경직도가 놓여 있다.”라고 묘사된 것은 이러한 정황을 잘 전해 준다. 이후 20세기 전반까지 경직도는 민간에서 널리 애호되었다. 민간에서 유행했던 경직도는 농사 장면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장면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열두달의 계절 변화나 세시풍속 장면을 첨가하여 풍속화적 면모를 보인다.와 는 전하는 작품이 적어 내용 및 화풍을 일반화하기 어렵다. 다만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해 화풍을 보면 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농촌의 풍속을 묘사한다는 점과 한 장면에 다양한 생업 장면을 취사 선택하여 담는 자율적인 화면 구성이 특징이다. 산수와 인물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며 각 장앞에 시구를 적고 그림을 배치한 구성이다. 는 크게 농사 전후의 풍속과 농사짓는 장면, 뽕 따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별자리 보기, 뽕잎 따기, 밭 갈기 쟁기질, 농관의 시찰, 새참 나르기, 수확을 축하하는 장면 등 각기 다른 시기에 발생하는 일을 한 화면에 묘사한다.는 농사 장면과 옷감 짜는 장면이 더 상세하게 등장한다. 에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농사짓는 장면으로는 침종浸種(씨 불리기)으로부터 시작하여 경耕(논갈이), 파욕耙褥(거친 써레질), 초耖(고운 써레질), 녹독碌碡(고무래질), 포앙布秧(씨 뿌리기), 어음淤陰(거름주기), 발앙拔秧(모찌기), 삽앙揷秧(모심기), 일운一耘(애벌 김매기), 이운二耘(두벌김매기), 삼운三耘(세벌 김매기), 관개灌漑(물대기), 수예收刈(벼 베기), 등장登場(볏단 쌓기), 지수持穗(도리깨질), 시양簛揚(벼 까부르기), 농礱(맷돌 갈기), 용대舂碓(방아찧기), 여麗(채 거르기), 입창入倉(창고에 들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누에 치고 옷감 짜는 장면으로는 욕잠浴蠶(누에알씻기), 하잠下蠶(떨어 놓기), 위잠餧蠶(누에 먹이기), 일면一眠(첫 잠), 이면二眠(두 번째 잠), 삼면三眠(세 번째잠), 분박分箔(잠상 나누기), 채상采桑(뽕잎 따기), 대기大起(잠깨기), 제적提積(걸어 쌓기), 상족上簇(올림), 구박灸箔(잠상 막기), 하족下簇(내림), 택견擇繭(고치 고르기), 교견窖繭(고치 저장), 연사練絲(실 뽑기), 잠아蠶蛾(누에나방), 사사祀謝(제사), 낙사絡絲(실 감기), 경經(세로짜기), 위緯(가로짜기), 직織(베 짜기), 반화攀花(무늬 넣기), 전백剪帛(비단 자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는 청대에 다시 체제가 일부 조정되고 새로운 화풍으로 제작된 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현존하는 는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그 안에 공간감을 주면서 경직 장면을 배치하는 형식인데, 이러한 형식이 이후 조선 경직도의 주류가 된다.

특징 및 의의

경직도는 대표적인 조선의 감계화이다. 경직도의 배경이 되는 「패문재경직도서」를 통해 보면 강희제는 백성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이것이 경직도의 목적이자 성격 임을 밝히고 있다. 농상 작업에 대한 글은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지만 대개 서술의 형태였는데, 누숙의 경직도는 그림과 시가 갖추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즉, 통치자가 창과 호로 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하의 원한을 알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제작된 빈풍도, 무일도, 경직도는 유교적 권계주의와 권농의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당초의 빈풍도와 무일도가 권계적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다면 경직도는 권계라는 교화적 기능 위에 더욱 적극적이고 기술적인 권농의 개념이 더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京都雜志, 東國歲時記, 慵齋叢話, 조선시대 경직도 연구(김순아,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조선후기 경직도 연구(이수진,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패문재경직도의 수용과 전개(정병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1991).